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마 클럽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정창 옮김 / 시공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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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르테의 <뒤마클럽>은 우리 독서계의 변방 스페인 문학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리의 독서, 출판 시장이 미국이나 일본 등으로 제한된 상황에서 <뒤마클럽>과 같은 책이 발간되고 우리 독서계에 무시 못할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반가운 일이다.

문화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이겠지만 편식은 우리의 건강에 해롭다. 이런 상투적인 얘기를 경청해야 할 쪽은 소비자층이라기보다는 공급자층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수효가 없다고 괜찮은 작품들을 외면한다면 그보다 무책임하고 근시안적인 행동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이 독서층의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최근 일고 있는 추리문학 붐은 <뒤마클럽>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같다. 우리의 추리 문학은 독자의 외면을 받고 있고, 향유할 수 있는 추리문학은 아가사 크리스티나 앨러리 퀸 등 외국 고전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처럼 추리문학에 목말라 있는 독자에게 <뒤마클럽>같은 작품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두번째로 최근의 우리 소설들이 갈수록 왜소화되고 단편화된 경향이다.

이런 상황은 지식욕에 불타는 독서층의 확대 상황에서 광대한 지식과 교양의 세계로 인도하는 <뒤마클럽>은 지식욕에 불타는 독자층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사회적으로 확산되는 독서열기이다. 과거 몇 년간 인터넷 열풍이 불면서 독서층의 상당수가 인터넷 쪽으로 빠져나간 것이 사실이지만, 깊이 없는 정보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종이'와 '지식'의 결합체인 책에 다시 흥미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 붙은 200여개 남짓의 각주가 증명하듯 이 책의 출판 과정 그 자체는 지난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작가의 명성만을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는 난해한 지식의 세계를 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가지 요소때문에 <뒤마클럽>은 독서출판계의 화제가 됨직했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을 접한 독자층의 반응은 이런 열기와는 사뭇 대조적인 것같다. 추리문학으로서의 플롯 구성과 서스펜스가 약하다는 게 불만의 주요인인데, 나 역시 이 점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시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은 있다. 과연 이 책의 미덕과 가치를 추리문학적인 기교에서만 찾는 태도가 좋은가 하는 점이다. 1시간 30여분 남짓의 영화 감상으로 배양된 세련됨이나 즉물성과 같은 선입견에 우리가 너무 길들여진 것은 아닐까. 책은 감각에 대한 순간 순간의 향수가 아니라 좀 더 느슨한 이완과 지각을 요구하는 존재는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가진 약점이 감춰지는 것은 아닐 테지만.

<뒤마클럽>은 지식의 세계에서 지식을 먹고 꿈꾸고 그 때문에 쓰러지는 인간들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욕을 표현하기 위해 그 매개로 알렉상드르 뒤마를 채택하고, 뒤마클럽이라는 동호회까지 결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욕을 표현하기 위해 현실의 세계를 지식의 세계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은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배역을 맡아 펼치는 일종의 연극이 된다. 그 과정에서 정통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뭔가를 기대한 주인공 코르소와 그를 따라 여행을 떠난 독자들은 결말에 가서 한없이 맥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뒤마클럽>은 물론 정통 추리소설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어 정통 추리소설을 기대한 독자에게는 실망스럽겠지만, 관점과 흥미에 따라선 새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소설의 하나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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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4대 비극 - 범우비평판 세계문학선 3-1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이태주 옮김 / 범우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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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만큼 우리에게 친근한 문학가는 없다. 그의 등장 인물이 뿜어내는 대사 하나하나는 가장 섬세한 언어적 세공품이며, 셰익스피어 극의 설정은 인간의 운명, 갈등, 감정의 가장 정화된 형태를 보여준다. 셰익스피어 극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내면에 깃들인 본질을 꿰뚫는 듯한 통찰력과 이를 펼쳐 보이는 언어적 기교 면에서 그의 앞도 그의 뒤도 없는 듯한 형국이다.

