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신님의 글입니다. http://hook.hani.co.kr/blog/archives/9132 
한국방송의 김미화고소에 대한 지적이 참 날카롭습니다. 

 

(.....)김미화가 자신의 트위터에 ‘한국방송에 블랙리스트가 있어서 나를 출연시킬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밝혀달라’고 적었다. 한국방송의 대응은 날렵한 검객의 칼솜씨보다도 빠르다. 곧바로 기자회견과 9시 뉴스 보도를 통해 반박하며 그녀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다. 과도한 대응이라는 지적에 한국방송 임원은 ‘자칫 잘못되면 엄청난 파장이 생기고 회사 신뢰에 큰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고도 엄중한 대응을 분명히 했던 것’이라고 밝힌다. 군사독재 시절, 계엄사령관이 민주화세력에 대해 사회혼란을 유발하는 폭도로 간주해 엄중하게 진압하겠다고 발표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명백한 엄살이다. 한국방송은 국민의 소통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대한 소통 전문 집단이다. 외견상 소통에 관련된 각종 노하우와 채널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조직이다. 그런 집단에서 한 개인의 의사 표명에 대해 다짜고짜 법을 통해 진압하는 것은 기괴하다. 입으로는 자기네가 최고의 경호전문가라고 강조하면서 막상 자신들의 안전은 다른 경호회사에 맡기는 격이다.(.....)  

kbs의 수많은 시사프로, 사회고발프로에서 얼마나 많은 '의혹성 가십'을 제기하는지를 생각해보면 김미화씨에 대한 고소를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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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님의 글입니다. http://hook.hani.co.kr/blog/archives/9458  아프님의 스크랩을 통해서 알게 된 글인데 좋네요.  

'강용석'비판이 정국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이 얘기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개운치 않은 점이 있었는데... 이 글을 보고 어느 정도 명확해졌습니다.  

아내나 여자 친구가 성폭력을 당한 경우 남성 파트너의 반응과 이후 커플의 관계를 살펴보면, 모든 권력이 그렇듯이, 권력의 편재(偏在)가 초래하는 어떤 비극과 마주하게 된다. 아니, 더 큰 비극은 이것이 비극이라는 사실조차 공유되기 힘든 현실일 것이다. 사람들은 피해여성 못지않게 파트너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가해자와 남성이 아는 사이거나 남성이 현장에 있었던 경우에는 파트너의 ‘상처’에 더 공감하기도 한다. 사건 이후 커플의 관계는 평소 애정과 신뢰도, 여성주의 의식(‘양성평등’의식), 사회적 환경, 남성의 ‘인격적 성숙’ 정도 등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피해여성보다 자기 고통에 더 몸부림치며 술로 세월을 보내는 남성, 피해여성을 의심하고 학대하는 남성, 혼란과 자기 분열에 시달리다가 결별을 통보하는 남성, 문제를 회피하며 더욱 냉담하게 구는 남성 등 여성과는 다른 성격의 ‘고통’이 전개된다.

피해여성을 위로하고 보살피려는 남성도 많다. 그런데, 이때 남성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난 괜찮아”다. 남성은 이 말이 피해여성에 대한 사랑과 관대함을 증명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남성의 ‘자부심’ 섞인 예상과 달리, 많은 여성들이 이 말에 ‘폭발’한다. “뭐? 뭐가 괜찮아? 누가 괜찮아? 난 하나도 안 괜찮아!” 이처럼 남성이 ‘좋은’ 의도에서 한 말이 여성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최근의 사례를 보자. 아마도 한국사회에서 가장 공적(公的)인 인격이자 정치적 위상이 높은 여성으로 간주되는 박근혜 의원. 그런 그녀의 ‘섹시함’을 구구절절 ‘칭송’한 강용석 의원에게, 나를 비롯한 여성들과 당사자는 모욕감을 느꼈거나 최소한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강 의원은 남성의 위치에서,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관록의 정치지도자를 성적인 존재로 환원하는 폭력을 저질렀다. 이는 현직 미국 대통령이 얼마나 흑인다운지 감탄하는 ‘호감’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과 같은 행동이다. 상대방에 대한 비하를 정작 강 의원 자신은 “왕아부”라며 “내가 이렇게 아부해도 되는지”, 반성(?)까지 하고 있다.

