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그는 누구인가? - 카이로스의 시선으로 본 세기의 순간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지음, 정진국 옮김 / 까치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변하지 않고서 늘 그대로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잊지 말지어다. -부처 
(책 중 인용)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은 인간의 질감이란 것이 세계와 어떻게 접촉하는가를 보여준다. 외부 세계와 내면 세계가 어떻게 만나고 교차하고 대립하는가, 그럼으로써 한 인간의 내면의 순간이 표정에서 재현되었다 사라져 버리고 그럼에도 그의 영혼의 어떤 겹은 고유한 초월의 속성 속으로 깃들게 된다는 것을 그의 사진은 시사한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화가가 되고 싶었다는 것은 이런 지점에 있어서 일종의 시사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책 후반부에는 그의 데생과 그림이 몇 작품 소개되지만 나는 그의 그림에 깊은 호감을 느낀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란 존재는 인간이란 존재의 질감, 물질과 비물질 사이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존재의 성질―어쩌면 이것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모든 생명체의 속성일 테지만 그것이 가장 잘 구현되는 경우는 인간이지 않을까―,을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을 둘러싼 삼차원의 영역 어딘가에서 종종 푹푹 빠져 허우적대며 어딘가를 움푹 패이게 하고 휘게 하는 곡선을 그리며 차원을 넘나드는 그 인간의 비밀을 눈치채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존재의 질감에 대한 통찰이 화가를 화가이게 하고 사진을 좋은 사진이게 한다. 존재의 이런 위태로운 성질이 이차원의 평면에서 구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에서 인간이 그려내는 곡선의 아름다움은 물 속에서의 성교 장면을 찍은 사진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이 사진은 인간이 의도하지 않았으나 그려내는 완만한 곡선이 얼마나 부드럽고 아름다운가를 잘 드러내는 사진이다. 그러나 이 사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진에서조차 직선의 세계 속 인간의 곡선은 두드러진다. 그 곡선의 자그마한 세계는 직선의 세계를 균열시키고 인간 세계의 어떤 비합리성을 폭로한다. 이 비합리성은 우연이 결코 아니며 논리도 아닌 영역, 앞에서 장 클레로가 표현에 따르면 ‘카이로스’라 할 수 있는 그 영역을 재현한다. 그러나 나는 이를 그저 절묘한 짜맞춤 정도로 표현하고 싶다. 이 느낌을 좀 더 속되게 표현한다면―이 표현은 당연히 나의 느낌을 비껴가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는데― 이 세계에 인간보다 더 거대한 어떤 존재가 개입해있는 듯한 그런 순간적인 의심과도 닮아있다. 이 느낌은 경외라기보다는 아이러니에 가깝고 어떤 유희와도 닮아있다. 그러나 아무리 말해도 말은 늘 모자라게 된다. 우리는 이런 느낌에 대해 명시적으로 혹은 설명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말해지는 순간 방금과 같이 타락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느낌의 순간이 종종 스쳐지나감을 목격한 뒤 우리는 뒤돌아보며 이 순간에 대해 이리저리 이미 비물질이 되어버린 기억 속을 되돌이켜보는데 물론 그에 대한 답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은 이런 절대성에 대한 느낌의 포착이다. 그의 사진을 대면하는 순간, 주변이 중심 속으로 빠져들며 일으키는 모순과 대립, 합치의 순간적 반짝임이 견고한 한 장의 사진과 바라보는 자 사이에서 무수히 점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 인간을 대할 때 그렇듯.

 

 

 

 

 

 

 

 


 

카르티에­브레송에게, 역사에 대한 도전은 새로운 것이었고 또 전쟁을 겪은 체험이 그가 어떻게 역사를 폭로하게 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지에 대한 대단히 폭넓은 설명이 된다. 벌어졌던 그대로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초조감이, 역사가 그렇게 펼쳐지고 있었던 때에 그가 있었던 그곳으로 향하도록 그를 자극했다. 이는 바로 그가 매일 저녁, 그가 낮에 찍었던 이미지들에 긴 설명문을 붙이도록 했던 바로 그 역사이다. 이런 설명문은 단순히 그의 직업의 일부는 아니다. 그것들은 그의 작업이 무시했던 차원을 이룬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다시 찾는 시간이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이런 설명에 사진 그 자체에 못지 않는 열정을 쏟았다고 회상한다. 이 열정 ― 단지 보는 것만이 아니라 소통하려는 열정 ― 은 저널리스트에게 딸린 업부와 관례적 의무를 짊어지고 있었던 것으로부터 확연히 독립된 예술가에게 예비되었던 열정이다.


