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좋은 일 - 책에서 배우는 삶의 기술
정혜윤 지음 / 창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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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사실을 미리 알았어야 했다.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는 ‘뜻밖의 좋은 일‘이라는 것도 실은 마음속으로 수많은 날 기다리던 것이란 걸. 그렇다면 우리에게 한 가지 좋은 일이 생기기 위해서 그전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
- P26

물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이다. 정직과 진실을 향한 큰 사람일수록 더 괴로워한다. 언어는 삶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 P40

나의 경우에 듣는다는 것, 그것은 진실을 들을 줄 아는 것이다. 안다는 것, 그것은 적어도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가 말하는 모든 단어, 우리가 취하는 모든 동작은 의도하지 않은 자서전의 조각이고 이 모든 것은 자신도 모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종이에 가장 자세하게 글로 쓴 삶의 이야기만큼 진실한 것이라고 했는데, 경험상 이 말은 진리다. 나에 관한 진실은 내가 입으로 뭘 주장하는가가 아니라 무심코 하는 말, 무의식적으로 하는 동작에 담겨 있다.
- P42

무겁기 때문에 가벼워지고 싶었다. 삶에 시달리면서도 가볍게 되고, 삶이 꿈이란 것을 알고 싶었다.
- P43

우리 인생 중간에는 세상이 엉망진창이라는 당혹감을 처리해야 할 때가 반드시 있다. 더 큰 문제는 세상은 나만큼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혼란스럽기는커녕 질서가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문제는 그 질서가 부당하다는 것이다. 현실은 부당할수록 어쩐지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삶이 이렇게 우리를 끌어내리므로 우리에게는 붙잡고 위로 끌어올려줄 믿을 만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지옥에서는 우리를 위로 끌어올려주는 것이 있어야 탈출할 수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은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 균형을 잡되 하늘 같은 곳, 조금 더 높은 곳, 다른 차원에서 찾으란 말로 느껴졌다. 삶의 무게는 우리를 끌어내리는데 정신의 중력은 이와는 반대로 우리를 높으로 끌어올리 수 있어야만 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환상 없이 보면서도 사랑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 P44

내 꿈은 간단했다. 내게 있는 시간과 에너지를 어디에 써야 할지 알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꼭 필요한 곳에서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사는 것이었다. 모든 싸움은 자기 자신과의 무거움과의 싸움이고 꼭 필요한 일을 하면서 산다는 느낌, 그것이 삶의 가벼움이라 생각했다.
- P46

지금 일어나는 일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미래를 만들어보는 것이 구원이란 것을 알고 있는 나는…

‘희망은 이빨 사이에 깨무는 희망이어야 한다‘는 존 버거의 말을 이해한 것도 그날이었다.
- P52

우리의 삶이 누군가의 꿈이란 것을 알게 해준다. - P53

그들은 용감하게 선택하고 댓가는 치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기억하자. 삶은 총합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한폭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란 것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말이 떠오른다. ‘어떤 경우에도 나를 지켜주는 근거는 사랑이다. 나의 사랑은 누구도 반박할 수가 없다. 이에 근거해서 나를 만나라. 그러면 나도 강한 사람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남이 나를 비난하거나 나 스스로 나 자신을 부정하는 순간마다 나는 지체 없이 이렇게 생각한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나의 정신에 의지하자.‘ 지금 나의 마음이 그렇다. 비록 사는 것은 잘 못해도 사랑만은 잘해내고 싶다.
- P54

나는 인생의 모든 페이지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던 새하얀 페이지 위로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것을 안다.
나는 꿈꿔본다. 나도 하얀 페이지가 될 수 있을까?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위해.

