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 / 돌베개 / 199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몇몇 가지 문제들이 있다, 그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수는 있지만 어쨌든 몇몇 가지 문제들이 있고, 그 문제는 늘 잠복해 있으며, 우리는 살아가면서 점차로 그 문제들을 끌어내며 그 횟수가 많아지게 될 때, 그 문제는 진정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지금부터 당신의 문제를 떠올려 보자. 나의 문제? 그 문제가 무엇이건 원인을 소급해가다보면-이것은 오래된, 인간의 습관이라 할 수 있다, 원인을 소급해가기, 대체 무엇 때문에? 문제를 해결해내기 위해서인가 완전히 후벼파기 위해서인가?-결국 그 원인에 이르러,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개체 이전 상태에서 개체로 나를 이끈 어떤 힘에 대해, 그 힘이 내게 어떻게 작용했는가에 대해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튀세르,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오랜 우울증을 정신분석으로 치료하려 들며 라깡과 관계 맺고 정신분석에 대해 글을 쓴 인물이다. 이 책에도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사이의 공통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러나 대부분의 철학자에 대해 사실 이름만 알 뿐 제대로 된 저서는 거의 읽지 않는 나는 이번에도 알튀세르가 자신의 아내를 교살한 뒤 면소 판결을 받고 죽은 자가 되라는 사회적 요구에 대항(?)하기 위해 쓴 자서전을 읽었다. 철학서라기보다는 문학에 가까운 글. 그의 철학적 입장이 무엇인지 대충 알 수는 있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는 글을 읽은 셈이다. 늘 개론서만을 읽는 것과 똑같은 방식인가?

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글은 그의 우울증에 대해 정신분석을 받으며 스스로 정리하고 머리 속에서 굳어진 내용을 풀어내고 있다. 이는 자신의 환상과 현실이 어떻게 스스로 안에서 통합되었는가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문제 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알튀세르는 자신의 문제를 풀어낸다. 결벽증에 걸린 어머니와 냉혹한 아버지 사이에서 자라나 한 명의 철학자가 되기 까지, 끝내 자신이 교살하고 만 자신의 아내 엘렌느와의 관계에 대한 알튀세르의 주관적인 묘사를 읽다보면 결국 나마저 스스로를 정신분석적으로 해부하려 든다. 어릴 때부터 나의 삶에 잠복해있던 환상, 나의 부모님과 나의 관계 등등이 어떻게 내게 영향 미쳤는가를 해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지금은 다시 내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는데, 이 책을 읽는 도중에는 흥미진진하게 살아나곤 한다, 한 편의 영화를 관람하듯이.

더불어 이 세계의 불완전함, 불완전한 두 인간이 만나 끊임없이 갈등을 겪으며-이 갈등은 그들의 삶이 되고 마는 것이다,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 자식을 낳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완전히 노출시킨 채-여기서 공포가 생겨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자신에게 그 불완전함이 유전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 이것은 또한 전혀 상반되는 태도를 길러내 그를 더욱 혼란에 빠져들게 한다- 그 갈등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불완전한 인간을 키워내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여러 유명 철학자들에 대한 언급과 그의 철학에 대한 견해이다. 그러나 사실 일천한 지식밖에 갖지 못한 나는 그가 하는 말의 대부분을 그의 말 안에서밖에 파악할 수 없었다. 뭔가 철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그의 말을 좀더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므로 공부하자는 결론뿐. 또한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애정도 알아볼 수 있다-이 역시 앞에서 지적한 한계 내에서이다-.







그 대신 “나는 용감하게 말할 것이다. 자, 여기 내가 행한 것, 내가 생각한 것, 그리고 지나온 나의 모습이 있노라”라고 한 그의 선언(루소의 『고백』의 서두)에 내가 솔직하게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나는 다만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자 한다. “내가 이해했거나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것, 더 이상 완전히 내 뜻에 따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되어 버린 것”이 여기 있노라라고.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속에는 뭔가 아주 어린시절부터 나를 떨게 만들며 내게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앞으로의 내 운명을 영원히 결정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하나의 환각이 아니라 내 삶의 현실 그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여 각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환각은 삶이 된다.







지금 나는 지출과 위험이 없는, 즉 돌발사건이 없는 삶이란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돌발사건과 지출(매매되는 것이 아니라 무상의 지출: 그것은 공산주의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정의다)은 삶 전체의 일부분을 이룰 뿐만 아니라 삶의 그 궁극적 진리에서, 그리고 하이데거가 너무나 잘 표현했듯이 삶이라는 그 ‘사건’(Ereignis)에서, 즉 삶의 출현과 그 귀결에 있어서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이제는 확실한 근거를 갖고 내가 깨닫게 된 것 같다.







