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일요일 데이빗이라는 친구가 혼자 와서 데킹 공사를 했는데, 아직 다 못끝냈다. 화요일날 다시 와서 마무리하겠다고 한다.


땅을 더 파고 구덩이 12개를 파고 목재 포스트를 시멘트로 굳히는 기초 공사를 했고, 오른쪽 시멘트 보도를 때려 부수고 거기서 나온 페자재를 치웠고, 받침목들을 놓고 마루 일부를 깔았다. 


약간 놀랐던 것(어이없었던 것). 혼자 와서 일하더라는 것. 그리고 거의 기계를 쓰지 않고 몸으로 일하더라는 것. 구덩이 12개를 뚫는데 긴 창 같은 것으로 땅을 쑤시면서 하더라. 시멘트 덩이도 그것으로 부수길래 햄머 빌려줬다...-.- 한국 사람들 같으면 그렇게 힘만으로 일하지 않을 텐데... 톱도 세 개나 부러 먹더라...-.- 내 꺼 빌려 준다니까 여자 친구에게 전화해서 톱 새로 사오게 하더라. (일전 나무 베러 왔던 벤이라는 사람의 여동생이 데이빗의 여자 친구더라. 예쁘더라. 데이빗도 영화배우처럼 잘 생겼고 헬스로 만든 몸은 헬라클레스같다.)


아직 초보 일꾼인지 경험도 없고 요령도 없어 보인다. 그렇긴 해도 끝마무리만 잘 되면 만사가 잘 된 것. 마무리는 잘 할 것 같다. 시간이 너무 걸려서 그렇지...


(작년 여름 친척들이 놀러 왔었는데, 성격은 좋지만 반에서 거의 꼴지를 다투는 초등학교 꼬마애 하나가 있었다. 난 이 애가 고등학교 가서 미적분, 통계 공부할 걸 상상하면 그저 그 애가 안되었구나 싶다. 왜 그래야 하나? 영국에서라면 마루 놓고, 펜스 세우고, 잔디 깔고, 벽 쌓고, 문짝 고치고, 나무 자르고, ... 이런 기술 하나만 익히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 여유롭게 자기 생활 즐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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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2013-07-31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말의 요지는 사람마다 적성과 특성이 다 다른데, 한줄로 세워서 일률적으로 평가하는 사회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는 거야. 수학이나 공부 머리가 정말 안되는 아이도 있고, 그 아이들도 사회의 당당한 시민으로 존중받고 살아갈 선택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는 거야. 물론, 여기엔 많은 사회 경제 문화적 조건들이 구비가 되어야 하겠지만...

(물론 너는 내 말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거야. 이상적이니까. 그러나 이상이 이념이야. 즉, 정책 목표야. 한국 정부를 비롯한 한국 사회의 많은 브레인들은 이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적어도 고민하는 척은 하지.그러라고 돈 받는 거니까.)

그리고 얘네들이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주로 제국주의 시대때 축적해 놓은 부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 동의해. 그러나 한국, 중국, 인도, 브리질 등의 나라가 서구 나라들을 추월하는 건 이제 시간 문제라고 다들 말하고 있어. 10여년 후면 중국의 경제 규모가 미국을 넘어설 거고. 그 기간 동안 유럽은 억지로 통합해 놓은 유로 문제에 발목이 잡혀 정체되어 있을 거라고 다들 생각하지.

은근슬쩍 끼어놓긴 했지만 한국이 저기 낄 나라는 아닐거야. 지금 한국은 국민들을 서로 서로 피터지게 경쟁시키면서 그 스트레스를 에너지 삼아 성장을 이어가고 있어. 언제까지 이렇게 지속될 수 있을까? 가장 큰 문제로 한국 사람들은 유럽 사람들보다 애를 덜 낳아.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 빡센 경쟁과 노년 세대에 대한 부양 부담 속에서 얼마마한 생산성을 창출해 낼 수 있을까? 내 보기에 한국의 현 시스템은 지속가능하지 않아. 아마 누구나 동의하는 부분일거야.

