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을 기초로 블로그 글을 작성하라: 딥시크 뉴스를 계기로 에아이의 성숙 정도가 궁금해졌다. 이러 저러 검색을 해보고 글쓰기에 특화되어 있다는 클로드를 선택하여, 내가 구상하고 있는 "스피노자를 찾아서" 라는 책의 서문 부분을 작성해보도록 하였다. 놀라웠다. 내가 머리 속에서 그리고 있던 장면을 그대로 출력한 듯 했다. 나는 더 테스트해보았다. 이번에는 요즘 읽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나의 요약을 제시한 후 이를 토대로 글을 써보도록 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나 자신의 개인적 관점, 해석 등등이 쇼펜하우어에 대한 일반적인, 피상적인 지식과 섞여 희석된 것이었다. 나는 나의 요약에 좀 더 충실한 글을 작성하도록 제약을 주었다. 그러자 내가 쓴 요약 정도의, 이도 저도 아닌 결과가 만들어졌다. 더 풍부해지지도 더 생생해지지도 않았다. 나는 생각했다. 에이아이가 적어도 철학을 논함에 있어 창발성을 드러내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구나. 그러나 문학적 서술 등에 있어서는 놀라운 성과를 보이고 있다. 기업의 문서를 작성하거나 소설을 쓰는데는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지 싶다.


---

이상은 이번 포스팅을 작성하기 위해 클로드 에이아이 모델에 프롬프트로 제시한 것이다. 원래는 클로드가 출력해준 그대로를 붙여 놓으려 했는데 그 결과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포기했다. 나의 결론은 이렇다. 에이아이가 아직 영혼을 갖고 있지는 않구나. 에이아이가 쓴 글에서는 급하게 짜깁기한 대학 레포트 과제물 냄새가 난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도 에이아이는 좋은 사실주의 작가가 될 수 있는 자질을 이미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소설가들은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1세기 한국에서 쿠데타가 가능한가? 답은,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쿠데타가 실제로 일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무겁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복합체로서의 한국 일반은 분명 쿠데타와 양립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쿠데타를 수용가능한 옵션으로 생각하는, 비례적이지 않은 특정 영역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대표적으로 군부가 그렇고 민정당계 역사를 공유하는 정당들이 그렇다. (예컨대, 군 지휘관들 중 박정희, 전두환을 영웅화하고 있는 이들의 비율은 국민 평균을 훨씬 상회할 것이다.) 이들이 정치적 사법적으로 실존적 위기를 겪는 권력자와 결탁되었을 때 쿠데타는 쉬운 탈출구 역할을 해줄 수 있다. 


내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영국에서도 쿠데타가 가능할까?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는 데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왜 영국에서는 쿠데타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일까? 한국과 영국을 가르는 차이점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이번 쿠데타 국면에서 윤석열이 쉬지 않고 입에 올리고있는 '자유민주주의' 라는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민주주의'와 같은 뜻인 것으로 생각하고, 윤석열이 말로는 민주주의라면서 행동으로는 독재자, 파쇼 짓을 하고 있네 라며 의아해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민주주의에 대한 초월적,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퇴행적 입장을 의미한다. 즉,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한국은 공산 세력인 북한과 붙어있기 때문에 서방식 민주주의를 했다가는 공산 세력의 암약을 방치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은, 특히 헌법 1조에 대한 수정적,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유보적 입장을 의미한다. 자유민주주의는 한국이라는 체제의 자기 수호를 제1가치로 여긴다. 간단히 말해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대한민국의 헌법과 양립가능하지 않다.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즉자적이지 못하다. 즉,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 정의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공산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정의한다. 이 얼마나 처량한 개념인가?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의 용법은 지극히 처량하다. '자유민주주의'를 언급하는 순간 '반국가세력'이 언급될 수 밖에 없고, 그러므로 '처단'이라는 말로 결말을 지을 수 밖에 없다. 자유민주주의자는 이 단순한 논리 회로 이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단순성을 마냥 비웃고 있을 수는 없다. 예컨대, 영국에는 없고 한국에는 있는 것이 바로 이 '자유민주주의' 라는 개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일 수 있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이고, 이데올로기는 실재하는 어떤 힘을 전제한다. 즉, 한국에는 북한이 붙어 있다. 북한은 부정할 수 없는 실재이다. 그리고 북한은 한국에 대해 실제적이고 임박한 위기를 초래하는 반국가세력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은 간단하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 한국의 객관적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즉, 그것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운명이다. 박정희, 전두환이라는 망령? 국민의 힘이라는 정당? 아, 그것은 한국의 운명이다.


