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는 분의 집에 놀러 갔다가 영화 기생충을 보게 되었다. 해외 영화제에서 큰 상을 탔다는 얘기는 얼핏 들었는데 그게 칸느 대상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여튼 기대를 잔뜩 안고 영화를 보게 되었다.
2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조금도 의식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웃음거리와 적당한 긴장감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는 재미있는 영화였다. 기술적으로 상당히 깔끔한,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살인의 추억’을 개봉관에서 봤었고, 그러므로 봉준호가 천재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감독에게 이 정도 작품은 소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 그만큼 내게는 이 작품이 가벼운 오락 영화 정도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살며시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왜 이 영화에 칸느를 줬을까?” 아내의 대답은 이랬고 나는 어느 정도 동의했다: “일본 영화 같잖아. 서구 사람들이 일본 스타일 좋아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나는 이 영화가 계급 우화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 말고는 그다지 의미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관객들과 심리적 수싸움을 벌이는 감독의 수완이 놀랍다는, 즉 기술적 차원에서의 감탄 말고는 이 영화에 돌려 줄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적 주제를 드러내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장면인, 이재민 대피소에서의 아버지의 대사를 보라. “무 계획이 가장 좋은 계획이다.” 여기 영국 말로 filler, 즉 구색이나 맞춰 시간이나 때우는 식의 무의미한 대사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의 긴 나레이션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런 영감도 없고 뻔한 대사를 길게 늘어놓을 뿐이다.
현대 사회의 계급 문제를 다루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두 계급 사이의 상호 의존적 관계를 드러내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계급의 절대적 고착 과정, 즉 한 계급의 필연적 전락을 다루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만약 봉준호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계급 문제를 다루고자 한 것이 맞다면, 즉 웃기면서도 괴기스러운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계급 우화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감독은 가장 피상적인 방식으로 이 주제를 다룬 셈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보자. 송강호 가족들은 반지하에 사는 백수들이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 사는가? 영화에서 그들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은, 내가 보기에는 딱 하나이다. 그들에게는 확실한 계획이 있다. 그들은 그 계획을 깔끔하게 실현해 낸다. 코너링이 좋은 송강호를 비롯해 가족 각자의 개인기는 출중하다. 그런데 그들은 왜 반지하 방바닥에서 뒹굴며 그렇게 사는가? 답은, 주인집 가족이 캠핑을 떠난 후 그 집을 차지하게 된 반지하 가족들의 행태에서 드러난다. 그 반지하 가족들은 그 좋은 주택에서조차 반지하에서 살 때와 똑같이 술이나 퍼마시면서 뒹굴고 있는 것이다. 즉, 그 냄새는 반지하 집에 살면서 몸에 배인 것이 아니라 그네들의 DNA이며, 그네들의 운명인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냄새 때문에 주인집 남자를 살해한 것은 자신의 냄새, 자신의 계급, 자신의 운명,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기 혐오에 지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영화는 이런 식의 관점으로 일관되게 해석된다. 그리고 이 관점이란 하층 계급 사람에 대한 경멸의 관점이다. 예전에, 일베라는 사이트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궁금하여 그곳의 여기 저기를 구경해 본 적이 있었다.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자기 계급에 대한 혐오였다. “내가 중국집 배달을 하는데, 잘 사는 아파트에도 배달을 가보고, 못 사는 아파트에도 배달을 가보니, 진상들은 전부 못 사는 아파트에 몰려 있드라.” - 미안하게도 영화 기생충은 이런 관점에 머물러 있다. 아내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기분이 나빠졌다고 했다. 그 이유는 이 영화의 관점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이 영화가 우리 속의 아픈 무엇인가를 건드려서가 아니라 말이다.
2. 크리스마스에 맞춰 아마존에서 타겟 메일이 왔고 거기에 켄 로치 감독의 BBC 시절 작품을 묶어 놓은 것이 있었다. 나 스스로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치고 주문을 했다. CD 6장. 한 장에 두 편의 드라마가 담겨 있다. 총 18시간 30분의 분량이란다. 지금까지 4편의 작품을 보았다.