이 성별에 따른 ‘외국어’(‘젠더 방언’이라고도 한다)는 애초에 누구 때문에 만들어졌고, 누가 어떻게 통역할 것인가? 사실, ‘나는 괜찮아’는 ‘왕아부’ 만큼이나 심장한 의미가 있다. ‘나는 괜찮아’ 앞에 생략된 말은, “성폭력 피해를 입은(따라서 ‘더러운’) 너는 내게 미안해해야 하는데, 나는 속이 넓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즉, ‘나는 괜찮아’는 내가 ‘상당히 괜찮은 남자’라는 뜻이다. 피해자, 그것도 사랑하는 파트너의 고난을 함께 하면서 가해자와 같은 남성이라는 사실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마치 ‘죄인(피해여성)’의 잘못을 사면한다는 태도로 ‘관용’을 베푸는 것이다. 피해자가 괜찮은가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를 내치지 않은 내가 얼마나 괜찮은 남자인지를 피해자에게 인지시키고, 더 나아가 ‘남다른’ 자신에게 고마워하길 바라는 것이다.

내가 이 글에서 언급하는 남성은 생물학적 남성 개개인이 아니다. 여기서 남성은 시공간 제약을 받는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이 부분적 인식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보편적, 초월적 존재로 생각하는 권력자 혹은 알튀세적 의미의 주체(subject)다. 루스 이리가레이는 이런 남성을, “결핍을 결핍한 존재”라고 정의했다.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기 때문에, 타인은 존재하지 않고 세상사는 자기 생각의 확장일 뿐이다. 따라서 자아의 경계가 없다. 자기 외부가 없기 때문에 자기 내부, 즉, 자아도 없다. 자신이 누구이며,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며 사회와 인간관계 안에서 자기 위치를 알 수 없는 허공에 뜬 존재다. 이런 사람은 타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眼下無人’) ‘남의 입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그래서 타인이 “그게 아니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크게 놀라면서 부인, 당황, 분노한다. 내 편이었던 세상이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나를 공격한다고 생각하며, 상처받는다. 이때부터 가해자는 ‘피해자’가 된다.

강 의원 같은 사람은 민주당이나 진보 진영에도 있을 것이고, 그는 한국사회 ‘지도층’ 남성의 샘플일 뿐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여당에 대한 ‘정치공세’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일부 여론에 나는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이 사건은 여야간 공방에 그쳐서는 안 되는 문제다. 강 의원은 권력층의 자기중심성이 만들어내는 소통 불가능 사회의 면면을 모두 보여주었다. 가해자(violater)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보자. 당 대표는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는 굉장히 자기중심적 발상이다. 이들은 피해를 규명하고 사과하는 대신, “우릴 걱정해주어 미안하다”는 ‘왕자병’ 증세를 보이고 있다. 왜 ‘피해국민’이 ‘가해정당’을 걱정한다고 생각하는가? 국민정서를 못 읽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도취 수준의 착각이다. 이런 뉴스를 접했을 때 국민(여성)의 주된 정서는 불쾌와 모욕감, 그런 사람이 국회의원이라는 현실에 대한 자괴감이지, 가해자에 대한 “심려”는 아닐 것이다.

한나라당의 제명 조치는 공당으로서 사죄하는 차원일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아 보인다. “10시간도 안돼 제명 조치를 취한 것은 당의 위기의식이라고 보면 된다”, “재보선 의식한 ‘꼬리 자르기’ ”, “선거용 제명” 등 한나라당의 자체 발언이나 “강 의원은 팀킬의 달인”, “자살 폭탄 테러”, “최대 피해자는 강 의원과 대통령 부부”라는 여론처럼, 자기 걱정과 보호만 몰두할 뿐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찾아보기 힘들다.

