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동당에 가입했다. 물론 나는 시민권자도 아니고 조만간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내가 한국에 사는, 한국을 사랑하는 영국인이고, 한국이 극도로 우경화되는 모습에 안타까워 하고 있고, 마침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작은 일이 있다면, 내가 한국을 사랑한다는 그 표현은 오로지 내가 그 어떤 작은 일을, 그것이 어떤 것이든 실제로 수행함에 의해서만 내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이번 탈퇴 결정이 긴축 정책과 심화된 계급 갈등의 결과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데, 이건 거의 자명한 이야기다. 그래서 문제는 이런 상처를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집권 보수당은 이런 문제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보수당은 장애인 복지 혜택을 줄이는 정책과 부자들 세금을 깍아주는 정책을 동시에 발표할 정도로 아무 감수성이 없다. 노동당도 마찬가지다. 대처 이후 집권기 동안 노동당은 이런 문제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야당이 된 지금도 다를 건 없다. 노동당 내에서 유일하게 이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은 현 노동당 리더인 제레미 코벵이다. 그래서 어떻게 될까?

영국에서는 국민 투표가 끝나자마자 블레임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 화살은 누구에게 갔을까? 카메런 총리? 아니면 보리스 존슨? 아니다. 제레미 코벵에게 갔다. 영국의 얼마 되지도 않는 진보 신문 중 하나인 가디언이 먼저 포문을 열고, 노동당 예비 내각 멤버들이 아침에 한 명, 저녁에 한명, 이런 식으로 잘 계획된 작전마냥 사임에 나섰다. 현재 예비 내각의 2/3 이상이 사임했고 코벵에 대한 불신임에 투표한 의원들은 80%에 달한다. 도대체 왜 이럴까? 국민투표로 EU 탈퇴 결정이 내려졌는데 왜 코벵이 그 책임을 져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80%에 달하는 의원들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누구나 인정하는 하나의 답이 있다. 그것은 노동당 의원들이 코벵이 electable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민투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것은 구실에 불과한 것이다. 왜 코벵이 electable하지 않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코벵이 긴축 정책을 완화하고 계급 갈등을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럴려면 먼저 부유층에게 세금을 많이 거둬야 한다. 영국은 EU 내에서 소득 불균형이 가장 심한 나라이지만 고소득층에 대한 최고 세율은 미국보다도 낮다. 계급적 분리가 심화될 수 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코벵의 이러한 기득권층에 대한 도전에 영국의 중앙 정치권은 화들짝 놀란다. 보수당도 놀라고 노동당도 놀란다. 기득권에 도전해서는 선거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지혜인 것이다. 그것은 또 노동당 역시 기득권에 속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당 의원의 80%가 비토하는데 코벵이 리더직을 수행할 수 있을까? 노동당 의원의 80%는 코벵을 비토하지만 평당원의 과반수는 코벵을 지지한다. 곧 노동당 리더 경선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나는 평당원으로서 코벵에게 투표하기 위해 소정의 당비를 내고 노동당에 가입한 것이다. 노동당 현직 의원의 절대 다수가, 그리고 거의 모든 언론이 코벵을 비토하고 있기 때문에 코벵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에 어떤 의의가 있을지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다. 다만 나이 먹는다는 것이 좋은 것은 어떤 좌절적인 상황에서도 마음을 다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해 간다는 것인 것 같다.

어쩌면 영국 워킹 클라스의 분노와 좌절을 노동당이 아니라 UKIP이 받아안을 수도 있다. 워킹 클라스 사람들은 산업을 살리고 커뮤니티를 복원하자는 코벵의 주장에 적개심을 보일 것이다. 내가 가는 피쉬앤칲스 가게마다 놓여 있는 신문은 언제나 썬이나 데일리 메일같은 어처구니없는 우파 신문들이다. 영국 서민들의 심성에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이런 신문들인 것이다. 영국 총리 아버지가 파나마 페이퍼에 연루되어 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데일리 메일은, 상속세는 이중 과세이고 열심히 돈 벌어 자식에게 물려준다는 생물학적 동기를 부정하는 것이니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코벵이 성공하기란 사실상 쉽지 않을 것이다...

