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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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중 좋아하는 작가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꼽는다. 그 만의 독특함.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개성. 거침없는 필치. 등등.. 여기 '적의 화장법'을 다 읽고, 책장을 덮는 순간 나는 또 한명의 독특한 작가를 발견한 기분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또 하나의 '파트리크 쥐스킨트' 탄생의 순간이다.   

소설은 거의 지문이 등장하지 않는다. 90%가 대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등장인물은 단 두명이다. 물론 그들의 대화 속에 다른 인물들이 거론 되기는 하지만,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둘 만의 대화는 매 순간순간 극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제롬 앙귀스트는 출장을 가기 위해 대기중이던 공항에서 텍스토르 텍셀이라는 남자를 만난다. 그는 다짜고짜 그에게 접근해 와 줄기차게 자신과 대화 하기를 요구한다. 그보다는 싫든 좋든 선택의 여지 없이 무조건 그를 향해 떠들어 대는 것이다. 왜 이런 실없는 사람과의 대화를 멈추지 못하는가? 처음에는 귀찮아 하면서도 앙귀스트는 점차 그에게 말려들어간다. 아니 그보다 그와의 대화는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었으며, 처음부터 결코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제목 '적의 화장법'에서 화장법은 현재의 통용되고 있는 메이크업의 뜻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위장'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적'은 누구인가? 아닌 척 위장하고 다가와 나를 옥죄는 '적'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앙귀스트라는 이름에서부터 '불안', '각박'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 뜻을 몰랐다 하더라도 사실 조금만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텍스토르 텍셀'이라는 이름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부터 감춰져 있는 은밀한 의미를 이해했으리라. 

이제 겨우 중편분량의 한권의 책을 읽었을 뿐이지만 개성 넘치는 젊은 작가에게 벌써부터 푹 빠진 것 같다. 그녀의 다른 작품을 얼른 섭렵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나를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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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켜진 사무실 법칙
김종원 지음 / KD Books(케이디북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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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척 영리한 책이다. 보통 간과하기 쉬운 '야근'이라는 주제를 택한 것도, 그 주제를 풀어내는 방식도 영리하다.

흔히 야근을 한다는 것은 곧 일을 더 한다는 것. 즉 일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야근을 한다는 것은 근무시간에 충분히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런 사람이 야근을 한다 해도 시간때우기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자주 불이 켜 있는 회사는 매일 일만 시키는 회사로 안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근무시간 후 밤에 사무실의 불을 켜는 직원을 해고하라고 까지 한다. 꽤나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그에 덧붙여 회사의 오너의 입장에서 혹은 직원의 입장에서 효율적으로 일을 해나가는 방법을 하나하나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이 영리한 것은 결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단원마다 주제를 제시하고 주제를 뒷받침할 만한 간단한 예와 핵심만을 말한다. 설명투의 해설을 배제한 간단명료한 문장은 지루함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사실 이런 실용서들의 내용은 알고보면 다들 인지하고 있는 것들이다. 다만 실행하지 못할 뿐인 경우가 많다. 새로운 내용을 일깨운다기 보다는 일종의 자극제정도가 아닐까 싶다.

