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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 ㅣ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3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평점 :
박완서 소설은 타인이라는 속절없는 속물의 세계와 내 내부에 존재하는 구멍 사이에 좁혀지지 않는 혼돈을 이야기한다.
내 소견으로는 아무리 보아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막막한 혼돈(p.316),
비로소 내가 철들고 덮어놓고 몸을 던진 광대무변한 혼돈 속에서 무엇인가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사람마다 죽자꾸나 쫓고 쫓기고 있다는 거였다.(p.326)
위 둘은 <무중(霧中)>의 문장이다. 무중의 나는 맨션 아파트 1층에 이사 와 살기 시작했다. 1층에 사는 건 나와 옆집 남자 둘뿐. 나는 나이 든 남자가 마련해준 집에 살면서도 도망칠 틈을 두기 위해 1층을 고집했다. 나는 매일 밤 그 남자의 쫓기는듯한 숨소리를 들으며 그 남자와 불안을 야금야금 나눠먹을 꿈을 꾸고 그에게 다가가고 그의 베란다에 숨어들지만, 그는 현상금이 붙은 남자였음이 밝혀지며 소설은 끝난다.
앞 소설 <로열 박스>도 비슷하게 아파트에 살게 된 여성의 이야기다. 재벌의 둘째 아들인 남편이 갑자기 가문을 물려받을 위기 속에서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 뒤 혼자 시아버지와 같은 단지 아파트에 살게 된 그녀에게 보험을 들라며 친구가 찾아온다. 친구의 속물성이나 <무중>의 반상회에서 만난 여자들의 속물성. 그러나 결국 이 속물성 뒤에 또한 소설 속 화자거나 주인공인 이들의 속에도 '욕망'이 '지글대'고 있으며 그 욕망의 부딪힘 속에서 커져가는 혼돈의 구멍을 박완서 소설은 주시한다. 내부에 뚫려가는 구멍. '마음을 좀먹고 있는 불안'.
박완서의 소설은 하나같이 무섭다. <육복>에서 아내는 사우디에서 일하던 남편이 서울로 발령난 데 대해 화를 낸다. 그런 더러운 막노동꾼꼴로 우리 집을 매일 드나들거냐며. 그 집을 그 남편이 그 더러운 막노동꾼꼴로 만들어냈음에도. 아, 하지만 그게 나다. 그게 사람이다.
<천변풍경>에서 남자는 약수터에서 만난 이들의 속물근성에 치를 떨지만, 실은 그가 그들보다 아래 연배임에도 일찍 자리에서 물러나 겉만 속절없이 늙어버렸음이 후반부에 밝혀진다.
<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은 광고 카피라이터인 남자가 말로만 어머니방을 만들어두었다 그 어머니가 실지로 서울로 와 집에 살겠다고 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남자도 어머니도 속에 진득하게 들러붙은 욕망이 덕지덕지 추해져버린 어떤 덩어리로 그려진다.
<아저씨의 훈장>은 전쟁 때 조카만 데리고 남한으로 온 아저씨가 혼자 늙어 버려져 자기 아들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아저씨'가 입때껏 자신을 치장했던 도덕성이 다 벗겨져 버린 모습.
<무서운 아이들>에서 '나'는 약혼한 남자에게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뒤 퇴짜 맞고 선생이 돼 반의 지능발달이 늦은 아이를 자기 반 아이들이 따 시키자 그 아이에게 훔치든지 빼앗으라고 한다. 그 말이 실수임에도 그녀는 통쾌함을 느낀다.
<소묘>에서는 시어머니가 화분을 가꾸며 남편과 아들과 며느리를 보이고 싶은 방식으로 외부에 노출시키고 그 집안 사람들은 자기 욕망에 시들해진 채 오락을 하는 아들(남편)의 손길에서 거침없는 욕망을 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박완서 소설 속 인물은 하나같이 욕망 앞에서, 늙음 앞에서 속절없다. 그게 삶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