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이야기
윌 듀란트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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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방식이 바로 살아온 방식이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죽음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죽음의 문으로 들어서기 전 어떤 제스처를 취하는가로 그의 전 존재는 함축되는 것이다.

각 철학자들의 죽음은 그래서 흥미롭다. 자신의 육성으로 삶의 가치와 지혜, 우주의 흐름과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이들의 죽음 속에는 생의 방식이 있다. 니체의 고독한 죽음과 베이컨과 윌리엄 제임스의 죽음에 대한 일화는 그래서 재밌다.

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선택한 텍스트인데, 철학사를 훑기에는 이 책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인용한 말은 각 철학자들의 철학의 핵심이라기보다는 내가 공감하거나 필요해 발췌해놓은 것이다.

다른 공부도 그렇지만,

철학 공부는 겉핥기는 즐겁지만 속으로 들어가 세심해지려는 순간부터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머리에 쥐가 난다는 말이 이런 거군 싶다. 안타까운 일은 세심해지려는 순간부터가 바로 시작인 것 같다는 예감이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 적이 없었으며, 오직 지혜를 애구(愛求)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철학은 회의를 배울 때―특히 자신의 소중한 신념, 자신의 독단, 자신의 공리를 의심할 줄 알 때―시작된다.


모든 정치 형태는 기본 원칙의 과잉으로 멸망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민주정치도 민주주의의 과잉으로 멸망한다. (중략) 민주정치의 결말은 참주정치(僭主政治) 또는 전제정치이다.


정치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심리학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이 더 훌륭해지기까지는 어떠한 변화에 의해서도 본질적 변화를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분명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잠들거나 병, 또는 정신착란에 걸려서 지력이 속박당해 있을 때, 참된, 또는 영감적인 직관에 도달한다. 예언자 또는 천재는 광인과 같다.


초등교육은 일종의 오락이어야 한다.


수학은 철학의 불가결한 서곡이고 최고의 형식이다.


정의는 자신에게 알맞은 것을 소유하고 자신에게 알맞은 일을 하는 것


사회에 있어서의 정의는 많은 유성이 질서 정연하게 운행하면서 결합을 유지하는 조화로운 관계와 같다.


새로운 옷을 입더라도 진리는 항상 동일하다.

-플라톤


우리도 모두 인간의 가능성의 한갓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민감한 자는 주인이 되기도 어렵고 노예가 되기도 어려운 법이다.


“우리 인생의 극장에서는 신들과 천사들만이 관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사상은 대상의 사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 자신의 사진이다.


어쩌면 철학의 대재건은 단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뜻할지도 모른다.


조물주는 우리들에게 세계 전체와 맞먹을 만큼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영혼을 주었다.


“중상을 입고 더운 피를 흘리면서도 상처를 입는 순간에는 아픔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열심히 연구를 하다가 죽기를 바란다.”


그는 생명을 단념하지 않고 쾌활하게 “실험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썼다.


그는 유언장에 그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오만한 말을 남겨놓았다. “나는 나의 영혼을 신에게 유증한다. …… 내 몸은 아무도 모르게 묻을 것. 나의 이름은 후세와 외국에 전할 것.”


-베이컨


“때로는 나의 자연적 오성으로 거둬들인 수확이 비현실적인 것임을 알게 되지만 나는 이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모으는 동안 나는 행복하며 탄식과 비애가 아니라 평화와 안정과 기쁨 속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참으로 선하고 또 그 선함을 전달할 수 있고 정신으로 하여금 그밖의 모든 것을 배제하도록 하는 것이 있는가를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영원히 지속되는 지고의 행복을 누리는 능력의 발견 또는 획득이 가능한가를 탐구하기로 결심했다.(중략) 영원하고 무한한 것에 대한 사랑만은 고통이 생길 여지가 없는 쾌락에 의해 정신을 키워준다. 최대의 선은 정신과 자연 전체의 합일을 인식하는 것이다. 정신은 많이 알면 알수록 자기 자신의 힘과 자연의 질서를 더 잘 이해하고, 정신이 자기 자신의 세력 또는 힘을 더 잘 이해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을 더 잘 인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더 좋은 규칙을 만들어낼 것이다.”


