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모처럼 날씨가 좋았다. 가까운 공원으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사람들이 커누 연습하는 것을 바라보며 강변을 따라 걸었다. 가족 단위로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함께 나온 개들이 미칠 듯이 좋아하는 것을 본다.

근처 펍에 갔다. 마당이 넓고 푸르다. 마당 한가운데 테이블에서 버거와 감자 튀김을 곁들여 까맣고 진한 기네스 맥주를 마셨다. 나는 영국의 감자 튀김(칲스)을 무척 좋아한다. 굵을수록, 그리고 기름기가 쪽 빠져서 기름에 튀겼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수록 좋다. 이 집 칲스도 아주 맛이 있어서 아껴가며 먹었다. 마당의 푸른 잔디 위로 아이들이 뛰어 다니며 부산을 떤다. 아이들은 금방 친구가 된다. "영국 아이들은 절대 엇될 수가 없을 거야. 이렇게 좋은 환경이라니!" 나는 내 말에 뭔가 미심쩍음이 느껴져서 웃고 만다. "여긴 부자 동네라니까..." 여전히 미심쩍다. 미소를 계속 머금을 수 밖에 없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넓다란 공원에서 사람들이 크리켓을 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종종 보던, 사립 학교 다니는 부유한 학생들이 입는 것 같은 흰 바지에 흰 셔츠 차람들이었다. 벤치에 앉아 잠시 구경을 했다. 규칙을 유추해 낼 작정이었다. 심판 자리도 계속 바뀌는 것 같고, 타자 자리도 계속 바뀌는 것 같았다. 뭐가 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검색을 해보니 11명이 한 팀이고, 한 경기를 몇 날 몇 칠 할 때도 있다고 한다. 공원 한쪽에 펍같이 생긴 건물이 하나 있었다. 점수를 기록하는 전광관이 달려 있다. 크리켓 클럽이란다. 클럽 입구에 사람들이 나와 앉아 경기를 지켜 보고 있었고 입구에는 맘씨 좋게 생긴 개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더니 외로운 척을 했다. 안에는 중년의 백인 남자들로 북적였다. 우리가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들어왔다. 벽에 걸려 있는 텔레비젼에서는 럭비 경기를 중계하고 있었다. 우리는 클럽을 나왔다. 왠지 그게 예의일 것 같았다.  

영국 사람들의 삶을 알고 싶어서 이스트엔더스라는 드라마를 본다는 나에게 학원 선생이 진짜를 알고 싶으면 런던 바깥으로 나가보라고 하더라. 나는 그가 이스트엔더스를 보지 말라고 나를 계속 설득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것은 전혀 사실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시청자를 잡아두기 위해 자극적인 소재들을 지속적으로 다루는 것이라고... 음주, 폭력, 살인, 울부짖음, 사기, 찌질함, 그리고 또 찌질함... 글쎄, 연휴 때 텔레비젼 뉴스를 보면 스페인 휴양지 같은 데서 개같이 술을 먹고 비틀거리며 도로 한복판을 걷는, 기괴한 화장의, 기괴한 복장의 영국 젊은이들이 나온다. 진행자가 한숨을 짓는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기괴한 화장을 한, 위의 옷도 짧고 아래 옷도 짧은 파티걸들을 지하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인터넷에는 술먹고 고주망태가 된 쿨한 영국 사람들 사진이 널려 있을 거다. 참으로 극단적인 대비들이다. 나는 한국에서 양보 정신이 투철했었다. 그런데 영국에 왔더니 너무 조급하게 굴어서인지 툭하면 양보를 당하고 있다. 이렇게 예의바른 사람들과 술먹고 고주망태가 되어 토사물을 뒤집어 쓴 채 길거리에 누워 자는 사람들이 같은 사람들인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작품을 쓴 사람은 분명 영국 사람이렷다! (하긴 나도 학교 다닐 때 그랬군... 평소엔 나름 진지하고 예의바른 사람이지만 축제 같은 때 술 먹으면 끝장을 보려고, 자신이 문약한 사람이 아님을 과시하려고 했었던 것 같다. 결과는 아스팔트를 침대 삼아...-.-)

지난 주중엔 날씨가 무척 변덕스러웠다. 해가 났다가 구름이 꼈다가 비바람이 몰아쳤다가 우박이 쏟아져 내렸다가... 일년 날씨가 하루 날씨 안에 다 들어 있는 듯 했다.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터운 털코트로 둘러싸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스페인에서 온 학생들은 영국 날씨에 진저리를 친다. 영국 날씨에 대한 무수한 비난이 쏟아진다. 이럴 때 영국 사람들이 하는 대사는 딱 정해져 있다. "디스 이즈 앵글랜드." (내가 사는 곳이 잉글랜드이므로...) 영국의 비합리성, 기괴함, 변덕, 모순이 있는 곳에 이 대사가 있다. 온수, 냉수 나오는 수도꼭지가 따로 있어 꼭지를 오가다가 기어코는 "아 뜨거!"를 외치게 될 때도 "젠장, 여기는 잉글랜드라지!"로 마무리를 하게 된다. 영국 드라마를 보다보면 "점프!"라는 말을 흔하게 듣는다. 성취에 만족하지 말고 새로운 환경에 도전해 보라는 뜻이다. "점프! 아이 데어 유!" 나도 도전 정신을 높이 사는 영국의 문화에 감명을 받곤 한다. 솔직히 오늘도 "닥터스"라는 드라마에 이 대사가 나오기에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잠깐 더 생각하면, 영국은 "왜 바꿔야 하지?"하는 보수성이 극단적인 나라이기도 하다. 진취성을 고양하는 것도 세계 최고 수준이고, 기존의 것에 집착하는 것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 둘이 어떻게 한 문화에 공존할 수 있을까? 깊게 들어가려 하지 말고 그냥 그러려니 해라... 이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디스 이즈 잉글랜드가 될 터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Forgettable. 2012-05-21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스 이즈 잉글랜드라는 영화도 있지요. ㅎㅎ 추천작입니다.

weekly 2012-05-22 15:15   좋아요 0 | URL
아,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주말에 꼭 챙겨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