타인의 인권을 침해해서 징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당’을 망신시켰기 때문에, ‘우리’ 선거에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라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징계란 말인가? 재보선 후보를 위한 징계? 어떤 사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가해자의 행위와 이후 조치가, 같은 의식 구조와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라면 사건은 반복될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여성을 성적인 물체로 환원하는 행위를 자연스런 ‘사회 규범’으로 인식케 하는 것? 이것이 그들의 의도인가?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제가 (페미니즘 시각에서 강자인)남성이어서인지 필자의 이야기 중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특히 글의 도입부에 나타난 성폭행 당한 여성과 커플인 남성의 대응방식에 대한 서술은 다소 극화시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자가 '난 괜찮아'라는 말을 할 때의 의미를 “성폭력 피해를 입은(따라서 ‘더러운’) 너는 내게 미안해해야 하는데, 나는 속이 넓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된다”라고 서술했는데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어쩌면 이러한 제 생각은 제가 자신을 지키려는(곧 남성으로서의 지위에서 파생되는 보수적인)성향 때문에 진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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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널리 알려져야 할 내용이군요. 

 정부에 비판적인 글을 쓴 사람의 정보를 경찰이 원하면 '관행적'으로 주었다고 합니다. 

참 몰상식한 일이네요. 반박의 가치가 없는 자명한 폭력같습니다. 

 

미디어 오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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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님이 쓴 앞으로 출간될 테리 이글턴의 <신을 옹호하다> 추천사입니다. 
읽고 의문이 드는데 잠도 안오고 기록해봐야 겠군요.ㅎㅎ~  괄호안에 제 의문을 넣겠습니다.

  각별한 의미


(신을 옹호하다 추천사)

