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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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담스런 능소화가 뚝뚝 떨어지는 부용각에는 오늘도 부엌어멈 타박네의 속 깊은 잔소리와 소리기생 오마담의 한 자락 소리가 들려옵니다. 민간보다 세배는 세월이 빠르다는 기방 부용각의 하루는 겹처마 팔작지붕이 어둠에 휩싸일 무렵 수런거리며 깨어나 흥취에 젖은 밤을 지나서야 끝을 맺고 낮이 되면 다시 고요해지길 반복합니다.


「나이가 들면, 몸에 붙은 살이 헐렁해지고 윤기 있던 피부에 주름살이 덮이는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깊어질 줄 알았다. 내주는 게 있는 만큼 받는 것, 얻는 것도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늙는다는 것은 철저히 손해 보는 장사였다. 일흔아홉의 타박네를 기다리고 있는 건 버려도 될 굳은 습관과 쓸데없는 잔소리, 조금씩 풀리는 손목의 힘처럼 근육이완으로 생기는 요실금의 기미들뿐. 늙음은 완전한 소멸이었다.」


부용각의 기생은 자색과 예기가 뛰어났다는 황진이도 이매창도 아닙니다. 사랑에 몸을 던져 차디찬 물 속으로 들어간 오마담의 동기 채련이는 더더욱 아닙니다. 미스 민, 미스 양, 미스 주로 불리는 그녀들은 찢어진 청바지를 즐겨 입고 발가락에 매니큐어를 바르는 뻘처럼 질척한 20대를 통과하는 청춘일 뿐이며, 오늘 밤 팁으로 가슴에 지폐 몇 장이 꽂힐지 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꼿꼿이 기방의 법도를 지켜온 전국 최고의 기방 부용각의 기생, 아니 이제는 소멸하고 말 이 시대 마지막 기생입니다.


「징그럽도록 활짝 핀 꽃을 자세히 본 적이 있는가. 꽃은 시들기 직전 가장 화려하게 꽃잎을 피운다.…… 꽃다이 웃고, 꽃다이 걷고, 꽃다이 말하고, 꽃다이 노래하고, 꽃다이 춤추고……꽃타령을 듣고 있으면 저절로 몸에 가시가 돋아났다.」


과거의 도식화된 기생이 아닌 현대를 사는 오늘날의 기생 이야기로 세월의 무게와 삶,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솜씨는 문득 부는 바람에 서걱서걱 몸을 부비는 고즈넉한 대숲에서 뽑아져 나오는 오마담의 소리마냥 빼어납니다. 몇 번을 다듬었을지 모를 정성이 그대로 깃든 문장과 고운 우리말은 그 빼어남을 한층 더 해 첫 장을 펼치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오롯이 그네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그걸 확인하고 싶어 끝까지 가보는 사람도 있단다……뜨겁게 달군 모래를 바싹 마른 혀에 수북이 얹고……혀가 타는지, 목이 타는지, 가슴이 타는지도 모르는 채……전신에 화근내를 풍기면서……온몸이 한줌 재로 타버릴 때까지……가야만 하는 사람도 있단다……」


이 소설은 소재가 작가를 선택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기생들이 불현듯 나를 불렀고, 나는 그들이 불러주는 말을 받아 적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과연 해어화(解語花)라 하여 꽃처럼 화려하기만 할 듯 보이던, 여성을 옥죄던 사회에서 자유로이 살았을 것만 같은 기생이 아닌, 집에 있을 아내를 위해 산 꽃을 가슴에 품은 사내를 보고 잠시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꿈을 꾸어 보는, 무형문화재 이수자가 되기보단 배를 곪지 않기를 바라는, 평생을 기생으로 늙어갈 적에 바닥이 닿은 고무신을 신고 절벽 위에 선 것마냥 가슴 저리고 서늘하기만 한, 그걸 견디지 못해 새들새들 속병이 들고 마는 그런 여인들의 이야기이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그네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꽃이 진다. 오마담이 우뚝 걸음을 멈춘다. 꽃이 지고 있다. 오마담은 돌아보지 않는다. 눈을 감고 다만 등으로 듣는다. 보지 않아야 꽃이 지는 소리가 들린다.」


겹처마 팔작지붕 부용각에는 오늘도 멀미가 날 듯한 주홍빛 능소화가 뚝뚝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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