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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여기 죽어가는 한 사람이 있다. 본인 스스로는 살인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고 하지만, 결국 살인적인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살인자로 거듭난 사람이, 그리고 그는 당장 내일이라도 자기와 똑 같은 다른 살인자의 손에 죽어 없어질지도 모르는 내게 고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비록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고백에는 분명 진정한 참회의 흔적이 있었다. 유대인인 ‘내게’ 이야기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회개하고 있다는 증거는 충분하다.] - 89쪽
용서는 단일한 선택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가해와 피해의 과정이 촘촘한 그물처럼 연관을 맺고 있는 상황에서 참회-용서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진정한 참회는 무엇일까? 나치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시몬 비젠탈은 그의 흔치 않은 경험을 <해바라기>에서 전한다. 시몬 비젠탈은 이런 선택의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책을 읽어가는 동안에 어머니, 아버지, 형이나 누나에게 그리고 동네 어린 꼬마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다. ‘누군가 아주 몹쓸 짓을 했는데, 어떻게 하면 용서를 해줄 수 있나요?’라고 대답은 한결같았다. 진정한 참회가 있어야 고통 때문에 응어리진 마음이 풀린다고. 가해자의 참회와 피해자의 용서는 사실 한 마디로 단정하기가 불가능한 과정인 듯하다.
가해자가 참회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단지 ‘잘못했다.’라는 얘기를 하면 끝나는 것일까? 무엇을 어떻게 잘못하고 그렇게 된 원인에 대해 돌이켜보는 게 진정한 참회가 될 것이다. 반대로 참회를 듣고 용서를 할 수 있는 피해자의 경우는 어떨까? 바둑의 ‘복기하다.’라는 용어가 있다. 한 수 두 수….. 바둑이 종료되기까지 누가 어떻게 상대방을 이기고 어느 국면에서 승부를 가르는 선택이 이루어진 것인지를 알기 위한 것이다. 참회와 용서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마치 바둑의 승부가 끝나고 복기하는 것처럼 한 땀 한 땀 가해-피해상황을 반성해보는 과정이 절실하다. 착한 아이이고 카톨릭 신자였던 카를이 히틀러 소년단에 가입하고, 다시 ss에 지원하였던 일들… 그리고 그러한 카를이 가담하게 되는 조직적인 학살들….
비젠탈이 보기에 카를은 ‘진정한 참회의 흔적’이 보인다. 내가 생각할 때 진정한 참회를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흔적’만 보인다고, 카를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것과, ‘진정한 참회’의 시작을 하는 카를을 용서해준다는 생각은 섣부른 판단일 것이다. 왜냐하면, 참회의 과정은 어떤 하나의 행위로 완결되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의 몸이 된 비젠탈은 ‘호기심 때문이 아닌, 일종의 의무감 때문’에 카를의 어머니를 찾아가며, ‘내 생애에서 가장 불쾌한 경험 가운데 하나인 기억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싶어서였다.’라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내 생각엔 ‘불쾌한’이라는 형용사의 원래 의미와는 다르게 이해해야 할 것 같다. 해결해야 했는데, 해결하지 못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영어원서의 단어를 확인해야 할 듯…)
카를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비젠탈은 무엇을 확인하려고 그러는 것일까? 아마도 죽어가는 ss대원 카를의 흔적이 마음속에 걸린 것이리라. 비젠탈은 자신의 대답을 바로 구하는 카를의 요구엔 거부했지만, 카를의 참회의 흔적이 담긴 얘기를 듣는 것을 거부하진 않았다. 자유의 몸이 된 비젠탈은 전쟁범죄조사위원회에서 일하며 다짐한다. ‘나는 위원회 일을 함으로써 인간성에 대한 나의 믿음은 물론이고, 또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물질 이외의 것들에 대한 나의 믿음을 되찾으려 한 것이었다.’ 133쪽
내가 이해한 이야기의 주제는 용서가 가능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참회는 가능할까? 이다. 몇 몇 분에게 질문한 ‘당신에게 큰 상처를 남기 그들을 용서하려면 그들이 어떻게 하면 당신은 용서해주겠습니까?’의 질문은 지금 생각해보니 논의의 맥락이 어긋났다고 생각한다. 어떤 잘못이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기 위해선 그 상황을 다시 겪어야 하고 그 세밀하고 섬세한 아픔을 다시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픔도 다 느끼기 전에 ‘어서 용서해, 잘못했다고 하잖아?’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또다시 상처를 받을 것이다. 문제는 여전히 가해자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를 일으킨 자가 문제를 풀어야 한다. 가해자가 문득 깨달은 과거의 사실(가해한 일)로 마음의 고통을 일으키는 것이 문제일까? 인정한다. 그렇지만 피해자의 고통보다 클 것인가? 가해자가 마음의 고통도 안 느끼고 참회가 가능할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가해자의 고통은 피해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느끼는 데 필수적이기도 하다.
참회와 용서의 일은 고통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과정이다. 다시 병실의 비젠탈-카를이 놓인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그 당시 비젠탈이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참회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서하지 않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진정한 참회의 흔적이 그리고 씨앗이 나오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카를의 숨이 오래지 않아 다 한다고 해서 그냥 용서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카를에게도 비젠탈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카를은 자신의 얘기에서 참회의 흔적을 발견한 비젠탈에게 할 수 있고 자신의 상황에서 가능한 방식의 용서를 구한 것이고, 비젠탈 또한 카를의 ‘불충분한’ 참회에서 씨앗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게 있었다. 앞에 바둑의 복기 비유를 들었다. 그 비유는 사실 적절하지 않는 것인데, 이유는 바둑의 참여자는 2명이다. 그렇지만 비젠탈과 카를 두 사람의 용서와 참회의 참여자를 2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젠탈이 ‘임시병원’으로 노동을 하러 갈 때, 바라보던 군중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강압적인 상황에서 옆집의 유태인이 나치에게 끌려가는 상황에서 두려워하고 떨었으며 어떤 이는 스스로 인종차별을 실행했던 인물일 것이다. 부도덕한 세상에 자신의 인생을 위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쉽게 말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나치의 학살 뿐 아니라 다른 세상의 억압들과 차별들… 그것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 사람들의 침묵의 공유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