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저분함 주의...)


최종적으로 정착할 LLM 모델로 제미나이를 선택하여 어제 구독을 시작했다. 한달 무료다. 


LLM 모델에게 내가 원하는 수준의 철학적 글을 쓰게 하는 것은 아직 무리다. LLM 모델은 창의적인 부분을 날려버리고 글을 평균으로 회귀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구독을 결정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아이디어를 검증하는 과정에서 LLM에 질문했던 것들이 LLM을 학습시키는 데 다시 사용되겠지? 그렇다면 종국에는 LLM을 통해 나오는 모든 것들이 평균적인 것이 되겠지? 그러나 뭣이 문제란 말인가? 지금이 하나의 거대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는 시점이라면 말이다. 그 끝점 어느 근방에서 읽을 만한 철학적 책을 쓰고자 고투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아이리스 머독이, 소설이 종말을 고하는 시점 근방에서 소설 쓰기를 시작하는 어느 작가의 이야기를 하고 있듯이...)


얼마 전에 젊은 한국 소설가를 추천받기 위해 유튭에 들어갔다 헤매다 엘레나 페란테라는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의 "마이 브릴리언트 프렌드." 드라마로도 나왔다 하길래 시즌1을 샀다. 제1화를 보고 나서는 책을 사기로 결정했고 4권 합본으로 1300 페이지 특별판을 샀다. (이 특별판이 잘 안팔렸는지 50% 할인이었다.) 


첫 몇 페이지를 읽자마자 작품에서 풍기는 고전의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책을 매우 매우 지저분하게 본다. 그러나 이 책에는 어떤 밑줄, 어떤 메모도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읽고 있고, 원어로도 읽고 싶어서 이탈리아어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마저 하고 있다. 그리고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이 책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높은 평가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알아 볼 사람은 알아본다는 것.


이 책의 무엇이? 그것은 드라마에서 표현될 수 없는 것이고, 짧게 요약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문장 곳곳에 낑겨 있다. 그것은 작가의 깊은 관찰력, 성찰, 감수성, 통찰 등을 문득 문득 느끼게 하는 그런 것이다. 짧게 말하면 책의 고전적 풍모. 이에 대한 감수성이 아직 인류에게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제 아내와 긴 산책을 했다. 우리는 "마이 브릴리언트 프렌드"를 동시에 읽고 있는 중이다. 내가 물었다. 엘레나 페란테는 정말 훌륭한 작가라고 생각해. 그런데 나는 릴리와 레누 사이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할 수 없어. 그것을 우정이라 불러도 되는 건가? 그런 관계가 실재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작가가 인위적으로 창조한 것인지도 모르겠어. 내가 남자라서 그럴까? 둘의 긴장 관계가 우정 안에 어떻게 포용될 수 있는지 모르겠어...


그러므로 결국... 시대의 종말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지속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인류는 계속 대화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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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책 작업을 하고 있다. 네들러가 스피노자 전기 서문에서 말한, 스피노자 철학의 출전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일은 한 사람의 생애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스피노자 가계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져온 전통이 있고 네덜란드에 정주했을 때 그곳 사람들의 전통, 주로 스피노자의 친구들의 사고를 형성한 전통이 있고 등등... 심각하게는 스피노자 후대의, 스피노자가 주요한 추동력 중 하나였던 거대한 독일 관념론 운동이 있다. 이 마지막 것에 속하는 철학자 한명을 연구하는데만 연구자의 전생애가 갈려들어갈 판이다. 아, 그리고 스피노자의 진리성 문제, 즉 그의 현재성, 혹은 현대성이라 불려야 마땅한 문제가 있다... 등등.


그렇지만 머지않아, 늦어도 한 세대 안에 그런 종합판 스피노자 연구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AI 때문이다. AI의 빠른 발전은 인문학 분야에 있어서도 사람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한다. 그리고 LLM 분야에 있어서도 슬슬 옥석이 가려지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나는 어떤 아이디어가 있으면 LLM에 넣어서 의견을 묻는다. chatgpt 최신 버전은 하나마나한, 고등학교에서 대학 수준의 답변을 해준다. 그러나 제미나이 3 버전이나 클로드 opus 4.5 버전은 대학원생 수준급의 답변을 내놓는다. AI의 진보는 이제 시작 아닌가? 이 기술이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가줄까? (이 기술이 없다면 지금 내가 꿈꾸는 수준의 기획을 완수하는데 나의 평생을 갈아넣어야 할 것이란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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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 아이가 지난 주 수요일에 제대하였는데 이번 주 화요일에 출국하여 50일 일정으로 유럽 여행을 시작했다 한다. 11월 말경 영국에 오는데 우리 집에도 몇 칠 묵게 될 것 같다.


이 얘기를 듣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제대하자마자 집을 떠나 50일간 유럽 여행이라니! 젊음이란 대단허다! 


낯설고 긴 여백을 채우는 것을 우리는 열정이라 부른다. 예컨대, 시스타나 성당 천정의 광막한 공간을 가득 채운 것은 미켈란젤로의 열정이었다. 기획, 상상력, 육체적 고투, 성당 당국자들을 적절히 다루는 정치, 스스로를 새로움에 끊임없이 열려 있도록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 등등... - 그래서 열정이란 말은 요즘 말로 역량이라는 말과 비슷하다. 