그렇지만 이번 쿠데타의 전개 국면에서 우리는 분명한 희망을 본다. 이번 쿠데타는 4, 50년 전의 것과 양상이 분명 달랐다. 그 다름의 현상에 온갖 것들이 기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묶는 타래 중의 하나는 분명 민주주의에 대한 각성의 신장일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결코 스스로 소멸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의 소멸은 언제나 다른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을 전제하며 그 투쟁에서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탄핵안 투푯날, 나는 여의도에 모여든 시민들이 부러웠다. 그날은 승리가 예정되어 있는 날이었다. 누구 말마따나 승리의 가장 큰 보상은 승리 그 자체일 것이다. 모든 대의라는 대의는 다 가지고, 그 추운 겨울날 자신을 희생해가며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에게 그 날 민주주의의 승리는 생애 내에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일 것이다. 그날 여의도는 민주주의의 거대한 학교였다. 어쩌면 추우면 추울수록, 고생스러우면 고생스러울수록 그 승리는 더 달콤하게 여겨졌을지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내에게 윤석열이 계엄령을 발표했다는 전화를 받고 바로 유튭을 켰다. 나는 이런 경우라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매체를 주로 이용한다. YTN 라이브 채널로 들어갔다.


경찰이 국회를 에워싸고 있었고 계엄군이 국회 내로 진입해 있었다. 국회 의장은 착석해 있었으나 아직 성원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김광삼(나는 이 이름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이라는 변호사가 해설을 하고 있었다. 경찰이 국회를 봉쇄하고 있기 때문에 성원 인원수를 채우지 못할 것이다, 곧 계엄군이 회장에 들이닥쳐 의원들을 체포할 것이다, 각 방송사도 계엄군이 접수할 것이다... 등등. 


김광삼 변호사가 쿠데타와 계엄의 차이를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윤석열이 발표한 계엄은 그 성립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불법적이고, 1호 포고문도 헌법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앵커들도, "계엄군이 국회에 들어와서 의원들을 체포하는 건 불법이 아닌가요?" 같은 질문을 결코 하지 않았다. 


성원이 된 후에도 안건 상정이 늦어지며 상당한 시간이 지체되었다. 김광삼은 계엄군이 곧 들이닥칠 것이라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리고 김광삼의 어? 하는 당황스러움의 표현과 그 뒤를 잇는 침묵을 무시하며 계엄 해제 안건은 통과되었다. --- 어제 뉴스보니 계엄군 일선 지휘관이 회장 진입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하더라...


어젠가, 그젠가 계엄 관련 뉴스를 찾아보다 얼핏 김광삼이 윤석열은 내란죄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핏 하며 헛웃음이 나왔다. 권력과 언론에 관한 고전적인 일화의 실제 버전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목격하게 될 줄이야...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에 대해, 프랑스의 한 신문사가, "악마, 엘바섬을 탈출하다!"로 첫 기사를 내었다가, "황제 폐하, 마침내 파리 입성!"으로 마무리했다는 그 유명한 일화 말이다. 어쨌든 살 사람은 살아야 할 터이다.


이번 사태를 보며 새삼 나는 오바마의, 민주주의란 정말 어려운 것이라는 진단에 100% 동의하게 된다. 민주주의란 균형의 문제이며, 이를 위해 온갖 장치들이 그것 위로 주렁 주렁 달리게 된다. 문제는 그 장치들이 지극히 인위적인 것들이라는 것이다. 왜 저 악마같은 성범죄 현행범에게도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지? 왜 저 법망을 요리 조리 빠져나가는 부패 정치인들을 처단할 수 없는 거지? (윤석열의 경우라면) 저 반국가세력들을 현행법으로 처단할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나? (국회 경비대장의 경우라면) 어째서 나의 첫 번째 의무가 직속 상관의 명령이나 대통령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저 추상적인 헌법 구문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등등. 이런 수 많은 의문과 그에 따른 유혹을 추종하는 순간 균형은 깨어진다. 균형을 유지하기란 이토록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균형은 직접성에서 추상성으로 일보 나아가야, 즉 자신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성향이지만 동시에 기술이기도 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기술의 체득은 직접적인 경험에서 가장 잘 이루어지는 것 같다. 생활과 유리된 이념으로, 교과서로 배우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이번 경우라면, 국회 경비대가 국회 의장의 명령에 반하여 대통령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국회의 권능을 제한하게 하는 대통령의 명령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법이므로) 불법이 된다는 것을, 국회 경비대장 등이 중형에 처해지는 사례를 통해 국회 경비대에 체득될 것이다. --- 아마 이런 것이 민주주의란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의 깊은 의미일 것이다. 민주주의란 기술은 경험을 통해, 공포와 혼란을 계기 삼아, 그것을 교과서 삼아 체득된다... 


