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왜인의 세계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37
무라이 쇼스케 지음, 이영 옮김 / 소화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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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일어 능력 문제가 나와서 “일어 서적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이면 괜찮겠다는 얘기를 했는데, 얘기를 듣던 선배는 “일어 서적 읽을 줄 모르냐”라고 자연스레 되물어왔다.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웠고 일어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겠구나 하는 후회막급의 감정마저 샘솟았다. 선배의 그 얘기를 통해서 내 주변에 일어 해독 능력이 상상외로 보편화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정작 중요한 건 그 이후에 나온 얘기이다. 일본 영화를 보다보면 특히 일본어 종결 어미나 억양이 경상도 방언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일본 여성들이 주로 쓴다는 ‘の’같은 종결 어미는 사용 주체나 상황 면에서 정확히 대비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구 근방 사투리의 그것을 많이 닮아 있다. 그런데 우리 말과 일본 말의 유사성은 오히려 그 억양에서 전반적으로 두드러지는 것같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대사를 듣게 되면 그 억양이나 늬앙스에 주목하기 마련인데, 그때 들려오는 억양에는 경상도 방언과 매우 흡사한 면이 있다. 이런 측면에 대해서는 순전히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하튼 중요한 점은 우리에게 순수한 ‘피’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 속에 어느 정도의 일본인, 어느 정도의 중국인 피가 흐르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우익이나 보수주의자들은 단일민족이란 점을 시시때때로 강조하곤 하지만 이는 민족주의라는 순수주의를 강조, 이념화한 이데올로기적 산물일 뿐 실상은 그 이데올로기와 동떨어진 곳에 놓여 있을 지도 모른다. 민족주의는 선동적인 힘이 대단해서 공평무사한 이성을 지닌 사람조차도 순간적인 판단 상실의 상태로 몰아가곤 한다.

하여튼 그건 그렇고 여기서 내가 꺼내놓고 싶은 얘기는 <중세 왜인의 세계>라는 일인 역사학자의 책이다. 저자 무라이 쇼스케는 동경대 문학부 교수로 <조선왕조실록>에 흥미를 가지고 십수년간 읽어온 사람이다. 씨디롬 타이틀로 소개되지 않았다면 <조선왕조실록>은 나같은 이에겐 도저히 접근불가능한, 고고의 성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15-16세기, 흔히 왜구로 알려진 일인들의 조선 남해안 교섭 과정을 <실록>의 해당 부분을 인용하고 해석을 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 책을 따라 읽어 보면 상상외로 우리 땅에 일본인들이 지속적으로, 광범위하게 들락거렸음을 알 수 있다. 주로 무역을 위한 왕래인데, 삼포를 중심으로 장기간 거주까지한 왜인도 상당하고, 남해안에서 서울까지 왕래 루트가 지속적으로 개통되어 있음을 생각할 때 그 과정에서 우리와 일본인 사이의 교섭은 물물거래 이상이었을 것임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우리와 외국인 사이의 교류가 일본의 경우에 제한되지 않음은 기나긴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바이므로 그 과정에서 무수한 교섭이 지속적으로 이뤄져 왔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외국인의 눈으로 우리 사료를 읽는다는 독특함과 더불어 몇 가지 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흥미롭다. 첫째,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까지 지속된 일인의 지속적인 무역 행위 의지를 통해 현재 일본의 경제적 동인의 씨앗을 볼 수 있다는 점. 둘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은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중세 버전이 아닌가 하는 역사적 상상을 하게 한다는 점. 셋째, 일본만큼 우리도 일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 넷째, 경제력이 뒷받침된 군사력 강화는 언제든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가능케 할 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이 모든 것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의 현재로 전화될 수 있는 상상이며 상당히 근거 있는 두려움이다.

일본에 대한 관심은 좋지만 우리는 여전히 피해망상과 적대감의 그 중간 지대에서 헛돌고 있지는 않은지. 일본 총리 고이즈미의 알듯말듯한 표정처럼, 가부키 배우의 두껍게 회칠한 얼굴처럼 일본의 얼굴은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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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까치글방 132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서성철 옮김 / 까치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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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책 한 권을 읽었다. 읽고서 이렇게 가슴 뿌듯해지는 책을 만나기는 참 오랜만이다. 한 권의 책을 쓰자면 이런 책을 써야 할 것이고, 출판하자면 이런 책을 출판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며 주먹을 뽈끈 쥐어본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카를로스 푸엔테스라는 저자 이름에 끌렸고, 페이지 사이에 심심치 않게 삽입된 그림들에 매혹됐고, 까치라는 출판사가 주는 믿음에 끌렸다. 딱딱한 책 제목, 그리고 만만치 않은 두께를 가진 이 책에는 많은 게 들어 있다.

역자도 후기에서 얘기하고 있지만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독재, 실업, 마약, 외채, 빈곤 같은 온갖 부정적 이미지와 이와는 동떨어진 탱고와 <해피 투게더>의 매혹적 이미지가 공존하는, 그래서 빈곤하다면 빈곤하고 편협하다면 편협한 우리의 눈을 이 책은 폭넓은 시공간에 대한 풍부하고 진지한 얘기를 통해 조금씩 열어주다가 책장을 덮을 때쯤 해서는 확 틔워준다. 물론 한 권의 책이 줄 수 있는 만큼의 효과임에는 분명하다.