암튼 요즘 세상에 열정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열정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니셔티브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문화적으로 말해서 한국은 이니셔티브를 취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다. 모난 돌이 정을 먼저 맞는다느니, 나대지 말라라든지, 잠자코 있으면 중간은 간다든지, 특히 인성이나 윤리적 평가에 대한 광적이고 집단적인 집착을 보면 그렇다. 그래서 예컨대, 한국의 코로나 백신 정책 얘기를 들으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다른 나라의 백신 접종 결과를 보고 문제가 없으면 백신 접종을 시작하겠다니 국가 정책의 기준이 이래도 되는건가? 불확실성의 사실성을 전제하고 스스로의 기준과 필요에 의해 주도적으로 사업을 해나가는 것이 열정이고 열정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갖는다. - 예컨대, 활기 있음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 것이다. 즉, 그 자체로 긍정적인 것이다.


한국의 문화적 특성을 논외로 하고 말한대도 현대의, 말하자면 사상적 분위기 역시 열정에 적대적이다. 현대적 사상가들의 눈에 주체란 이니셔티브를 취하는 존재가 아니라 구성되고 구조화되는 존재이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사회 구조의 결과물로 환원하여 이해하는데 너무도 익숙하다. 그러면 현재의 나의 실존에 내가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현재의 나의 실존의 상당 부분은 나의 행위들의 결과이다, 라는 자명한 명제가 울려나온다. 그러면 현대는 또 다른 처방을 제시해준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만연한 개념.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자기기만적이고 음울하다. 음울하다? 이니셔티브가 열정과 역량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스스로에게서 이니셔티브를 제거한 사람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활기없음. 


이재명 대통령과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놀란 장면이 있다. 한 2030 남성이 청년 실업 대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청년 실업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대기업에 노동 유연화 정책을 시행하여 청년들이 좋은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자기와 동류인 성별, 세대, 지역, 학연 등의 정체성 집단에서 하소연 겸 상식처럼 주고받던 얘기를 그 정체성 집단 밖에서 하게 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니셔티브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자에 추종적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정체성 그룹에 준거하여 사고하게 된다. 아니 그것은 사고가 아니라 무사고다. 그리하여 열정이 없는 사람은 지루하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창출할 힘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 '내것'을 더 가져가는지에 매우 매우 민감하다. 그의 세계는 좁고 재미가 없다.


스피노자는 진리는 진리와 거짓을 가르는 기준이라 말했다. 활기있음과 활기없음을 나란히 놓고 어느 것이 더 가치있는 것인가를 분석할 필요는 없다. 전자가 좋은 것이다. 그리고 전자가 드물어지는 것을 활기없음이라 한다. 활기없음을 근절하는 방법은 그 옆에 활기있음을 놓으면 된다. 열정 옆에 놓인 열정없음은 얼마나 초라해보이는가? 내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 옆에서 남탓만 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초라해보이는가? - 이것이 우리가 열정 넘치는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열정 넘치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진정한 이유다. 열정 넘치는 사람은 나같이 게으른 사람에게도 열정을 전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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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희생'을 보았다. 조금은 이상한 경로로, 유튭에서 인터스텔라 리뷰를 보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보게 된 영화다. 다행히 유튭에 전편이 올라와 있었다. 2시간이 훨씬 넘는 상영 시간에, 기존의 영화 문법과는 많이 다른 영화였기 때문에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기존의 문법에 지겨움을 느끼는 사람이나 그런 문법을 깨어버리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참조가 될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모로... 


영화는 많은 여운을 남겼다. 모든 좋은 예술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의 근원 조건을 되사유케 하는 것 같다. 사유란 일종의 외적 타격에 의해 촉발된다. 익숙함에 익숙해 있는 한 사유는 여름날의 동물원 곰처럼 비비적거릴 뿐이다. 내 생각에는, 사유를 일깨우는 것이 예술의 본원적 의미인 것 같다. 즉, 예술은 창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일깨우는 것이다. 혹은 인간의 근원 조건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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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장에서는 책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잘 시간 등의 방해만 없다면 한없이 앉아서 읽을 수 있는 책과 몇 십분 지나지 않아 엉덩이가 들썩들썩해지는 책. 첫 번째 종류의 책은 약간의 가책을 느끼게 하고 두 번째 종류의 책은 어렵게 해독된 단 몇 문장에도 감사함을 느끼게 한다. 인간지사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가치란, 전통에 따르면, 얼마나 얻기 힘드냐에 따라 측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니스 시절의 스필버그는, 사람들이 자기 영화를 보러와서 실컷 즐긴 후 극장을 나가서는 우디 앨런에 대해서만 얘기한다고 불평을 털어놓는다. 우디 앨런의 영화가 더 만들기 어렵고, 어떤 의미에서건 더 가치가 있는 영화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므로 옛날의 스필버그에 동정이 간다. 여튼 이 또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다. (마치 도통한 사람인냥... 정작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책을 읽으면서 한 숨 돌리고자 딴 짓을 하는 것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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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9-10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없이 앉아서 읽을 수 있는 책...이런 책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이 점점 줄어드는 거 같아요. 어쩔 때는 읽어두 재미가 없어 죄다 덮고 드라마만 본 적도 있어요. 요상하게 어떤 드라마를 봐도 재미가 없을 때가 있는데, 그때 책을 보면 다 재밌어 지는 게...참 요상하더라구요..ㅎㅎ

그레드릭 제임슨의 책...지루하긴 하죠..ㅎㅎ

weekly 2025-09-11 04:1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요즘은 이경규씨가 자꾸 생각나는 계절이네요. 젊었을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얼 가장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이경규씨는, 독서를 많이 하고 싶다고 했죠. 희극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었어야 한다는 뒤늦은 깨달음에서 나온 얘기일 것입니다. 저랑 처지가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