그러니 당연히 대안을 생각하는 거지. 작지만 강하고 잘 사는 나라는 도대체 어떻길래 잘 사나? 어떻게 그 나라들은 빡세게 야근하지 않고도, 양반질하며 살아갈 수 있나?

이런 거에 대해 토론해 보고 국민들이 방향을 모색해 볼 기회가 지난 대선이어야 했다고 나는 생각해. 물론 엉망이 되어 버렸고. 현재 한국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본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후진국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 한없이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 이럴 때가 아닌 데 말이야...

난 좌든 우든, 새나라든 민주든 사람들이 아이를 더 많이 낳도록 정책을 잘 짜는 정당이 좋은 정당이고 그런 정책을 잘 펴는 대통령이 좋은 대통령이라고 생각해. 내 기준에서는 그게 절대선이야. 그런 관점에서, 혹 공부 머리가 모자란 아이도 부모들이 안심하고 사회에 내놓을 수 있겠다는 안심을 할 수 있는 나라를 나는 좋은 나라라고 보는 거고...

(글구... 블로그는 딴 거 쓸 생각 없어. 이거에서 맘 떠나면 다시는 블로그 안할거니까. 몇 번이나 폭파시켜 버려야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내 삶의 중요한 장면을 담고 있는 거 같아서...)
 

어제 런던에 나갔다 왔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헌책방에 들러 책을 몇 권 사고, 이번에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친구 아이를 위한 선물로 아크릴 페인트 등을 샀다. 아크릴 페인트가 생각보다 싸서 붓 세트, 팔레트, 캔버스 세 개를 함께 샀는데 딱 40 파운드가 나왔다. 그림 그리기가 아주 비싼 취미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런던은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퇴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펍 바깥에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보았던 것처럼 런던 사람들이 맥주컵을 한 손에 든 채 서서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날도 더워서 나도 한 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네로라는 카페 체인점에 가서 에스프레소 한 잔 먹고 나왔다.

새삼 인상적인 것. 대체로 사람들의 다리가 곧게 쭉쭉 뻗었다. 좌식 생활을 하지 않아서 그렇겠지. 이걸 나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나: 여기 사람들은 좌식 생활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다리가 휘지 않고 죽죽 뻗었어. 
그: 그거 근거없는 얘기라던데.
나: 아냐, 나만해도 다리가 많이 휘었거든. 봐봐. 어랏, 억지로 힘쓴 것도 아닌데 다리가 딱 붙었네! 내가 증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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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할배가 재미있다길래 찾아서 봤다. 컨셉이 좋고 출연진이 호화찬란하더라. 재미는 있었지만 3회쯤 되니 나올 얘기는 다 나온 것 같았다. 더 볼 생각은 없다.