한국에서 친위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의 전개는 40, 50년 전과는 분명히 달랐다. 한국의 현실(분단 현실, 식민지와 오랜 군정을 겪은 현실 등등)과 문화(좀 더 직접적인 관계를 선호하는 성향 등등)는 유럽 국가들보다 한국에서 쿠데타나 독재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조건을 형성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번 쿠데타 사태가 민주주의 기술의 집단적 체득을 위한 강력한 계기를 형성할 것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것, 그리고 역사에 점프는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번 쿠데타 사태가 나쁘기만 할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잘만 하면 최소 비용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탄핵 당시에도 친위 쿠데타가 기획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 사태로 이런 잠복적이고 항존적인 위험은 이제 좀 더 덜 현실적인 것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가 현재 궁구하고 있는 부분은 지난 번 이 카테고리에서 말했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내게 있어 무엇보다도 형이상학자이고, 그것은 그의 실체-양태 이론으로 구체화된다. 나는 지금 이 이론의 주변을 뒤집고 다니고 있다. 


럿셀은 그의 철학사에서 철학을 과학과 종교 사이의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다면 나는 단순하게 철학 일반, 혹은 형이상학을 지식의 최전선, 혹은 주변부에서 이루어지는 지적 활동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여러 제약 조건들을 걸어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요점은 철학은 지식의 양태를 갖는다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가?) 그리고 지식의 양태들은 당연히 시간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17세기, 18세기 유럽, 특히 스피노자가 살았던 네덜란드라는 공간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요즘 네덜란드 출신 저자들이 스피노자 등에 관해 쓴 문헌들을 주로 읽고 있는데 읽으면서 꽤나 놀라게 된다. 이 저자들은 자기네 옆 동네에서 이, 삼백 년 전에 살았던 어떤 인물의 흔적을 추적하듯이 스피노자를 연구한다. 그렇게 수집된 구체적인 자료들이 풍기는 생생함은 어느 방법론 따위에 비길 바가 아니다. 예컨대, 에티카 한 권을 책상 위에 놓고 그것의 내적, 논리적 구조를 치밀하게 추적하는 작업은, 때로는 정말로 허망한 짓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적 게으름을 정당화해주는 방법론에서 오는 허망함.)


물론 네덜란드 출신 학자들의 연구들이 나의 애초 기획을 흔들 수도 있다. 예컨대, 나는 스피노자 사후 그의 철학은 아주 잊혀졌다가 독일에서의 스피노자 르네상스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고, 기존의 설명을 따라갔었다. 그러나 사태가 꼭이 이렇게 진행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네덜란드 출신 학자들의 연구 결과로 나는 이제 안다. - 그러나 애초 내가 스피노자를 형이상학자로 다루고자 했을 때 내 머리 속에 있던 그 형이상학의 정체는, 근대 네덜란드라는 시간성을 고려하자 더 명석해지고 판명해졌다. 이대로 쭉 가도 될 것 같은데? 이런 느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yamoo 2024-11-15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그 느낌이 뭘까요? 저도 느껴보고 싶은 느낌입니다..ㅎㅎ

러셀-비트겐슈타인을 지나...이제는 스피노자인가욤?? 스피노자가 살았던 시대 동시대 사람들이 스피노자를 연구한 결과물은 어떤지...우리나라에서는 구경도 해 볼 수 없겠죠? 좋은 문헌들을 접하고 계시네요~ 유학의 장점이 이런 것이겠죠!^^

스피노자 전기를 보면 당시 스피노자가 파문당했을 시 동시대 플랑드르 지역 사람들은 스피노자를 매우 비난했다는데...당시 사람들이 스피노자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궁금하네요~

weekly 2024-11-16 02:29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시죠?:)

그 ‘느낌‘이란 건 애초 생각대로 진행해도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 확신감... 이런 거예요. - 전문용어로 ‘착각‘, ‘혹은 ‘환상‘, 이런 것일지도요...