거리에서의 도전의 경우는 그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삶을 재창조하려는 그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초현실주의는 공방의 미술이자, 스튜디오와 살롱의 미술이었다. 바로 그것을 거리로 옮겨놓았고, 뒤이어 세계 전체 속으로 옮겨놓았던 이가 바로 카르티에-브레송이다. 순수하게 스타일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는 결코 파리를 벗어나지 않고서도, 30년대 초의 마술을 전광석화처럼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파리와 프랑스와 유럽을 떠나 있었다. 세계를 눈앞에 두고서 자신을 발견하려는 열정적 욕망이야말로 애당초 그의 사진 활동의 추진력이었다. 역사에 대한 도전은 한순간 그에게 새로운 것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구상하고 능숙하게 다룬 수법은 이 청춘의 모험기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피터 갤러시, 「그간의 모든 것」 中



세계의 특별한 모습을, 어떤 얼굴 표정과 어떤 풍경의 전개를 포착하기 위해서, 조준경을 통해서 겨누고 또 셔터를 누르는 것으로 구성되는 그토록 단순해 보이는 몸짓, 그토록 쉽고 거의 기계적으로 보이는 이 몸짓은 사실상 고대의 세계의 것들이었던 하나의 철학, 하나의 도덕, 하나의 지식을 전제로 한다. 그 몸짓은 그 속에 고대 철학의 가장 알차고, 풍부하며, 눈부신 개념들 가운데 하나를 숨긴다. 그 몸짓은 그것들이 없었다면, 그리스의 비극도, 플라톤도, 파르테논 신전도 나타나지 못했을지도 모를, 그런 지적 양상들을 최살려낸다.


그의 작은 라이카 사진기로 무장한 이 사진가는, 문명의 여명기에 종종 유일한 감수성과 대수와 미학에 대한 어떤 희귀한 개념들에 이끌려, 오늘날 우리 지식의 바로 그 기초들을 쌓았던, 작은 칠판과 필기구로서만 무장한 사상가가 다시 살아난 듯하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은 이렇게 썼다.


“한 장의 사진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한편으로는 어떤 사실의 의미작용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실을 설명하는, 시각적으로 통찰된 형태의 엄격한 조직이, 동시 발생적으로 인지되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일종의 운행 규칙을 이야기하고 있다 ― 결정적 순간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제때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그와 동시대인들, 즉 우리들이 분명히 합의한 도덕적 사회적 운행 규칙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이는 마치 연주에 앞서 조율되는 악기처럼, 누구보다도 시간에 맞춘다는 일이다. 결국 그것은, 사물의 아름다움과, 크기(또는 균형)를 그 속에서, 순간적으로 그것들을 포착하는 “카이로스”와 결합시키는 심미적 규칙이다. 그것은 플루타르코스가 「모랄리아」에서 이야기했던 것을 반복한다. 즉,


“모든 작품에서, 이를테면 아름다움이란 비례와 조화의 체계를 통해서 하나의 유일한 카이로스에 이르는 일군의 숫자들이 빚어내느 것과 같다.”


