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그리스인 조르바 (한글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3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베스트트랜스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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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돌아오는 기차에서 읽을 책을 찾다가 예전에 이북 다운 받은 게 생각나서 읽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몇 번 비슷하게 그렇게 조금씩 읽다가 말았다. 초반 '나'라는 사람을 소개하기 위한 대목이 힘들어 포기했었다. 거기를 넘어서 조르바를 만나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으로 넘어가면서 재밌어졌다. 

조르바와 크레타에 가서 광산을 캐고 붓다와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살아가는 이야기. 돈키호테가 떠올랐다. 산초와 돈키호테라는 한 쌍이 있다면, 나와 조르바라는 한 쌍이 있구나. 물론 그 구성원의 개성은 다르지만, 결국 두 사람이 만나서 삶을 함께 전진해나가며 어떤 캐미를 주고 받는 것. 이야기란 그런 것인가. 그것을 사랑으로 포장하기도 하더라도. 

결국 나라는 인간이 타인이라는 세계와 만나 새로운 세계를 얻어나가는 것. 


조르바라는 캐릭터를 하나 만들고 그가 행동하고 말하도록 한 게 아닐까. 

아마 자기 속에 있는 조르바이지 않았을까. 

정 반대편에 사는 사람. 


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제 인물이라고 한다.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해봤다. 

남기고 싶은 것들이 있는가, 그런 문제이기도 하다. 

예전에 글을 쓰다 멈춘 이유, 정말 내가 남기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어서. 아마도.

그냥 '작가'라는 사회적 위치를 얻고 싶은 것인지 그게 헛갈리던 순간이 오자 멈췄다. 대부분의 일을 그렇게 멈춘 것 같다. 직업들도 그렇게 멈췄다. 다 멈추고 다시 원점에 서있는 기분인데,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책 읽기는 그나마 그런 순간들마다 등불 같은 기분이 들어 서점을 열어볼까 싶었는데, 그 또한 불확실해서 투자를 하지 못해 결국 실현하지 못했다. 

등 떠밀리듯 살기 싫다가도 결국 나를 먹여 살리려면 등 떠밀리듯 무언가 일을 해야 한다. 세상에 도움되는 일이면 좋겠고(어떤 방식으로든, 자본주의란 결국 생산과 소비, 그리고 시스템인데 이 매개 안에서 어떤 자리를 잡든 그래도 조금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 나도 좋아하는 일이면 좋겠는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최승자 시인이 '삼십세'에 썼던 그 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살은 온다'는 그 문장 그대로가 마흔에 온 셈이다. 그런 채로 조르바를 만났다. '나'가 조르바를 만나듯.


크레타 섬이라는 장소성. 바다 바로 옆에 사는 두 사내.

나 역시 바닷가에 산다. 언제라도 바다에 나갈 수 있는 거리다. 지금은 해수욕장이 개장하며 사람들이 많아져서 불편하지만 평소에는 거의 사람이 없는 바닷가다. 혼자 앉아서 책을 읽기도 하고 수영을 배워서 되도록 매일 수영을 해볼까 한다. 텐트를 치고 누워 있을까도 싶지만 한번도 실행해보지 않고 있다. 이게 문제다. 생각나면 바로 해야는데 그러지 않는다. 뉘엿뉘엿.


우리는 모두 조르바처럼 살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조르바라면


순간마다 조르바라면 이라고 생각해보자. 조르바가 누구냐고? 일은 바라는 대로 해주지만 산투르 연주만은 강요하면 끝장이라는 예순이 넘은 사나이다. 산투르는 짐승이고 '짐승에게는 자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계산 같은 걸 하려면 땅속 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는,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 '세상이 다시 처음 그대로의 활기를 찾'고 '물, 여자, 별, 빵이 원시의 신비로운 모습으로 돌아가고 태초의 회오리바람이 주위를 맴돌'게 하는 사내다. 그는 말한다. 


"지금 우리 앞에 필래프가 있으니 필래프만 생각하고 내일 우리 앞에 갈탄 광산이 있을 때 갈탄을 생각하면 되지요. 어정쩡하다가는 아무것도 못해요."

-p.48


나는 어제 일어났던 일 따위는 다시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도 미리 생각하지 않지요. 내게 중요한 건 바로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조르바, 지금 이 순간 자네는 뭘 하나?' '잠 자고 있어.' '그래,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자네 지금 뭐하나?" '여자한테 키스하고 있지.' '그래, 그럼 실컷 해보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 없으니 실컷 키스나 하게."

-p.350


언제 한 번 이렇게 살아본 적이 있는가? 눈 앞에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며. 마치 세상에 그것과 나밖에 없다는 듯.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가라는 격언을 실천하며. 


"아무도 안 믿고 아무것도 안 믿어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것들보다 낫다고 하는 말은 아니오. 눈곱만큼도 나을 게 없지. 이놈 역시 짐승이거든.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라 그렇소. 나머지는 모두 허깨비들이지.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낸 것만 믿어요. 내가 죽으면 모든 게 죽는 거지.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죽는 거요."