내게 영국의 EU 탈퇴 사태가 의미하는 것은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계급이 존속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제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승리한 자이거나 승리한 자에 동화된 패배한 자이다. 그러나 승자 중에는 좀 더 지혜롭고 솔직한 사람도 있다. 워렛 버핏이 그렇다: "There's been class warfare going on for the last 20 years and my class has won." 코벵은 이미 진 전쟁을 배경으로 등장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지게끔 운명지워져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미 끝났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도 시간의 열려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 계급은 존속한다는 것, 거기에 갈등이 개재해 있다는 것, 거기에 운동이 놓여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은 철지난 거대 서사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매일 겪는 구체적인 현실의 배경이다. 만약 철학에 어떤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실로 돌아가라, 라는 것일테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가 곧장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유년기에 있다는 것, 즉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언제나 그렇듯 이것이 곧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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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국을 사랑한다. 영국의 자연, 영국의 기후, 피쉬앤칲스, 펍, 소박하고 실용적인 사람들, 런던의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 등등을 사랑한다. 내가 런던에 산다면 나도 런더너다. 반면, 내가 파리에 산다고 파리쟝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열려있음이 영국의 가장 큰 장점이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다. 완벽한 곳은 없기 때문이다. 테레비젼에서 런던에 사는 이방인들을 인터뷰한다. 이네들의 심정은 한 마디로 정 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애초에 정을 붙일 일이 없다면 정 떨어질 일도 없을 것이다...

 

탈퇴파 인사들은 아직도 헛소리를 하고 다닌다. 영국이 EU 안에 있으면서 누리던 모든 혜택은 그대로 누리면서 이제 영국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golden opportunity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냥 웃으면 된다. 어짜피 이걸 믿는 사람도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영국의 미래는 매우 분명한 것 같다. 즉, 영국은 EU 밖에서 EU로 남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미 분리 불가능하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예만 들어보자. 하나는 북아일랜드 문제다. 만약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의 국경이 EU의 경계선이 되어 사람들의 이동이 통제된다면 북아일랜드의 지금도 위태로운 평화는 결정적으로 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은 EU에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국경에 대한 현상 유지를 요청할 수 밖에 없다. 또, 영국은 금융업으로 먹고 산다. 그러므로 금융업을 지켜내기 위해서 영국은 EU에 영국의 금융 영업 라이센스만 가지고도 EU에서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해야 한다. 즉, EU 단일 시장에 대한 접근을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허용해 줄 것을 요청할 수 밖에 없다. 반대 급부로 EU는 노동 이동의 자유 등을 요구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결국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영국이 EU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지 않는다는 것 등을 제외하면 말이다.

 

영국의 탈퇴가 EU 해체의 계기가 될까? 내 생각에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인 것 같다. 경제 강국이자 강력한 자국 통화를 갖고 있는 영국도 EU를 탈퇴하면서 휘청이고 있다. 자국 통화를 갖고 있지 않은 다른 EU 국가가 EU 탈퇴를 시도한다는 것은 거의 망상적인 생각이라고 본다. EU 입장에서는 항상 징징대고, 예외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영국이 EU를 탈퇴함으로써 EU의 결속력을 더 높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쪽에서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더라.

 