그런 탓일까. 셰익스피어의 작품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바탕으로 재연된 영화를 통해서 그를 접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햄릿], [맥베스], [로미오와 줄리엣], [리어왕]같은 작품들은 세계의 명감독들에 의해 영화로 재탄생했고, 책 읽기가 번거로운 현대인들은 그런 영상물들을 통해 셰익스피어 극의 매력을 간접적으로만 맛보고 있는 형편이다. 극은 연극을 위한 서브텍스트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셰익스피어 극은 텍스트 그 자체로서 읽어보아도 큰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과장된 듯한 표현도 상당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극 자체가 가진 특징으로서 크게 흠잡을 만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셰익스피어의 가장 잘 알려진 비극 4편을 싣고 있는데, [햄릿]을 비롯한 이 4편의 비극은 궁정 주변의 상류 사회 인간들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그 갈등은 한 인간의 성격적 결함, 마녀의 신탁이라는 운명적 계시, 인간의 탐욕, 연약한 인간적 약점 등에서 비롯되고,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를 망쳐놓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고귀한 궁정 인사들의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는, 시정배들의 그것과 유사한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궁정극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오랜만에 극을 읽는 일은 행복했다. 브레히트, 몰리에르도 괜찮고, 아서 밀러, 테내시 윌리엄스, 버나드 쇼같은 현대 작가의 작품도 다시 한번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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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 그 섬세함의 뒷면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4
박현수 지음 / 책세상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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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대학생이면 누구나 한번쯤 읽어봐야 할 소설 중 하나라는 위상을 지녔다. 눈부신 이념의 후광이 사라진 빈 공간에 남은 것이라곤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는 고뇌하는 자아였다. 단자화된 개인들의 상실감에 침윤된 관념 세계를 하루키만큼 그려낸 소설가는 없었고, 적어도 우리에게 하루키는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해 준 영웅이었다.

현실에 대한 무관심과 철저한 내면 조응을 특징으로 하는 하루키의 문학 세계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환멸 어린 의식 세계와 적절한 조응을 이루면서 젊음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문학의 이러한 흐름 한편에서 일본은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을 가속화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과거에 대한 재해석과 왜곡, 현실적인 조처들로써 이어졌다.

국가라는 거대 단위와 개인이라는 소 단위 사이의 이와 같은 부조화 현상에 대해 일부에서는 안도감 비슷한 감정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 감정의 개요는 이런 것이다. 일본이 국가 단위로 군국주의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 기반인 개인의 현실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그런 움직임을 좌절되지 않을까 하는 것.

그러나 과연 이런 상반된 움직임이 역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는가, 혹시 그 둘 사이에는 상보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아닌가 라고 의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문화 그 섬세함의 뒷면>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일본 고유의 문학 형식인 사소설을 검토하고 있다. 저자의 고찰 결과에 따르면 한때 우리가 열광했던 하루키 문학 세계의 상당 부분은 이미 사소설에 의해 정립된 것이다. 비록 사소설이 국민국가 형성이라는 근대적 과제 성취와는 다소 동떨어진 위치에서 국민국가 형성의 이념적 기반 조성이라는 근대적 과제 수행에는 비효과적이었지만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함으로써 오히려 군국주의적 움직임에 무비판적으로 개인들을 이끌어들이는 기능을 했다.

이 책은 우리가 매혹되는 일본문화의 섬세함의 기원을 일본적 문학 형식인 사소설에서 찾고, 이를 일본의 군국주의적 흐름과 연관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일본 문화를 수용하는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 즉, 하나의 문화로서 받아들이되 그 이면에 군국주의적 논리가 묻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굳이 미비한 부분을 지적한다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일본문화에 대한 매혹은 소설에 한정되지 않고 영화나 드라마, 가요 등 대중문화 전반에 걸친 현상이라는 점, 그리고 매혹되는 이유도 굳이 섬세함 하나로만 한정하기에는 다양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본문화의 중심은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영상물이고 소설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영상물에 매혹되는 이유는 섬세함을 제외하고서라도 무수히 많다는 것.

