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의 천재들
정혜윤 지음 / 봄아필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가지고 싶은 책이다.

가졌다고 그 책을 꺼내보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다.

이번 이사에서는 그런 책이 아니면 다 버려야지 했지만

버림도 하나의 행위이고 시간을 쏟아야 하는 일이라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또 가지고 싶은 책이 생겼다.

이런 제길

이만 가져야지 했는데

어떤 생각들은 몇 번이고 다시 쓰담쓰담해주고 싶다

우리 고양이를 다시 쓰다듬어도 늘 기분이 좋은 것처럼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런 책이다.

  

책을 읽는 동안 행복해지고 말았다.


이런 일 많지는 않은데.


너 왜 책을 읽어


라고 스스로 묻다가 혹시 이거 지적 허영 아니야 요새 그런 생각도 많이 하던 차 (요새는 허영은 다 갖다버리고 알맹이만 부둥켜 안고 살고 싶어서 되도록 많은 것들을 멀리하고 있다)인데, 이 책은 "그래 그래서 나는 책을 읽어"라고 말하고 싶게 만든다. 그래서 주변의 좋은 사람들에게 "이런 책이 있는데 말이야"라면서 얘기한 것도 여러 번이다.


인생과 신념이 일치하는 사람들의 얘기다.


그것은 거의 예술의 경지


이 자본주의 최고봉 한국사회에서 돈 말고 신념 따라 살아가겠다는 것은

얼마나 강해야만 하는 일인지

해보려 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말들 속에서 무언가를 기대했으나

거짓된 희망을 불어넣고

거짓된 혁명을 꿈꾸게 하고

거짓된 도취로 춤을 추다

남는 것은 무도회복을 사느라 진 빚과

무대를 치워야 하는 청소부


라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으나


그런 위축된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게 해준다.


가장 아름다운 날이 지나갔다는 그런 생각이 들 때, 딱딱하게 굳어진 내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싶을 때. 예전에는 어떻게 할 지 잘 모르겠어란 말을 자주 하긴 했어도, 실제로는 어떻게든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말을 할 수도 없을 만큼일 때, 뭔가 굴복해버린 느낌이 들 때,  왜 그랬어, 너? 혼자 물어도 보는데, 그때 넌 뭘 믿었던 거야

물어보면 실은 것도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믿었는데...

지금은, 이러던 차...


지금 과정에 있는 거잖아


라며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이유는 아래 인용 문장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또 딱딱해지면 읽어야지. 이런 문장들을.



-2015년 4월 7일 화요일



네 책에서는 고독한 두 사람이 만나면 저항군이 되더구나. 이것은 카뮈의 말과도 같아. 고독한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것이 반항이라고. 난 고독한 두 사람이 만나 적응을 말하기보다 저항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미래를 가져다주는 행동이라고 생각해. 이건 사랑과도 같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서로를 안전하게 지켜주겠다는 약속, 너를 위해 싸우겠다는 약속, 사랑 안에 이런 맘이 들어있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겠지.


그런데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지키지? 무엇을 위해 싸우지? 무엇을 보호하지? 무엇에 분노하지? 뭐라고 표현했든 나는 네가 네 책 속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해. 그런데 이 질문들 없이 우리가 미래를 위해 최선을 행동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 미래가 만약 갓 태어난 갓난아기라면 우린 이 질문들을 던지지 않고 그 아기를 최선을 다해 잘 키워볼 수 있을까?


네 고민의 무게는 깊어도, 네 고민의 중심이 끌어 앉히는 힘은 막강해도, 너는 "에구, 그래도 어떻게 좀 움직여보자."라고 말하는 듯했어. '곰처럼 무거워도 나비처럼 난다'라고나 할까? 고민은 무거워도 행동은 가볍게, 거창한 질문 앞에 우리의 행동은 사소한 것부터, 이것이 한 점 중심에서 네가 출발할 수 있었던 이유야.


우린 확신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야. 자유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지. 자신의 삶이 하나의 알리바이(이 세상이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다는)에 불과하길 원치 않으니까.


네가 평소에 가장 잘 하는 말이 뭔지 알지? "그럼 나라도 어떻게든 해볼게. 그런데 기왕 할 거면 잘하자." 야. 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해. '음, 이놈은 천재다.' 너는 절실함에서 천재야. 영혼의 부지런함에서 천재야. 너는 가만히 있지 못함에서 천재야. 그래서 너는 '나비처럼 나는 곰' 혹은 '나비의 날개를 단 곰'이 될 수 있었어. 비록 잘 날진 못해도 날긴 날아. 그러니 신랄해도 귀여울 수밖에 없어. 네가 좋아하는 표현을 옮기자면 너는 일종의 시적인 동물이야.