아마 철학도라면 저마다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철학자들이 있을 텐데요... 저는 스피노자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하지 않을 이유를 찾을 때 요긴한 철학자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네덜란드 사람들이 스피노자 연구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이이, 이황 연구하는 것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예컨대, 직접 오죽헌을 가볼 수 있고, 그 건축물의 문화적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도 잘 알고 있잖아요? - 인터넷 시대이다보니 관련 문헌들은 검색해보면 웹에서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영국 런던 바비칸 센터 극장에서 국립 창극단의 창극 리어를 보았다. 이번 런던 공연은 사나흘 정도로 짧은 일정이었고 우리는 마지막 날의 오후 공연을 보았다. 공연팀은 두 시간 남짓을 쉬고 다시 저녁 마지막 공연에 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기 빨리는 일정이다.) 여튼 우리가 본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고 기립 박수를 이끌어내었다. 


내 생각에도 무척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던 것 같다. 첫째로, 리어왕이라는 원작 자체가 문화적 경계를 타지 않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창극으로 공연되는 리어왕에 전혀 위화감을 느낄 수 없었다. 더구나 창극이란 형식은 셰익스피어 비극 중에서도 가장 처참한 비극성을 가진 리어왕을 그 극한까지 몰아갈 수 있는 쟝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둘째로, 나는 이번 창극을 리어왕에 대한 가장 참신한 해석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요컨대, 한국 사람이 리어왕이라는 작품을 접했을 때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토대로 각색이 이루어졌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예컨대, 이 모든 사단의 시발에는, 리어왕의 고집스러운 성격 못지 않게, 코델리아의 고지식함도 한 몫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의 하나로 노자의 첫 구절을 떠올릴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한국의 각색자도 분명 이런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갔을 것이다. 젊고 아름답고 착한 코델이아의 이면은 늙고 고집스러운 리어이다. 밝고 투명하고 경쾌함의 이면은 깊고 어둡고 알 수 없음이다. 그리고 그것의 이미지가 바로 물이다(여기서 바슐라르를 인용해야 할 것이나 책을 뒤지기 귀찮다). 극이 시작하고, 무대의 바닥에서 조용히 출렁이고 있는 것을 나는 비단이거나 레이저 2D 이미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물이었다. 배우들은 그 물에 발을 담그고, 첨벙대고, 고기를 잡고 등등... 했다. 어리석음과 어리석은 척 하는 것, 광기와 광기인 척 하는 것 등등의 이 처절한 변증법에서 물은 그 어느 캐릭터보다 더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아마 물의 배역을 말하라면 그것은 바로 '비극'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리어는 처형당한 코델리아를 안고 와서 그 물에 누인다. 코델리아는 잔잔한 물 위에 누워 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마 내 옆에 셰익스피어가 앉아 있었더라면 그는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공연팀에 감사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 장면을 통해 한국에서 온 공연팀은 '햄릿(오필리어의 비극)'과 '리어왕'의 가장 비극적인 장면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기, 죽음 등등에 무엇을 첨가해야 그 광기는, 그 죽음은 궁극의 비극성을 성취할 수 있게 될까? 무지함, 고집스러움 등등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필요한 것은 바로 순진함, 나이브함, 어린 아이같음이다. 노자에 따르면, 천지는 인간을 어린 아이처럼 대한다. 그리고 동시에 노자는 천지는 결코 인자하지 아니하다고 말한다... (이 두 번째 구절은, 고전 그리스 비극의 합창의 형태로, 무대에서 직접 표현된다.)


기립 박수가 터지는 와중에도 나는 조용히 앉아서 박수를 쳤다. 나는 원래 기립 박수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담할 수 있다. 한국에서 온 공연팀의 자기 확신을 그 순간 나는 누구보다 강하게 긍정하고 있었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