그러나 이 책을 두루 훑어봐도 저자가 이런 사정을 미리 감안하고 논의를 제한한 것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저자의 전공이 문학인 탓에 논의의 폭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사정은 감안할 수 없지만 현재 우리 문화 대중이 일본 문화의 어떤 부분을 어떤 식으로 어떤 이유에서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점을 검토하고 논의에 어떤 식으로라도 반영한 연후라야 이 책의 논지가 한층 더 설득력과 현실성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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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신비
베티 프리단 지음 / 평민사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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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저작의 고전이라고 일컫는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를 읽고 있다. 서평은 모름지기 책을 다 읽고 나서 쓰는 게 정상이지만, 이 책은 도저히 끝까지 읽어낼 것같지 않다. 이런 느낌을 갖게 된 이유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대신하겠지만, 절반이 채 못되는 부분에서 독서를 그만두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선 고전이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지만, 번역 상의 문제와 더불어 편집 과정 상의 문제마저 거론하자면 차라리 절망감까지 느끼게 된다. 이 책은 초판이 70년대 말에 나왔고, 지금까지 초판 8쇄, 개정판 1쇄까지 찍은 상태이다. 70년대식의 번역 감각은 아무래도 지금의 번역 감각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지만, 이 책은 적절한 의역을 거치지 않은 초벌 번역을 그대로 책으로 내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건 넘어갈 수 있다 치더라도 한 문장 내에서도 주술 구조가 일치하지 않는 문제를 그대로 내버려 둔 건 이해할 수 없다. 거기에다 편집 과정도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오자도 수두룩해서 일일이 지적하기가 힘들다. 초판을 8쇄까지 찍고, 개정판까지 내놓은 마당에 내가 지적한 이런 문제들이 지적되지 않았을 리 없는데도,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내놓는다는 것은 출판사로서는 비도덕적인 상행위라는 인상을 준다. 이런 책을 내놓고 독자들에게 읽으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꼭 필요한 책을 번역해서 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성의 신비>처럼 도저히 알아먹지 못할 글자들만을 종이 위에 박아서 내놓았을 때는 차라리 이 책을 펼치지 않음만 못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차라리 원서로 읽는 게 말도 되지 않은 글자더미를 놓고 씨름하는 것보다 최소한 열 배는 속시원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제조물책임법까지 시행되는 마당에 출판사라고 해서 제조물에 대한 책임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리라 생각한다. 나는 제품 구매자로서 이 책을 통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으므로, 출판사에서는 최소한의 보상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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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후책임을 묻는다 - 기억의 정치, 망각의 윤리
타카하시 테츠야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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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방한한 독일 작가 퀸터 그라스의 대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나치에 대한 생리적 혐오증으로 인해 어른들의 세계를 거부하는 아이 오스카의 세계를 다룬 <양철북>의 저자 퀸터 그라스는 꽤 오래 전부터 나치 독일의 기억과 싸워온 사람이기도 했다. 대담 중 가장 인상에 남는 대목은 전후 처리를 두고 독일과 일본이 보여준 태도상의 차이를 언급한 대목이다. 전후 독일이 전전 체제와 완전히 단절하고 나치즘적 잔제를 완전히 청산하는 절차를 거친 반면, 전후 일본은 전전 군국주의적 일본과의 고리를 지금까지 이어오면서 역사 왜곡을 통해 피해자에게 다시 한번 정신적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최근에 출간된 서경식, 다카하시 대담집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는 일본이 과거 동아시아인들에게 행사한 폭력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고, 그 피해자들의 기억과 증언에 대해 가해자로서 어떻게 윤리적 응답을 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의 입론에 의하면, 20세기는 거대한 정치 폭력의 세기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군 위안부, 나치 생존자 프리모 레비같은 이들이 그 폭력에 대해 끊임없이 증언하며 기억을 되살리려 하지만 가해자들은 그런 기억을 과거화하거나 희석시킴으로써 과거를 시간의 저편에 묻어두려고 한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단절을 뛰어넘어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재소환하여 심문하는 절차는 필수적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현재의 일본은 무책임하며 비양심적이다. 그것은 일본 스스로가 초래한 단절이다. 자신들의 과거 책임을 천황에게 전가하는 상징천황제라는 교묘한 논리를 법제화하고 군국주의의 상징 기미가요와 히노마루를 국가의 상징으로 제정하고 평화법을 개정하고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으로 국가의 책임은 미룬 채 국민기금으로 대체하는 등 지금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일본 스스로가 세계 속에서 스스로 책임 있는 주체로 나서기를 거부하는 의지의 반영이다. 여기서 한일 양국간의 단절의 극복은 요원해진다.

이 책은 군국주의 일본의 극복, 더 넓게는 내셔널리즘 극복의 문제를 과제로 한 진지한 반성의 산물이다. 200여 페이지 남짓의 적은 분량이지만 그 무게만큼은 그 어느 진지한 책에 못지 않다. 그러나 '대담집'이라는 날렵한 형식으로 인해 그 논의는 문자화된 고정성을 뚫고 한층 생동감있게 다가온다.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에 따른 일본 천황의 내방이 예정되어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러나 한 국가의 수상도 아닌 천황을 김 대통령이 초청한다는 일은 일의 진행 절차에 비추어 단계를 뛰어넘는 무리한 발상이다. 과거 군국주의의 상징 천황을 피해국인 우리가 초청하는 것은 천황 그 자체를 승인하겠다는 발상과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천황은 존재 그 자체를 의심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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