나짐은 희망들의 넝마가 되어도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고 말하는 듯해. 여전히 누군가는 정의의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느냐고. 이 말은 아주 의미심장해. 희망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거대한 정치적 변혁이었을까? 희망을 이 사이에 깨문다는 의마가 무엇일까? 나는 이 말에 대답하고 싶어졌어.


인간은 수많은 사람으로 태어나 한 사람을 죽는다는 말이 있지. 우리 안에는 우리가 쓰지 못한 힘, 탐험하지 못한 모습, 발견하지 못한 보물, 미처 능력을 드러내 못한 자아들이 넘쳐나고 있어. 우리는 그중 최악의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것을 끄집어낼 수 있게 서로 도와야 해. 우리 자신이 자신에게 남은 단 한 가지 모습을 혐오스럽게 보지 않도록 서로 도와야 해.


그러려면 저항군이 될 수밖에 없어. 왜냐고? 어떤 사람으로 죽고 살아야 하는지조차 이미 사회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 같으니까. 어떤 삶이 최선의 삶인지조차 이미 정해진 것 같으니까.


-p.20~22



훗날 다큐멘터리 피디가 되어서 숲을 헤맬 때 나는 죽은 사슴의 뼈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사슴 뼈를 보면서 숲과 사슴의 역사를 가슴으로 느꼈습니다. 살아생전 지녔을 사슴의 감성과 살아있을 동안의 투쟁과 생애 마지막 순간의 고뇌를 느꼈습니다. 그 뼈를 보면서, 숲 속에 자신의 역사를 외로운 유적처럼 뼈로 남겨놓은 한 생명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룬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인생 전체가 중요하다는 것, 매일매일 불행하다가 어느 한순간 찬란하게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 나는 뼈 한 조각을 보면서 보람이란 것을 어떤 핵심적인 것, 본질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겐 꽃 이름을 아는 것보다 어디선가 꽃이 피고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걸 느껴야 합니다. 낙엽 하나가 떨어져도 낙엽이 떨어지는 걸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릴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경쟁이 너무 치열합니다. 우린 그럼 어쩔 수 없지, 하면서 그 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잊습니다. 내가 원래 뭘하고 싶어 했던가, 이것을 잊습니다. 나는 선택을 해야 할 때마다 오솔길과 변두리의 철학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슴 뼈를 떠올립니다.


나는 밤길을 걸으면서 낮 동안 일어났던 일을 사소하게 느꼈던 그 시간을 잊지 못합니다. 낮의 사소함과 사슴 뼈의 의미는 선택과 행동의 순간에 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무엇이 나에게 중요했었고 뭐가 사소했던가? 어떻게 하면 후회하지 않을 시간을 살 것인가? 하지만 나는 또한 모든 개체는 먹고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것 또한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너무 큰 것을 요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높은 기준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은자가 되자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다른 이 두 생각이 내겐 정-반-합(harmony)의 세계로 이해됩니다. 현실적인 조건 즉 인간의 규칙과 내가 따라야 할 자연의 규칙들 사이의 소통, 이것이 내겐 진정한 마음속 소통입니다. 저 시베리아 우데게족 최고의 신은 엔두리입니다. 엔두리는 바로 화합(harmony)의 신이죠. 내게 화합은 이런 모습입니다.


-p. 51~52


호랑이에게 공격당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바로 혼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개인의 자유, 개인의 자아를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또 어쩔 수 없이 더불어서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란 종입니다.


나는 땅 밑에 홀로 누워 카메라를 바라보며 끝없이 갈등합니다. 호랑이를 보고 싶은 욕망과 얼른 돌아가서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거대한 자연을 보고 싶다는 욕망과 낯익고 편안한 관계 속에 있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지금까지 걸어오던 길을 앞으로도 계속 걸어가고 싶은 욕망과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이냐고 절규하고 싶은 순간들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나는 평생 이런 고민들 속을 떠돌았습니다. 나중엔 사람이라 불리는 하나의 존재,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으니 아무나 만나기만 하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어쩔 땐 녹차 통에 적혀있는 상품 정보 글자를 읽고 또 읽습니다. 그때 글을 잘 썼느냐 못 썼느냐가 아니라 읽을 게 있다는 것, 그것만이 좋단 생각이 듭니다. 올바른 길이 있어도 그 길을 가고 싶은 욕망과 벗어나고 싶은 욕망 사이의 갈등은 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저 산속에서 추위와 눈과 싸우고 있을 때 도시에선 사소한 이전투구들이 수도 없이 벌어진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황폐함 속에 오래 있으면 도시의 삶이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산에서 고독하듯이 도시에서도 고독할 것이란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참지 못하고 도시에 전화를 겁니다. 내가 온갖 방법을 다 통해서 겨우겨우 전화를 한 통 걸면 이런 답변을 듣습니다. "지금은 회의 중이니까 나중에 전화하세요." 산에서의 고독은 인간이 보고 싶어 생기고 도시에서의 고독은 거기에 종속될 수밖에 없어 생깁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잠복에서 또 뭔가를 알게 됩니다. 도시에서 중요했던 것들이 산에서는 사소해지고 도시에서 사소했던 것들이 산에선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잠복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겨우 알 수 있는 걸 미리 알게 해줍니다. 삶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퍼뜩 깨닫고 돌아가서 살 방향을 정하게 됩니다. 비트는 호랑이를 보는 곳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보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비트에서 기다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눈으로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기다리는 겁니다.