사진가의 순간적 시각에서, “카이로스”는 지속 속에서 때맞춰 도달하듯이 공간 속에서 목표를 이루는 사건으로, 그 정확하고 전격적인 순간 속에서 펼쳐진다. 거기에서 세계라는 화면은 즉각적으로 닫혀지기 직전에, 살짝 열리고, 찢기고, 틈을 벌리는 듯하다. 상당히 종교적 의미를 끌어들이자면, 이는 “순조로운” 순간, 다시 말해서 신들에게 유리하다는, 그 “프로-피티우스”라는 단어의 조합 속에서, 앞으로 벌어지게 될 것을 예견하는 그 어떤 약동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필요한 바로 그곳에 도달하는 몸짓이다. 즉 날개가 달린 몸짓이다. 호메로스는 그의 시에서, 어떤 언어가 정확할 경우, 즉 말이 잘 들어맞고 급소를 겨냥하고 있을 때, 종종 화살처럼 “깃이 달린 말”이라든가 “날개 달린 말”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진가는, 그가 새를 새장에서 빠져나와 날아가게 할 때, 이와 같은 도약에 참여하고 또 예견한다. 깜작거리는 그의 눈길은 호메로스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목표를 향해서 곧장 날아간다. 그것들은 가볍고 재빠르며 창공을 날아오르고 민첩하다. 민첩하다는 것은 “짓궂다”는 말이다. 이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어릿광대 같고, 장난꾸러기 같은, 20세기의 소년 기자 같은 면모이고, 때때로 완벽한 신사의 거동을 취하면서도 상당히 오락가락하는 유령의 면모이다. 그가 무엄한 것에 대한 취미와 또 우연한 만남과 경이로운 것에 대한 취미를 즐기는 초현실주의자들을 좋아할 수 있었고 또 그들을 기웃거릴 수 있었던 사실을 우리는 이해한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좋아하는 것에서 또한 그들로부터 멀어진다. 왜냐하면 “카이로스”는 “로고스”와 맞서기 때문이다. 카이로스가 고귀한 지속을 깨뜨릴 때에, 그것은 그만큼 “투케”와 대립한다. “투케”는 우연이다. 그런데 “카이로스”는 우연의 정반대이다. 그것은 옳은 결정이고, 당연히 그래야 할, 그렇게 알맞은 바로 거기에서 내려지는 결정이다. “카이로스”는 필요성의 편이지, 우연의 편이 아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미의 반열에, “칼로스”의 좌화의 “극치”의 반열에 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구도는 고대인들 사이에서, 부분들 사이의 조화로운 일치를 가리키며 또 전체와 부분과의 조화를 가리킨다. “카이로스”, 이 결정적 지점은, 하나의 균형점이다. 그것은 현살들의 질서를 흔들어놓게 되는 우연의 간섭과는 무관하다.


카르티에-브레송과 그의 초현실주의 친구들 사이를 가르는 선이 시작되는 이 지점이 중요하다. 이 사진가의 데뷔 시절은, 종종 초현실주의의 그늘 속에 또 이른바 “대물 렌즈”의 우연한 마술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친구이자, 그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 속에서 성장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종종 “투케”, 즉 우연을 그의 임상 진단술의 기본 수단으로 삼는다. 그는 그것을 “사실계와의 만남”으로 보았다. 이는 향락우너칙에 따른 기호들의 끝없는 반복과 회귀를 가키린다. 그러나 이것은 앙드레 브르통에 따르면, 마술과는 거의 무관할 것이다. 카르티에-브레송은, 내가 보기에 그가 사건을 예견할 정도로 사건의 주인인 만큼, 결코 그 어떤 것도 우연에 맡겨둔 적이 없었던 듯하다. 그는 현상 ― 태양, 그림자, 섬광, 잎새와 군중의 움직임 ―을 다스린 예술가이다. “카이로스”는 지배권이다.


사진가는 이렇게, 외양의 지속적 움직임 속에, 또 끊임없이 늘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연속되는 산더미 같은 사건들 속에서 곀코 ‘방심’한다든가 ‘무사태평’에 빠지지 않고 주변을 경계하는 보초와 같은 상태로 서있다.


카르티에-브레송이 무관하다 또는 “나와는 상관 없다”라는 뜻으로 그 의미를 즐겨 비아냥거리는 이 “무사태평”이라는 용어는 현대어로 이렇게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동시대인들의 막연한 무심함을 의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사진가는 거의 모든 순간에 세계에 몰두하며, 결코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관계를 맺는 사람이다. 그는, 그것들이 멈추게 된다면, 세계가 무너져버릴 지도 모른다며 기도문 통이 절대 멈추지 않고 돌아가도록 감시하는, 오리엔트 지방의 독실한 신자들과 비슷하다. 사진가는 세계의 모습을 감시하는 사람이고, 또 사진기 속의 두루마리 음화통은 바로 그의 기도문 통이다. 그는 이렇게 외양의 심리요법사이다. 그는 그것들을 보살피고 구원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 눈앞에 여전히 살아 있는 세계를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건들이 물리계의 질서 속에서 일정한 조화에 따라 우리 눈앞에 배치됨과 동시에 그 사건들이 논리적 세계의 질서 속에서 의미를 취하는 그런 순간을 포착할 줄 알기 때문이다. “로고스”와 “코스모스”가 서로 교차될 때, 세계의 질서가 어떤 의미작용을 흘리게 되는 그 순간, 또 어떤 계기가 우러나는 한 편의 시와도 같은 것, 그것이 “카이로스”이다.