좋은 책을 읽은 독자는 멍해진다. 말문이 막히고 미래가 하얗게 된다. 잠시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비우고 비운다. 그렇게 자신을 비우면서, 새로운 것으로 채우면서 우리에게 좋은 일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눈으로 읽지만 두번째는 삶으로 읽으면서 가까운 미래에 전에는 할 수 없을 일을 할 수 있게 되더라도 전혀 놀랄 것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 P58

질문이 없다면 대답도 없고, 질문이 있다면 더 나은 대답은 가능하다는 것 또한 안다. 그리고 또 아는 것이 조금 더 있다. 내가 하는 말들이 공허할수록 내 삶도 그렇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리를 닮고 우리의 삶은 우리 내면을 따라 흘러간다.
- P73

잊지 말자.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냉소주의를 통해서만 무기력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세상이 썩었다는 것을 개탄하느라 썩지 않은 세상에 대한 책임과 해야 할 일은 덜 이야기한다. - P77

아니다. 한방에 훅 가지 않는다. 수많은 시간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말을 빌리자면 지켜보는 이도 없고 상벌도 없는 평범한 나날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먹고 마시고 잤으며 작은 시간들을 어떻게 쪼개 썼느냐에 따라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권위와 능력이 주어질지 정해진다. 지켜보는 이도 없고 상벌도 없는 평범한 나날을 내가 어떻게 썼는지는 결국 표면에 떠오른다. 마치 한방에 훅 가는 것처럼 떠오른다.
- P84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이며 가장 아름다운 날이네.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과거에 나눴던 대화를 생각하면 영혼의 기쁨을 느낀다네.‘ 에피쿠로스는 삶은 불행하므로 기쁨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했다.
- P92

세상에 슬픔이 너무 많아서 단 한번의 기쁨이라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단 한번만 기뻐도 하루 종일 기뻐할 수 있다. 덜 요구하고 더 기뻐할 수 있다. 기쁨은 희귀하므로 웃음과 기쁨을 줄 줄 아는 사람이 가장 관대하고 친절한 사람이다. 기쁨은 오래가는 감사의 마음과 관련이 있다.
- P93

품위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깨끗하게 마음을 쏟을 줄 알고 상황이 좋지 않을 때조차 감사할 일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때문에 균형을 잃지 않고 자기비하에 빠져서 나약하거나 감상적인 넋두리른 늘어놓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미래를 살아라‘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미래를 사는 사람은 오늘의 삶을 미래의 눈으로 본다. 그 덕분에 희망은 앞으로 어떤 환상적인 일이 일어나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나길 원하는 바로 그 일을 지금 여기서 행하고 있는 사람에게 있음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희망은 환상이나 보상이 아니라 인내와 끈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102

누군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자신과 삶을 바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P103

인생에 뭐 다른 거창한 의미는 없다. 서로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 말고는,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가볍게 하고 웃게 만드는 것 말고는. 그리고 그것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느껴진다.
- P104

우리는 뭔가를 잃어야 그것이 소중했음을 안다. 그래서 모든 순간은 소중하다. - P105

마음속의 슬픔, 좌절감, 수치심, 무력함, 연약함이 역설적으로 앞으로는 한점 부끄러움 없어야 한다는 단호한 마음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뒤로도 몇번이나 경험했고 내게는 그 발견이야말로 기쁜 일이었다. 극복된 좌절감, 극복된 두려움, 극복된 우울, 모든 극복된 것들은 삶을 기쁜 마음으로 살게 돕는다. 이런 일은 한번만 일어난다면 두번, 세번 연거푸 일어날 수 있고 이 또한 뜻밖의 좋은 일이다. (극복했다고 생각한 두려움도 언제든 다시 찾아온다. 그럼 또다시 극복하고 또 기뻐할 수 있다.)
- P110

우주에서 우리가 즐길 수 있는 따뜻함은 우리가 직접 만들어낸 따뜻함뿐이다. - P116

우리의 문제는 혼자 살 수도 없고 함께 살 수도 없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내 시간과 삶, 운명을 누군가와는 나눠야 한다.
- P122

문제는 셰익스피어가 ‘템페스트‘에서 나는 이 암흑의 존재를 나의 것으로 인정하오!라고 말한 것처럼 이것들을 끌어안고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고 문제는 불평의 대부분을 만들어내게 한 바로 그것, 우리는 나약했다는 점이다.
- P124

