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받는 기분 문학과지성 시인선 552
백은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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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책을 열심히 보고 공부(?)를 하고 그랬던 게 다 그냥 소일처럼 좀 더 내게 와닿는 콘텐츠를 찾아 좀 더 공감하기 위해서였나 싶기도 하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다, 라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책을 읽는 이유가 어떤 성장이나 감동을 위해서라고 콕 집어 말하는 게 더 웃기지만, 그렇다고 교수가 되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말은 더 웃기지만, 누군가에게 아는 체 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와 비슷한 말 같기도 하지만, 그럼 우리는 왜 그리 책을 읽고 밑줄을 쳤을까. 시험 문제에 나오지도 않는데. 왜 시를 배껴서 적고 그랬을까. 


며칠 전 비가 오는 날은 안도현 시인의 ‘빗소리 듣는 동안’의 제목을 도무지 알 수 없이 그 시를 좋아하던 친구들과의 기억 같은 것만을 끌어안고 있다가 ‘양철지붕에 대하여’를 보다가 이 시가 아닌데 하다가 다음날이 되어서야 내가 떠올린 그 시 제목이 ‘빗소리 듣는 동안’이라는 것을 누가 알려줘서 알았다. 이러려고 시를 읽은 걸까. 어느 순간 호명하기 위해. 하지만 너무 많은 콘텐츠 속을 허우적대는 데다 기억력은 점차로 사라져가 이제 호명하기조차 힘들어지는데, 이제 시는 왜 읽는 걸까. 


시집에 나오는 파스칼 키냐르라는 이름을 보고 그래 이런 이름을 가진 작가를 알고 있지, 누구더라 하며 찾아보니 집에도 책이 있어 (읽지 않은 채 방치된) 다음에는 이 책을 읽어야지 싶었다. 


왜 우리는 시를 읽을까, 예전에는 왜 그랬지? 밤마다 시를 한 편씩 보다 잘까 했고 거의 종종 그렇게 했다. 아침에는 외국시, 저녁에는 한국시, 좋은 구절에 밑줄을 긋고 좋은 시를 체크한 이유는 뭐였을까. 무엇을 위해?


무엇을 위해가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이라고, 오늘 칸트 관련한 내용을 찾다 보니 그런 메모가 있어 내일 좀 더 열심히 들여다볼 계획이긴 한데, 왜 나는 그렇게 목을 맸을까. 이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 에미상을 받네 마네 하는 오징어게임도 이제는 굳이 보려 하지 않는데, 무슨 차이일까. 


다음에는 시간 내서 오징어게임을 봐야하나 보다. 회사를 그만두고자 하며 ‘왕좌의 게임’, ’프리즌 브레이크’를 열심히 봤는데 그게 뭐가 되는지는 모르겠어 그런 드라마 보기도 멈췄다. 이다지도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 나로 웅성대는 서점에 어제 오늘 다녀와 지금 이 콘텐츠, 심지어 자본주의의 논리를 입고 가격을 매긴 이 활자만으로 승부하는 듯 하지만 알고 보면 디자인을 입고 콘셉트 속에서 시대를 고민하는 이 콘텐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는 시대, 시를 읽는 일은 무얼까. 시를 읽으면서도 알 수가 없이. 그래도 밤에 자기 전에는 영영 시가 필요할까. 나도 확신을 못하겠다. 


시는 외로운 밤을 위해 존재한다?

시는 정리되지 않은 밤을 위해 존재한다?

시는 이제 무엇을 하기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도 시는 존재하지만



좋은 시를 쓰는 사람


시 쓰기는 시대의 언어를 찾아가는 일


매일 밤마다 시를 한 편씩 보려고 한다. 쉽다면 쉬운 일이고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다. 아까 10시쯤 잠이 들었는데(넘어져 무르팍이 까진 데다 날이 춥고 아침부터 나가 돌아다니다 왔다) 시를 읽어야지 하고 불을 켰다가 안 되겠어서 그냥 잤다. 시 1편을 읽는 시간이 길지 않다는 점에서 시 한 편 읽는 일은 쉬운 일이다. 하루를 반성해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그대로 잠들기 어렵다는 점에서 시 읽기는 어렵기도 하다. 도움 받는 기분 다음 읽고 있는 시집은 안도현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다. 오래전 시집이다. 

너무나 달라서 같은 장르라 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최근에는 아침에는 '가장 아름다운 괴물이 저 자신을 괴롭힌다'를 읽고 있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쉼보르스카의 '끝과 시작'을 가지고 다닌다. 시집 네 권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다 다른 언어이다. 너무 달라, 너무 달라,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다. 


한국시집 2권마저 전혀 다르다. 나는 안도현 시인의 시대를 살다(실제로 대학 동기가 선물해준 책을 이제야 읽는 거다. 쯧쯧) 21세기의 시대를 살며 21세기의 시를 읽는다. 동질감은 현재의 감각이라는 것, 정도다. 현재의 감각을 최대한 정제된 언어로 표현해 보려 한다는 것. 