“카이로스”는 짧고 강렬한 순간인데, 그곳에서는 세계가 다시금 역류와 혼돈에 빠지기에 앞서, 그 정지상태에 있으며, 빛과 그림자가 뒤섞이기에 앞서 균형을 이루고, 또 그곳에서는 한 무더기 형태 속에서 하나의 형식이 표출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가는 그것을 붙잡으려고 세계를 지키는 불침번을 서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끊임없이 재고 평가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무릎을 살짝 굽혀 원근을 수정하고, 고개를 불과 몇 밀리미터 돌려서 선들의 조화로운 일치를 끌어낸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오직 사진기의 속도에 따라서만 되는 일이고, 또 우리는 ‘예술’에 전전긍긍하지도 않는다.”


사냥꾼 또는 의사, 웅변가, 도공도 “테크네”라고 하는, 다시 말해서 실용적 기술 같은 것으로서의 그들의 예수렝,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보편적 과학의 추상적 규칙들 ― 예컨대 과학적 원근법의 규칙들이라든가 또는 아카데미풍의 채색법 ― 등을 응용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사진가들 또한 사진기를 다루면서, 현실을 겨누고 또 촬영 순간을 결정하면서, 사진의 어떤 과학을 사용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산만하게 우리의 눈을 끄는 것에서부터, 그것을 벗어나는 것을 세심하게 주목하기까지, 흐름에 몸을 맡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현실의 혼동 속에서, 보편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인간 정신의 무능을 폭로한 최초의 사람일 것이다.


“인간과 행위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성은, 또 예컨대 그 어떤 인간의 일도 결코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는 사실은, 모든 예술이나 그밖의 분야에서도, 어떤 경우와 어떤 시간에 대해서나 유효한 절대성을 적절히 배려하지 않는다.”


외양의 이러한 줄기찬 이탈 앞에서, 또 어떤 “예술”의 준거에 요구되는 것과 관련된 이러한 불가능성 속에서, 절대가 아니라 상대의 인간이자 실체가 아니라 우발적 사건의 인간으로서, 사진가가 일종의 전과학적 지식, 이른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반사적 속도로 움직이는” 잠재의식적 인식에 의지하며, 또 사실계의 소용돌이에 그토록 휩쓸려, 마치 격랑 위의 작은 쪽배 같은 것에 실린 것 또한 아득한 옛날의 “카이로스”의 것이다.


이 수은의 작용에 의한 지성의 형식, 또는 해석학적으로 말해서, 사실상 궁수의 기술에 속하며, 목표를 향해서 팽팽히 긴장된, 전력을 다해서 주저없이 당기는 자의 기술에 속하는 이러한 형식은 사물의 불안정하게 떠도는 동태에 꾸준히 유연하게 적응해야 하고 또 문한히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도록 하는 그런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분석했던 침입 효과, 로고스의 규칙을 깨게 하는 카이로스의 감수성의 분발은, 또한 카르티에-브레송, 즉 상거래의 신이었도 또한 도둑의 신이기도 했던 이 가벼운 발걸음의 헤르메스가, 그토록 정확하게 “경범죄”라고 했던 것이기도 하다.


“나는 온종일 긴장한 채, 길에서 현행범과도 같은 사진을 즉석에 붙잡으러 돌아다녔다.”


그러나 위법적이며 외양의 도둑인 사진가는 또한 판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지식의 보편적 규칙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하나의 사실에 부딪치기 때문이고 또 어떤 보편적 지식이라는 것은 사실과 외견상 접촉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사진가라는 탁월한 사실의 인간은, 여전기 기자보다 더 훌륭하게, 무한하게 미묘한 이러한 지식 ― 융거는 “까다로운 사냥”이라고 말했다 ― 에 기대기 때문이다. 즉 곤충학자들뿐만 아니라, 사냥과 전투와 항해를 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행하는, 합리적 지식이나 박학학 로고스가 아니라 카이로스라는 이 적정 순간의 본능적 인식 말이다. 도공, 항해사, 마부와 마찬가지로, 사진가도 특이한 직감과 교활한 지성에 따르는 일이 있다 ―고고학자 장 피에르 베르낭이, 상당한 근거로서, 논리학과 아카데미 예술로 환원시킬 수 없는, 세계의 다형적이고 오직 움직이는 사실에 응용될 수 있을 뿐인, “카이로스”와 닮은 것이라고 한 “메티스” 말이다.