기독교 성서에는 두 가지 신이 등장한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신, 즉 모세의 신은 권위적이고 질투가 많은 존재다. 신은 제 명령을 잘 따르면 기뻐하고 상을 주지만 어기면 크게 화를 내며 벌을 준다. 자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나 사회에 대해선 아예 어떤 사회인가 어떤 사람인가와 무관하게 차갑고 잔혹하다. 모세의 신은 자신들이 신과 계약을 맺은 유일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젖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배타적인 민족 신이다.(기독교 성경에 등장하는 두 가지 신, 구약과 신약의 신을 나누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신을 '배타적인 민족 신'이라고 규정하게 되면 7일 동안 모든 것을 창조한 신의 전능함과 모순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신은 기본적으로 완전한 존재인 거죠.) 예수는 신은 우리에게 명령하고 누르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이해하며 우리와 대화하려 하는 분이라고 말한다. 모세의 신이 행여 화를 낼까 두려워 엎드려 눈치를 살펴야 하는 권위적인 아버지라면 예수의 신은 마주보며 대화하고 위로받고 의지할 수 있는 엄마다. 예수를 통해 신은 비로소 인류 보편의 신이 된다.(예수의 존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 또한 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신 그자체 혹은 신의 대리인 혹은 신에 종속된 존재가 아닐까요. 신은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그러나 기독교가 종교체제를 갖추고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하면서, 말하자면 예수의 정신을 잃어가면서 기독교의 신은 서서히 모세의 신으로 회귀한다. 특히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기독교의 신은 대개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자와 부자의 신으로 군림해왔다. ‘이스라엘 민족’이 차지하던 자리를 ‘기독교 체제’가 대신했을 뿐. 오랜 세월 동안,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수많은 불의와 참혹이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부시의 신, 이명박의 신의 이름으로.
대체 신은 어떤 존재인가? 동학을 비롯한 한국의 민간 사상과 종교에서 신관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신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외부에서 절대적인 힘으로 우리를 관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 ‘본디의 나’로 존재한다. 신을 섬긴다는 건 지금 나를 뒤덮어버린 이런저런 부질없는 집착과 욕망들을 씻어 내고 본디의 나로, 신의 모습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은 곧 신의 모습이다. 신은 내 안에 존재하듯 다른 모든 ‘내 안’에도 존재한다.(이 문장 좋네요.^^;) 신을 섬긴다는 건 곧 이웃을 내 몸처럼 섬기는 것이다. 예수가 말한 그대로.(내안에도 타인에게도 신이 존재한다면.. 이웃을 내 몸처럼 섬기는 것이 용이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도 타인에게도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이웃을 존중하며 살 수 있는 조건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진짜 제 안에도 신이 존재할까요? 사실 가끔 내 자신의 존엄함이랄까?에 달뜬 경험이 여럿입니다. 일상에서 여러 사회관계에서 소외감을 느낄 때, 그러한 감정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내안에도 타인에게도 신이 있다는 말은 누구나 '위대함'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내가 그리고 다른 사람이 위대할까요? 위대해질 가능성이 있을까요? 그리고 위대하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규정되는 것일까요?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은 신을 닮았기에 위대하다는 것이 기독교의 말이겠지요.) 
그런 신관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들어오면서 모조리 미신으로 치부되고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종교가 진정 종교적인 것들을 말살하는 기막힌 상황은 서양세계와 그 정신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이후 매우 일반적인 상황이 되었다.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런 종교를 인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양식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 대해 정당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진정 종교적인 것들을 말살하는 종교에 대한 반감은 당연하지만, 그런 반감이 진정 종교적인 것에 대한 무작정한 부정으로 비약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선 안 된다.(여기서 김규항님은 '진정 종교적인 것'을 강조합니다. 도킨스와 히친스 비판에서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중요한 듯합니다.) 
그러나 많이 배우고 젠 체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어리석음에 빠지거나, 심지어 그런 어리석음을 부추겨 세속적 명성을 얻고 책을 팔기까지 한다. 이 책이 “디치킨스”로 한데 묶어 비판하고 있는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그 가장 ‘저명한’ 사람들이다. 사실 그들은 종교가 뭔지 제대로 모른다는 점에서 그들이 비판해마지 않는 사람들, 즉 진정 종교적인 것들을 말살하는 사람들과 같다. 테리 이클턴은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통찰과 유머가 넘치는 필치로 그들의 무지와 오만을 차근차근 폭로한다.(이 문단은 다소 반감을 갖게 합니다. 이글턴이 어떠한 논리로 도킨스와 히친스를 비판하는지는 아직 모르지만요. 일단 도킨스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신을 믿는 것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같습니다. 그러나 도킨스의 주장-진화론이 창조론 혹은 신의 존재 보다 진리에 부합한다는-은 이성적 근거를 갖추어 내린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그리고 도킨스는 신이 존재한다고 사람들이 여기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더 행복하고 더 윤리적으로 살 수 있다고 누누히 강조합니다.)    
이글턴은 이 책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애초 의도하지 않은 매우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지구상에서 좌우분별이 없는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과 한국이다. 두 나라에선 극우 성격이 짙은 보수주의가 우파, 자유주의 우파가 좌파라 불린다.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한국의 지배계층과 교육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좌우분별이 없으니 좌파의 존립이 어렵고 좌파의 힘이 적으니 좌파가 맡아야 할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은 더욱 공공연하게 무시된다. 이 책은 좌가 뭐고 우가 뭔지, 왜 오래 전에 폐기된 것으로 알려진 좌파적 상상력이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해 또렷하고 깊이 있는 식견을 제공한다.
이글턴은 잘 알려진 사회주의자인데 사회주의와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가,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역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일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핵심 메시지는 상당 부분 겹쳐진다. 기독교 신앙은 ‘사회주의 이상’의 것이지 ‘사회주의에조차 못 미치는’ 어떤 게 아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보는 눈을 환히 밝혀주는 책이다.(김규항님에게서 기독교 신앙과 사회주의는 서로 모순되지 않고 필요한 것으로 결합됩니다. 그런데 김규항님이 얘기하시는 기독교 신앙은 종교가 인간존재와 만물을 낳는다는 의미에서의 '초월적 종교관'을 상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신이 없어도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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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0-07-20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규항씨는 또다른 의미에서 종교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이 아닐까요? 김규항씨의 결론은 종교를 도덕이나 윤리로 끌어 내리는 것이니까요. 님이 지적하셨듯이 김규항씨는 초월적인 종교관을 상정하지 않아도 되는 착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기독교는 아니니까요. 가끔 과학과 종교를 같은 범주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답답합니다. 종교가 맹목적인 광신도 문제이지만, 이성적으로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하면 그것은 과학이지 종교가 아닙니다. 이런 두서 없는 말이 되었네요.