시는 현재의 언어다. 모든 콘텐츠는 현재의 언어이지만, 시는 언어로만 현재의 시대에 있고자 한다. 영상도 없이,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가장 인간적인 콘텐츠라 할 수도 있지만, 


이 시대의 언어


이 시대의 한국어, 이 시대의 감성들이 모두 만나고 거기에 학문적인 접근도 이루어져야 한다. 책 좀 읽는 자들의 언어들. 회사생활 하면 이런 시 읽기가 쉽지 않다. 현재의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나의 감정에 가장 가까울 수도 있다. 접근이 쉽지 않다. 


언제까지 시를 읽을까. 


나는 되도록 평생 시를 읽고 싶다. 당대의 감정을 알고 당대의 언어 속에 살고 싶다. 절박한 인간 언어들 속에서 진실(이라는 게 있다면, 있다고 믿고 싶으므로)에 근접해 살고 싶다. 


소비가 사회생활이 되어버린 시대, 개인의 감정은 대부분 그건 너의 이야기가 되었고, SNS에는 연예인의 사생활이 판치고, 예능으로 웃음을 퉁치는 시대, 그래도 한 사람의 살아감을 진지하게 대화해보고자 하는 


영영 남아있는 과거와 현재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언어로 발설해보는


발설하다


라는 단어와 가장 가까운 야옹이나 멍멍이 아닌 


언어를 찾아서 (물론 인간도 음조만으로도 자기 언어를 계속 찾는 동물이지만) 나의 언어로 세계를 개척하고 대화하고 이를 통해 질문을 던지는


우리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우리의 과거는 어떠합니까


당신은 괜찮습니까


어떤 미래를 꿈꾸십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에 대한 답과 질문 사이를 오가는 


노래


아마도



감정적으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이들과는 멀리하려고 한다. 사회적이라는 것은 내 감정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너의 감정을 모르고 너는 나의 감정을 모르며, 그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그렇다고 감정을 무시하거나 하는 건 아니다. 감정은 시 속에 있다. 어떤 언어로도 안 되는, 그 속에서 겨우, 발설되는 감정들이 시다. 헤치고 헤쳐나가는, 파도 같은. 그렇다고 타인에게 내 파도를 타라거나(탈 마음이 없는데) 기준 없이 감정으로 재단하며 '내가 제일 잘 나가'를 혼자 하면 같이 갈 수 없다. 그런 감정은 시 속에 있다. 그런 감정이 많다면 언어화해 시를 쓰라. 이 시인의 시집을 다음에도 살 생각이다. 혹시 읽고 싶은 시집이 없다면 이 시인의 이전 시집을 사볼 의향도 생겼다. 감정을 사회적으로 드러내고 싶다면,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는 뭘까. 약속, 언어, 몸짓, 표정, 눈짓, 그런 것들의 집합에 경제나 세계, 역사, 철학, 종교가 합쳐진 양태. 일대일의 관계란, 역시 약속, 언어, 이런 것들이겠지. 그 다음은…


생각 중


누구나 어찌할 수 없는 감정들 속을 산다. 그것을 시로 써서 이 정도에 이르기를. 그 감정이 얼마나 소중하고 절박한지 이야기할 수 있기를. 남한테 내뱉지 말고, 성내지 말고.






...

세계의 비밀에 가까워질 수도 없는데


끝없이 두들긴다

단단해질 것도 없는데 두들긴다



보는 눈이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르는 게

...

- 클리나멘 중 -




2022 9 13일 화요일

2

시가 없는 삶을 생각해보곤 한다. 시집 뒷편 해석을 읽다 이게 다 무슨 상관인가 싶고 그래서 시가 없는 삶을 생각한다. 그러다 실제 시를 보면 무언가 울림이 온다. 드라마가 없이 살고 뉴스나 스포츠도 없는 삶을 산다. 겨우 듣는 것은 목소리 없는 음악 정도이다. 

요즘에는 아침에는 네루다의 '스무 편의 사랑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읽고 밤에는 '정본 백석시집'을 읽고 있다. 아침부터 네루다의 정열을 이해하기는 좀 어렵지만 그래 이것도 삶이지 하기도 하고 밤에는 백석이 바라본 바깥에 대해, 시는 어쩌면 바깥을 조용히 바라보는 일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잔다. 

백은선의 시도 밤에 읽었다. 뜨거운 목소리. 아마 시를 해설하는 분도 그런 의미에서 포에트리 슬램을 이야기했겠지. 그러나, 그래서, 싶다가도 결국 시가 없는 삶보다는 시가 있는 삶을 계속 살기로 했다. 

삶의 어떤 층위, 알지만 모르겠는 그것을 겨우 언어로 해보는 일, 그것을 통해 어디로 도달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층위 또한 있음, 그것을 알고 있음, 어쩔 수 없음, 아마도.

2023 5 21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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