사진가의 눈은, 의사나 사냥꾼의 눈과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세계의 무한히 다양한 상황 속에서, 위험이나 행운의 특이한 변화를 파악한다. 그는 법칙에 바하는 특수성의 인간이고 또 바로 그것을 통해서 보편성에 승리르 거둔다. 그는 현실의 중복된 요인들 속에서 적정 순간 ―카이로스 ―을 인지하며, 하나의 특수한 이미지는 의미를 배출한다. 카이로스는 예견과 정확성의 기술이자, 진단과 치료의 기술이다. 사진가는 우리에게 현실을 떨쳐버리게 한다 ―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우리에게 현실을 감내하게 하고 또 심지어 그 무게를 사랑하게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현실 속에서 두 가지 지속이 부딪치는 지점을 구별해내기 때문이다. 즉 바로 그 지점에서 과거의 성숙과 다가올 위기의 출현이 교차된다. 그는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가장 위대한 솜씨로 또는 가장 올바르게, 판결하는 사람이다. 시간을 둘로 가르는 셔터 위의 그의 손가락은, 저울대 꼭지점의 엄정함을 지닌다.


진주 목걸이에서 빛의 낱알들의 무게를 재는 베르메르의 “저울질하는 여인”처럼 세계를 저울질하면서, 사진기라는 저울로 무장한 이 판사는 또한 이 경우, 사실상 국가 원수의 시해와 같이, 다가올 것을 순식간에 예견하고 알아맞히는 점쟁이이기도 하다.


카르티에-브레송은 너무나도 정확하게 말한다. “사진 언어라는 사고의 지름길에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판단하는 지름길의 위대한 힘이 있고, 또 이는 엄청난 책임을 의미한다”라고.


인간의 동질적 시간이 아니다. 거기에는 높낮이가 있다. 그것은 지체되기도 하고 가속이 붙기도 한다. 그것은 성숙의 시간인가 하면 해체의 시간이다. 때때로 드물기는 하지만, 부동성의 시간 또는 재앙의 시간이 있다. 시간은 살아 움직인다. 이는 반복되는 시간과 또 동일한 대상들만을 찍어내는 기계의 시간이 아니다. 인간의 시간은 기다리고, 기대하고, 찾는다. 이는 단순한 제품이 아닌 작품의 시간이다. 이런 점에서, 이러한 사람들의 시간의 내밀한 지식에 속하는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 그 괴기스런 모조품의 편이라기보다는 흐뭇한 기억인 므네모시네 편에 더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카이로스”는 예견할 수 있는 것을 기억하며, 또 에상할 수 있는 것을 본다. 의사도, 사람들이 “만성적”이라고 하듯이, 어떤 환자를 보기에 앞서 시간과 관련된 일이 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무것도 반복되지는 않는다. 사진가, 예술가는 그 점을 입증하려고 존재하는 것이다. 사진가는 기억력이 붙어 있는 한, 결코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의 솜씨는 제도적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만성적 세계에 속한다. 즉 그는 시간의 주인이다. 바로 여기에서 카르티에-브레송 특유의, 시간성을 공간성으로 되돌려놓는 대기 현상에 대한 감수성이 비롯된다. 즉 이는 어떤 순간의 “카이로스”이고, 그가 한낮의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취한 시간의 “카이로스”이다. 카르티에-브레송의 가장 아름다운 몇몇 사진들은 인도에서 한낮에 구름들이 떠오른 것들이고, 플랑드르에서는 초저녁 어스름이다. 나는 그가 보나르를 굉장히 좋아했으리라는 점을 이해한다.


발끝으로 가볍게 바람처럼 걸어서 사진을 찍는 그와, 손바닥에 가려진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진기를 보았던 사람이라면, 그가 저 유명한 리시포스의 “카이로스”의 입상을 닮았다고 해서 그다지 놀라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포시이디포스가 지었던 경구 속에 묘사되고 있고, 또 “카이로스”와 행인 한 사람 사이에 나누었던 다음과 같은 대화에서 되찾게 되는 그런 “카이로스” 말이다.


“당신 대체 누구요? ―세계의 주인인 카이로스올시다. ― 왜 발끝으로 걷는 거요? ― 쉬지 않고 달리려구요. ― 뒤발꿈치에 돋친 작은 날개는 뭐요? ― 바람처럼 날려구요. ― 왜 오른손에 면도날을 쥐고 있는 거요? 어떤 칼날보다 더 예리하고 재빠른 게 바로 나, 카이로스라는 것을 보여주려구요.”


장 클레로, 「“카이로스”: 카르티에-브레송의 작품에서 적정 순간의 개념」 中

-배울 점이 많아 아주 길지만 적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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