푸하 2010-07-20 13:55   좋아요 0 | URL
제 느낌을 다듬지 않고 올렸는데, 잘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김규항님은 종교의 초월적 성격과 윤리적 성격이 어떻게 융합하는지 몇 몇 곳에서 밝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신학의 오랜 주제이기도 한 것 같기도한데 저는 잘 모르겠네요.^^:
김규항님은 한국사회의 기독교가 외양은 초월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그 윤리적 측면에 있어서는 매우 반기독교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을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김규항님의 글들은은 현재의 기이할 정도로 돈을 섬기는 한국기독교 시스템과 그것을 수용한 종교인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김님 2010-07-20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냥 세글자 .``무신론`` ..그냥 무신론적 사회관.....김규항씨의 영성을 종교적팩트로 다루기보다...오히려 기독교화지않은 종교화하지않은 예수보기 그자체 아닐까요...님의견의 시시비비보다 이곳엔 어울리지않는다는...뜻입니다

푸하 2010-07-20 15:27   좋아요 0 | URL
김규항님의 주된 논지와 좀 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좀 망설이기도 하였습니다. 제도화되기 이전의 예수를 살려내는 김규항님의 작업에 적극 동의하고 많이 배웁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이 있어 가벼운 소감을 적었네요.

phd6729 2010-09-15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주의가 신에 기대야 한다면, 별로 현실에서 이루고 싶지 않네요. 배부른 돼지 되는거 같아서.
김규항형 참 좋은 사람인데, 저 부분은(신학) 죽을 때까지 동의 못할듯. ^^

푸하 2010-09-15 13:18   좋아요 0 | URL
참 어려운 주제 같아요.
아마도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어려운 주제인 것 같아요.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어떤 확실한 견해라도 이성에 의한 의심과 회의에서 자유롭기 어려울 것 같아요. 여튼 고민해야 할 것 같네요.^^
 



cafe 체화당은 금화터널 근처, 이화여대 공대 바로 옆에 있습니다.
이화여대 후문에서 금화터널 앞까지 와서, 대신교회 앞 언덕길을 따라 올라오면 이화여대 공대의 교문이 있습니다.

교문을 마주보고 왼쪽으로 올라오시면 cafe 체화당이 있습니다.

걸어오시는 길은 아래의 영상을 참고하세요. *^^* (영상은 이대역부터 오는 길 입니다.)

 

<교통편>

 

지선버스(G) 6714, 7017, 7024, 7737 - 이대부고 정류장 하차

 

간선버스(B) 272, 606, 708, 751 - 이대부고 정류장 하차

                  370, 470, 601, 607, 708, 710, 750A, 750B - 중앙차선 이화여대 후문 정류장 하차

 

광역버스(R) 9602, 9706, 9708 - 중앙차선 이화여대 후문 정류장 하차

 

지하철 2호선 이대입구역 1번출구 - 751, 7017 버스 이용

지하철 2호선 신촌역 3번출구 - 7024,7737 버스 이용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2번/4번출구 - 7737 버스 이용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출구 - 272, 606, 708 버스 이용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출구 - 7737 버스 이용

[출처] 카페 대문 (:: 초록실천단 ::) |작성자 스폰지밥

 

아마도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그린파티입니다.
많아야만, 뛰어나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배하는 시대에 적은 것, 작은 것도 풍성할 수 있는 그런 파티가 되었으면 하네요.

어려워 마시고, 수줍어 마시고 가볍게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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