-p.73


오로지 자신만을 믿는, 그 이유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이 간단한 진리에 눈이 번쩍 뜨인다. 맞다. 세상에 오로지 나 하나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모든 문제는 타인 혹은 타인으로 대변되는 세상(시스템)과 발생하는데, 이것들은 절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귀를 기울이고 마음이 맞는 듯 하다가도 나중에 보면 전혀 내 의도와는 다른 방향인 경우가 많다. 복장이 터진다. 그때 내 마음을 바꾸면 된다. 기다리거나 다시 시도하거나, 돌아서거나. 그러나 대부분 서성일 뿐이다. 복장 터져 하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는데도.


흙덩이로 만들고 싶은 건 뭐든 만든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시겠소? 프르르! 돌림판을 돌리면 진흙 덩어리가 동그랗게 되면서 마치 당신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요. '항아리를 만들어야지, 접시를 만들어야 해. 아니 램프를 만들까, 뭐든 만들어야지.' 사람이라는 건 이런 게 아니겠소? 자유 말이오."

그는 바다도 잊고 레몬을 씹는 것도 잊었다. 눈빛이 다시 빛났다. 

-p.25


세상과 발 맞추어 살아가기 위해, 그 세상의 모양새라는 것도 결국은 내가 짜맞춘 어떤 내 머릿속 세계(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들을 조합한)인데도 거기 맞춰나가기 위해 애쓰다가 '어, 그런데 내 자유는 어디 있지?' 이런 기분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내가 원하던 것, 내가 바라던 것인가, 이런 기분들이 들어찼는데 그렇다고 다시 돌아서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기분 말이다. 


책 속의 화자인 '나' 역시 마찬가지 상태였다. 붓다와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는 '나'가 조르바를 만나 크레타 섬으로 가서 광산 개발을 위해 투자하나 실제로 광산 개발은 엉망진창이 된다. 제목이 크레타 섬의 광산 개발이 아니라 그리스인 조르바인 이유다. '나'는 조르바를 만나고 그동안 쓰고자 했던 붓다에 대한 책을 완성하지만 그 책 구절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조르바와의 영롱한 대화들이 빛을 발한다. 그래서 조르바랑 놀면 하루 종일 심심하지 않을 것 같다. 


책을 읽고 하는 내내 이 사내와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조르바는 책 따위는 던져버리라고 하지만, 글자에 익숙해져버리며 화자와 같은 상태에 놓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밑줄 친 모든 구절은 조르바의 말들이다. 조르바의 세상에 대한 하느님에 대한 악마에 대한 인간에 대한 세상에 대한 해석이다. 그의 시선, 철학)


어쨌든

조르바라고 생각하자. 아니, 나가 되자. 세상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보스, 보셨소?"

"…...."

"경사에서 돌멩이가 다시 생명을 얻었어요."

나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쁘고 놀라웠다. 위대한 사상가와 위대한 시인은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는 법이다. 모든 일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아니, 보는 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조르바에게 우주는 태초에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처럼 경이롭고 강력한 환상이었다. 별은 그의 머리 위로 미끄러지고 바다는 그의 이마 위에 부서졌다. 그는 이성의 방해 따위는 받지 않고 흙과 물과 동물과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

-p.180



열정과 광기로 싸우는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일세.

-p.186


이 한심한 친구가 자기 안에 악마 한 마리가 들어 있다면서 이름까지 붙여놨어요. 이름이 터키의 호자랍니다. '호자는 성금요일에도 고기가 먹고 싶대!' 이렇게 외치며 교회 벽에 머리를 찧었어요. '호자가 여자랑 자고 싶대. 호자가 수도원장을 죽이고 싶대. 그래, 모두 호자가 하고 싶어 한다니까. 내가 하는 짓이 아니라니까!' 그러고는 또 머리를 찧어요.

보스, 내 안에도 악마가 들어있어요. 나는 그 악마를 조르바라고 부릅니다. 이 안에 든 조르바는 나이 먹는 걸 엄청 싫어하죠. 나이를 먹지도 않고, 먹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나이 따위는 안 먹을 겁니다. 이 안에 있는 놈은 사람 잡아먹는 도깨비예요. 칠흑처럼 검은 머리에 이빨이 서른두 개, 귀 뒤에 빨간 카네이션을 꽂고 다닌답니다. 바깥에 있는 조르바는 배가 불뚝 튀어나온 데다 흰 머리카락도 좀 있어요. 가엾지요. 나이 먹어 주름살도 있고 이도 빠지고 커다란 귀에는 흰 터럭까지 있으니 영락없이 당나귀 꼴이에요.

보스,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제까지 이 두 조르바가 엉겨 싸워야 될까요?

-p.192


나는 인생과 맺은 계약에 시간 조항이 없다는 걸 확인하려고 가장 위험한 경사 길에서 브레이크를 풀곤 합니다. 인생이란 가파른 경사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잖아요. 대부분 사람들은 브레이크를 쓰지요.

-p.193


나는 그저 언제나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내키는 대로 삽니다. 부딪쳐서 박살이 나면 뭐 어때요. 그래 봐야 손해날 게 뭐 있다고요. 없어요. 천천히 가면 거기 안 가느냐고요? 물론 갑니다. 하지만 기왕 갈 거 신명 나게 가자는 거지요.

