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뒷모습 안규철의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 2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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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앞의 챕터를 읽으면 책을 끝까지 읽을지 말지를 정하게 된다. 끝까지 읽을 마음이 없는데도 들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끝까지 읽어야지 하는 결심(?) 드는 책은 계속 잡고 있게 된다. 오랜만에 그런 책을 만났다. 누구 생일인 사람이 있으면 사줄까 싶기도 했다.

 

글을 쓰려면 정도는 써야는 아닐까, 그래야 글을 쓴다고 있는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깊이 있는 사유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글을 좋다고 표시해두었다.

 

내가 보지 않던 , 보려고 했더라면 당연히 있었던 것들을 응시하고 보임 뒤의 이치 속에서 '' 자리를 되돌아보는. 책을 읽다 며칠 전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이가 든다고 알게 되거나 깨닫는 아니라, 있는 것은 나이가 들기 전에도 있고 영영 보는 것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보지 못하는 아닐까. 바람의 흐름, 식물의 겨울, 관성 자연의 이치는 나이와 상관 없이, 있거나 보지 못하거나 여서, 그것을 보면 도를 통한다고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달라이 라마도 떠오르고… 그랬다. 예술이란, 예술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을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나무는 그 씨앗을 바람에 실어서 멀리까지 날려 보내는 방법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한곳에 붙박여 사는 식물의 한계를 넘어 바람처럼 멀리 여행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씨앗은 수신인이 적히지 않은 편지처럼 어디론가 날아가서 바람이 멈추는 곳에, 가장 낯선 곳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다.
나무들은 정물이 아니다. 시간의 리듬이 다를 뿐 그들도 우리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중이다. 불시에 찾아와서 어린 잎사귀들을 떨게 하고 때로는 가지를 흔들어 꺾는 광포한 바람에 자신을 꼼짝없이 내맡기는 동안 나무는 그 바람을 타고 바람처럼 움직이는 것을 상상했을 것이다. -바람이 되는 법
- P23

오늘 아침 서늘해진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들을 보면서 그렇다면 나는 이 바람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바람이 되는 법, 바람처럼 나타나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법,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사물들을 쓰다듬고, 멈춰있는 것들을 움직이게 하고,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는 법, 그리고 때때로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다시 잔잔하게 가라앉히는 법을 배울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바람이 되는 법 - P24

유리잔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한순간의 소리를 1분, 한 시간, 하루 또는 1년으로 늘려놓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본다. 소리의 총량은 그대로지만 시간이 늘어남으로써 그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 된다. 우리는 그것을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로 인식하지 못한다. 유리잔 스스로도 자신의 몸이 산산히 부서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하필이면 깨지는 유리잔에 비유하고 싶지는 않지만, 삶은 이처럼 느리게 진행되는 사건의 과정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청년은 노인이 되고 기억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우리는 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연장된 사건의 미세한 파편들로 이루어진 안개 속에 있다. 예감은 어긋나고, 하나의 사건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종결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무슨 일이었는지 안다. 그제야 뒤늦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세월의 덧없음을 안타까워한다. -유리잔
- P51

그러나 우리가 삶이라는 사건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연장된 시간 때문이다. 수만 분의 1초로 분할된 느린 화면이 아니라면, 우리의 삶은 유리잔처럼 순식간에 부서져버릴 것이다. -유리잔
- P52

바위는 웬만해선 제자리에서 꿈쩍하지 않는다. 흐르는 물은 웬만해선 멈추지 않는다. 바위는 머물기를 원하고, 물은 흘러가기를 원한다. 바위도 물도 지금의 상태가 이대로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것을 우리는 사물의 관성이라고 부른다. 관성 뒤에는 중력이 있다. 사물을 관성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중력을 설득해야 하고, 사물이 갖고 있는 질량이나 운동량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하다. 흐르는 물을 막으려면 거대한 콘크리트댐이 필요하고, 바위를 옮기려면 바위보다 훨씬 더 무거운 크레인이 필요하다. -관성
- P59

일상의 사소한 습관도,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시대의 흐름도 바위와 물처럼 관성의 지배를 받는다. 세계를 그 관성으로부터 떼어내 올미고 변화시키는 것이 인간의 일이라면, 그 일의 성패는 우리에게 그 관성을 능가하는 더 큰 힘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나를 지배하는 관성은 무엇인가. 정체성이란 이름으로 내 안에 들어앉은 타성과 편견의 바위들을 끌어내고, 익숙한 방향으로만 흐르려는 생각의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릴 힘이 나에게 있는가. -관성
- P59

식물은 죽어야 산다는 것을 안다. 헤어져야 만난다는 것, 버려야 얻는다는 것,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겨울이 오기 전에 정든 잎들을 남김없이 떨어뜨려야 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눈부시게 피어난 꽃잎들을 한순간 바람에 날려보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빛나는 날들에는 끝이 있다. 작은 풀 한 포기도 이것을 알고 있다. 미련과 회한으로 우물쭈물하다가 때를 놓치는 우리 인간보다 낫다. -씨앗 - P87

늦은 봄날, 비어 있던 땅을 갈아 자갈을 걷어내고 씨앗을 뿌렸다. 꽃씨 속에는 그 꽃의 전생이, 저 아득한 지질학적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이 들어 있다. 씨앗의 기억은 단단한 껍질 속에 나 있는 어둡고 비좁은 터널을 통해 미래로 잠입한다. 멀리 가기 위해서 식물은 모래알처럼 작고 하찮은 광물의 모습을 취한다. 어디선가 다른 햇살과 바람 속에서 다시 꽃피우기를 기약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지금 여기가 아닌 어떤 곳, 그러니까 유토피아를 향해, 수천, 수만 분의 일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실어 보내는 저 무모한 낙관주의자들을 보라. 굽힐 줄 모르는 저 희망의 화신들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라. -씨앗 - P87