긴 호흡으로 생각하는 자에게는 실패도 성공도 없습니다. 오늘이라는 날은 항상 숲으로 이어지는 길의 입구 같습니다. 긴 호흡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결코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틀렸다고만 합니다.

하는 만큼 알 수 있다는 말도 우리에겐 희망입니다. 하는 만큼 보입니다. 그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한 발을 든 정지 상태로 5분을 참는 호랑이의 모습이야말로 저에게 천재란 단어를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까뮈의 한마디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천재란 스스로의 절도를 창조해내는 반항아다." 절도 있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우리를 천재적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마 자기 삶의 용감한 관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자기에게 가장 좋은 일을 자기 스스로의 판단력으로 찾아내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저는 자신의 한계에도 고통에도 행운에도 똑같은 자세를 취하는 사람이 좋습니다. 한계는 한탄하고 장점은 과장하는 그런 태도 말고요. 한계도 장점도 길을 내딛는 하나의 원료로 쓰는 거지요. 어차피 한계와 결핍과 고통에서 모든 중요한 것들이 다 나옵니다.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서글픈 일은 아닙니다. 고통이 없다면, 고통이 없기만 바란다면, 고통이 없는 척한다면, 고통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둔다면 우린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은 중간적 존재입니다. 삶과 죽음의 중간적 존재,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의, 현실과 꿈의, 어둠과 빛의, 기쁨과 슬픔의,  출발점과 목적지의, 어제와 내일의 중간적 존재입니다.

까뮈의 문장이 있습니다. 까뮈는 '나는 비참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비참하진 않았다. 나에게는 태양이 있었다."라고 말했지요. 비참과 태양 사이에서 그는 태양 쪽으로 걷고 싶어 했습니다. 태양이 있는 쪽으로, 빛 쪽으로, 또다시 빛 쪽으로 결코 눈을 떼지 않고 그러나 환상은 없이, 그렇게 걸음을 걷는 것이 우리의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중간적 존재인 우리에게 그 중간 지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그게 별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구하라, 두드려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라는 말이 있지요. 박수용 감독은 "구하라, 인내하라, 극복하라."라고 말하네요. 찾을 것이라는 말은 그에게 이르러 '극복하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그 전환이 좋습니다. 뭔가를 끝까지 추구하면서 찾아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자신이 뭔가를 극복했다는 것을요. 끝까지 한번 다 태워봐야만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혼자 있어봐야지 비로소 간신히 이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지쳐 떨어질 때까지 싸워봐야지 화해다운 화해를 할 수 있습니다.

-p. 76~77

 

'게니우스는 어떤 사람이 태어난 순간 그의 수호자가 되는 신(수호천사)를 지칭하는 명칭이다.' 아감벤의 말에 따르면 게니우스는 우리의 기원인데,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게니우스랑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즉 인간은 자아이자 자아가 아닌 것과 늘 함께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비인격적인 것이 게니우스이고 우리는 이 낯선 존재와 떨어지지 못하고 가장 은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가끔 이 게니우스를 느낍니다. 바로 감동할 때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왜 감동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때 '게니우스를 불안이나 기쁨, 안심이나 동요로 경험'합니다. 감동하는 순간에 우리는 자신의 특성을 내려놓고, 상황과 처지도 내려놓고 감동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어린아이(순수함)야말로 끈질기게 우리를 타자에게 향하도록 만드는데, 우리 자신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는 바로 그런 감정을 우리는 타자 속에서 찾는다. 마치 어떤 기적처럼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이 명확하게 비춰지고 해명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바로 이 부분에 거울이 나옵니다.

우리는 게니우스, 즉 '우리의 비밀스러운 환희와 자랑스럽고 고결한 고뇌'를 타자 속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아래서라면 타인과의 관계는 우리에게 너무 중요해집니다. 타인의 얼굴에서 내가 보는 것이 나의 게니우스라니, 타인이 나의 거울이라니,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감응하는 타인의 맨얼굴은 너무도 중요해집니다.

