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의미가 있을까? 철학자들은 더 이상 이런 문제를 다루기를 꺼려 한다. 그리고 철학적인 답변을 시도해 본다고 해도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의 답을 내놓지는 못할 것이다. 암튼, 그렇더라도 일단 시도해 보자.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난관에 봉착한다. 즉, 의미라는 말은 너무나 다의적이다. 예컨대, 어떤 문장의 의미라는 말에서의 의미와 인생의 의미라는 말에서의 의미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말을 정돈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거기에 질서를 부여할 기준이 필요하다.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으로 지향성을 들어보자. 말하자면 의미는 인간이 어떤 의도 하에 수행하는 행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의 가장 궁극적인 의미일까? 일단 그렇다고 해두자. '문장의 의미'에서의 의미는 이런 근원적 의미의 파생적인 부분일까? 일단 그렇다고 해두자.
의미라는 말을 일단 이렇게 이해했다. 예컨대, 나는 지금 커피잔을 들고 있다. 이것은 사실에 대한 하나의 기술이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는 내가 지금 커피를 마시려 한다는, 좀 더 커다란 기획 안에 포섭된다. 혹은 그 기획 안에서 내가 커피잔을 들고 있다는 사실에 의미가 부여된다. 나의 이런 사소한 행위는 내가 지금 블로그 글을 쓰고 있다는 것 등에 포섭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주제는, 기획은 나 자신의 존재에까지 확대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어떤 사소한 행위는 나의 존재, 혹은 실존, 혹은 인생, 혹은 인격 등의 한계 안에서 조명되어 그것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실존이니 인생이니 하는 말은 이미 한계 개념이 된다. 그것은 어떤 행위에 의미를 비쳐주는 지반이다. 그러므로 실존이나 인생에 의미가 있는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런 한계 개념에는 주체성이라든지, 실재라는 것 등이 있다. 예컨대, 모든 경험은 실재를 전제하므로 실재 자체를 의심한다든지, 실재를 이론적으로, 차후적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는 모두 헛된 것이 된다. --간단하게 말하면 한계 개념들에는 외부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들은 무의미하다. 그런 것들은 그저 기분 탓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인생이나 실존의, 말하자면 색깔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낙관적인 사람과 비관적인 사람에 있어서 어떤 행위는 서로 다른 의미를, 서로 다른 색깔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행위의 궁극적인 저자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의 행위의 의지적인 저자인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이미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일상적인 의미에서는 모를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의 가르침은 진리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의 색깔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나 이외에도 또다른 주체성들이 존재하므로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내가 나의 삶의 색깔을 바꿀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이르면 철학은 할 말을 잃는다. 철학은 이론적이므로 전회의 기준을 설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성, 혹은 영성이라는 개념이 도입되게 마련이다. 종교성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절대 긍정하는 것이다. 종교성이란 절대 긍정이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것은 철학의 무기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철학은 종교성에 대해 절대 긍정의 근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 근거를 이론적으로 제시할 수 있건 없건, 인간이 변할 수 있다면 변할 수 있을 것이고 변할 수 없다면 변할 수 없을 것이다. 종교성은 그 변함의 방법론을 개발할 뿐이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봤을 때 인생에 의미가 있느냐 하는 질문은 인생에 가치가 있느냐, 혹은 이 인생은 저 인생보다 더 나은 인생인가 하는 물음과 통해 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한 인생이 다른 인생보다 더 나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말할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 각 인생마다 가치의 좌표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예수와 그 옆에 매달린 도둑의 인생의 가치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직접적인 결과는, 그렇다면 윤리가 불가능해 진다는 것일 테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개별 주체성을 넘어서는, 말하자면 인륜성 같은 개념을 만들어 내지만, 그런 것들은 착한 허위일 뿐이다.
인간의 존재에 가치가 개재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에 기반하여 우리는 종교성이라든지 윤리성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윤리성이라는 개념 없이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상대적인 의미에서. 예를 들어 우리는 민간인에 대해 군사 공격을 용납할 수 있는가? 말도 안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을 용인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구축된 윤리 이론들은 기껏해야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아마 문제는 우리의 시작을 개별적 주체성에서 찾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주관성이라는 것이 더 근원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인정할 근거가 있는가? 나는 못찾겠다. 그러나 어쨌든 간주관성의 현상에서 윤리성을 다루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윤리는 타자성을 한 축으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정의의 영역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궁극적으로 묻고 있는 것은 각 인생 사이에 가치의 우열을 부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더 나은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런 것은 없다고 답했다. 이런 결론은 우리를 불안케 한다. 하나의 대답. 이런 불안을 안고, 실존적 결단을 통해, 외부적인 요구를 나의 주체적인 요구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하이데거는 나치의 대의에 자신의 실존을 걸었던 것일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질문들과 관련된 철학의 병폐를 깨닫게 된다. 절대적 자를 찾으려 하고, 그것을 찾을 수 없을 때는 항시 주관적, 절대적 자로 이를 대체하려 한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말하자면 저 불안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론화하려는 욕구. 사실은 아무 것도 문제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