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가고 곧 아주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는 너 말이야. 나는 네가 언제 이사를 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구나. 그저 그런 집이었지만 아파트였으니 그 단칸방 집 보다는 좋았을 텐데, 게다가 화장실도 집 안에 있는 재래식이 아닌 화장실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는 건데도 이제 나는 왠만한 기억은 다 지운 것 같아.
나는 이제 마흔이 되었고, 어린 시절 너의 소망대로 작가가 돼서 노벨상을 받을 준비 중이지도 못하지. 그저 평범한 어른이 되었고, 아주 나쁘거나 아주 착하거나 한 그런 사람 아니고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되게 돼. 희한하게도 나이가 들면 아주 나쁜 사람도 아주 착한 사람도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이루어가고 그게 당연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지. 아주 악한 누군가에게도 아마 어떤 선한 면이 있고 또 아주 선해보이는 그 누구도 결국 어느 순간은 이기적이라는 것을 말이야. 그런 평범 속에서 살아가는 일은 조금은 고맙고 때로 시시하지만, 그래도 너는 별 탈 없이 어른이 된단다.
너는 그런 어른을 꿈꾸지 않았지. 네가 꿈꾸던 어른은 뭐였을까.
또 생각해보면 네가 꿈꾸던 어른과 내가 비슷한 것도 같아. 어딘가 어두운 조명 아래 글을 쓰는 모습을 어렴풋이 떠올렸던 것도 같으니 말이야.
너는 여전히(?)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그 책을 다 읽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돼. 지금은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란 책을 읽고 있지. 그 외에도 ‘공부란 무엇인가’,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복자에게’ 등의 책도 펼쳐두긴 하였어.
나는 아직도 이 나이가 조금은 낯설어. 그때쯤 나는 어른이란 게 되어 있지 않을까 했는데 어른이란 아마 아이들을 키우고 의연하게 무언가를 책임지는 삶을 말하는 걸 테지. 하지만 나이가 들자 네가 어릴 때 보았던 그 어른들처럼 아이를 키운다고 해도 마음이 어른이 되지는 않아. 의연한 채 단단한 채 버티는 일도 쉽지 않지. 아직 10대일 때는 어른이 되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기도 했던 것 같지만, 그런 단단한 마음을 위해 나는 지금 너를 만나보려 하는 거야. 오랫동안 지우고 살았던 너, 그때 네가 알던 가난은 사실 오래 너를 붙잡게 된단다. 가난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 그 속담을 엄마가 자주 되뇌곤 했잖아. 그 말은 진짜라, 삶의 많은 시간이 그 가난을 벗어내는 데 쓰게 돼. 또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음에도 부자가 되어서 돈 걱정 없이 사는 그런 날은 아직 마흔이 되어도 오지 않아. 그래도 발을 뻗고 잘 집이 있고 먹을 음식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조금은 헐벗은 그 마음을 벗어나게 된다는 것은 아마 다행이겠지. 요새 나는 처음 깨달았어. 아, 나는 평생 가난을 벗어나려 했구나 하는 것을 말이야. 그때 네가 어렴풋이 엄마랑 아빠가 싸울 때 듣던 얘기들을 엄마로부터 며칠 전 자세히 들었어. 엄마는 가난한 사람이었고 엄마 역시 그 가난을 벗어나려고 세월을 보내며 어쩌다보니 엄마 말에 따르자면 길냥이 같은 세월 속에 너랑 오빠가 태어나고, 그 아이들까지 거둬먹이며 세월이 흘렀다는구나. 지금 13살의 너의 엄마가 아마 지금 내 나이일 거야. 그러고 보면 순천에서 익산에서의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여자였던 거지. 억세지는 못했지만 억세지려 애쓰던 그 사람, 엄마라고 부르던 그 한 여자가 견딘 시간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 얼마나 자기를 깎아내고 있는지 말이야. 매일 잠을 자던 엄마 옆에서 너는 왜 이렇게 엄마는 잠만 잘까 생각하곤 했지. 지금은 이제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자면서 엄마는 그 시간을 벗어나고 싶었던 거구나 하고 말이야.
나는 한동안 너를 들여다보면서 나를 들여다볼 생각이야. 아 책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거지만, 나는 스스로 늦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왠지 모르게 이 책을 읽게 되었어. 이제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너를 나를 들여다보려 하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데 쓰던 시간을 좀 다른 데 써보려하는데 그래도 되는 걸까 나는 알고 싶어서 이 책을 빼든 것 같아. 물론 집에 걸려있는, 기념품으로 이전에 온라인 서점에서 받은 달력이 예뻐서기도 했지만, 제목이 이게 아니었다면 이 도시에 와 처음으로 도서관에 가 빌려온 책이 이게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너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자면 너는 바닷가에서 살게 되고, 아침에는 해가 뜨고 전경이 아주 멋진, 그래 그 시절 네가 꿈꾸기 어려운 전경의 집에서 살게 돼. 그러면 조금 나이 먹는 게 기대가 될 수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