영국의 EU 탈퇴 결정의 결정적인 문제는 역시 이민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이민 문제는 일종의 매맞는 아이에 불과한 것 같다. 영국의 정치인과 언론은 영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덮기 위해 EU나 이민자 문제를 들먹여 왔다. 뉴스를 보니 콘월 지역은 탈퇴가 우세한 지역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EU 보조금의 혜택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 영국의 낙후된 지역은 EU의 보조금으로 개발 사업을 많이 벌이고 있는데, 바로 이런 지역들에서 탈퇴 요구가 가장 많았던 것이다. 또, 이민자들이 영국 경제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민자들이 복지 혜택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고까와 한다. 내가 아는 분도 영국에 투자 이민을 왔다. 집 사고, 세간 사고... 등등 한국에서 번 돈을 영국에서 어마어마하게 쓰고 있다. 영국인 직원도 최소 세 명 고용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3년 있다가 심사해서 통과 못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식으로 영국에 돈과 기술을 들고 오는 이민자들이 엄청 많고, 영국은 이들의 수를 결코 줄일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영국의 국립 의료 서비스는 만성적인 일손 부족에 시달린다. 진료 받으러 갔다가 두 어 시간 기다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필리핀까지 가서 간호원 등을 모집해 온다. 동구권에서 의사들도 많이 데려온다. 그 혜택을 직접적으로 받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서민들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이민자들 나가라는 선동에 휘말려 영국의 EU 탈퇴에 투표를 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 잉글랜드, 웨일즈의 화이트 워킹 클래스만 비난할 수는 없다. EU의 교두보로 영국은 해외의 어마어마한 투자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 투자는 거의 런던에만 집중되고 있다. 런던과 런던 이외의 지역의 격차는 계속 벌어지고만 있다. 런던 이외 지역의 산업은 경쟁력도 없고 이미 공동화된 곳도 많다. 얼마 전 제철소가 문닫는다고 해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중요 산업이 허물어져 가는 것이고 실업 때문에 지역 경제가 엉망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뉴스를 통해 그 제철소를 보고 난 내 느낌은, 저렇게 낡고 영세해 보이는 공장이 어떻게 여태까지 돌아갈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본 한국 포항제철의 시설이 훨씬 현대적으로 보인다. 잉글랜드 북부의 어느 동네는 동네 사람이 거의 전부 복지 수당에 의존해 살고 있는 곳도 있다는 신문 기사를 본 적도 있다. 테스코같은 대형 할인 매장 계산대 말고는 일할 곳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긍심을 잃어갈 때 악마와 같이 접근하여 이 사람들을 하이잭 해 가는 세력들이 바로 보리스 존슨과 같은 포퓰리스트이고, UKIP과 같은 극우당이다.

 

