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마지막 오랑캐
이영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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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다니기 좋아해 

유목민으로 태어났다면 더 좋았을 텐데 

생각을 종종 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더 안정된 느낌이 드는 사람이라 그렇다. 

하지만 사실 나는 유목민이 뭔지 잘 몰랐던 게 아닐까

이 책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또 그래도 유목민이 내게는 참 잘 맞구나

이런 생각도 든다.

인용한 대목에서 보이듯

유목민의 사고방식, 자유롭고 자연에 가까운 생각이 더 내게 와닿아서다. 


몽골에 가보고 싶어졌다. 

예전에 몽골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잠시 가르친 적이 있는데 

그때 이 책을 보고 갔더라면 좀 더 오래 거기 머무를 수 있지 않았을까

그저 고기 냄새가 어려웠고

그때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 바다라고 했는데 

이 책을 보자 고기 냄새도 바다에 대한 그들의 시선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좀 더 마음을 터놓을 수 있었다면

너무 어려서였거나 시야가 좁아서였겠지

                                        


2018 1 24일 수요일


새끼가 적당히 자라면 어미는 훈련을 시작한다. 가을이 되면 다시 지구의 반 바퀴를 날아 한국으로 대만으로 더 멀리 호주까지 가야하기 때문이다. 길고도 힘겨운 여행을 무작정 떠날 수는 없을 터, 매일 어미 새를 따라 혹독한 훈련을 반복한다. 호수면을 박차고 오르는 훈련, 지치지 않고 날갯짓을 하는 훈련, 대열을 만들고, 선두를 바꾸고, 다시 대열을 만드는 훈련을 한다. 처음에 가족 단위로 진행되던 훈련은 날이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비행 고도도 높아진다.
그렇게 훈련을 거듭하던 어느 안개 가득한 날, 훈련처럼 출발한 새 무리는 곧장 하늘 꼭대기까지 날아오른다. 새끼들이 두려워하지 않게, 훈련인지 실전인지도 모르게 길을 떠난다. 그런 날이면 비지아는 뿌연 안개 속에서 새끼가 어미를 놓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 P169

하늘 안개에서 길을 잃은
앙기르 새끼가 가엾어라
세상 안개에서 길을 잃은
사람의 자식이 가엾어라
저절로 오리앙카이 어른들이 부르던 노래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친구들과 놀다가 잘못을 저지를 때면, 어른들이 그렇게 측은한 눈으로 노래를 해주곤 했었다. - P169

유목민들은 씨를 퍼뜨릴 한두 마리를 제외하곤 두 살이 넘는 모든 가축의 수컷을 거세한다. 거세하지 않으면 전쟁이다. 그것이 우주 생물의 질서다. 오직 인간만이 거세를 하지 않고, 전쟁도 없이 공존하며 사는 색다른 실험을 하고 있다. 사실 문화와 사상, 철학의 힘을 바탕으로 진행중인 인간의 실험은 아슬아슬한 모험이다. - P213

불가의 수행자들에게 ‘일기일회一期一會‘란 말이 있다. 여러 번 되풀이되지 않는, 평생 단 한 번뿐인 만남을 뜻한다. 일생 단 한 번 만나는 인연, 두 번 만나기 힘든 세상에서 서로 만났으니 만났을 때 최선과 진심을 다한다. 광활한 우주 속의 점 한 톨 같은 인간, 몽골 초원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런 인연을 맺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 옆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 P227

"밤마다 나담 축제 꿈만 꾸었겠다. 어디서 아이 목소리만 들려도 너를 타고 앉았던 기수가 부르던 노래인 듯 돌아보았겠구나."
비지아는 잠깐의 재회가 반갑고 아쉬워 헤르를 꼭 안아주었다. 어른들은 헤르에게도 어린아이 하나를 태워 나담 축제에 참가시켰다.
그해 여름, 헤르는 달리는 길 위에서 쓰러져 죽었다. 숨은 가빠오는데 발이 먼저 간다.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늙은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그래도 헤르는 쉬지 않았다고 했다. 결승선에 다 오지 못하고 앞다리가 꺾이면서 쓰러졌다고 했다. 사인은 폐파열이었다. 유목민이 말 위에서 죽는 게 영광인 것처럼, 말은 달리다 죽는 게 영광이다. - P255