사고는 욕망의 열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욕망은 사고의 빛을 잃어서는 안 된다.


“최고선은 정신과 자연 전체의 합일을 인식하는 것이다.”


힘의 평등은 불안정 상태에 있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하다. 따라서 “불평등 속에서 평등을 구하는 자는 부조리를 구하고 있는 셈이다.”


“최초의 인간은 지혜를 완전히 알지 못했고 최후의 인간도 지혜를 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지혜에 담긴 사상은 바다보다 깊고 그 충고는 심연보다 깊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뾰족탑 끝에서 떨어지며 공중으로 떨어지는 것이 상쾌해서 ‘제발 이 상태가 계속됐으면’이라고 말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나다.”


“우리들은 둘 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충심으로부터 확인한다.”(한 젊은이가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라고 주장했을 때” 볼테르가 보낸 편지 내용 중)


천국이 파괴될 때, 비로소 지구는 정덩한 권리를 가질 것이다. 유물론은 세계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일지도 모른다.


“확실성을 말하는 자는 허풍선이다.”


회의는 매우 유쾌한 상태는 아니지만 한편 확실성은 가소로운 상태이다.


“최초의 성직자는 최초의 바보를 만난 최초의 사기꾼이었다.”


“신이 ‘무엇’이고 ‘왜’ 신이 현존하는 만물을 창조했는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 너무 주제넘다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도 나에게는 매우 주제넘은 일로 생각된다.”


-볼테르


철학에 있어서도 정치학처럼 두 점 사이의 최장 거리는 직선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저절로 질서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사고 자체가 정제 작용이기 때문에 질서를 갖게 된다.


물질이나 외계가 존재한다는 것 외외에는 우리는 물질이나 외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도덕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행복에 알맞은 자가 될 수 있는가를 가르친다.”


가슴은 머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 나름의 이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비사교성, 이 지지 않으려고 하는 질투심과 허영심, 이 소유와 권력에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자연에 감사하라……인간은 협조를 원한다. 그러나 자연은 인류에게 보다 좋은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서, 인간이 힘을 새롭게 발휘하고, 자연적 능력을 더욱 발전시키도록 불화를 원한다.”


-칸트



“우리는 어떤 것을 욕구할 이유를 찾아냈기 때문에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하기 때문에 욕구할 이유를 찾아낸다.”


기억은 ‘의지’의 하인이다.


“한번도 인생과 사물을 망상 또는 환상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철학적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나 자연의 참된 상징은 원(圓)이다. 원은 회귀의 도식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인생의 기초적 자극이고 현실이며 쾌락은 고통의 소극적 유예이기 때문에 인생은 악이다.


“곤궁과 고뇌가 잠시 인간을 쉬게 하면 곧 ‘권태’가 다가와서 어쩔 수 없이 오락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또다시 고통이 생기기 때문에 인생은 악이다.


악 중의 어떤 것―예컨대 투쟁―은 삶의 본질적인 것이다.


“인생은 시계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유기체가 고등해지면 그럴수록 수난도 더 커지므로 인생은 악이다. 지식의 증대는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못한다.


“인식이 명석하고 의식이 고양됨에 따라 고통도 증대되는데, 인간에게서 최고도에 이르며, 인간의 경우 인식이 분명할수록, 곧 인간이 지성적일수록 고통도 크다. 천재는 가장 고뇌하는 법이다.”


인생은 전쟁이기 때문에 인생은 악이다. 자연의 어느 곳에서나 우리는 투쟁, 경쟁, 갈등, 그리고 승리와 패배의 자멸적 교체를 본다. 모든 종은 ‘다른 종의 물질, 공간, 시간을 정복하려고 한다.’


