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뒷 정원에서의 모습.

 

길가 쪽 모습.

 

삼일 연속으로 눈이 내렸고 오늘 밤에도 큰 눈이 예정되어 있다. 3월을 코 앞에 두고 영국 뿐 아니라 온 유럽이 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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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잉글랜드 남부에는 눈이 잘 오지 않는다. 그래서 눈이 와서 땅에 쌓일 정도가 되면 꼬박꼬박 사진을 찍어두었었다. 영국에 있는 동안 두 번 정도? 그리고 오늘 몇 년만에 다시 눈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푸짐한 함박눈이 바람에 마구 휘날리는, 잉글랜드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장면이다. 내 방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고 가운데 벚꽃 나무를 보면 봄이 올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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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펑크를 내어 대타로 마라케시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덕분에 그 스케쥴에 따라 꽤 좋은 호텔에도 묵어보고, 가이드를 따라 모로코의 원주민이랄 수 있는 베르베르 사람들이 사는 아틀라스 산 마을에도 가보고, 낙타도 타보았다.

모로코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는데 공항에서 잡아 탄 택시에서부터 바가지를 당했기 때문에 시작부터 조금 긴장을 해야 했다. 아닌게 아니라 숙소 근처 제마 엘 프나 광장이나 광장 북부의 유서 깊은 염색 공장 지대 가는 길의 그 혼란스러움은 외지인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해 보였다. -좁고 포장이 잘 안된 골목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걷고, 외치고, 가게에서 빵을 사고, 그 틈을 굉음을 내는 오토바이와 노새 달구지가 비집고 지나가고, 길 가장자리에서는 퀭한 눈의 사람들이 손을 내밀며 동냥을 한다. 난생 처음 보는 북새통이었지만 곧 익숙해지기는 했다.

모로코에 조금 익숙해지려하자 떠날 때가 되어 아쉬웠고, 사원에 들어가 절을 하고 싶었는데 외지인은 사원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아쉬웠고, 제마 엘 프나 광장의 노천 음식점이나 일반 음식점에서 파는 기름에 튀긴 물고기 요리를 더 이상 먹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내년에 다시 가서 사막 여행을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제마 엘 프나 광장. 악기 연주도 하고 재담도 한다. 그러면 구경하는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고 웃고 하다가 동전을 던져 준다. 또 이렇게 사진을 찍고 있으면 바로 돈 달라고 한다. 우리에게 불어 아냐, 아랍말 아냐, 하고 묻기에 모른다고 했는데도 굳이 끌어다 앉혀 놓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재담을 끊임없이 늘어 놓는다. 모로코 사람들이 즐기는 모양을 감상하다고 동전 던져 놓고 몰래 도망 나왔다.


아랍 사람들이 모로코에 들어와 이슬람화시켰기 때문에 모로코에는 거대한 이슬람 문화 유적들이 많다. 위의 유적 이름을 까먹었다.


베르베르 사람들 집에 가서 먹은 타진이라는 요리. 닭고기에 감자, 올리브 등을 넣어 찜을 한 것 같았다. 기대보다는 썩 독특한 맛은 아니었다. 나는 튀긴 생선 요리를 더 좋아했다.


베르베르 사람들 동네. 자신들의 언어가 있으며 산악 지대에서 주로 산다. 관광 관련 사업, 양치기, 농작 등을 해서 먹고 산다고 하더라. 사람들이 다들 착하고 부지런해 보였다.


목요일마다 열린다는 베르베르 사람들의 장. 한국의 시골 장과 전혀 괴리감이 없다. 염소 파는 구역도 있고 닭을 파는 구역도 있다. 우리는 녹차를 샀다. 차주전자도 살 걸 그랬다.


아마도 유태인 거주 지역 사진일 것이다. 아주 옛날 스페인의 박해를 피해 유태인들이 모로코로 이민 왔고 이스라엘 건국 이후 많이들 빠져 나갔다고 하더라.


