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자주 가는 독서모임의 10월 모임을 소개합니다.
돈의 소유여부가 '자유함'의 기본적 척도인 사회에서 그러한 자유가 정말 자유인지,
지식이라는 것이 '환금성'(돈으로 바뀌는)의 정도로만 평가받는 현실에서
사회와 나의 삶에 대해 좀 더 넓게 성찰할 수 있는 것 또한 지식일 수 있다는... 등등
상식과는 좀 다른 시각을 접하실 수 있을 거에요.
이 독서모임은 <나비야 청산가자>라는 공간 내에 있는 독서모임이에요. <나비야, 청산가자>는 자연, 환경, 사회, 사람... 어떤 조화로운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나누는 공간이랍니다.
DAUM에 카페가 있는데... http://cafe.daum.net/nbychungsan 관심있으신 분은 가입하시길 권해드립니다.(가입할 때 장일순 선생의 호를 물을 것인데 '무위당'입니다.)
저도 갈 예정입니다. 혹시 혼자 가시기 어려우시면 함께 가시지요. (010-3124-9123)
아래는 <나비야, 청산가자>에 올라와있는 10월 책읽기 모임 소개를 옮겨온 것입니다.
예수전/김규항/돌베개
완연, 가을이네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뜨끔합니다. 벌레먹은 낙엽처럼 세월만 갉아 먹고 사는 건 아닌지......
가을볕에 느즈막한 자기 성찰까지 하게 되네요. 옷깃을 더욱 여미게 만듭니다.
낮은자의 편에서 함께 했던 예수, 믿음이란 곧 그 사람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이라는데,
이 세대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지, 종교를 떠나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한 예수를 만나보는 시간을 가져 봅니다.
'예수전'에 관심있는 분은 누구라도 오셔서 함께 의미있는 시간을 만들어 보세요.
10월 책읽기 모임 공지입니다.
함께 읽을 책 : 예수전(김규항)
일 시 : 2009년 10월 30일(금) 저녁 7:00
장 소 : 이대부근 문화공간 cafe체화당(02-364-9356 ) * 차값(2~3,000원)을 준비해 오세요.
연 락 처 : 청산별곡(011-9007-3427)
기 타 사 항 : 책읽기모임 후, 땀` 대안화폐를 사용할 수 있는 벼룩장터가 진행됩니다.
각자, 나눌 물건이나 도움을 주거나, 도움 받을 일들을 챙겨 보시기 바랍니다.
재미있게 우리가 꿈꾸는 세 상을 향하여 한걸음씩......
모임 약도 :
차를 갖고 오시거나 걸어오실때는
어쨌든 세브란스 병원이나 이대후문쪽으로 우선 오세요.그리고, 이대후문에서 금화터널 쪽을 향해서 약 200~300미터 전방으로
걸어오시면 이대부고를 지나서 대신교회로 가는 오르막길이 보입니다. 그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와서 대신교회를 끼고 골목길을
따라 올라오시면 주택가에 체화당이 보입니다.
버스를 이용하실 경우는
신촌에서는 신촌역 3번출구를 나와 맥도날드 앞에서 7024 초록색 버스를 타고 이대부고 앞에서 내리시면 대신교회로 오르는
오르막길 앞에 내립니다. 시내에서는 종로의 교보빌딩 앞에서 606을 미국대사관이나 KT 앞에서 708을 타시고 이대부고 앞에서
내리시면 금란슈퍼앞에서 내립니다. 눈앞의 횡단보도를 건너면 대신교회를 오르는 길이 보입니다.
그 길을 따라 쭉 올라오시면 체화당이 보입니다.
버스편: 파랑버스: 272 606 708
초록버스:7024 7737
통유리로 분리된 안쪽 공간, 최대 8명이 이용할 수 있는 체화당에서 가장 좋은(?) 테이블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우리가 사용할 공간이지 싶어요.
모임장소인 체화당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chewha.cyworld.com 방문해 보세요.
<책 소개> |
B급 좌파 김규항, 예수의 삶을 다시 읽는다
지배세력에 대한 비판자로서의 예수,
자본주의와는 공존할 수 없는 예수의 가르침!!
예수를 교리로 덧칠되지 않은 구체적인 인간으로 되살려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예수는 교리의 주인공, 교리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적으로 만들어 낸 예수가 기독교 교리의 뼈대가 되었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이야기하며, 예수의 말과 행동을 다시 짚어보며 예수를 새롭게 해석해낸다.
저자는 고통받는 모든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그들을 고통에 빠뜨린 지배계급과 사회체제에 불같이 분노하는 사람으로 예수를 이야기한다. 로마와 그에 결탁한 세력이 멋대로 독점한 성전의 권위를 대놓고 무시하고, 가진 자들이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하는 율법 또한 부정했던 예수의 삶을 근거로 하여 '지배세력에 대한 비판자'로서의 예수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예수의 말을 인용하여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살아가면서 예수의 정신을 본받겠다고 하는 것은 그러므로 모순이라고 말한다. 예수가 자본주의와 공존할 수 없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가진 자들만을 위한 ‘악의 구조’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구조 안에서 예수가 말한 ‘나눔’의 사상은 구현이 불가능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예수에 대한 이같은 해석은 오늘날의 한국사회에까지 이어진다. '바리사이인'들을 하느님 나라 운동을 가장 교묘하게 반대했던 세력이라고 평가하며, 이들을 오늘날의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에 빗대고, 막대한 자본과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한국교회, 기독교의 모습이 예수의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이야기 한다. ‘역사의 예수’ 담론은 예수가 더 이상 교회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의 성서 전문가들의 비밀 영역이었고, 점차 교회의 영향권 안으로 포섭되었다.