-p.194


당신이 내 생각이나 내 약점이나 내 헛소리를 실컷 비웃어도 좋아요. 이 세가지가 도대체 뭐가 다른 건지도 모르겠네요. 세상에는 웃음이 흔하기도 합니다. 웃는다고 생각하니 우스워지네요. 사람에게는 바보 같은 구석이 있기 마련인데 가장 큰 바보는 그런 바보짓을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p.194


흠, 나는 사람에게는 다들 냄새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 냄새란 게 아주 복잡하게 섞여서 의식도 안 하고 살고 있어요. 이게 누구 냄새인지, 저게 누구 냄새인지 구별하기도 어렵지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이른바 '인간성'이라는 고약한 냄새가 있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걸 라벤더 향이라도 맡듯 킁킁대는 사람도 있어요. 생각만 해도 먹은 게 다 올라옵니다.

-p.194


날 아는 놈도 없고 나도 아는 놈 하나 없으니 그야말로 자유지요.

p.195


보스, 지난번에 내가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천당이 있다고 한 적 있지요? 당신 천당은 잔뜩 쌓인 책, 큰 병에 가득 잉크가 있는 방일 수 있겠지만 포도주, 럼, 브랜디 병이 가득한 방이나 돈이 산처럼 쌓인 방을 천당으로 가진 놈 등 제각각입니다.

-p.198


내가 아는 당신은 내가 잘못을 저질러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당신에게는 하느님처럼 물 묻은 스펀지가 있어요. 쓱싹쓱싹 다 닦아 버리면 내 죄도 끝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이런 고백을 하는 거랍니다. 그러니 들어줘요.


지금 엉망으로 취했어요. 핑핑 돌아갑니다. 보스, 제발 펜을 들어 이 편지를 받는 대로 답장을 주세요. 답장을 받기 전까지는 안절부절못할 거예요. 앞으로 몇 년간은 하느님이나 악마의 장부에서 내 이름을 찾긴 어려울 겁니다. 내가 들어있는 장부는 오직 당신 것뿐이에요. 그래서 내가 의논할 상대도 당신밖에 없어요. 그러니 잘 들어봐요.

-p.199



이 무식한 일꾼은 글을 쓸 때마다 펜을 계속 부러뜨린다. 원숭이 껍질을 처음 벗은 인간처럼, 혹은 위대한 철학자처럼 그는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에 빠지고 만다. 조르바는 이런 문제들이 가장 급하고 필요하다고 느낀다. 어린아이처럼 그는 모든 사물과 새롭게 만난다. 끊임없이 놀라고 '왜, 어째서'라는 질문을 달고 다닌다. 모든 일이 그에게는 기적이며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새와 돌을 보고도 새삼스레 놀란다.

'이 기적은 대체 뭔가요? 이 신비는 뭐란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새의 신비가 뭘까요?"

-p.200-201



"인간이란 짐승이야! 이봐요, 보스. 책은 그냥 놔둬요. 창피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짐승이라니까요. 짐승이 책을 읽소?"

-p.202


커 가면서 나는 '영원'이나 '사랑' '희망' '국가' '하느님' 같은 말들에 관심을 가졌다. 단어 하나하나를 제대로 알아 가면서 마치 위험에서 벗어나 쑥쑥 성장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겨우 말 바꾸기를 통해 구원받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 내가 2년 전부터 관심을 가진 단어가 '붓다'였다.

-p.228


"닥쳐요, 보스! 닥쳐요. 이런 얘길 왜 내게 하는 겁니까? 왜 내 마음에 독을 풀어 넣느냐고요. 왜 사람 기를 죽입니까? 나는 이대로가 좋습니다. 배고픈 나에게 하느님과 악마가-이 둘이 다르다면 내가 벼락을 맞겠소-뼈다귀를 던져주니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하면서 그걸 핥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p.239


"거룩하신 원장님, 저도 청을 한 가지 할까요? 날 수도원 문지기로 일하게 해줘요. 밀수도 좀 하고 이따금 그 성스러운 수도원에다 괴상한 물건도 좀 들여놓게 말이오. 여자랑 만돌린, 새끼 돼지 구이, 라키 술 같은 거 말이오. 그래야 당신들이 허튼수작으로 인생을 우습게 보내 버리는 걸 막을 거 아닙니까?"

-p.241


"보스, 이래선 안 되겠습니다. 이놈의 세상이 작아지든가, 내가 커지든가 둘 중 하나가 돼야 살지요. 둘 다 안 되면 낭패라니까요."

-p.245


"하지만 나는 천국에 가고 싶어. 그래서 도반들에게 농지거리나 미친 짓을 해서 웃기는 거지. 이것들이 뭘 알아야 말이지. 나한테 악마가 들렸다고 욕이나 해대고.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해. '하느님도 장난을 치거나 웃거나 하는 걸 좋아하신다고. 언젠가는 날 보고 이리 들어와라. 이 광대야, 와서 날 좀 웃게 해다오. 이러실 거라고.' 그러니까 나는 광대가 되어 천국에 가려는 거야."