영국의 극우당인 UKIP은 대기업, 런던의 은행가들, 기득권 세력, 영국 의회의 정치꾼들에 맞서 싸우자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일말의 진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극우당이 원하는 것은 단지 사람들의 머릿수, 그리고 그들의 분노 뿐이다. 기업가들과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는 UKIP의 경제 정책이 기업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영국에서 가장 강력한 EU 지향적인 도시인 런던의 시장을 역임한 보리스 존슨의 경우는 어떨까? 그는 진정으로 EU 탈퇴를 원했을까? 사람들은 보리스 존슨이 수상이 되고자 하는 야망으로 EU 탈퇴 운동을 주도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이번 사태의 정확한 양상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소외된 화이트 워킹 클라스를 포퓰리스트들이 하이잭해 간 것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대선도 이렇게 될 위험이 있다. 뜻밖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버니 샌더스와 트럼프의 지지층은 상당히 겹치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미국의 소외된 화이트 워킹 클래스가 기득권 층을 뒤엎고자 유일한 대안인 트럼프를 지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결코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아마 히틀러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는 소외된 화이트 워킹 클라스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영국 정치권의 실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영국에는 좀 더 복잡한 측면이 있다. 워킹 클라스 문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 사람들은 어마 어마한 성취 동기로 가득 차 있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돈 벌고 하여 계급 상승을 이뤄내려 노력한다. 영국에 이민오는 사람들도 어마 어마한 교육열로 중무장하고 있다. 그런데 영국의 워킹 클라스에는 바로 이런 동기 부여가 없다. 이 사람들은 상위 계급으로 상승한다는 관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나이고 이것이 나의 인생이고 나는 이렇게 살 것이다. 왜 내가 아득 바득 출세의 사다리를 올라가야 하는가? 그렇게 산다고 하여 내가 더 행복해 지는가? 영국 워킹 클라스의 이런 세계관은 빌리 엘리어트, 히스토리 보이, 에듀케이션 같은 영화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이들의 세계관을 존경한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의 시대가 이들을 그냥 놓아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국의 일반 공립 학교에서 가장 학력이 떨어지는 학생은 화이트 워킹 클라스 남자 아이다. 이들이 멍청해서가 아니라 동기 부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 공립 학교보다 상위의 학교는 이민자들의 자식들로 채워진다. 화이트 워킹 클라스 부모들은 아이를 준비시켜 좋은 학교에 보낸다는 개념 자체가 없고, 그러므로 그런 정보를 찾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튼 스쿨과 같은 최상위 학교는 거의 화이트 귀족 계급의 자식들로 채워진다. 내가 아는 분이 아들을 어찌어찌해서 이튼 스쿨에 보냈는데, 개교 모임때 보니 학부모들이 거의 화이트에 귀족스러운 용모를 갖추고 있더라고 하더라. 영국의 화이트 워킹 클라스는 바로 이러한 이중의 좌절 속에 놓여 있다. 영국 정부는 이들 화이트 워킹 클라스 사람들을 잘 교육시켜서 국가의 생산성을 높이고 싶어한다. 한국이나 중국의 교육 제도를 참고하여 학생들의 학력을 높이려고 한다. 그러나 번번이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왜 우리를 자꾸 미들 클래스로 올린답시고 압력을 주는가! 문제는 워킹 클라스 문화, 그리고 그것의 뿌리인 계급 사회에 있기 때문에 영국이 이 문제를 쉽게 풀지는 못할 것 같다. 적어도 몇 세대는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음... 사실 이렇게 길게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어제 테레비젼에서 영국 노동당의 리더 제레미 코벤의 연설을 들었기 때문이다. 코벤은 현재 위기의 남자다. EU 잔류 운동을 시원찮게 했다는 이유로 동료 의원들로부터 십자포화를 맞고 물러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야당 예비 내각의 2/3 정도가 이미 사임한 상태고 오늘 아마 불신임안이 통과될 것 같다. 이런 와중에 코벤을 노동당의 리더로 만들어준 젊은 지지자들이 어제 의사당 앞에서 번개를 했고, 코벤은 그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을 한 것이다. 내가 보기엔 코벤은 영국의 문제를 제대로 인지하고 대처하고 있는 유일한 정치인이다. 노동당 의원들은 코벤으로는 선거를 이길 수 없으니 물러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동당이 집권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일까? 노동당이 갖고 있는 비젼이 있을까? 내가 보기엔 제레미 코벤이 곧 비젼이다. 제레미 코벤을 축출하고 나면 노동당은 다시 비젼 없는 정당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제 젊은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한 코벤을 보고 아내는 바로 노동당에 가입했다. 나는 잉글랜드와 아이슬랜드의 축구 경기를 보느라 가입하지 못했다. 영국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시대의 문제는 워킹 클라스, 즉 서민들을 포퓰리스트에 빼앗기지 않고 잘 지켜내는 것이다. 나는 영국이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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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10시에 투표가 끝났고, 개표 방송을 보다가, 별 일 있겠어 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었다. 그리고 새벽에 그야말로 쇼킹! 가디언 신문을 사보니, 아직 결과가 기사에 반영되지 않았는데, 이번 투표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만큼, 탈퇴파의 실망을 잘 추스려줘야 한다는 기사가 일면에 떡 실려 있었다... 탈퇴가 현실화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이번 국민투표를 애초부터 혐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EU 탈퇴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면서 정작 집권당은 잔류를 주장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이번 투표는 순전히 집권당의 정략적 이익 계산에 따라 벌어진 어마어마한 소모전일 뿐인 것이다. 그래도 이번 투표를 거치면서 영국의 극우당이라 할 수 있는 UKIP이 사라져서 영국은 유럽에서 극우당이 준동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나라가 될 수도 있겠다고 긍정적인 면을 애써 찾으려고는 했었다. 이제 모든 것이 불확실성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특히나 낙담스러운 것은 24세 이하의 젊은 유권자들은 70% 이상 잔류를 희망한 반면 노년층에서는 과반수가 탈퇴에 투표를 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EU 탈퇴는 영국 젊은이들에게 학업과 취업에 있어서 폭넓은 옵션을 박탈하는 것과 같다. 물론 이번 선거 결과를 세대 대결로 보는 것은 큰 오류이겠지만, 세계 각국(한국, 미국, 영국 등)에서 젊은 유권자들의 좌절을 바라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물론, 이들 젊은 세대가 자신들의 주장에 진지하다면 그들이 노년 세대가 되었을 때 세계는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결정은 내려졌고 스코틀랜드는 또다시 독립 투표를 준비할 것이라는 성명이 나오고 있다. 카메룬 영국 수상은 유나이티드 킹덤을 해체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될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 같다. 영국은 지금 정략적 불장난의 후폭풍 속에서 시야를 완전히 잃었다. 참으로 역사적인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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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5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7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이와 타자 현대의 지성 108