신학자도 성직자도 아닌 김규항 선생의 『예수전』은 예수가 더 이상 교회와 소수 성서 연구자들의 독점물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그는 소위 성직자와 성서 전문가만의 비밀 영역이던 ‘역사의 예수’를 훔쳐 내 자기 자신과 대중에게 돌려준다. 그의 빼어난 통찰력과 필력으로.
그는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예수를 이 성찰의 자리로 초대한다. 이 자리에서 예수는 우리를 배우고 우리는 예수를 배운다. 그의 『예수전』은 이렇게 예수와 우리 사이의 대화를, ‘지금 여기’라는 삶의 현장에서의 대화를 중계한다.
―김진호(제3세계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 왜 지금 예수인가 ― 김규항, 예수의 삶을 다시 읽다
제도권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 10여 년을 한결같이 우리 안팎의 권력을 향해 날 선 비판을 해 온 ‘B급 좌파’ 김규항. 그가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예수전』을 펴냈다.(이 책은 칼럼집이 아니라 저자가 본격적인 단행본으로 집필한 최초의 책이기도 하다.) 그의 엄격한(?) 시사 칼럼들만 보아온 독자들이라면 조금은 낯설 수 있는 소재다. 요즘 같은 시국에 한가로이 ‘예수’ 타령이라니. 정치사회적 혁명의 전망이 그 어느 때보다 아득해진 지금, 그도 별수 없이 내면의 수양이나 하기로 변심한 것일까.
그러나 이 책은 기독교인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진정한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모두를 위한 것이다. 이 새로운 혁명은 사회구조적 변화뿐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을 포함한다. 김규항은 예수에게서 그 단초를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편에 서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했던 그 청년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새로운 세상의 꿈’과 함께 찾아왔다. 개항기에 서학은 ‘새로운 세상’을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평등’과 ‘자유’의 이념을 무섭게 전염시켰다. 1970~80년대에는 이러한 흐름이 남미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서남동, 안병무 등의 민중신학론을 통해 지배적인 신학으로 유통된 바 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기독교가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이후 친미, 반공, 배타적 민족주의, 가부장주의 등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보수화했고 신도 수 1천만 명이 넘는 거대 권력으로 변신했다. 실제로 그들은 사회 여론을 형성하고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막대한 자본과 기득권으로 언론의 감시와 비판마저 무력화하는 교회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역’인 셈이다.
이 책은 권력 집단으로 전락해 버린 한국 교회에서 ‘예수’를 구해내려는 시도이며, 나와 세계를 바꾸기 위한 새로운 동력을 찾아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저자의 안내를 따라 예수의 시대를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진단과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 예수, 잔치를 열어 혁명을 하는 사람
이 책의 중심이 되는 문제의식은 ‘과연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예수는 교리의 주인공, 교리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 해관계에 따라 정치적으로 만들어 낸 예수가 기독교 교리의 뼈대가 되었고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예수는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이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가난했다. 지배계급과 로마의 압제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예수가 갈릴래아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고통받는 인민들과 함께하는 메시아로 예고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가 정말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활동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왜 죽임을 당했는지 따위는 모조리 생략한 채, 그를 단지 교리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한다. 정말 예수는 단지 교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그 고단한 삶을 살았단 말인가? 이성으로든 신앙으로든, 예수를 ‘갈릴래아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교리 속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예수의 정체성을 선택하는 결정적인 지표가 된다.”
이 책은 예수를 교리로 덧칠되지 않은 구체적인 인간으로 되살려 낸다. 예수는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아파하고 그들을 고통에 빠뜨린 지배계급과 사회체제에 불같이 분노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권위와 허위와 위선을 깨부수려 했다. 로마와 그에 결탁한 세력이 멋대로 독점한 성전의 권위를 대놓고 무시했다. 성전은 이미 그 신성한 의미를 잃은 지배세력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했다. 하느님은 인민의 삶 속에서 인민과 직접 만나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분이라고.
예수는 심지어 로마 세금 징수업자 밑에서 일하며 온 인민의 미움을 샀던 세리를 제자로 삼기까지 했다. 예수는 세리를 로마의 앞잡이가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는 인민으로 보았다. 예수는 그런 행동을 통해 지배세력의 위선을 비판한 것이었다. 예수는 가진 자들이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하는 율법 또한 부정했다. 가난에 신음하는 인민들에게 율법이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강제 조항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거리낌 없이 세리들, 죄인들과 어울려 시끌벅적하고 유쾌한 식사를 했다. 그의 식사는 파격이었다. 하지만 예수의 그런 천박한 식탁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인민들은 비로소 ‘인권’을 되찾았다. 예수는 경건한 사람들의 양식이었던 단식 또한 거부했다. 예수의 별명은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들과 죄인들의 친구”였다. 그는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은 바로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이웃들이라고 믿었고, 그들과 함께 잔치를 여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운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예수가 꿈꾼 나라 ―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가능한 ‘이웃 사랑’
예수는 세상이 바뀔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지배계급이 예수를 적대시하고 끝내 죽일 수밖에 없었던 본질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세상이 바뀌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가 바리사이인들을 비난했던 이유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가장 교묘하게 반대했던 세력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인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양심과 양식을 갖춘 시민사회 세력’이다. 학식과 경제력에 사회의식까지 갖춘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는 그들을 꺼려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입으로는 변혁과 진보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변혁과 진보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머문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냉소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 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인민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을 혐오하지만 양식과 윤리로 무장한 그들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그들,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라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를 가장 잘 알면서도 그 체제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점철된 보수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끊임없이 지적함으로써 대중들로부터 양식 [예스2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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