켄 로치가 BBC에서 한 작업 중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다던 ‘Cathy come home’은 두 번을 보았다. 한번은 혼자서, 또 한번은 아내와. 1970년 영국에서 순진하고 선량한 젊은 남녀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면서 전락을 거듭하다 결국 홈리스가 되고 아이들은 고아원에 뺏겨 버린다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더블 인컴이었다가 출산 때문에 남자만 돈을 벌어야 했는데, 운전을 하던 남편이 차사고를 내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아내와 한참을 토론을 했다. 그 젊은 부부가 만일 유죄라면, 그것은 모던 사회의 엄중함에 무지한 죄라는 것이다. 한번 집을 줄여 이사하면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절대 집을 줄여서는 안된다. 수입 총액을 계속 유지할 수 있지 않는 한 있던 수입원을 포기해서는 결코 안된다. 아이를 낳으면 여자 쪽이 직장을 포기하게 될 수 있기 때문에 함부러 아이를 낳아서는 안된다, 등등. (두 남녀 주인공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그들이 홈리스가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켄 로치는 주택 보급률이 너무 낫다는 현실과 아이를 홈리스 부모에게서 빼앗는 관료제 기구의 잔인함에 촛점을 맞춘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영국의 전후 첫 세대가 성년이 되어 교육, 결혼, 취직, 주택 마련 영역에서 맞닥뜨리게 된 사회적 갈등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추상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모던 라이프의 일상적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서의 '모던' 사회는 IMF를 기점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실존적 이유(살아남는 것과 일정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것) 때문에 결혼과 출산, 다시 말하면 인간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계기들을 포기하게끔 강요하는 사회가 정의상 모던 사회인 것이다.
(영화는 밝고 선량하던 캐시가 각종 보호소를 전전하면서 날카로워지고, 쉽게 화내고, 책임을 남들에게 돌리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가족을 재건하는 일이 이제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남편은 더 이상 캐시를 보러 오지도, 돈을 보내지도 않게 된다. 이미 노숙의 길에 접어 들었지도 모른다. 세상 어디든 젊은 남자에 대한 보호 장치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되니까. 그리고 이쯤 되면 이 두 젊은 부부는 하층 계급에 대한 우리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게 된다. 뻔한 진상 짓을 하며 가족에 무책임한 사람들! 영국말로는 쉐임리스라고 한다. 그들에게 보내는 경멸은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에게 보내는 안도이기도 하다. )
3. 요즘 즐겨 듣는 음악은 로저 워터스의 것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도 전곡의 작사와 거의 모든 곡의 작곡을 로저 워터스가 맡았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월’은 주인공 핑크의 탄생부터, 그가 자신의 주위에 벽을 쌓는 과정, 그리고 기어이 그 벽을 부수고 마는 장면까지를 묘사하고 있는 컨셉트 앨범이다. 핑크가 벽을 쌓는 이유는 간단히 말할 수 있다. 모던 사회의 실존적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여 안전해질 수는 있지만 새로이 고립감이 고개를 들게 된다. 그러므로 이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해 일종의 연대감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거짓된 연대감이다(즉, 파시즘). 문제는 벽 자체를 허무는 것 뿐이고, 핑크는 결국 벽을 허문다. 그러나 ‘더 월’에서 핑크는 스스로의 결단으로 벽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 상정되는, 매우 흉측하게 생긴 벌레라는 존재로부터 벽을 허물라는 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사르트르의 유명한 “우리는 자유롭도록 처단되었다” 라는 명제에서처럼 우리는 벽을 허물도록 처단되었을 뿐이다. 즉, 사르트르의 명제에서 자유는 일종의 징벌이기 때문에 자유를 회피할 방법을 계속 모색하게 되는 것처럼, ‘더 월’에서 핑크는 벽을 부수라는 징벌에 대해 새로이 벽을 쌓을 궁리를 늘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에서의 회피와 벽을 쌓는 행위는 우리 존재의 영원한 조건이 된다. 이러한 순환성의 깊이 있는 구조가 락 앨범인 ‘더 월’을 주조하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더 월’을 듣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전체 곡의 흐름을 배경으로 독립성 있는 곡 위주로 듣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체 곡의 흐름 그대로를 듣는 것이다. 후자의 방법에서는 싱글 컷이 가능한 독립적인 곡들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들리게 될 위험이 있다. 나는 취향상 후자의 방법을 좋아하기 때문에 예컨대 ‘컴포터블리 넘’ 같은 곡들을 싫어하게 되고 만다.
이 앨범의, 짧지만 인상적인 곡은 ‘The Thin Ice’ 라는 곡이다. 가사의 한 구절인 “If you should go skating / On the thin ice of modern life . . . / Don't be surprised when a crack in the ice / Appears under your feet”은 거의 우리의 관용구가 되었다. The thin ice of modern life보다 더 정밀하게 우리 시대의 실존을 정의할 수 있는 말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