이슬람 코란 학교 하나를 찾아 갔었는데 공사 중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근처 골동품 가게에 가서 작은 병 하나를 사고 주인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고대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홀로 천막을 치고 살았다던 흰 수염 휘날리는 도인들에 관심이 많다고 하자 주인 양반이 이메일로 이슬람 철학에 대해 차근 차근 설명해 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먼저 메일을 보내 봤지만 아직 답이 없다...-.-


모로코 마라케시 사람들은 정말 가난해 보였다. 중년대에 치아가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 길을 물으면 앞장 서서 가이드하고 나중에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싫다는 데도 악착같이 따라 붙으며 흥정을 하거나 호객을 하는 사람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보며 이 사람들은 자아가 없거나 아주 작은 자아를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아란 생존하는데 아주 거추장스러운 도구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현대의 어떤 사상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알다시피 마르크스는 역사를 계급 투쟁의 역사로 보았다. 가진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투쟁.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의 최종적인 승리. 그 현대 사상은 마르크스를 이렇게 비트는 것 같았다. 인간의 역사는 자아에 고착하는 사람과 자아에서 탈주선을 긋는 사람들 사이의 투쟁이라고. 그리고 자아에서 탈피하는 사람들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마라케시에서 나는 이런 관념론의 관념성을 본 것 같았다. 편집과 분열의 이항 논리만으로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예컨대, 최소한 마라케시 사람들의 비자아와 고타마의 비자아를 구분해 줄 장치가 필요하다, 등등.


베르베르 사람들의 장터에서 가이드가 우리에게 귤을 주었었다. 그것을 맛있게 먹고 난 후 나는 내내 귤 껍데기를 손을 들고 다녔다. 길 바닥에는 더러 더러 귤껍데기가 뒹굴고 있었지만 차마 내 가 먹은 귤의 껍데기를 땅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정말 강한 자아를 갖고 있구나...   확실히 자아가 문제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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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메모에서 시간 간격이 꽤 있다. 집 공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고(아직도 완료되지 않았다), 이 주제가 너무 크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관성의 실질이 무엇인가? 자아인가? (물론 오늘날 누구도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철학사적으로는 칸트-흄, 더 아래로 내려오면 후설-사르트르의 논쟁이 이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것들을 다시 차분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일은 너무 지루하다. 비슷한 길을 좀 더 재미있게 걸을 수도 있지 않을까?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자아에 대한 사르트르의 착상의 근원에는 흄이 있다. 들뢰즈의 경우는, 사르트르의 자아 이론에서 시작한 것이 분명하지만 흄까지 소급하여 들어가서 흄에서 다시 시작한다. 두 개의 계열을 그릴 수 있겠다. 흄-사르트르, 흄-(니체)-들뢰즈. 그리하여 문제를 이렇게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와 들뢰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마 대단히 큰 일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요 몇 칠 집중적으로는 아니어도 조금 조금씩 들뢰즈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고 있다. 이렇게 화려하고 시원한 철학책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아주 옛날에 읽었던 니체의 "선악의 피안을 넘어서"를 제외하면?).

 

들뢰즈 가타리의 책은 종합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종합하려 하고 있으므로. 또, 분열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두의 그 유명한 귀절에서 알 수 있듯이 분열증적인, 분열자의 긍정적 관점 하에서 전체 기획이 수행되고 있으므로. 그리고 서문에서 푸코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윤리적인, 실천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분열자의 긍정적 관점을 실천 요강으로 내세우고 있으므로.

 

내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그 실천적 부분과 존재론 사이의 관계이다. 예를 들어 사르트르에게는 몸이 근원적 우연성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인간실재의 기획의 대상은, 이러 저러한 사물 대상이 아니라 인간실재의 존재 그 자체가 된다. 다시 말하면 사르트르는 자아 이전의 비인격적 장에서 출발하면서도 개체성, 총체성의 방향으로 사고하는 것이다(사르트르적 관점에 따르자면 개체성은 없어서는 안되는 것, 즉 주어진 것이고, 총체성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 즉 사실적 필연성이라는 것이다).

 

들뢰즈 가타리는 훨씬 더 급진적이다. 기계라는 개념은 우주의 모든 것을 동질화시키는 것 같다. 모든 것이 기계이다. 나의 손도, 저 태양도. 흐름이 있고, 흐름을 이어 주는, 흐름을 발생시키는, 흐름을 끊는 기계들, 그 기계들의 단속적 연결들만이 있을 뿐이다. 개체성도 총체성도 없다. 아니, 그러한 것들은 환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엄격히는 환상 역시 실재라고 할 수 있지만).