“살려는 의지는 어디서나 자기 자신을 잡아먹으며 여러 가지 형태로 자신의 영양이 되고 있다. (중략) 인류도 가장 무서울 만큼 분명하게 이러한 갈등, 곧 의지의 자기 분열을 드러내며 우리는 ‘인간은 인간에 대해 이리’임을 알게 된다.”



인생의 전경(全景)은 거의 생각하는 것조차도 고통스럽다. 인생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때에만 우리는 살 수 있다.


“목표 달성 이외에도 전과 달라진 바가 없다는 것 이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기 때문에 모여 있는 고슴도치와 같아서 너무 가까이 있으면 기분이 나쁘고 너무 떨어져 있으면 비참해진다. 모든 일이 매우 이상하기만 하다.


“낙천주의는 인간의 표현할 길 없는 고뇌에 대한 통렬한 조소이다.”


“우리들의 노력, 분투, 투쟁의 보람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좋은 일은 덧없으며 세계는 결국 파산하며 인생은 손해 보는 장사이다.”


행복하려면 청년처럼 무지해야 한다.


경험이 정연한 지혜가 되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에 두뇌와 육신은 시들기 시작한다.


죽음이 잠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양이가 가엾은 쥐를 놀리는 것과 같다.


“광기는 괴로워하는 본선, 곧 의지의 마지막 치료법이었다.”


마지막 피난처는 자살이다. (중략) 디오게네스는 호흡을 하지 않아서 죽었다고 한다. ―살려는 의지에 대한 승리가 아닌가! (중략) 의지는 종을 통해 지속된다. 삶은 자살을 비웃고 죽음을 미소로 맞이한다. 자발적 죽음이 있을 때마다 무수한 비자발적 탄생이 있기 때문이다.


의지가 인식과 지성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 한, 인생의 재난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철학은 의지를 정화한다.


천재는 의지 없는 인식의 최고 형태이다. 생명의 최하 형태는 전적으로 의식 없는 의지로 구성되어 있다.


“천재는 바로 가장 완전한 객관성, 다시 말하면 곧 정신의 객관적 경향이다. (중략) 순수한 인식주관으로서 세계를 밝은 눈으로 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잠시 완전히 포기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과학의 대상은 많은 특수를 포함한 보편이고 예술의 대상은 보편을 포함한 특수이다.


음악은 영원히 움직이고 노력하고 방황하는 의지, 마침내는 언제나 새로운 노력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로 돌되돌아가는 의지를 보여준다.


언제 우리는 ‘의지’의 눈 앞에 도전장을 내던지고 감미로운 인생은 거짓말이며 최대의 은총은 죽음뿐이라고 말할 용기를 갖게 될 것인가?


염세주의자가 되려면 한가해야 한다. 활동적인 생활은 거의 언제나 심신을 건강하게 한다.


“세계는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고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다.”-호레이스 월폴


30세가 넘으면 염세주의자가 될 수 없다.


-쇼펜하우어


만년에 미쳤을 때 맑은 정신이 돌아오는 순간, 이미 오래 전에 죽은 바그너의 초상을 알아보며 그는 ‘나는 이사람을 무척 사랑했어’라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도덕’의 배후에는 권력에의 은밀한 의지가 있다.


이성과 도덕은 이 열정의 손아귀에 든 무기이고 이 열정의 괴리이다.


“지옥은 지상에 있어서의 인간의 천국이었다.”


“인간은 보다 착해져야 하는 동시에 보다 악해져야 한다.”


인류는 개선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다. 인류는 추상명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은 개인이라는 개미가 살고 있는 광대한 언덕뿐이다.


“자기 시대의 도덕 체계와 싸우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투쟁에는 반드시 복수가 뒤따를 것이다. ……안팎으로부터”-엘리스


“왜 인간이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인지를 아마도 내가 가장 잘 알 것이다. 인간만이 참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웃음을 발명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리스베트, 왜 울어? 우린 행복하지 못한가?”라고 물었다. 언젠가 그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 그의 창백한 얼굴이 밝아졌다. “아! 나도 몇 권의 좋은 책을 썼어.”라고 그는 밝은 어조로 말했다.