몽골 사람들이 만나서 처음 하는 인사말은 ‘사인 바인 오(잘 있어요?)이고, 헤어질 때의 인사말은 ‘바이테르‘이다. 몽골 여행에 꼭 필요한 두 마디 말인데,…
‘바이르‘는 ‘반가움‘이란 뜻. 그러므로 바이테르는 ‘반가움이 남아있다‘는 뜻이 된다. ‘잘 있어요, 잘 지내요‘라고 말하는 대신 ‘당신에게 반가움을 남겨두고 갑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 P289

우리말의 ‘비가 온다‘라는 문장에서 주인공은 누구일까? 비와 나, 즉 나한테 오는 비이다. 반면에 몽골어의 ‘비가 들어간다‘라는 문장은 주인공이 다르다. 하늘과 대지이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땅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하늘과 대지와 그 사이의 비, 천지인天地人이 아니고 천지우天地雨이다.
우리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사는 존재들, 푸른 하늘과 어머니 대지가 유목민들의 삶, 사상, 언어 속에 늘 함께한다. 인간이 모든 장면의 주인공이란 생각을 버렸기 때문에, 스스로가 우주의 주인이라는 짐을 덜어낸 덕택에, 유목민들은 그만큼 가볍고 그만큼 자유롭다. - P291

"야호!"
누구나 쓰지만 누구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말이다. 몽골어로 ‘가다‘는 ‘야(와)흐‘이다. 그럼 ‘갈까요?‘는 어떻게 말할까? 의문형에 붙는 어미를 붙여보면 ‘야(와)호‘가 된다. 정확한 발음을 한국어로 적을 수는 없지만, ‘야와호‘ 또는 ‘야호‘가 원음에 가깝다. 야-호. 이 말도 몽골어의 ‘갈까요?‘에서 왔던 것이다. - P297

알타이산이 가지는 또다른 의미는 사라짐이다. 고향을 바람 속에 묻어둔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고향이다. 유목민들은 조상의 묘를 찾아, 부모의 고향을 찾아 천릿길을 떠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과거는 지나간 시간에 불과하다. 과거는 흘러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초지를 찾고, 새로운 방목을 시작해야 한다. 삶도 죽음도 전쟁의 승리도 실패도 모두 그렇다. 과거를 버리지 못하면 분노와 복수심에 발목이 잡혀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알타이산이 이동한다는 것, 마음속에 성산을 두고 산다는 것은 고향을 몸으로 찾지 않고 마음으로 찾는다는 뜻이다. 유목민의 고향은 바람 속이다. - P325

사람이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조촐한 장례를 치른다. 몇 잔의 술을 마시고, 양고기를 나눠먹고, 하늘에 별이 가득할 무렵 나이 지긋하신 노인이 달구지를 끌어온다. 그러곤 하얀 천에 싼 시신을 싣는다. 화요일을 제외한 어느 길일이어야 한다.
노인은 독한 보드카를 들이켜며 덜그럭덜그럭 삐그덕삐그덕, 울퉁불퉁한 초원 길을 하염없이 돌아다닌다. 달구지를 끄는 노인이 만취하여 상주의 집으로 돌아올 즈음, 뒤에 실려있던 시신은 어딘지 모를 대지에 떨어지고 없다.
시신은 가고 없는 상가喪家에서 달구지꾼 노인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전날 갔던 길을 똑같이 따라가본다. 초원 어느 땅에 사흘 전 내려앉은 시신이 있다. 달구지에서 내려 시신을 살펴보는데, 육신이 그대로 남아있으면 크게 슬퍼하고 흰 뼈만 빛나고 있으면 기뻐하며 돌아온다. - P330

흥청망청하는 저 시간, 유목민들이 한 해를 보내는 의식이다. 조금 변형돼서 ‘서양식 파티‘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흘러가버린 한 해를 기억하기 위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그 시간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기 위해, 시간을 쌓아두지 않고 툴툴 털어버리기 위해 축제를 즐기는 것이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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