이 프로그램의 짜증나는 점. 나는 시청자를 바보로 아는 테레비 프로그램을 싫어한다. 꽃보다 할배는 전형적으로 그런 프로그램이다. 캐릭터를 잡는다고, 스토리를 만든다고 특정 장면을 세번이고 네번이고 반복해서 편집해 보여주는 데, 이거 정말 참기 힘들다. 나는 보면서, 다 알아들었으니 제발 그만해!를 외쳐대야 했다. 3회에서는 피디가 출연자 하나를 계속 따라다니면서 약을 올리던데, 이런 것도 반칙이다(이런 프로그램에서 이런 것까지 지적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양념을 최소로해도 좋은 맛이 나는 음식이 좋은 음식이다. 편집을 최소로 해도 좋은 그림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좋은 프로그램이다. 재미와는 별개로 꽃보다 할배는 초호화 캐스팅의, 질이 떨어지는 프로그램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 서양에서라면 꽃보다 할배의 컨셉은 거의 이해가 불가능할 것 같다. 나이는 있지만 사지 멀쩡하고 정신이 올바로 돌아가는 남자 넷이 왜 젊은 남자 하나에 철저하게 의지하며 여행을 해야 하나? 이쪽 사람들은 자아가 크다. 노인, 아이 아빠, 여자, 시아버지 이전에 무엇보다도 '나'는 '나'다. 그러므로 '너'는, 노인이고 아이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너'다. 예를 들어 여기 영국에서는 아이가 스스로 일어나 잠자리 정리하고 세수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부모가 아이 대신 이런 걸 해주지 않는다. (지난 여름 한국에서 친척들이 놀러 왔었는데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를 아이 엄마가 화장실에 같이 들어가 씻겨주는 걸 보고 나는 문화적 충격을 먹었다.) 이런 물리적 독립성이 정신적 독립성을 수반하리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런 정신적인 독립성이 어른됨의 조건이다. 한국에서라면 (부모가 되어) 부모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어른이다. 그러나 여기 기준에서는, 예를 들어 지하철 빈자리를 향해 돌진하는 아줌마 아저씨들은, 나이가 있고 아이 부모이긴 해도, 여전히 미성숙한 인격의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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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중간에 마음이 자주 바뀐다. 솔직히 나는 그걸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 놀러 갔었을 때다. 살라미 파는 가게에 가서 주인에게 살라미를 12 조각 잘라달라고 했다. 다 잘라주었더니, 아내가 8 조각만 더 잘라주면 안되겠냐고 한다. 순간 그 프랑스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더라. 그리고는 음식을 휘휘 던지면서 짜증스러운 태도로 살라미를 잘라주더라. 나는 그 모양을 보면서 웃었다. 또, 빵가게에 가서 바게트를 샀을 때였다. 바게트를 봉지에 담아 건네 주니 아내가 좀 잘라주면 안되겠느냐고 했다. 빵가게 점원 아가씨의 볼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바람 소리를 쇳 내더라. 나는 또 웃었다. 


아내는 영국에서도 이런 짓을 곧잘 한다. 그러나 영국 사람들은 표정이 굳거나 태도가 퉁명스러워지지 않고 한결같이 친절하게, 추가된, 혹은 변경된 사항을 처리해 준다. 


그럼, (지나친 일반화지만) 프랑스 사람은 퉁명스러운데 반해 영국 사람은 친절하고 너그러운 것일까?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프랑스 사람의 기질을 이해하고 그 기질을 더 좋아한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당신이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게 한 만큼 당신은 나를 덜 배려한 것이다. 나를 존중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타인의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게 하는 데 있어 세계 챔피언일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늦도록 퇴근 못하게 잡아끌거나 회식으로 몰아대는 회사 상사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뭔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지난 주 내내 정원 데킹(마루) 견적을 받았다. 그리고 어제 가장 싼 가격에 가장 좋은 조건으로 공사 예약을 했다. 데킹 시공자는 우리집 정원의 큰 나무를 잘라 주었던 벤이라는 사람이 물고 온 사람이었다.


원래는 딴 사람과 나무 자르기 예약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벤이 또 나무 자르는 사람이라며 왔다. 나는 아내에게 이미 결정된 사람이 있으니 견적은 아예 받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아내는 견적을 받았고 가격이 훨씬 쌌다. 나는 이미 결정된 사람과 일을 진행할 것을 고집했지만, 결국 일은 벤이 맡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 벤이 데킹할 사람을 하나 데려온 것이었다. 그 사람과 얘기해 보니, 데킹을 훨씬 튼튼하고 세심하게 해 줄 것 같았다. 나는 아내에게 견적이 좀 비싸도 이 사람과 일을 진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견적이 온 것을 보니, 훨씬 더 싸기까지 했다.


교훈은, 글쎄... 세상 일은 강물이 굽이쳐 흐르듯 그렇게 흐르는 것 같다는 것. 나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미 된 계약을 깨고 더 싼 사람을 쓰지 못한다. 나는 한 극단의 사람이다. 사실은 우리 모두 다 극단의 사람들이다. 나는 세상에 다양한 기질의 사람이 살고, 그에 따라 다양한 방식의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즐겁다.


