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읽는 책이 영어로 된 딱딱한 것들이다 보니 한국어 구사 능력이 퇴화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알라딘에서 리뷰들을 참고하여 주문해 본 책이 "고종석 문장"이었다. 그리고 놀랐다. 이 책은 좋은 한국어 문장을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었다! 저자는 자신의 다른 책에서 문장을 뽑아 자아 비판을 한다. 그런데 수사적으로 어떤 교정을 하건, 내 눈에는 그 문장들이 여전히 어설프고 어색하고 불명료해 보였다. 나는 좋은 문장이란 명료한 사고를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사는 나중 일이다. 혼란스러운 사고에서 나온 문장들을 수사로 가릴 수 있을까? 내가 고종석의 문장에서 본 것은 상투적이고 어설프고 불명료한 사고들이었다. 이런 것들로 좋은 한국어 글쓰기 연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실망했다가 아니라 놀랐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에 제정된 이래 한국인의 기본적 인권을 크게 제약하며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를 갈라놓는 거대한 빙벽 노릇을 해왔다."(267페이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알겠는데 불명료하고 상투적이다.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를 갈라놓는?, 거대한 빙벽? 

"올해 대통령 선거의 예비 후보들은, 속마음이 어떻든, 보수적 유권자들의 표를 잃을 이니셔티브를 취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269페이지)

이런 말은 정말이지 하나 마나다. 올해라고 특정할 필요도 없다. 예비 후보라는 말도 어색하다. 이니셔티브를 취하다라는 말은 그냥 영어 번역체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와 공포를 끊임없이 생산함으로써 국민의 무기력한 총화단결을 도모했다."(274페이지)

국민의 무기력한 총화단결? 문장 자체도 영어 번역체다.

"... 우리 정치 문화에서 군사 쿠데타의 가능성을 도려내는 커다란 공을 세웠다."(280페이지)

'~의 가능성을 도려내는'. 이런 어색한 표현은... 

"일거에 정치 군부를 숙청함으로써 군대의 문민 통제를 확립한 것은..."(281페이지)

군대의 문민 통제? 군대가 문민을 통제한다는 것인지, 그 반대인지 불분명하다. 물론 영어 번역체다.

"백 교수가 그 책을 냈을 때의 나이를 훌쩍 넘기도록 나는 그 책의 중후하고 논리적인 한국어를 흉내도 못 내고 있지만, 위대한 정신의 그늘에서 한 시대를 살 수 있었던 것을 복되게 생각한다."(291페이지)

이런 어마 어마한 겸양은... 좀 민망하지 않나?

"북한 사회의 공식 이데올로기는 지도자 곧 수령을 뇌수에 비유하는데, 어떤 기념물이 뇌수를 기념하든 아니면 몸통이나 사지를 기념하든 그 뇌수로서는 별 차이가 없다."(293페이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역사의 진보가 담고 있는 핵심적 의미 가운데 하나가 개인의 자유의 확대라면..."(297페이지)

역사의 진보가 담고 있는 핵심적 의미?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알겠지만...

"그러나 그 염치나 반성의 항진은 투쟁력의 수축을 의미한다."(337페이지)

도대체 무슨 말? 내 한국어가 퇴화한 것인가?

"다른 사회들에 견주어 우리 사회는 비교적 넉넉히 세속화된 사회다."(342페이지)

비교적 넉넉히 세속화된 사회? 일부러 이렇게 애매하게 쓴 것일까?

"그러나 확실한 것은, 법적으로 보든 사실 관계로 보든, 김영삼 정부가 제6공화국의 두 번째 정부였듯이 새 정부 역시 제6공화국의 세번째 정부일 뿐이라는 것이다."(343페이지)

새정부는 제6공화국의 세번째 정부일 뿐이다. 끝. 이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서구의 보수 언론이 견지하고 있는 주지주의, 열린 사회에 대한 신념이 <조선일보>에는 없기 때문이다."(346페이지)

솔직히 나는 영국의 보수 언론(썬이나 데일리 메일)보다 조선일보가 더 격조 있는 신문이라고 생각한다. 암튼, 주지주의, 열린 사회에 대한 신념 등은 뜬금없고 어설프고 애매한 말이다.

"사회적 선택의 배후로서의 그런 다수의 등장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에 의해서 '대중의 반란'이라는 표현을 얻었다."(351페이지)

더도 덜도 아니고 그냥 영어 번역체. 물론 뜻도 불명료하다. 

이 밖에도 허다한 예문들이 이 모양이다. 이런 문장들을 이러 저러한 수사로 다듬는다는 것이, 좀 더 나은 어법으로 고쳐 쓴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제는 뒤엉킨 사고인데 말이다.

("고종석 문장"을 내 돈 주고 사서 봤으므로 나는 이 책에 복수할 자격이 있다. 더구나 한글날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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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10-09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eekly 님 의견에 많은 부분 동의는 하고 싶은데요.
저도 우리 글을 너무 못쓰기 때문에 찔리는 점이 많으네요.

《나는 좋은 문장이란 명료한 사고를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사는 나중 일이다.》

위 문장이 마음에 듭니다. 명료한 사고를 명료한 글로 쓰기란 정말 어렵죠. 남한테 뭔가 깨닫게 하는(인식하게 하는) 글을 쓰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하나 마나 한 소리는 안 하느니만 못하죠. 그런데 우리는 그 어떤 깨달음도 인식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글들을 양산하고 있다고 봅니다.

weekly 2015-10-09 18:4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하하, 저도 잘 못쓰는데요...:)
제 생각에는 잘 쓰든 못 쓰든 일단 쓰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누군가 평을 해 줄테니까요. (그 누군가는 대부분 자기 자신이 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