자! 책을 읽고 자극을 받았다면 이제 실천할 때이다. 책에 적힌 모든 글이 다 나에게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분명 체크해 둔 부분이 한두곳은 있을 것이다. 이제 실제로 적용만 하면 된다. 물론 한가지.. 맹신하지는 말자. 책에서 든 성공 예처럼 나도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한번 해볼만은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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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그림으로 읽기 - 그리스 신들과 함께 떠나는 서양미술기행
이주헌 지음 / 학고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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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명의 두 줄기라고 하는 헤브라이즘(혹은 히브리즘)과 헬레니즘. 그 중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헬레니즘을 둘러보는 여행기쯤이 될 것입니다. 부인과 아들 3형제를 대동하여 온 가족이 그리스 문명을 탐방하고 온 기행문이자, 책 제목인 '신화 그림으로 읽기' 그대로 차례차례 방문한 곳을 기준으로 하나둘씩 그리스 신화를 설명하면서 신화의 영향으로 탄생한 수많은 명화들..그리고 신화와 함께 고대 그리스 문명이 서양의 예술과 문명에 끼친 영향 등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도판이 무척 화려합니다. 예로 들고 있는 그림과 조각 등의 작품은 거의 다 책에 실려 있어 눈이 즐겁고, 대중서인만큼 신화속의 내용이 작품으로 어떻게 표현되었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정도의 쉬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화가와모델'을 재미있게 잘 읽어서 '이주헌'이라는 이름만으로 선택한 책이었고, 기대에 크게 어긋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온 가족을 동반한 가족여행이었다 해도 꼭 그렇게 가족들의 얼굴이 박힌 사진을 넣었어야 했는지... 그건 각 장마다 초반을 장식하고 있는 고생담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미술관련 교양서를 처음 접하거나 그동안 관심이 적었던 분이라면 읽어 볼 만합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있는 정보를 원하는 분이라면 글쎄... 그리고 매 장마다 마지막 부분에 두세페이지에 걸쳐 방문했던 박물관이나 유적지의 전시품목, 교통편이라던가 휴관일 등을 기록한 정보는 이런 비슷한 여행을 기획하고 있는 분이라면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은 그럭저럭 읽었지만 어쨌든 이들이 부러웠습니다. 그것이 정말 많이많이.. 그리스 문명을 테마로 한 여행이라니... 언젠가는 파르테논 신전을 직접 눈으로 보고.. 루브르 안을 거닐어 볼 날을 꿈꾸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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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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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담스런 능소화가 뚝뚝 떨어지는 부용각에는 오늘도 부엌어멈 타박네의 속 깊은 잔소리와 소리기생 오마담의 한 자락 소리가 들려옵니다. 민간보다 세배는 세월이 빠르다는 기방 부용각의 하루는 겹처마 팔작지붕이 어둠에 휩싸일 무렵 수런거리며 깨어나 흥취에 젖은 밤을 지나서야 끝을 맺고 낮이 되면 다시 고요해지길 반복합니다.


「나이가 들면, 몸에 붙은 살이 헐렁해지고 윤기 있던 피부에 주름살이 덮이는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깊어질 줄 알았다. 내주는 게 있는 만큼 받는 것, 얻는 것도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늙는다는 것은 철저히 손해 보는 장사였다. 일흔아홉의 타박네를 기다리고 있는 건 버려도 될 굳은 습관과 쓸데없는 잔소리, 조금씩 풀리는 손목의 힘처럼 근육이완으로 생기는 요실금의 기미들뿐. 늙음은 완전한 소멸이었다.」


부용각의 기생은 자색과 예기가 뛰어났다는 황진이도 이매창도 아닙니다. 사랑에 몸을 던져 차디찬 물 속으로 들어간 오마담의 동기 채련이는 더더욱 아닙니다. 미스 민, 미스 양, 미스 주로 불리는 그녀들은 찢어진 청바지를 즐겨 입고 발가락에 매니큐어를 바르는 뻘처럼 질척한 20대를 통과하는 청춘일 뿐이며, 오늘 밤 팁으로 가슴에 지폐 몇 장이 꽂힐지 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꼿꼿이 기방의 법도를 지켜온 전국 최고의 기방 부용각의 기생, 아니 이제는 소멸하고 말 이 시대 마지막 기생입니다.


