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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 지음, 황보석 옮김 / 문이당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책은 말을 우습게 만든다. 논평이나 분석 같은 것들을 하는 행위가 왠지 대단히 허세스럽고 그래서 부끄러워지는. 이 책은 그렇다. 스타일리스트라거나 모더니스트라는 평들이 어딘가에 꼭 못을 박아버려서 박제시키는 것처럼, 이 책에 대해 그런 평을 한다면 날아가는 나비나 교미하는 잠자리를 잡아서 산 채로 꼭 못을 박아놓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이 책에 나오는 이란성 쌍둥이 남매 에스타와 라헬은 글자를 능숙하게 거꾸로 읽을 줄 아는데, 왠지 이 책도 거꾸로 읽어도 될 것 같다. 그렇게 거꾸로 읽었을 때 색이 달라지는 인물은 아마 막내 코차마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앞뒤로 봤을 때 달라지는 인물이 문제인 건가? 투명하지 않게 무언가를 속이고 있다는 느낌.-하지만 순간, 속이지 않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걸, 우선 너 자신부터 봐봐라는 속삭임이 들린다.
한 개인의 문제가 결국 인간 역사의 문제이고 인간 본질의 문제라는 통찰력. 가족 대대로 전해내려온, 아니 인류에게 전해내려온 본성들이 충돌하는 현장. 사랑의 문제나 죽음의 문제, 그 사이사이의 교차로들에 서있는 이들. 그러나 작은 것들은 작은 것들로 온전하게 생을 이어나가고 우리는 결국 작은 것들일 뿐이며...작은 슬픔을 그러안고 살아가고 그 작은 슬픔의 폭발력으로 무너지고 모든 것이 바뀌기도 하고...
체제를 말하고 싶다면 그 체제 속에서 뒹구는 인간을 말해야 한다.
문득, 이 책을 읽고 나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실은 한 권의 이야기 책을 쓸 능력을 누구나 타고 나는 게 아닐까. 단 한 권의 책. 그 정도면 충분한 게 아닐까.
-기차가 너무 빨리 지나가버려서 그처럼 짧은 순간을 위해 그처럼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참마 잎사귀들은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전적으로 동의를 하는 것처럼 기차가 지나가고 나서 한참 뒤에까지도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타는 그의 어떤 부분이 웃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입이 아니라 다치지 않은 다른 어떤 부분이. 그것은 어쩌면 그의 팔꿈치나 어깨일 수도 있었다.
-그는 한 번에 한 가지만을 할 수 있었다. 만일 그가 그녀를 만진다면 그녀와 이야기할 수 없었고, 그녀를 사랑한다면 떠날 수가 없었다. 또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들을 수가 없었고, 싸운다면 이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