 

매우 흥미있는 모델지만 즉각 드는 생각은, 그것은 마치 튜링 머신처럼 매우 추상적인 사고방식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각 층위에서의 자율성을 믿는다. 예를 들면 물리적 층위와 생물학적 층위에서는 다른 법칙들이 등장하며 이들은 환원불가능하다고 믿는다(원자단을 들여다 보는 물리학자들이 진화론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들뢰즈 가타리의 책은 논증적이라기보다는 선언적으로 읽힌다(혹, 푸코가 서문에서 이 점을 지적한 것은 아니었는지?). 논리적 간격은 선언으로 밖에 매울 수 없으므로.

 

정리하자면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비인격적 장의 환원 불가능한 부분을 어디까지 잡아야 하는가 하는 것과, 그러한 존재론적 단위가 실천적 차원과 어떤 관계에 놓이는가 하는 것이다. 구체적 예를 들어보면, 예컨대, 원시 사회가 고대 국가로 접어들 때, 혹은 현대의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사회는 끊임없이 위계화, 관료화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 데, 이러한 현상을 사유하는 기본 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힘인가, 욕망인가, 혹은 희소성인가? 그리고 이러한 항들은 주관성을 어떤 것으로 암시하고 있는가?

 

당분간 들뢰즈 가타리를 읽게 될 것 같고, 덕분에 존재론-인식론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사회 존재론적 차원으로 관점이 순식간에 이동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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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과의 대화.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어떨까? 나. 건강과 지력 등이 유지된다고 한다면 나쁠 것 없을 것 같다. 그. 정말? 난 정말 끔찍할 것 같은데! 나는 그가 몸서리를 치면서 혐오를 표하는 것을 보고, 그가 지금 과장을 하고 있거나, 자신의 현재 삶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겠거니 하는 생각을 했다. 


죽음은 우리에게 그냥 주어지는 우연성에 속한다. 그리하여 나는 진정으로 죽음을 실감하지는 못한다. 예컨대, 나는 나의 나이 먹음을 실감할 수 없다. 나는 나의 나이 먹음을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보이는 반응을 통해서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는 나의 나이 먹음을 연기하게 된다. 죽음도 꼭 마찬가지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죽음은 우리가 삶에서 이루어 놓은 것을 대부분 무효화시킨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나의 모든 행위들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곧 무효화될 것이므로.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계속 삶을 살아간다. 어떤 철학자는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은폐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죽음이란 실감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사르트르)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스티브 잡스는 인간의 유한성에서 매우 참신한 생각을 해냈다. 만일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일에는 우선순위가 없을 것이며, 이 일은 해도, 안해도 그만이 될 것이며,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의 독자성, 고유성은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유한성 속에서 선택된 것만이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다면, 그 역시 인간에게 우연성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즉, 인간의 삶이 유한하든, 무한하든, 그러한 것은 인간에게 실감이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인간은 그저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내가 교사라면 내가 교사의 역을 연기하는 것은 실천적 의의를 갖는다. 예컨대, 학생들에게 숙제를 시킬 수 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사고하는 것은 거의 아무런 실천적 의의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공자님이, 군자는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진리에 적중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 마지막 페이지들에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그려져 있다. 90이 넘은 중국 노인들이 구약 성경을 읽기 위해 히브리 언어를 붓으로 그리며 배우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보통 놀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연세에, 차라리 다른 걸 하시는 게... 그러나 다른 어떤 것을? 그리고 왜 하필 그것을? 이 중국 노인들의 위대한 점은 죽음이 실감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분들은 90 노인 역을 연기하지 않는다. 


나는 죽음에 대한 동양적 사고에 대해 그 분에게 이야기했지만, 뜻밖에도 그 분은 죽음의 현전, 유일신 개념 등이 심오한 사고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양적 사고가 실제적인 의의를 갖고 있을 수는 있지만 또한 뭔가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서구 중심주의라는 푯말을 붙여놓기 좋은 주장임에는 분명하다(터키 출신이다). --어쨌든 이제는 동양 중심주의라는 말도 나올 때가 되었으므로.


철학이 대단한 무언가를 전해 줄 수는 없다. 철학은 단지 정돈할 뿐이다. 우리는, 그래 그것이 맞다, 라고 느낄 수 있다. 그때 철학은 지혜에 속해 있던 것을 다시 진술한 것의 모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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