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으면 안 돼요." 그림자가 등뒤에서 속삭였다. "보는 것도 안 됩니다. 그저 환영이에요. 도시가 우리에게 환영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눈을 감고 이대로 돌파하는 겁니다. 상대의 말을 믿지 않으면, 두려워하지 않으면, 벽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저들이 머리를 쓴 거예요. 도시는 이 웅덩이 주위에 공포라는 심리적 울타리를엄중하게 둘러쳐뒀지요. 담이나 울타리보다 훨씬 효과적이에요. 한번 공포가 마음에 뿌리내리면 그걸 극복하기란 간단하지 않으니까."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입니다." 고야스 씨가 나지막히 말했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시간이 머물러 있어도 계절은 순환한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현재가 비춰내는잠깐의 환영일지라도, 책장을 아무리 넘겨도 쪽 번호가 바뀌지 않을지라도, 그래도 하루하루는 흘러가는것이다.
나는 그가 한 말을 생각해봤다. 그 높은 곳에서 격심하게 떨어지는 나를 정확히 받아줄 사람은 (만약에 있다면 과연 누구일까? 내가 덧없는 상상을 되풀이하는사이 촛불이 훅하고 꺼졌다.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이주위를 감쌌다.
"마음으로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소년은 조용한목소리로 내게 고했다. "이 방의 이 작은 촛불이 꺼지기 전에 마음으로 그렇게 원하고, 그대로 단숨에 불을끄면 돼요. 힘차게 한 번 불어서. 그러면 다음 순간, 당신은 이미 바깥세계로 이동해 있을 겁니다. 간단해요. 당신의 마음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습니다. 높은 벽도당신 마음의 날갯짓을 막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처럼굳이 그 웅덩이까지 찾아가 몸을 던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분신이 그 용감한 낙하를 바깥세계에서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으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