뒷마당의 키 작은 꽃나무들은 겨우내 무엇을 하는가. 봄부터 가을까지 푸른 잎과 붉은 꽃으로 한껏 제 모습을 뽐내던 영산홍과 철쭉이 몇 달째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정지 화면으로 창밖에 멈춰 서 있다. 아침에 박새 몇 마리가 다녀가면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천천히 제 주위를 맴도는 그림자밖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풍경 속에서 그것들은 바짝 마른 잔가지들을 사방으로 뻗친 채 잠을 자는지 꿈을 꾸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꽃나무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온갖 풀벌레와 잡초들도 같은 모습으로 이 혹독한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 -식물의 시간
- P91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을 가여워할 수 있을까. 그 작은 것들이 하나같이 무자비한 자연과 맞서 바위처럼 묵묵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걸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안달복달하는가. 매 순간의 공허를 뭔가로 채워 넣기 위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우리의 조바심이 저들에게는 얼마나 가소롭게 비칠까. 혼자 있어서 외롭다느니 우울하다느니 삶이 의미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푸념조차 부끄러워하는 법을 배우는 한 해가 되기를. 그렇게 내 속에 숨어 있는 식물의 시간을 깨우는 새해가 되기를 겨울나무들 앞에서 소망해본다. -식물의 시간 - P91

김춘수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고 했는데, 이에 응답하듯 진은영 시인은 "내가 이름을 불러보기 전에 사라져버린 것들이여 /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사라져버린 모음들 / 손을 담그기 전에 흘러가버린 강물이여"라고 쓰고 있다. 둘은 다르지만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그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시인은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것‘의 이름을 부르고, ‘이름을 불러보기 전에 사라져버린 것들‘을 호명하는 사람이다. 다루는 재료가 다를 뿐 미술가의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것을 다른것들로부터 구별하고, 그것이 사라져버린 뒤에도 그 존재를 가리키기 위해서이다.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다른 것들 속에 섞이고 강물처럼 흘러가버릴 경우가 예상된다는 뜻이다. -이름에 대하여 - P101

이름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그 이름으로 부르는 대상이 사라졌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름을 잊으면 다 잊는 것이다. 이름이 없다면 과거를 기억할 수 없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이름을 부르는 일은 그저 해보는 일이 아니다. 이름은 현재에 묶여 있는 수인인 우리를 과거와 미래로 탈주하게 한다. 지금 여기 부재하는 것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안 보이는 나라‘를 보이게 한다. 이름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주어진 의무와 필요를 넘어선 존재"가 된다. -이름에 대하여
- P102

그러나 이름은 영원하지 않다. 어떤 이름으로 원래 가리켰던 대상을 불러낼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이름을 버려야 한다. 아직 오지 않은 어떤 것을 부르려면 그 이름 없는 것들에게이름을 지어주어야 한다. 예술가란 죽은 이름들, 낡고 더럽혀진 이름들을 지우고 아직 이름이 없는 것들, 새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낯선 것들의 이름을 새로 쓰는 사람이다. 예술가로서 이름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이름들을 부르느냐가, 그 호명이 한낱 잡담과 소음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름에 대하여
- P103

나는 연필 끝을 통해 전해지는 켄트지의 촉감과 그것들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좋아한다. 거기서 허용되는 자유, 그 위에서 달팽이처럼 천천히 움직일 수 있고, 마냥 멈춰 있을 수 있고, 또 언제든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자유를 사랑한다. 딱딱한 A4 용지에 볼펜으로 쫓기듯 써내려가는 공문서 같은 글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유가 거기 있다. - P178

실용과 경제의 이름으로 노인과 약자의 희생을 정당화하려는 비정한 정치에 단호히 반대하는 엄숙하고도 격정적인 설교에 이어서, 목숨을 잃은 이들과 그 가족들,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과 치료제를 개발하는 과학자들, 집 안에 홀로 고립된 사람들이 차례로 호명되며 그들을 위한 기도가 이어졌다.
뜻밖에도 그 목록 속에 ‘예술가들‘이 들어 있었다. "우리를 위하여 새로운 길을 찾는 예술가들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그곳에 예술가의 자리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예술가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들이니,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했다. 내가 그 기도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에게 새로운 길이 되는 예술을 했던 적이 있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예술의 이름으로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 P201

밤새 퍼붓던 비가 새벽녘에 그쳤다. 건너편 산자락은 아직 낮은 구름 속에 있고, 어둠 속에서 젖은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었을 새들은 부산하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계곡의 요란한 물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어제 내리는 앞으로 여러 날 동안 그렇게 골짜기를 흘러내려갈 것이다. 비가 오는 시간이 있고, 비가 가는 시간이 있다. 바위와 모래 틈 사이에 머무는 물방울들의 시간, 그 시차가 숲을 만들고 풀벌레를 키우고 새들을 먹여 살린다. 빗물이 곧바로 강과 바다로 돌아가지 않고 세상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순환의 시간을 지연시키는 동안, 나무와 풀과 들짐승들이 자란다.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은 하나의 사건과, 그 사건이 완전히 종결되어 흔적 없이 사라지기 전까지의 시간,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어제 내린 비 - P243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까지 물방울이 겪는 숱한 우여곡절의 시간, 뜻밖의 급류와 흙탕물의 시간, 얼음처럼 차갑고 어두운 지하수의 시간, 누군가의 땀과 뜨거운 눈물이 되는 시간을, 우리도 빗물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어제 내린 비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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