-p.249


"내가 뭘 먹고 싶거나 갖고 싶으면 어찌하는 줄 아시오? 목구멍이 터지도록 처넣는 겁니다. 그래야 다시는 그놈의 생각이 안 나거든요.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는 거지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아실 거요. 어렸을 때 나는 버찌에 미쳐 있었어요. 먹고 싶어도 돈이 있어야지요. 돈이 없으니 한 번에 많이 살 수도 없고 조금 사 먹을라치면 아쉬워서 더 먹고 싶어지고. 밤이나 낮이나 그놈의 버찌 생각에 환장을 하겠더라고요. 어느 날 화가 납디다. 창피해서 그랬을지도 몰라요. 어쨌든 버찌가 날 데리고 논다는 생각이 드니까 속이 상했어요. 그래서 어찌 했는지 아시오? 밤중에 일어나 아버지 주머니에서 은화 한 닢을 훔쳤어요. 다음날 아침 일찍 시장으로 달려가 버찌 한 소쿠리를 사서는 도랑에 숨어서 먹었어요. 넘어올 때까지 처먹으니까 배가 아프고 구역질이 나더군요. 네, 보스. 몽땅 다 토했다오. 그날부터 나는 버찌를 먹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한 적이 없습니다. 보기만 해도 싫어요. 나는 구원을 받은 거지요. 언제 어디서 버찌를 봐도 이제 너하고는 볼 일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중에는 담배랑 술하고도 똑같은 짓을 했습니다. … (중략)… 한때는 너무 그리워서 죽을 것 같았지만 그것도 역시 목구멍에 처넣고 토해 버렸어요. 그때부터는 날 괴롭히지 않더군요."

-p.254-255


이게 사람이 자유를 얻는 도리라는 겁니다. 내 말 잘 들어둬요. 토할 만큼 처넣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예요.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요. 보스, 생각해봐요. 반쯤 악마가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악마를 다룰 수 있겠습니까?

-p.255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다 보이니까 그러는 겁니다. 내가 성상 만드는 사람이라면 눈도, 귀도, 코도 없는 성모를 그릴 거요. 너무 불쌍해서 말입니다."

-p.262


이 신선하고 상큼하고 작은 즐거움들이 하느님 그 자체인 듯했다. 하느님은 시시각각으로 모습을 바꾼다. 어떤 모습으로 변장하든 그것을 알아보는 자에게는 축복이! 신선한 한 잔의 물이 되기도 하고, 무릎 위에서 노는 어린아이가 되기도 하며 아름다운 여자가 되는가 하면 아침 산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p.271


"보스, 이 세상에 있는 악마의 발명품들이 얼마나 근사한지 생각해봤어요? 예쁜 여자, 봄, 새끼돼지구이, 술…... 이런 게 모두 악마의 발명품이랍니다."

-p.277


"그럼 조르바, 당신이 책을 쓰지 그래요? 세상의 신비를 우리에게 설명해주면 좋은 일이잖아요."

내가 비꼬아서 말했다.

"하라면 못할까 봐요? 하지만 할 시간이 없었어요. 나는 당신이 말하는 그 '신비'를 살아내느라고 쓸 시간이 없었거든요. 어떤 때는 전쟁, 어떤 때는 계집, 어떤 때는 산투르를 살아낸 거죠. 그러니 그런 걸 쓸 시간이 어디 있겠소? 책 쓰는 일들이야 그쪽에서 할 일이고. 인생의 신비를 제대로 사는 사람들은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또 제대로 살 줄 모르는 법이오. 아시겠어요?"

-p.282-283


"내 조국으로부터 구원받고, 신부들로부터 구원받고, 돈으로부터 구원받은 겁니다. 나는 짐을 덜어내기 시작했어요. 가지는 대로 덜어버리는 거죠. 그런 식으로 내 짐을 덜어낸 겁니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해탈하는 방법을 찾은 셈입니다. 나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p.293


"요새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구나', '저 사람은 나쁜 놈이구나' 이렇게 구분합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별 상관 안 해요.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이게 더 문제거든요. 마지막으로 내 입에 쑤셔 넣을 빵에다 두고 맹세합니다만, 나이를 더 먹으면 이것도 그다지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모두 불쌍하거든요.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이 불쌍한 것! 이런 생각이 들어요. 누군지는 몰라도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하겠지. 이 사람 안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죽어서 땅 밑에 누울 테고, 구더기 밥이 될 테지.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나 다름없습니다. 모두가 구더기 밥이 되거든요."

-p.293


"당신이 믿어야 할 게 있다면 나 같은 놈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입니다. 그것도 앞뒤 분간도 못하는 짐승 신세를 못 벗어나는 거예요.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걸 끝냈어요. 당신은 어떤가요?"

-p.295


"보스, 저 건너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저 파란색, 저 기적이 뭔가요? 당신은 저 기적을 뭐라고 부릅니까? 바다? 바다입니까? 꽃으로 된 초록색 앞치마를 입은 저건요? 땅이라고 그럽니까? 이런 걸 만든 예술가는 누구인가요? 보스, 내 맹세하지만 이런 걸 보는 게 처음이라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조르바, 혹시 머리가 돈 거 아닙니까?"

"뭘 비웃는 거요? 당신 눈에는 정말 안 보인단 말이오? 보스, 봐 봐요. 저 모든 기적 뒤에 웅크리고 있는 마술이 안 보입니까?"