까치 책은 뭘 집어도 읽을 만한 책이다. 요즘처럼 철학책마저 출판 상업주의에 덜미잡혀 두꺼운 표지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는 현 상황에서 까치만큼 한 길을 걸어가는 출판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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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시대의 희망, 영화
열화당영상자료실 / 열화당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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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포스터는 영화를 알리기 위한 도구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건 영화를 배급, 홍보하는 쪽의 생각이고, 관객의 입장은 약간 다를 수 있다. 잘 된 포스터는 영화 홍보 효과도 월등하지만, 그 자체로 심미적 가치를 지닌다. 여기서 잘 된 포스터라 함은 그 자체로 마치 하나의 회화 같은 인상을 주는 포스터다. 이런 포스터를 보고 있으면 왠지 그 영화마저도 보고 싶어진다.

■이 책은 1950년대 우리 잡지에 실린 영화 광고를 모아놓은 책이다. 이런 책이 나와 있다는 사실을 그 동안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적잖이 충격적이다. 옛 신문을 가끔 자료 조사 차 들춰볼 때도 제일 먼저 눈이 가는 곳은 신문 하단의 영화 광고 부분인데, 이처럼 한 권의 책으로 묶여져서, 나 같은 사람과 눈이 맞기를 기다리고 있다니. 비록 50년대, 잡지라는 영역에 한정된 자료지만, 나에게는 상당히 의미 있는 책이 아닐 수 없다.

■ 책제목이 말해주듯 50년대라면 ‘궁핍한 시대’라는 두 마디 말로는 궁핍함의 정도를 헤아릴 수 없는 시기였을 것이다. 전쟁으로 고통받던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영화를 보며 울고 웃었는지를 이해하는데 영화만큼 좋은 자료가 있을까.

50년대 포스터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한 가지는 선전 문구에 뻥튀기가 다고 생각되지만, 50년대 포스터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지금 통용되는 외국인명 표기 체계와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친숙한 몇 사람의 50년대 당시의 표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설적인 여배우 마르렌 디트리히의 이름은 ‘마리-네 디트리ㅅ히’로 되어 있다. 장음, 단음을 구분하기 위해 하이픈을 삽입하고, 받침은 독립된 한 자로 표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받침을 독립시킨 것은 시각상의 배려내지 포스터 제작상의 한계가 아닌가 싶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말론 브란도는 ‘마-릉 부란드’, 에바 가드너는 ‘애바 카-드나’, 알란 라드는 ‘아란 랏드’, 킴 노박은 ‘캄 노박’ 등등. 영화 제목도 마찬가지다. 워터 프론트는 ‘워-타 후론트’, 피터팬은 ‘피-타판’ 등등... 그리고 또 한 가지. 글씨체도 인쇄체가 아니라, 연필체, 붓체가 만연하고 있다. 아마 이 점이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유치하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한자를 많이 섞어 쓰고 있다는 점 역시 특징적이다. 따라서 단 번에 영화 제목을 알아보기가 용이하지 않다. 또 그림보다는 선전 문구를 통한 광고에 상당히 신경을 쓴다는 점이다. 기껏해야 사진 한 두 컷 넣은 포스터에 손으로 빽빽이 쓴 문구가 포함된 포스터가 지배적인 경향이다.