-p.156~157


만약 내가 바쁘다면 평소의 한 순간을 영원처럼 빛나게 하느라 이것저것 하느라 바쁘고 싶어. 만약 내가 걸레라면 내가 닦은 부분을 살펴보고 자랑하고 싶어. 우리는 점점 한가지 틀로 세상을 보고 있어. 그렇게 보는 한 결코 눈치채지 못해.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다르다는 것을. - P20

우리는 살고 있는 나와 살아보지 못한 나를 다 거느리고 미래를 향해 여행 중이야. 미래에 우리는 누가 될지 알 수 없지만 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무엇인가의 대표자가 될 거야. - P23

그래서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미래는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닮아가는 거야. 우리 자신이 보고 싶은 미래 자체가 되어가는 거지. 그래서 내가 ‘가장 아름다운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할 때 내 마음속의 생각은 우리가 변화해야만 그날이 온다는 것이었어. 우리가 변화해야만 세상이 아름답게 바뀐다는 말이었어. 이것이 희망을 이 사이에 넣어둔다는 말이야. 희망을 깨문다는 말이야. 희망은 별처럼 먼 곳에 있지만 그 별을 입으로 옮겨놓는 거야. - P24

스피노자는 "만약 우리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참아내기만 한다면 우린 우리 삶의 (진정한) 원인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관하는 대신 어떤 행동을 할 때만은 비로소 스스로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후에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갖는 감정이 아무리 복잡해도 진실에 가까울 겁니다. 우리는 그런 후에야 자기 자신에게 갖는 슬픔과 기쁨을 정직하게 감당할 수 있고 타인과 세상을 향해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행동을 하려면 누구를 만나야 하지요. 누구를 만나서 말이라도 해봐야지요. 그래서 다시 한번 만남이 중요해집니다. - P153

우리는 한 인간이면서 한 인간이기만 한 존재는 아닙니다. 자식이자 부모이자 친구이자 동료이자 배신자 이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되어봤다가 다시 한 인간으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모두가 되었다가 다시 누군가로 돌아옵니다.
- P159

카프카는 자신이 미비하다고 느껴질 땐 공통성에 의존하자고 했습니다. 왜냐고? 그것은 다른 사람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니까.
저도 실은 그렇게 합니다. "무엇이든 좋으니 나랑 같이 힘을 내자!" 그러면 저기 공원에서 아이들이 놀고 소년들이 농구공을 튕기고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두는 소리들이, 바람 부는 소리와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꽃이 벌을 부르는 소리가 서서히 귀에 들어옵니다. 다시 어린아이 같아집니다. 다시 일상입니다. 다시 시작입니다.
- P160

하나의 생명은 그 서식지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의 생명은 그 서식지가 낳은 걸작입니다. - P180

저는 자신을 키우려는 자는 동물의 장점과 인간의 장점을 다 취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동물의 장점은 자신을 삶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한다는 겁니다. (중략)
그리고 인간의 장점은 작가적 시점을 가질 수 있단 겁니다. 즉 삶에서 좀 물러서서, 좀 떨어져서 마치 하늘에서 자신을 보듯 삶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 P182

저에겐 삶의 디테일이 중요합니다. 왜 디테일이냐고요? 그건 간단합니다. 우리는 결국 디테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정책 결정권자도 아니고, 우리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삶의 디테일뿐입니다. - P183

모든 서식지는 오로지 거기서만 살 수 있는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것에서처럼 살 수는 없는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서식지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장소만이 마이크로하비타트가 아닙니다. 아예 인간 한 명 한 명이 다른 인간의 마이크로 하비타트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쉴 만한 곳, 살아갈 곳이 되는 거죠. 자신의 친구나 애인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이 하나의 마이크로 하비타트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 P185

한 사회의 인문학적 수준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얼마나 개인의 문제로 돌리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말을 할 때 내면의 고백으로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증언을 해야 합니다. 즉 자신의 말을 사회적인 발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자신의 발언으로 우리 사회 역시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길 멈추고 사람을 옹호하라고 촉구해야 합니다. - P252

우리가 기대에 부응하려고 할수록 우린 너무나 바쁘고, 사회는 우리가 싫어하는 그 모습 그대로 쌩쌩 잘 돌아갑니다. 그런데 우린 기대와 희망을 착각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조건을 만족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불가능을 꿈꾼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그어놓은 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겁니다.

저는 인간 마음의 핵심에는 간절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없어도 성스러운 마음은 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존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엄하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을 존엄하게 합니다. 저는 그런 간절함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만나길 원합니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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