-p.296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이에요. 말도 대충하고 착한 일도 대충 하는 척만 하고 그러니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되는 겁니다.

-p.299


하느님은 대장 악마보다 어정쩡하게 반만 악마인 것들을 더 미워하시는 거요.'

-p.299


"사람들이 밥상머리에 앉아 이것저것 먹어보라고 권합니다. 그러다 보면 맛있는 걸 잔뜩 집어넣은 배가 다 소화를 시키지 못해요. 남는 게 기분이 되고, 춤도 되고 노래도 되고 싸움질도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부활이에요."

-p.302



그리고도 옮겨적다 보니

이 사람이랑 계속 있고 싶다 그런 기분이 든다. 이 사람이랑 있고 싶다. 소설 캐릭터란 그런 인물이어야 하지 않을까.


가요, 가서 방귀가 아닌 노래나 춤이 되게 하는 거요.

p.303


"오, 내가 당신만큼만 젊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물불 안 가리고 막 뛰어들 거요. 일이든 포도주든 사랑이든 모든 것에 말입니다. 나 같으면 하느님이건 악마건 두려워하지 않겠소. 젊음이란 게 그런 거니까."

-p.304


"어쨌든 내가 보기에 어느 것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겁니다. 하느님이 미쳤다고 지렁이를 앞에 두고 앉아서 지렁이가 한 짓을 일일이 따지겠습니까? 지렁이가 이웃에 있는 지렁이를 꾀어 외도를 하고, 성금요일에 고기를 한입 먹었대서 화를 낼 것 같소?"

-p.304


"보스, 몇 번 말했잖아요. 다시 한번만 더 말하죠. 하느님이나 악마나 똑같은 겁니다."

-p.305


"그래, 바다, 여자, 술 그리고 힘든 일이야! 이 세 가지에 자신을 던져 넣은 다음 하느님과 악마는 두려워하지 말자. 그게 젊음이지."

-p.306


"인간이란 얼마나 이상한 기계입니까? 그 속에 빵, 물고기, 포도주, 당근 같은 걸 채워주면 이게 한숨이나 웃음, 꿈이 되어서 나오잖아요. 무슨 공장처럼 말이지요. 우리 머릿속에 발성영화기가 돌아가는 모양입니다."

-p.328


맨 뒤에 뾰족구두를 목에 건 미미코가 나왔다.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들이야!"

신나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미코가 외쳤다.

따뜻하고 습한 바람이 불어와 바다가 일렁였다. 리라장이가 따뜻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리라 소리를 퍼뜨렸다. 상쾌하고 때로는 빈정대는 듯한 소리였다.

p.342-343


"책에는 인간의 혼란이 있어요. 조르바, 인간의 혼란으로 당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요."

-p.345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지식도, 미덕도, 선도, 승리도 아니다. 보다 위대하고 좀 더 영웅적이며 더 절망적인 그것은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p.345


그렇다면 저항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필연을 거부하고 외부적인 법칙들을 내부의 것으로 바꾸고, 존재하는 것을 모두 부정하고 자기 정신 법칙에 따라 새 세계를 만들려는 돈키호테 같은 인간의 긍지를 말하는 건 아닐까? 결국 자연의 비인간적인 법칙을 반대하고 지금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도덕적인 새 세계를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닐까?

-p.347


세상의 끝인 그 해변에서 우리는 난파한 2명의 뱃사람이었던 것이다.

-p.350


"조르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악마 몇 마리쯤은 배 속에 넣어두고 있어요.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중요한 건 그것들이 하는 짓이 다 제각각이라도 목표만 같으면 된다는 겁니다."

-p.356


"얘야, 천당의 일곱 품계도 이 땅의 일곱 품계도 하느님을 품기엔 넉넉하지 않아. 그러나 사람의 가슴은 하느님을 품기에 넉넉하단다. 그러니 알렉시스, 조심해라. 내 너를 축복해서 말하는 거란다.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내면 안 된단다."

-p.357


말에 어떤 가치를 따질 때는 그 말이 핏방울을 품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p.358


두 사람이 헤어질 때도 좋았다. 



2023 7 19일 수요일


"산투르를 연주하게 될 줄 알면서부터 나는 전혀 딴 사람이 되었어요. 기분이 안 좋거나 돈이 한 푼도 없을 때에는 산투루를 켭니다. 그러면 기운이 생기지요. 내가 산투르를 켤 때 당신이 말을 거는 건 상관없습니다만 나는 들리지 않아요. 들린다 해도 대답은 못해요. 말을 듣거나 대답을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거요."
"그건 왜요?"
"그걸 모른단 말이오? 그게 바로 정열이라는 거요." - P18

모태인 대지에서 아직 탯줄이 채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 P19

"그럴 기분이 생긴다면! 아시겠소? 마음 내키면 말이오. 일은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하지요. 거기서는 당신이 내 주인이니 말이오. 하지만 산투르 말인데, 그건 좀 다른 문제요.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게는 자유가 있어야 하지요….(중략)… 만일 당신이 나한테 연주를 강요하면 그땐 끝장이오.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 말이오."
"인간이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자유라는 거요." - P21