정말, 왜 이렇게 우리는 삶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을까? 정말 아끼는 사이라면, 잔뜩 위축된 모습을 오히려 가슴이 찢어질 듯 슬퍼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삶을 누리고 영위하기보다는 삶으로부터 퇴각하는 것처럼 보이고 사는 고통을 말하지만 살지 않는 고통, 혹은 사는 척하는 고통을 말해야 할 지경이다.
- P126

테리 이글턴은 우리는 함께 어울려 사는 일상의 질이 어떤가에 따라 구원받는 존재라고 했다. - P127

내가 나를 발견하는 것은 내가 관계 맺는 사람들 속에서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나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 관계 속에서 자기 얼굴을 만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의 초상화이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 남의 눈치나 보면서 주눅 들어 살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죽지만 미리부터 죽어 있는 것처럼 살 필요는 없다. 힘을 내고 싶다, 바로 이렇게.
- P128

아버지, 우리는 왜 태어났죠? 서로 삶을 잘 헤쳐가도록 도와주기 위해 태어난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이 순간과 장소를 바람직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잘 해냅시다.
- P132

‘사람의 마음은 깊고 또 이상할 정도로 얕다. 사람은 그 얕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 P133

각자 자신들 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끄집어낼 때 사는 맛이 난다.
그 시간은 참 좋다. 세상은 수없이 힐링을 말하지만 나에게 힐링은 서로의 좋음을 나누는 것이다. 좋은 대화와 좋은 생각을 서로 나누어 갖는 것이다. 나와 남의 관계는 나와 나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좋은 대화를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시선으로 나를 보게 만든다. 나를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는 생각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만든다. 그 다음에 위 일곱번째 항목에 있는 말을 외칠 수 있다면 정말 사는 맛 날 것이다.
"우리가 함께 해낸 일이 너무 좋다!"
존 버거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각자 현재를 구원하기 바랐다. "어떻게요?" 그에게 묻는다면 그는 ‘사소한‘ 구원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호시노 미찌오가 얕음이라고 표현한 그것, ‘사소함‘이다. 존 버거는 마른 꽃 한다발과 찬물로 하는 아침의 세수, 오래된 길을 걷는 소박한(사소한) 행복을 알고 있었다.
- P134

우리는 ‘사소한‘을 ‘시시한, 별것 아닌, 하찮은‘과 혼동하곤 하지만 카프카는 우리에게 있는 것은 일상뿐이고 ‘사소함‘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
- P135

고통은 늘 이중적이다. 하나는 현실 때문에, 하나는 나 자신 때문에. 몽떼뉴의 생각처럼 어떤 생각이 나를 갉아먹는다면 오직 나의 허락을 통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에드리언 리치가 말한 대로 우리가 상투적인 곳에 있다면 우리가 그곳을 택했기 때문이다.
나약해져버리면 자기방어, 자기비하, 자기연민의 에고를 억누를 줄도 다스릴 줄도 모르고 자기 자신과 싸움을 하기도 어렵다. 감상적이 되지 않고는 이야기하는 법도 모르게 된다. 받아들여서는 곤란한 것까지 받아들이게 된다. 지나치게 타협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되어간다. 손쉽게 초라해져간다.
- P148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와 에이드리언 리치가 각각 한 목소리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바보가 되고 싶지도 불행해지고 싶지도 않다. 리어 왕처럼 ‘결국 인간은 이것밖에 안되는가, 이런 것까지 순순히 받아들일 만큼 나를 바보로 만들지 말아주시고 고귀한 분노를 갖게 해주소서‘ 맞설 수 있어야 한다. 솔론처럼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자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나약해지지 않아야 지금 잘하고 있는 일을 앞으로도 할 수 있다. 나약해지지 않아야 자기를 과소평가하고 비하하는 대신 자기에게 엄격해질 수 있다. 자신부터 자신을 얕잡아보지 않아야 한다. 나 자신은 행동의 근거로, 본보기로 삼을 무엇인가를 찾으면서, 타인에게 구조요청을 보내면서 강아지, 꽃, 커다란 나무, 새소리, 달, 한밤중에 밝혀진 등불, 온갖 것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힘을 내왔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을 만한 친구와 술 한잔과 믿을 만한 시가 필요하다.
- P149