도대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온전함을,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쾌락을 위해서나 과도한 나르시시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반대로 조금도 모자람이나 미련 없이 완벽하게 뭔가를 줄 수 있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주는 행위 자체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인정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행위가 ‘받아들여지고’, 전달 통로를 제대로 찾아냄으로써 그 대가로 가슴속 깊이 희구하던 상대방의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정확히 말해 사랑받는 것은 자유로운 사랑의 선물을 교환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교환의 자유로운 ‘주체’와 ‘객체’가 되기 위해서는 뭐랄까 그 교환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준 것과 똑같은 선물, 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그 대가로(계산적인 유용성의 원리와는 정반대인 대가) 받고 싶을 경우 아낌없이 주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물론, 그리고 명백히 자기 존재의 자유에 한계가 주어져서는 안 되며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온전함에 손상을 입는 것, 즉 ‘거세되어서는’ 안 되며, 반대로 자기 존재의 총력을(스피노자를 생각하자) 단 한 부분도 잃지 않고, 또 착각이나 허공 속에서 자기 존재를 보상받을 필요도 없이, 그 총력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전체’에 대한, 그리고 우선 자아에 대한 통제, 다시 말하자면 ‘전체’로 파악되는 대상과 자신이 갖는 관계에 대한 통제, 이것이 바로 철학인데, 철학이란 “철학자 자신이 자아와 맺는 관계”(마르크스)일 뿐이며, 따라서 철학자란 바로 그런 존재다. 그런데 ‘전체’는, 총체적이라고 자부하는 사고, 즉 ‘전체’의 모든 요소와 모든 접합들을 반영하는 사고의 엄격함과 명확성 속에서만 진정으로 사고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한 그 유명한 말, “이제까지는 다양하게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문제는 세계를 변혁시키는 데 있다”라는 말을 반박하면서 이미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이 이 세계를 변형시키기 위해서건 그것을 역행시키기 위해서건, 아니면 위험하다고 판단된 변화의 위협으로부터 현존하는 형태로 이 세계를 보존하거나 강화시키기 위해서건 간에 세계사의 흐름에 개입하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밝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그 유명한 마르크스의 대담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옳았다고 생각하며,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때 철학자가 어떤 주관적 책임을 느낄지는 충분히 상상이 된다. 짓누르는 듯한 책임감이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모두 실험적이라고 간주하는) 과학처럼 검증할 만한 어떤 장치나 실험방법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명제들을 결코 직접 검증해 볼 수도 없이 오직 제기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명제들의 효과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언제나 그것들의 효과를 예껸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그 명제들을 임의로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그 경향에 대해 그가 포착하거나 포착했다고 믿는 것을 바탕으로, 또 그 분야에 이미 존재하는 다른 체계의 명제들에 그것들을 대립시키면서 제기한다. 그러나 항상 뭔가를 예견해야 하고 또 언제나 자시느이 역사적 주관성을 직접 느끼기 때문에, 그는 ‘전체’에 대한 자신의 이해(理解)(각자에게 자신의 전체가 있는 것인가?)에 직면해서는 무척 외로우며, 또 사실 뭔가를 바꾸고자 하기 때문에 타인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새로운 명제를 제기하려고 나서게 될 때에는 더더욱 외로운 것이다.







그 속에서 나는 마침내 내 자신의 욕망, 극단적으로 말해 마침내 나 자신의 욕망을 갖고 싶다는 욕망(욕망을 갖고 싶은 것 역시 하나의 욕망이다. 그러나 아직 형식적인 욕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체적인 욕망이 없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체적 욕망이 없는 이런 형태를 하나의 진짜 욕망으로 간주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비극이었는데 그 비극에서 나는 이렇게 승리자가, 하지만 사고 속에서, 순수한 사고 속에서만 승리자가 되었던 것이다), 내 어머니의 순수한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포착된 나의 욕망, 마침내 욕망의 부정이라는 형태에까지 이른 나의 욕망을 실현한 것이다.







의식적이건 혹은 무의식적인 모든 철학자들의 내적 동기들이 어떠하건 간에 글로 표현된 그의 철학은 하나의 객관적 현실이며, 이 세계에 대해 그것이 어떤 효과를 미쳤든 그렇지 못했든 간에 그것은 객관적 효과이며, 극단적으로 볼 때 그 효과란 다행스럽게도 내가 지금 그리고 있는 이 내면세계와는 더 이상 아무런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활동과 마찬가지로 철학이란, 각자 자기 자신의 유아론(唯我論) 속에 갇혀 있는 세상의 모든 주체들의 순수한 내면일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철학자임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데올로기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통합시키기 위한 철학적 작업의 결과인 뜻밖의 철학적 발견들의 영향을 받은 하나의 이데올로기 아래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배계급에는 이 통합을 담당하는 직업 철학자들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하여 결국 철학적 범주들이 과학적 실천 속에서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어떤 과학도, 수학 자체도 지배 이데올로기 밖에서, 그리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통합된 이데올로기로 성립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는 철학적 투쟁 밖에서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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