"신의 가호가 있기를! 자, 갑시다!"
내가 일어서며 소리쳤다.
"신뿐만 아니라 악마도!"
조르바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그는 몸을 굽혀 산투르를 옆구리에 끼고 문을 열고 앞서 걸었다. - P22

그렇지만 따뜻한 가을 날씨에 바다를 헤쳐 나가면서 주위의 작은 섬들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낙원으로 이끌 수 있는 가장 알맞은 기쁨이 아닐까. 그곳처럼 고요한 마음으로 현실에서 꿈으로 쉽사리 옮겨갈 수 있는 곳은 없다. - P22

햇빛은 사랑하는 바다와 물결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 P22

문득, 배를 집어 들어 배를 더럽히는 인간, 쥐, 벌레 같은 산 것들이 몽땅 떠내려가도록 바닷물에 담가 흔들어 씻은 다음 텅 빈 배를 다시 띄워 놓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따금 연민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것은 형이상항적 삼단논법의 결론처럼 냉철한 붓다의 연민이다. 단순히 사람만이 아니라 싸우고 울고 소리치고 희망하면서 세상만사가 허무한 것을 모르는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이다. 그리스인들에 대한 연민이고, 갈탄 광산에 대한 연민이며, 붓다에 관한 나의 미완성 원고와 갑자기 맑은 공기를 휘젓고 더럽힐 빛과 그늘로 빚어진 온갖 허무한 것에 대한 연민이었다. - P23

"보스, 내가 무슨 얘기를 할 것 같소? 터키 놈들의 목을 얼마나 쳐 냈는지, 그들의 귀를 수프 속에 얼마나 절였는지-이건 크레타 풍습이오만-이런 얘기를 할 것 같소? 천만에. 그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소. 무슨 지랄을 한 건지. 오늘 같은 날 약간 제 정신이 들었을 때 내 자신에게 물어봤다오. 도대체 무슨 지랄이 도져 우리에게 나쁜 짓을 하지도 않은 놈들을 덮치고 물어뜯고 코를 베어 내고 귀를 찢고 창자를 도려냈을까! 그러면서도 전능하신 하느님의 가호를 빌었으니 말이외다.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 그들의 코와 귀를 도려내고 사람을 작살내 주기를 바란다는 뜻일까요?
그땐 내가 혈기왕성할 때였지요. ‘왜 같은 걸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거든요. 사물을 제대로 보고 생각하려면 나이를 먹어야 해요. 이도 좀 빠지고. 이가 하나도 없는 늙은이라면 ‘얘들아, 물면 안 돼. 못 쓴단다‘하고 소리치기 쉽지요. 하지만 이 서른두 개가 멀쩡하다면…... 젊을 때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어요." - P29

사람을 잡아먹는 야수 같지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젊은 것들은 양도 먹고 돼지도 먹고 닭도 먹지요. 하지만 사람을 처먹지 않으면 양이 안 차는 모양입니다."
그는 커피 잔에다 담배를 비벼 끄며 한마디 더 보탰다.
"속이 차질 않아요. 안 차고말고. 그런데 자칭 현자라는 늙은 올빼미들은 뭐라 말합니까?"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보스는 굶주리거나 사람을 죽여본 적도 없고, 물건을 훔쳐 보거나 간음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세상 돌아가는 걸 안다는 말이오? 당신 머리는 순진하고 살갗은 햇빛 구경도 안 해봤어요."
그는 조롱하듯 말했다. 나는 섬세한 손과 창백한 얼굴, 진흙과 피 속에 굴러 보지 못한 내 인생이 부끄러웠다.
"좋아요."
조르바는 스펀지로 닦아내듯 식탁 위를 두꺼운 손으로 쓸어냈다.
"좋아요. 보스는 수백 권의 책을 읽었을 테니 하나 물어봅시다. 아마 해답을 알고 있을 거요." - P30

"말해봐요, 조르바. 뭘 묻고 싶은 겁니까?"
"보스,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참 웃기는 기적 말입니다. 우리는 독립군이 되어 사기 치고, 훔치고, 죽이는 짓들을 했는데, 그 때문에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크레타로 왔답니다. 그리고 자유가 찾아왔어요!"
그는 놀랍다는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굉장히 신비로운 일이란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유를 원한다면 살인을 저지르고 사기를 쳐야 한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정말이지 내가 죽이고 사기 친 이야기를 다 한다면 머리끝이 쭈뼛거릴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형편없이 굴었는데도 자유가 오다니! 하느님이 벼락을 내리는 대신에 자유를 주시다니! 나는 이해가 안 됩니다." - P30

"풀이 어떻게 돋아나고 똥과 진흙 속에서 어떻게 꽃으로 자라나지요? 조르바, 자신한테 비료와 진흙은 사람이고 꽃은 자유라고 말해 보는 게 어때요?"
"그러면 씨앗은요? 풀이 돋아나려면 씨앗이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우리 안에 그런 씨앗을 집어넣은 건 누구란 말이오? 왜 이 씨앗은 친절하고 정직한 곳에서는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겁니까? 왜 피와 더러운 것이 비료가 되어야만 하느냐는 말입니다."
조르바는 주먹으로 식탁을 치며 말했다.
"모르겠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누가 알까요?"
"없을 거요." - P32