서동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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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리뷰들을 참고하여 한국 다녀오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산 책이다. 보통 긍정적인 리뷰들을 잘 믿지 않는데, 이 책의 경우엔 달랐다. 궁시렁 없이 내내 즐겁게 읽었다. 그리고 그동안 한국인 저자의 철학 저술들을 외면해 온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저자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이 책은 프랑스 출신 철학자들이 주로 주제화한 현대 철학의 커다란, 아마 가장 커다란 문제인 주체성과 타자성에 대해 들뢰즈를 중심으로 레비나스, 사르트르 등등의 철학자들을 호명하며 명료하고 신뢰성 있게 서술하고 있다. 이 '명료성'과 '신뢰성'이라는 말이 아마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을 지시할 것이다. 즉, 저자가 정직하다는 것이다. 철학 저술들이 이러 저러한 온갖 종류의 해석가들의 이름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경우는 아주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저자가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고 그것에 대해 자신의 언어로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료성과 신뢰성은 저자의 이러한 정직한 노고와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이 책의 한계를 언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라딘에 리뷰를 쓴 다른 어떤 분이 지적한 것처럼, 각 철학자들의 관계가 어느 정도는 병렬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적은 항상 구체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 책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예를 하나만 들기로 하겠다. 저자는 레비나스의 타자론이 사르트르에게 크게 빚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전혀 비밀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슷한 사상을 표명하고 있는, 두 철학자의 문장들을 병렬적으로 비교하는 것 이상의 작업에 대한 요구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저자는 이런 종합적 검토의 계기를 계속 놓치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사르트르는 타자의 시선에 대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상적으로 파악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수치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수치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대자와 하나의 통일을 이루고 있는 가치에 대한 의식이다. 그러므로 수치란 본질적으로 윤리적 의식인 것이다. 조금 더 말해 보자. 저자는 레비나스와 사르트르의 형이상학에 대한 견해가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형이상학에 대한 사르트르의 견해는 칸트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형이상학의 긍정성을 인정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즉, 존재론의 성과들에 종합적 전망을 제시해 주는 한에서 형이상학도 의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타자 이론에 대해 이러한 형이상학적 종합을 적용한 결과는, 사르트르 자신에게도 놀랍고 우리에게도 놀라운 것으로, 타자성은 나와 타자들이 하나를 이룬 전체의 일종의 모험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상의 서술을 더 상세하게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컨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내가 선택한다는 것은 인류에 대해 선택한다는 것이다" 라고 쓰면서 사르트르가 상정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타자와 내가 하나를 이룬 전체에 대한 이론일 것이라는 점이다. 즉, 레비나스에서 특히 분명한 것처럼 윤리성은 타자성에서 오고, 사르트르의 경우 그것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갖지만, 어쨌든 타자성과 윤리성의 관계에서 두 철학자의 이론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저자는 이러한 부분을 어느 정도는 기계적이고 병렬적으로 처리한 감이 있다. 그래서, 예컨대 주체라는 개념을 고수한 레비나스와 주체를 소거한 들뢰즈의 입장을 단순히 병렬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금 여기를 반영하여 저자의 특권적 입장에서 종합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점이 저자의 한계를 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에게 있어 어떤 단계를 지시할 것이다. 이 책이 출판된 것은 2000년이므로,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저자의 다음 책들을 입수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나 더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저자는 프랑스 철학 연구자로 보이고, 프랑스 철학은 특히나 지역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현대 프랑스 철학은 무엇보다도 유럽의 역사성 속에서의 유럽인의 자기 의식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 철학자로서 일종의 분열 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분열 의식은 국내 프랑스 철학 써클 안에서 종종 매우 병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곤 한다. 제삼자에게는 분명 밥그롯 싸움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저질 논쟁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에게는 그런 자학적 자기 표출의 어떠한 징후도 없다. 즉, 이 책의 저자는 건강하다. 예컨대, 나는 저자의 우찬제에 대한 짤막한 평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다. 문학계가 철학적 개념을 끌어다 쓰는 것은 시비거리가 될 수 있다. 문학계의, 말하자면 외연 확장에 대해 철학계는 엄밀성에 주의할 것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개념의 인생 살이 아닐까? 사상의 경찰관이 되는 것은 사상의 연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천박한 직업 아닐까? 나는 저자 서동욱이 "이제 우리는 우찬제의 상처론과 타자론의 조우가 만들어낼 풍요로운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132페이지) 라고 쓴 부분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문학자(가)들을 존경하고 격려하고 들볶는 것은 편집장 이상으로 철학자의 일이기도 하다. 문학은 철학자의 소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외래적인 것에 대한 분열적 의식을 치료해 주는 것은 철학적 저술들 밖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어떤 사고, 지금 여기의 바탕 위에서 직접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어떤 사고에 주의하는 것 뿐이리라. 그것은 오로지 지금 펼쳐지고 있는 삶에 대한 주의, 곧 존경, 곧 사랑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리라. 나는 <차이와 타자>의 저자 서동욱이 이런 길 위에 있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건강한 저자들이 더 있겠지? 찾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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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2016-06-10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동욱의 책을 검색해 보았는데 <차이와 타자>에 후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책은, 어떤 독자(리뷰를 쓴 사람)의 말을 따르자면, 레비나스나 들뢰즈의 것이 아닌 서동욱의 철학이라 말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은 아직 출간되지 않은 것 같다. <차이와 타자>에서 보여준 서동욱의 명민함에 사람들은 그런 기대들을 많이 가졌었나 보다. 벌써 십여년도 더 된 이야기를 지금에서야 하는 것도 우습긴 한데... 어쨌든 우리의 기대가 타인의 야망을 규정할 방법은 전혀 없을 터이다. 세상이 우발적이고 만남적인 것이라면, 분명 기대라는 것에 할당된 자리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때에...
 