그렇다면 대체 리토스트란 무엇인가? 불현듯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보는 데서 생겨나는 고통스러운 상태이다. 이 치유책으론 사랑이 있다. 절대적 사랑을 받는 사람은 비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혹은 인간의 공통된 불완전성을 깊이 경험한 사람도 리토스트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목격하는 일은 흔하며 별로 흥미롭지도 않다. 따라서 리토스트는 청춘이나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의 장신구 같은 것이다.
- P158

진실은 적어도 무엇이 거짓인지 아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고 그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환상적인 해방감을 누리기 시작할 수 있다.
- P159

진리를 존중하면서 기만에서 벗어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나도 그 무엇보다도 진리를 사랑하고 싶다. 진리를 존중하면서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존중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자기를 존중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 P162

그는 곧 죽을 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관대하고 용감하게 살았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는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졌을까? 왜 그렇게 잘 알아보았을까?
그가 ‘벤투의 스케치북‘에 쓴 한 문장이 떠오른다.
‘자화상의 ‘자(self)‘라는 단어는 하나의 명사이기를 그치고 전치사 ‘-를 향해(towards)‘의 역동성을 획득한다.‘
그의 시선은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어딘가를 향했다. 늘 더 많은 관심과 사랑과 축복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누구인가, 지상 어디에 더 말해지고 정당하게 평가받고 알려져야 할 것이 있는가, 드넓은 세계를 마치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듯 탐색했다. 바로 그 시선이 존 버거를 존 버거로 만들었다. 그는 내게 세상에 자아말고도 관심 가져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그 덕분에 내 좁은 가슴에서 몇번이나 추락 직전에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 P169

하지만 내가 존 버거에게 가장 크게 빚진 것은 시간관이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에서 그는 시간은 선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환적인 시간관 안에서 우리의 자리는 선 위의 점이 아니라 원의 중심이다. 실수하지 말자, 이 말은 자아를 매사의 중심에 두라는 말이 아니다. 무엇이 우리를 둥글게 에워싸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존 버거는 우리를 둘러싼 원에는 꼭 우리를 향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텍스트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와 자연과 우주의 텍스트들이 그렇다. 존 버거는 그 텍스트들은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과 공존하면서 가혹한 운명을 극복하는 기발한 방법이 있음을 확인시켜준다고 생각했다.
- P169

내 생각에 존 버거는 자신만 원을 만들기도 했다. 작은 우주라고 해도 좋다. 그림, 음악, 시, 햇살의 기억, 바닷가의 나무에서만 나는 특별한 소리, 친구를 찾아가는 길, 한다발의 꽃, 푸른 하늘, 죽었지만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은 사람들, 친밀하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들로 원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원의 영향을 받으면서,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을 헤쳐나가고 자기 길을 걷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법을 찾아냈다.
- P169

상대방이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존중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 무엇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한가지 관점에서만 중요하다. 그것이 삶을 진실되게 사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 P177

어떤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는다면 그 이야기는 나의 일부가 된다. 앞으로 될 내 모습에 보태어진다. 나는 나를 이야기할 때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즉, 나는 어떤 이야기가 불명하기를 원했는가? 어떤 이야기가 계속되는 데 기여했는가?
- P183

‘비록… 했지만, 우리에겐 아직… 할 시간이 있다.‘
이 문장은 이미 살아온 삶 때문에 생긴 내 마음속 슬픈 회한 위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시간 위에 내려앉았고, 내가 나 자신의 미래에 관심을 두고 염려하는 한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 P186

"중요한 게 아무것도 없다면, 지켜야 할 것도 없는 법이란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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