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ㅣ 랜덤 시선 16
김경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김수영 시집 이후 아주 오랜만에 펴든 시집이다. 내게는 요즈음 나온 시집이라는 게 무엇보다 커다란 의미이다. 한동안 시집을 놓고 살았다. 놓고 싶지 않았는데, 요즘 시집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의 성찬이라는 편견이 책을 선택하는 나의 기준 한 켠에 자리잡았다.
더 깊어지기 위해, 뿌리 곳곳에 햇빛이 흡수되듯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시의 리듬과 고요함, 더불어 알 수 없는 어떤, 이 세계의 음모를 파헤쳐보게 되는 시각이랄까 그런 것들에 광합성하고 싶은데 요즘 시를 읽어서는 그게 잘 되지 않았달까. 아주 짧은 소견일 뿐이지만 사실 그랬다. 시는 ‘몇 억년이 지나도 암호로 남아버릴 이 시간’에 대한 유일한 시각(視覺)이다. 언어가 품고 있는 암호의 성질, 언어의 조합으로 나타나는 리듬, 음악성의 미(美)가 깊이있는 울림으로 공명해야만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집 속의 시들은 ‘자궁’-우리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열’, ‘죽음’, ‘서러움’, ‘꿈’, ‘외로움’,‘사랑’-부터 ‘바람이 다니는 아주 먼 곳’-‘우주’, ‘이역’, ‘방랑’, 다시 ‘꿈’, ‘사랑’, ‘죽음’-까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훑어간다. 관악기를 불기 위해 숨을 집어넣으면 그것이 음이 되어 나오듯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그의 깊이있는 언어는 세계를 연주한다.
자신의 모자람에 대한 앎이야말로 사유의 시작이다. 그래서 ‘기형에 관한 얘기’라는 그의 시집 초반의 선언은 결국 ‘너’와 ‘나’ 모두의 기형적인 내면에 대한 폭로이며 사유가 시작된 그의 내면을 따라갈 수 있는 길에 대한 안내문이 된다. 그리고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비정하고 성스러운 이 세계’에 대한 ‘울음’을 ‘간직’한 것이 그의 시라고 말한다. 그의 시를 읽는 동안 나는 문득 이 세계의 기형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들려온 방송 목소리의 낯설음과 낯익음 사이, 그 짧은 찰나에 지나쳐간 두 배반되는 느낌, 건너편에 앉은 아저씨의 다리를 벌리 폼, 사람들의 각자 다르게 바랜 구두를 바라보며 이 생의 낯설음과 불편함을 깨우치고 마는 것이다. 그가 열어준 문으로 바라본 세계는 당혹스럽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나는 그 당혹스러움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김수영은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동감한다. 거짓을 말하느니 시를 쓰지 않는 편이 낫다. 온몸으로 연주하는 음악을 듣는 일, ‘바람의 피를 마시며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일이 바로 시를 읽는 일이다. 간만에 깨닫는다.
혼자 있는 날 집에 앉아 중얼중얼 소리내어 읽어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