종종 들르는 어느 블로그에 도스토옙스키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글이었다. 솔직히 좀 놀랐다. 얼마 전 한 친구와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도스토옙스키가 신적인 위치에 있는 소설가, 철학으로 말하자면 플라톤의 위치에 있는 소설가라는 데 거의 순간적인 동의가 이루어졌었다. 다른 시각도 있을 수 있다는 걸 그 글을 보고 깨달았다. 취향 탓도 있고, 관점 차도 있을 테니...

여튼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한다. 예컨대 나는 "카라마조프"가 정말로 위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카라마조프"는 정말 재미있다. 엄청 두터운 소설이지만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가고 나면 도저히 손을 뗄 수 없는 작품이다. 특히 후반부는, 여느 통속 소설보다, 해리 포터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말하자면 도스토옙스키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다.

"카라마조프"에 등장하는 인물들 하나 하나는 다 개성이 있고 에피소드 하나 하나는 다 흥미롭다. 작가가 삶의 구석 구석에 주의 깊은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면 결코 간파할 수 없었을 삶의 작은 진실들이 거기 녹아들어 있다. 예를 들어 조지마 신부가 사람들을 맞으면서 인사를 하는데, 상대가 숙인 고개를 미처 들기도 전에 다음 사람을 향하는 장면이 있다. 이런 장면은 정말 웃기다. 왜냐하면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도 그와 똑같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 조지마 신부가 아닥들을 맞아, 한 아낙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장면은, 도스토옙스키가 삶에 얼마나 깊은 눈길을 두고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에 한 사람의 소설가가 있고, 그가 곧 도스토옙스키라는 것을. 또, 가난한 집 아이 에피소드도 정말 아름답다. 나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 이상의 삶에 대한 낙관을 거기서 본다. 

대심문관 에피소드는 지금 관점에서는 그닥 강렬하다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뻔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으니까. 어쨌든 거기엔 하나의 사상이 들어 있다. 어쩌면 위화감을 야기할 수 있는 이런 대목을 어떻게 소설 속에 집어넣을 생각을 했을까? 위화감이 나지 않도록 쓰면 된다. 프루스트는, 작가는 쓰고 싶은 이야기는 뭐든지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능력만 있다면 말이다. "카라마조프"에는 있음직하지 않은 인물들, 있음직하지 않은 사건들로 범벅되어 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그것으로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어 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삶의 진실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사실 성경이나 불경 등이 이런 것 아닐까? 있음직하지 않은 것들 속에서 현실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 나는 진정으로 "카라마조프"를 한 사람의 인간이 쓴 성경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친구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도스토옙스키 정도의 박력과 스케일과 깊이를 동시에 갖춘 이야기꾼이 다시 나타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 친구는 두 말 없이 동의. 나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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