"봐요, 내가 툭 까놓고 말하지요. 이 세상은 하나의 수수께끼인 데다 인간이란 야만스러운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잔혹한 야수면서 신이기도 하지요. 나와 함께 마케도니아에서 온 놈 가운데 불한당 같은 반역자, 요르가란 놈이 있었어요. 진짜 악랄한 놈인데, 그놈이 글쎄 울더란 말입니다. ‘왜 우는 거냐, 요르가, 이 개놈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죠. ‘늙은 돼지 새끼 같은 놈이 뭐 하러 울어?‘ 그랬더니 그는 두 팔로 내 목을 끌어안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더란 말입니다. 그러고는 그 잡놈이 자기 지갑을 꺼내 터키 놈들에게서 뺏은 금화를 몽땅 쏟아내서 한 줌씩 공중에 뿌렸어요. 보스, 아시겠어요? 그런 게 자유라는 겁니다." - P33

보다 고상한 정열에 휩쓸리는 것. 그것 역시 또 다른 노예 상태는 아닐까? 사상이나 민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우리가 따르는 것이 고상할수록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다는 뜻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재미를 보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지 못한 채 죽는 건 아닐까? 그럼 그게 우리가 말하는 자유? - P34

"마을은 여기서 멀어?"
"총 쏘면 맞을 만한 거리예요. …(중략)… 밤에 과수원에 있으면 열매들이 크는 소리가 들린다니까요." - P35

"형제, 형제는 영혼이 있소?"
여자가 조르바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있지."
그가 엄숙하게 대답했다.
"그럼 5드라크마만 줘."
조르바가 주머니에서 가죽 지갑을 꺼냈다.
"여기 5드라크마!"
그때까지 시무룩하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보스, 여기 동네는 물건값이 싼 모양이오. 영혼값이 겨우 5드라크마라니!" - P37

"육체에도 영혼이 있답니다. 몸을 가엾게 여기세요. 뭘 먹이셔야지요.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 영혼을 팽개치고 말 거라고요." - P45

"계산 같은 걸 하려면 땅속 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거든요. 만약 내가 바다를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여자를 본다면, 비록 늙은 여자라도 마찬가지인데, 아무튼 빌어먹을, 그때까지 하던 계산이며 숫자들이 몽땅 불사른 듯 날아가지 않으면 이상한 겁니다. 날개가 달린 것처럼 달아나고 나는 또 죽어라 뒤쫓아 가야 하지요." - P47

영혼을 짊어지고 다니는 육체라는 짐승에게 실컷 먹이고 포도주로 목도 축여 주었다. 음식은 곧 피가 되고 세상은 더 아름다워 보였다. 우리 옆에 앉은 여인은 점점 더 젊어져 얼굴의 주름살도 사라졌다. 매달린 새장 속에서 초록빛 재킷에 노란 조끼를 입은 앵무새가 고개를 숙이고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앵무새는 마술에 걸린 외로운 사내 같기도 했고 초록과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늙은 카바레 가수의 영혼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 머리 위 포도 넝쿨에는 시커먼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 P50

술 속에 있던 장난꾸러기 마귀가 그녀를 젊은 시절로 되돌려 놓았다. 옛날처럼 다정하고 유쾌한 여자가 되었다. - P51

사람, 동물, 나무, 별은 모두가 상형문자이며, 그 상형문자를 해독하고 그 의미를 상상하려는 사람은 고독하다. 보는 것만으로는 의미를 알기 어렵다. 그저 사람이며 나무며 별들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그 뜻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은 법이다.
- P60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는 모든 것이 조르바 앞에서는 엄청난 수수께끼가 된다. - P68

조르바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세상이 다시 처음 그대로의 활기를 찾는 것 같았다. 물, 여자, 별, 빵이 원시의 신비로운 모습으로 돌아가고 태초의 회오리바람이 주위를 맴돌았다.
- P69

"나는 아무것도 안 믿어요. 내가 사람을 믿으면 하느님도 믿고 악마도 믿을 거요. 그게 그거니까. 보스, 그리되면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고 나는 혼란에 빠질 겁니다."
- P72

무엇을 없애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그 위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 P82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언제든 변할 수 있으며 꿈속에 사는 것처럼 환상적이다. 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 같은 보랏빛 바람에 둘러싸인 구름이다. 이 땅 위 아무리 훌륭한 선지자라도 뚜렷한 예언은 들려줄 수 없다. 암시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하다고 여겨진다.
- P83

나는 행복했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행복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흘러간 뒤에야 그것을 돌아보면서 그것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크레타 해안에서 행복했고 행복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 P88

"오그레 삼촌, 나는 쑥쑥 자라는 뿔이에요. 그래서 참 기뻐요."
나는 놀랐다. 인생이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 뿌리 깊숙이 내려가면 모든 영혼은 서로 만나 하나가 되곤 하지 않는가!
- P88

