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에, 마음은 참 불완전한 것 같아요." 그녀가 미소를 머금으면서 말했다.나는 주머니에서 두 손을 꺼내, 달빛 아래에서 바라보았다.달빛에 하얗게 물든 손은 그 조그만 세계로 완결된 채, 갈 곳 을 잃은 한 쌍의 조각상처럼 보였다."내 생각도 그래. 아주 불완전하지." 하고 나는 말했다. "하 지만 그건 흔적을 남겨. 그리고 우리는 그 흔적을 다시 더듬 을 수 있지. 눈 위에 난 발자국을 더듬듯이."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요?"나 자신에게." 나는 대답했다. "마음이란 그런 거야. 마음이 없으면 어디에도 가지 못해."나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겨울 달은 어색할 정도로 선명하 게 빛나면서 높은 벽에 둘러싸인 마을의 하늘에 떠 있었다."그러니까 조금도 당신 탓이 아니야." 하고 나는 말했다.
모두를 위한 정의와 평등이라는 가치에 어떻게 반대할 수 있겠냐만, 그는 겨우 열세 살이고 전 혀 중요하지 않은 한 점 먼지 같은 존재인데 그런 먼지 가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핑계 대지 마, 에이미가 말했다. 영원히 열세 살은 아 니잖아. 그때는 어떻게 할 거야? 너 자신만 생각하면서평생을 살 수는 없잖아, 아치. 뭔가를 받아들여야만 해.아니면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텅 빈 사람이 되는 거야, 아치. 미국의 〈좀비 도시〉에서 걸어다니는 시체들처럼 말이야.
"들으면 안 돼요." 그림자가 등뒤에서 속삭였다. "보는 것도 안 됩니다. 그저 환영이에요. 도시가 우리에게 환영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눈을 감고 이대로 돌파하는 겁니다. 상대의 말을 믿지 않으면, 두려워하지 않으면, 벽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저들이 머리를 쓴 거예요. 도시는 이 웅덩이 주위에 공포라는 심리적 울타리를엄중하게 둘러쳐뒀지요. 담이나 울타리보다 훨씬 효과적이에요. 한번 공포가 마음에 뿌리내리면 그걸 극복하기란 간단하지 않으니까."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입니다." 고야스 씨가 나지막히 말했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시간이 머물러 있어도 계절은 순환한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현재가 비춰내는잠깐의 환영일지라도, 책장을 아무리 넘겨도 쪽 번호가 바뀌지 않을지라도, 그래도 하루하루는 흘러가는것이다.
나는 그가 한 말을 생각해봤다. 그 높은 곳에서 격심하게 떨어지는 나를 정확히 받아줄 사람은 (만약에 있다면 과연 누구일까? 내가 덧없는 상상을 되풀이하는사이 촛불이 훅하고 꺼졌다.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이주위를 감쌌다.
"마음으로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소년은 조용한목소리로 내게 고했다. "이 방의 이 작은 촛불이 꺼지기 전에 마음으로 그렇게 원하고, 그대로 단숨에 불을끄면 돼요. 힘차게 한 번 불어서. 그러면 다음 순간, 당신은 이미 바깥세계로 이동해 있을 겁니다. 간단해요.당신의 마음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습니다. 높은 벽도당신 마음의 날갯짓을 막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처럼굳이 그 웅덩이까지 찾아가 몸을 던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분신이 그 용감한 낙하를 바깥세계에서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으면 됩니다."
우리는 가끔 스스로 비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편하다는 이유로 그 비겁함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릴 때가 있다. (창피하게도 나는 그러한 부류의 대표적인 인간이다.)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으니 없다고 치고, 고개를 쭉 빼면 바로 보일 텐데 그냥 뒤돌아 서고 만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편한 존재를 인정하면 몸과 마음이 성가시고 상대방의 기분을 해칠 수도 있으니 말이다.몇일전 TV에서 북한에 남게 된 국군포로들에 대한 다큐를 보게 되었다. 자연히 오래전에 읽은 이 책이 떠올랐다. (보다 보니 이 책을 모티브 로 만들어진 다큐였다.) 책을 읽으면서 속이 상하고 억울했지만 책을 덮고 나서는 잊고 말았다. 비겁하게 말이다. 하지만 TV화면으로나마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니 그들을 잊고 지내던 시간도, 그들을 아예 모르고 있던 시간이 부끄러워졌다. 그 중 “우리가 거기에 없었다는 그 말을 믿었답니까?˝라며 눈물을 글썽이던 노인의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 조금만 살펴 보았다면 바로 알 수 있었을 텐데 아무도 알아 보지 않았고 그들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비단 그들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안보이는 척 하며 지나친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가끔은 어차피 내가 도울 수 없으니 그냥 지나치는 게 마음 편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조금 더 목을 빼고 살피게 되지 않을까?
요즘 영양제 한두알 정도 먹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TV에서 연속으로 4개의 영양제 광고를 하는 것도 보았다. 부모님에게도 주기적으로 멀티비타민과 관절이나 고지혈증에 좋다는 영양제를 보내드리고 있다. 이런 와중에 정작 나는 단 한알의 영양제도 먹고 있지 않다. 가끔 눈이 시리고 관절이 뻣뻣하고 피부가 칙칙하고 머리카락이 한움큼씩 빠지지만 아직은 영양제의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친구가 영양제를 먹으며 한번 먹어보라고 건네는 영양제는 소중하게 받아 삼킨다. 비타민C의 놀라운 신맛을 특히나 좋아한다. 오지은 작가님의 말처럼 영양제를 건내는 친구의 마음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어떤 효과를 기대하며 말이다.
원고를 전부 읽은 편집자가 이렇게 말했다."그럼 영양제를 먹으라는 거예요. 먹지 말라는 거예요?"나는 대답했다."바로 그것이 영양제의 핵심입니다."편집자는 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