「징그럽도록 활짝 핀 꽃을 자세히 본 적이 있는가. 꽃은 시들기 직전 가장 화려하게 꽃잎을 피운다.…… 꽃다이 웃고, 꽃다이 걷고, 꽃다이 말하고, 꽃다이 노래하고, 꽃다이 춤추고……꽃타령을 듣고 있으면 저절로 몸에 가시가 돋아났다.」


과거의 도식화된 기생이 아닌 현대를 사는 오늘날의 기생 이야기로 세월의 무게와 삶,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솜씨는 문득 부는 바람에 서걱서걱 몸을 부비는 고즈넉한 대숲에서 뽑아져 나오는 오마담의 소리마냥 빼어납니다. 몇 번을 다듬었을지 모를 정성이 그대로 깃든 문장과 고운 우리말은 그 빼어남을 한층 더 해 첫 장을 펼치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오롯이 그네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그걸 확인하고 싶어 끝까지 가보는 사람도 있단다……뜨겁게 달군 모래를 바싹 마른 혀에 수북이 얹고……혀가 타는지, 목이 타는지, 가슴이 타는지도 모르는 채……전신에 화근내를 풍기면서……온몸이 한줌 재로 타버릴 때까지……가야만 하는 사람도 있단다……」


이 소설은 소재가 작가를 선택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기생들이 불현듯 나를 불렀고, 나는 그들이 불러주는 말을 받아 적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과연 해어화(解語花)라 하여 꽃처럼 화려하기만 할 듯 보이던, 여성을 옥죄던 사회에서 자유로이 살았을 것만 같은 기생이 아닌, 집에 있을 아내를 위해 산 꽃을 가슴에 품은 사내를 보고 잠시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꿈을 꾸어 보는, 무형문화재 이수자가 되기보단 배를 곪지 않기를 바라는, 평생을 기생으로 늙어갈 적에 바닥이 닿은 고무신을 신고 절벽 위에 선 것마냥 가슴 저리고 서늘하기만 한, 그걸 견디지 못해 새들새들 속병이 들고 마는 그런 여인들의 이야기이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그네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꽃이 진다. 오마담이 우뚝 걸음을 멈춘다. 꽃이 지고 있다. 오마담은 돌아보지 않는다. 눈을 감고 다만 등으로 듣는다. 보지 않아야 꽃이 지는 소리가 들린다.」


겹처마 팔작지붕 부용각에는 오늘도 멀미가 날 듯한 주홍빛 능소화가 뚝뚝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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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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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의 첫 번째 작품이라는 ‘키친’은 적어도 제 기준에서는 그다지 선택할 만한 책은 아니었습니다. 베스트셀러인데다... 일본문학이고.. 최근의 일류(日流) 트렌드를 반영하는 듯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성적인 가벼운 책일 것이라 것.. 등등의 이유에서입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어느 정도 맞은 듯 합니다.

한 가지 ‘키친’만의 특이한 점이라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와 소재는 온통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겨우 그녀의 책이라고는 이 단 한권만의 책을 읽었을 뿐이니, 이것이 ‘요시모토 바나나’만의 특색인지 아니면 ‘키친’만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키친’에서의 죽음은 뭔가.. 극복해 나가야 할 지독한 슬픔이자.. 허무.. 상실 같은 것이지만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같은 것이기 보다는 삶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을 가장 고통스러운 일상과도 같은 것입니다.

화자인 주인공을 제외하고 사고와 살인 등으로 죽어가는 주변 인물들과 그들의 부제를 받아들이기 힘겨워하는 남은 자들... 그리고 그들이 서로 부대끼고 기대여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쓸쓸한 나날들이 담담하게 그려집니다.


지나치게 감상적인 나머지 특별한 의미 없이 과잉되는 낱말과 표현들이 많고, 이렇다할 사건들 보다는 (심지어는 살인사건조차도 그다지 놀랍지 않게..) 한 개인의 그 날, 그 날의 감정과 소소한 일상이 이어지는 방식은 역시나 이 책을 문학작품 이라기보다는 예쁜 팬시북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확실히 어느 정도 재미도 있습니다. 낄낄대면서 웃는 재미 혹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할 만큼 빠져들게 만드는 그런 재미가 아닌, 그래.. 그렇구나.. 하면서 어떤 흐름을 쭉 따라가게 하는... 그런 잔잔한 재미. 그런 재미는 지독한 슬픔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결국은 따뜻함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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