■ 대충 이 정도가 영화 포스터 자체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어떤 영화들을 우리 선조들을 보고 즐겼을까? 국적만으로 따지면 지금과 그다지 다를 게 없는 것같다. 헐리우드 영화가 주류이고, 한국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만큼은 안되지만 꽤 되고, 이태리, 프랑스, 홍콩 영화는 다 합쳐도 10%가 안되는 것같다. 르네 끌레망의 <금지된 장난>, 펠리니의 <길>, 샘 우드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히치콕의 <나는 비밀을 안다>, <다이알 M을 돌려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백경>, <사브리나>, <오케이 목장의 결투>,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워터 프런트> 등등은 개중 지금도 ‘음 그 영화!’ 할 수 있는 영화들이다. 이 당시 수입된 영화의 대부분은 드림팩토리라 불리는 헐리우드산 뮤지컬이나 로맨틱 멜로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 이런 책이 나와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너무 행복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별 생각 없이 펼쳐놓고 바라보며, 50년대와 호흡할 수 있다니... 50년대를 생각할 때마다 한숨부터 나온다는 고은의 심정의 일단을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조금 엿본 것같다. 60년대, 70년대도 계속 발간되기를 바라지만,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역시 헛된 바램으로 끝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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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관계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58
긴조 기요코 지음, 지명관 옮김 / 소화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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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나 설이 찾아오면 지방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은 싫으나 좋으나 고향을 찾아간다.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그 길은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진정 그리움에 사무쳐 고향땅을 밟는 사람도 있지만 나를 포함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무의식적 처벌 공포에 짓눌려 그 길위에 서게 된다 물론 가족들을 만난다는 건 이제 어느 정도 여유로운 일이긴 하지만 그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부담스런 일들이 우리를 괴롭힌다. 걱정과는 달리 무난하게 넘긴 명절이긴 하지만 언제나 명절 맞이 고향길의 부담에서 벗어날지는 알 수 없다.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 난 한 권의 책을 넣어갔다. 긴조 기요코의 <가족이라는 관계>. 이왕 떠나는 길에 그 길의 목적에 부합되는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같다. 내가 가족에 대해 다룬 책으로 처음 읽어본 건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다. 어느 정도 연배는 한번쯤 읽어봤을 이 책은 지금 생각하면 다소 고고학적이고 결정론적이란 인상이 강하다. 그러나 운동권 교재치고는 맑스 저작에 비해 덜 딱딱했고, 엥겔스 특유의 리얼리즘적인 문체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가족이라는 관계>는 주로 부부간의 문제를 가족법을 중심으로 풀어쓴 책이다. 굳이 이 책이 아니어도 괜찮을 만큼의 상식적인 수준을 보여주는데 나같은 초심자에겐 그동안 여성계에서 제기해왔던 문제들이 가족법을 중심으로 귀일된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저자는 새로 부부관계를 시작하는 남녀를 위한 지침서로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인데, 일본 역시 우리와 비슷한 가부장제 문화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족관계의 핵심인 남녀관계의 진정성을 고민하는 이들에겐 일말의 깨우침을 줄 것이라 생각된다. 때론 다른 문화권의 시각을 빌 때 우리의 문제가 더 잘 보이는 경우가 있듯, 일본은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기에 우리에겐 참조의 효과가 큰 듯하다. 그런 탓에 비슷한 문제를 다룬 경우 일본의 경우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편이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남녀관계의 평등주의라는 측면에서 이상적인 국가로 제시되는데, 그들의 사례를 다룬 책들이 의외로 없다는 건 참 아쉬운 일이다. 출판문화가 편중돼서 소중한 경험들이 사장되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여성학 계통 출판기획자들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그런 측면에서 노력해주었음 한다.

가족은 사회로부터 상처입은 자들의 최후 보루이자 그들이 가진 상처의 기원으로서, '가족'은 우리 시대의 아포리아처럼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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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일 수 없는 자유
막달레나 쾨스터 외 엮음, 김경연 옮김 / 여성신문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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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삶이 지겨울 때면 모든 걸 잊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누구에게나 일상은 지겹지만 막상 그 일상을 벗어나면 매 순간을 채우던 그 일상이 오히려 그리워서 예정된 날짜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때도 있다. 그리고 짧은 시간 일상을 벗어나 만끽하는 여행의 즐거움도 순간의 해방감만을 줄뿐, 근본적으로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다만 그 짧은시간의 해방감과 허무함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뿐이다.

예정된 휴가 여행보다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 무작정 떠나는 여행이 여행의 본질에 좀 더 부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통이 머무는 자리를 벗어나 어디론가 그곳만 아니라면 다 좋은 곳으로 떠날 때 우리는 고통에 대한 해답을 바라지만, 내면으로의 여행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그 여행은 어떤 해답도 주지 않은 채 우리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헛수고가 될 수도 있다. 프랑스, 인도와 네팔로 돌아다니며 고통을 치유하고자 몸부림치던 <면도날>의 주인공의 깨우침처럼 구원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구원이란 것이 낙타가 면도날 위를 걸어가는 것만큼 요원한 것이라는 깨우침은 내면적 구원이 평범한 인간에겐 얼마나 요원한 바램인가를 더욱 절실히 느끼게 해준다.

여성들에게 있어 여행이란, 더군다나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 여성들이 남편, 아이들을 버려 두고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 떠나는 여행이란 요즘에도 상상하기 힘든 모험이다. 웬만한 뚝심이 아니라면 순수하게 자신만을 위해 가정을 버리고 길을 나서는 것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사회적 죽음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한 여자는 죽을 때까지 한 가정의 아내, 어머니라는 의무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침묵의 관습이 철저한 사회에서는 여성의 자유의지는 숨쉴 수 없다. 그래서 <4월의 유혹>의 여성들이 이탈리아 여행에 그렇게 가슴이 달떴을 것이다.

자신의 현재 삶에 대해 온전히 수긍하는 사람이 없듯 나 역시 내 삶에 대한 회의가 가끔씩 찾아와 괴롭힌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 꾸려질 삶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의 선택만으로 채워질 삶이라는 걸 알지만, 틀을 벗어난 상상은 왠지 공상으로만 느껴지고, 그 상상은 다시 제 자리로 맴돌기 마련이다. 아마 나에겐 자유에의 용기가 부족한 건지 모른다. 사회와 가족이 부여한 기대와 의무를 벗어버린 삶이 나에게 안겨줄 시련이 걱정스러운 것이리라. 그러나 <길들여지지 않은 자유>의 여성들이 나에게 보여준 당당한 모습들이 나에게 용기를 심어 준다. 특히 자신을 세상과 고립된 아웃사이더이자 고아라고 생각했던 이자벨레 에버하르트의 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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