-니체



우리는 공간적 개념으로 사고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히 유물론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짙다.


“의식적 존재자에 있어서는 존재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은 성숙하는 것이고, 성숙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무한히 창조해가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견해, 곧 기계론과 목적론을 극복해야 한다. 두 견해는 인간이 하는 일을 고찰함으로써 인간 정신이 도달한 관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은 노력하는 것, 위로 위로 끊임없이 밀고 나가는 것, ‘언제나 끊임없이 생산하는 우주적 충동’이다. 생명은 관성과 반대되고 우연과 반대되는 것이다. 생명이 스스로 지향하지 않을 수 없는 성장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다. 그러나 생명을 저지하려는 물질이라는 저류, 다시 말하면 휴식과 휴지와 죽음을 지향하는 사물의 정체와 이완에 있어서, 생명은 각 단계에서 매체의 관성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본능이나 기관이나 마찬가지이다. 본능은 정신의 도구인 것이다.


본능은 안정의 매체이고 지성은 모험적인 자유의 기관이다. 본능은 기계처럼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생명이다.


-베르그송


“예술은 전적으로 상상력의 지배를 받는다. 심상은 상상력의 유일한 재산이다. 예술은 대상을 분류하지 않고 대상을 현실적 또는 상상적인 것으로 판별하지 않고 대상을 규정하거나 정의하지 않는다. 예술은 대상을 느끼고 표현한다. 그 이상의 것은 없다.”-카


예술의 기적은 사상의 외적 표현이 아니라 사상의 잉태에 있다.


-크로체


“태어났다는 것은 불사에 대한 흉조이다.”


“신화비평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째는 노해서 신화를 미신으로 취급하는 것이고, 둘째는 미소지으며 시로 보는 것이다.”


조용히 공물을 받아들이는 한 명의 해적 두목(국가)이 경고나 제한없이 돈을 빼앗는 수백 명의 해적들보다 낫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생산하고 우리가 만들 물건에 압도당하고 있다. 에머슨의 말처럼 “물건이 인간을 말[馬]로 삼아 타고 다닌다.”


“민중이라는 익명의 전제자보다 더 미운 전제자는 없다. 민중은 어디에나 파고들어 무슨 일이든 방해한다. 민중은 편재해 있는 지독한 어리석음으로 싹터오르는 새로움과 천재의 어린 가지를 모두 꺾어 버린다.”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철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오래 되고 가장 훌륭한 철학에 따라 살아갈 용기만이 필요하다.


-산티아나



우주는 밀폐된 조화의 체계가 아니라 엇갈리는 흐름과 상반되는 목적의 싸움터이다.



온 인류의 눈물로도 영원한 계획서의 단 한 마디나마 씻어내지 못한다. 완성된 universe에서는 개성은 망상이다.(중략) 그러나 미완성의 세계에서는 우리들의 역할 중 몇 줄은 스스로 쓸 수 있고 우리들의 선택은 어느 정도 우리가 살게 될 미래를 형성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나 자신은 인간의 경험이 우주에 현존하는 경험의 최고의 형태라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우리들과 우주 전체의 관계는 귀여운 개나 고양이와 인간 생활 전체의 관계와 같다고 믿는다. (중략) 우리들도 사물의 보다 포괄적인 생명에 대한 접선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책상 위에는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이 종이에는 그의 마지막, 어쩌면 가장 특징적인 글이 적혀 있었다. “결론은 없다. 우리가 이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결론을 어떻게 이끌어냈는가? 말해둘 만한 예언도 없고 남길 만한 충고도 없다. 안녕.”


-윌리엄 제임스



“철학은 내세에 대한 꿈에 취해 버렸다.”


“환경에 대한 완전한 적응은 죽음을 의미한다.”

-존 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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