(아침에 뉴스를 잠깐 보니까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대화록 정국에 대한 기자회견을 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타이밍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성명을 발표했다고 생각한다.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 지는 미련한 짓을 할 필요는 없다. 그 전투에서마저 이길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는 더더욱이 그렇다. 새누리당은 대선에서 저지른 불법을 원죄처럼 안고 있기 때문에, 사안 사안마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사람들도 새누리당의 과민반응을 다 느끼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럴 때일수록 야당은 수권 정당의 책임감, 성실함, 정쟁을 자제하는 성숙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선명성, 투쟁성은 지금 필요한 미덕이 아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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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에 있는 내 친구 얘기를 하려 한다. 내 블로그에 비밀댓글을 열심히 달아주는 친구인데, 아주 쿨한 친구이기 때문에 그냥 도마에 올려도 될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은 토론에 그리 능한 편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토론을 싫어(두려워) 하는 징후들을 흔하게 드러낸다. 가장 전형적인 토론 기피 증후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흔하게 엿볼 수 있다: 남자는 군대 가지만, 여자는 임신하잖아? 이건 주장이 아니라, 그냥 토론 중지!를 외치는 말일 뿐이다. 

또 하나 전형적인 토론 기피 증후는 다음과 같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다 썩었어! 나는 이런 류의 말을 노가다 아저씨로부터 소설가 이인화, 그리고 문제의 나의 친구에 이르기까지 정말 전한국적으로, 허다하게 들었다. 이 말이 토론 중지!를 외치는 긴급한 발언임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95% 이상이 여당 성향일 것이라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당신이 완벽한 도덕적 상태를 상정한다면, 그 기준에서는 누구나 썩었다. 그러나 당신이 완벽한 도덕적 상태를 상정한다는 말은, 그 자신 완벽한 도덕적 상태에 준하여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이 단계에서 돌연 방향을 바꾸어, 완벽한 도덕적 상태란 없으므로 49% 썩은 놈이나 20% 썩은 놈이나 썩은 놈은 썩은 놈이니, 난 차라리 49% 썩은 놈을 선택하겠다고 결론내린다(이인화의 논리가 이렇다. 도둑들의 자기변명도 이렇다). 이런 논리를 전문 용어로 알리바이라고 한다: 그러니 나의 선택에 토 달지 말라. -물론, 나의 이러한 말은 소크라테스적 순진함을 담고 있음을 인정한다.

(순수이성비판 들어가는 말까지 읽었다. 역자에 깊은 감사를 느끼며, 칸트의 깊음에 감동하고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형이상학적 질문을 타고난 존재다. 우주에 시작이 있었을까, 우주에 끝이 있을까, 나란 누구일까,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나이를 먹으면서 사람들은 이런 질문이 대답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한켠에 치워놓는다. 일부의 사람들만이, 즉 종교인, 과학자, 예술가... 등등 만이 이런 질문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계속 추구해나간다. 우리는 이런 류의 질문들이 확실하게 대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회의론자다. 그러나 이런 류의 질문들이 우리의 행동의 한 기준, 혹은 동기로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부정하지 못한다. 자유, 도덕의 기반에 대해 우리는 확고한 대답을 갖지 못할 것이지만, 여전히 그 정체불명의 도덕적 기준들은 우리의 판단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니체의 말대로 모든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 다음에 시작된다. 여당이 썩었고 야당이 썩었고 정치가 썪었고, 국민이 썩었다는 사실은 내가 내리는 판단들에 아무런 알리바이를 제공하지 못한다. 나는 변명할 수 없고, 나는 핑게댈 수 없다. 나의 선택, 나의 판단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알리바이는 부재한다. 한국 사람들은 알리바이가 부재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인들의 자아는 작다. 그나마 그 작은 자아마저 가족의 영토 안에 흡수되어 버린다. 가족이란 한국인에게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자아에서 비롯되는 고민들에 면역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삶에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자아의 요구다. 한국인들이 자아의 일관성을 요구하는 계기들, 예를 들어 토론을 싫어하거나 두려워 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리라. 그런데 이런 작은 자아는 동양이나 한국의 전통이 아니다(강릉 오죽헌에 걸려있는 율곡이 20세때 지은 문장을 보라). 그것은 독립한지 60년 정도 되는 신생 한국의 특성이다. 서양이 이념과잉이라면 한국은 좀 더 이념적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계속 이념, 원칙을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거 없음, 정치에서 관심끊어를 계속 외친다. 한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결국 이 싸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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