곧 조르바가 돌아와 불을 피우고 일상의 의식인 요리를 할 시간이었다.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한 가지 노릇이 바로 이겁니다. 끝없는 전쟁과도 같은 건 염병할 여자뿐만이 아니에요. 먹는 짓거리도 역시 끝없는 전쟁이랍니다."
- P88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지 가르쳐준다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 누구는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고, 누구는 일과 좋은 유머에 쓰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하느님께 돌린다고도 합디다. 그러니 세 종류의 인간이 있는 셈이지요. 보스, 나는 최악도 아니고 최선도 아니고 중간쯤은 될 겁니다. 나는 내가 먹은 걸 일과 좋은 유머에 쓰니까요. 그다지 나쁠 것도 없겠지요?"
- P89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데 필요한 것은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이 전부였다. - P106

"보스, 돌이나 비, 꽃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릴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걸지도 몰라요. 보스, 언제쯤이면 우리 귀가 열릴까요? 언제쯤이면 우리가 두 팔 벌려 돌이나 비, 꽃, 사람들 같은 모든 만물을 안을 수 있을까요?
- P124

"산다는 건 다 말썽인 거요. 죽어야 말썽이 사라지지. 산다는 건 말이오. 보스, 당신은 산다는 게 뭘 뜻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산다는 거요!"
- P134

"보스, 내가 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에요. 내 생각엔 하느님이 나랑 비슷할 것 같단 말이오. 좀 더 크고, 힘이 세고, 나보다는 좀 더 돌았겠지만요. 덤 같은 건 받지 않겠죠. 부드러운 양가죽 더미 위에 올라 앉아 하늘을 집으로 삼고, 오른손에는 칼이나 저울 같은 거 대신에-칼이나 저울 같은 건 백정이나 식료품 주인이 들고 다니는 거지요-꼭 구름 같은 스펀지 한 덩어리를 들고 있을 겁니다. 오른쪽에는 천당, 왼쪽엔 지옥이에요. 이때 혼령이 하나 들어오는데 가엾게도 이 친구는 옷을-그러니까 몸 말입니다-잃어버려 오들오들 떨고 있어요. 하느님은 그걸 보시면서 소매로 웃는 걸 가리고 마귀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리로 와 봐. 이 불쌍한 놈아‘ 하느님이 심문을 시작합니다. 벌거벗은 혼령은 하느님 발밑에 꿇어앉아 빌어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혼령은 자기 죄를 줄줄 대기 시작해요. 하느님은 심해도 너무 심하구나 생각하고 하품을 합니다. - P140

‘제발 그만해! 그런 소리라면 아주 신물이 나게 들었다고!‘ 그러면서 들고 있던 물 묻은 스펀지로 죄를 몽땅 지워버리고 혼령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가, 천당으로 썩 꺼져 버려. 이봐, 베드로. 이놈도 넣어줘라.‘
아시다시피 하느님은 굉장한 왕입니다. 광장한 왕이라는 게 뭐냐? 용서해 버리는 거지요!"
- P140

자기 생각에 질식할 것 같았는지 그가 불쑥 물었다. - P140

"조르바, 난 당신이 좋아요. 그거면 되잖아요?"
"하지만 보스, 당신은 내 머리 무게가 엉망이라는 걸 몰라요. 조금 더 많이 나갈 수도 있고, 덜 나갈 수도 있지만 어쨌든 정상은 아니란 건 틀림없어요."
- P141

"언젠가 기술자 한 명이 가르쳐 줬는데 말입니다. 확대경으로 음료수를 들여다보면 눈으로 볼 수 없는 벌레가 우글거린다고 합디다. 보고는 못 마시지, 근데 또 안 마시면 목마르니. 보스, 확대경을 부숴 버려요. 그럼 벌레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다오. 정신도 번쩍 들 수 있고 말이오."
- P156

진정한 행복이란 게 이런 걸까. 별다른 야망 없이 세상의 야망을 다 품은 듯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졌지만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음식을 실컷 먹고 마신 다음에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을 머리에 인 채 바다를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가 이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기적 같은 일이 진정 행복 아닐까.
- P157

"예수처럼 다시 태어나는 거지요. 예수님은 해마다 새로 태어나지 않소? 나도 그렇다오!" - P158

인생을 돌아보니 밋밋한 데다 모순이 가득하고 주저함이 진득하게 달라붙은 몽롱한 반생이었다. 바람을 만난 한 조각 구름처럼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어 흩어졌다 모이고, 모였다가 다시 모습을 바꾸어 백조가 되고, 개가 되고 악마가 되는가 하면, 전갈이 되고 원숭이가 되었다. 구름이란 영원히 날리면서 찢기는 존재, 영원히 바람과 무지개에 쫓겨 다니는 신세인 것이다.
- P158

나는 달빛 속에 앉은 조르바를 보면서 주위 세계에 어우러진 그 소박함과 단순함에 놀랐다. 여자, 빵, 물, 고기, 잠 같은 모든 것이 유쾌하게 잦아들어 조르바가 된 것에 놀랐다. 나는 우주와 인간이 이렇게 다정히 서로 엮여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 P175

창조의 빛을 잃어버린 종교에서 모든 신은 결국 인간의 고독처럼 시의 모티브가 되거나 벽면을 장식하는 예배 용품이 되어 버린다. 그의 시 역시 그런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가슴에서 타오르는 열망이 씨앗이 되어 대지와 완벽하게 만난 것 같지만 완벽하게 머리로만 씨앗을 키워 내는 지적 놀음, 교묘하게 만들었지만 속은 텅 빈 구조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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