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 희망이 뭐야?"
"선생님"
대충 자기소개서에 썼던 직업을 말했다.
"아니, 직업 말고"
자기는 직업을 물은 게 아니란다. 정말로 장래의 희망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한다.
"장래 희망 하면 왜 꼭 직업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인생이 다 직업에만 달려 있는 것처럼."
"넌 그럼 뭔데?"
"나는 하얀 강아지 한 마리랑 갈색 강아지 한 마리랑 얼룩 강아지 한 마리랑 검은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는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황당한 대답이었다. 할 말을 잃었다.
"되게 어려운 거야. 반려동물을 네 마리나 키우려면 경제적 상 항도 좋아야 하고, 할머니가 되어서도 귀여우려면 매너나 마인드도 좋아야 해. 그리고 옷도 귀엽게 입어야 해. 손으로 뜬 스웨 터 같은 거. 즉 손재주도 좋아야겠지. 평생을 바쳐 이뤄야 하는 장래 희망 아니냐고"
수민이는 다시 내게 장래 희망을 물었다. 그런 식의 장래 희망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하자 지금 생각해 보라고 했다.
"난.....전단지에 붙은 얼굴들을 주의 깊게 보는 어른이 되 고 싶어. 혼자 걷는 아이에게 부모님은 어디 있냐고 묻는 어른이 되고 싶어. 슬픈 기사에 악플 대신 힘내라고 댓글 다는 어른이 되고 싶어."
나도 모르게 단숨에 말하고 조금 후회했다.
"그건..... 너무 쉽게 되겠다."
"만약 어른이 될 수만 있다면

"너, 불운의 속성이 뭔지 알아? 피하고 숨으면 더 찾아다녀. 자기를 의식하는 사람들한테 애정을 가지고 있거든. 아주아주 외로운 놈이야 그거."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내 말 잘 들어."
선생님은 몸을 내게로 기울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인생의 엄청난 비밀이라도 알려 준다는 듯이. 그 비밀에서는 땀 냄새와 점심에 먹은 된장찌개 냄새가 났다.
"불행이 다가오면 움직여선 안 돼. 반응하지 말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지. 아침밥 먹고 점심밥 먹고 저녁밥 먹고. 최대한 그대로 지속하는 거야. 모든 것을. 알겠어?"

"우리 직원 모두, 혜진 양의 얼굴을 매일매일 봐 왔어요. 혜진양이 나타나면 1초 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어요. 기운 내세요."
우리 가족 말고도, 이 세상 어딘가에 혜진이를 기억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 태어나 들은 그 어떤 말보다 단단하고 힘센 말이었다.
호텔에 온 건, 잘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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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사라진 여자들
메리 쿠비카 지음, 신솔잎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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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실종이라는 큰 틀 외에도 저자는 여성들만이느끼는 미묘한 불쾌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조용한 주차장을 거닐며 누군가 내 뒤를 따르는 것만 같은 불안감,내 집인데도 눈치를 보게 되는 인테리어 작업자들의 불편한 시선, 아이들을 따라 형성된 학부모 커뮤니티내 신경전, 임신으로 불어난 몸을 향한 압박감, 불쾌하고 적나라한 산부인과 진료, ‘해피엔딩‘을 맞이한다는 이유만으로 출산 과정에서 완벽히 묵살되고 마는 산모의 고통,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하원시키는 아빠보다 등원시키는 엄마가 자연스럽게 악역이 되고야 마는 현실. 저자는 이런 일상적이고도 어찌 보면 평범하기까지 한, 하지만 뒤늦게 생각해보면 묘하게 뒷맛이 씁쓸해지는 이야기들로 알게 모르게 독자들을 긴장시킨다. 슬쩍슬쩍독자를 건드리는 언짢은 요소들은 가랑비에 진창이 되고 마는 땅처럼 독자들의 발을 무겁게 잡아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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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넛워터 2023-06-09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긴이의 말을 그대로 옮겨놓고 자기 서평인 듯 적어놓으셨네요;;

vooc 2023-06-09 19:20   좋아요 0 | URL
네. 옮긴이의 말을 그대로 적은 것 맞습니다. 밑줄긋기 기능이지요. 이 책에서 제가 가장 공감한 글이었거든요.
 
[eBook]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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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애쓰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조차 기어이 바닥을 드러내게 만드는 동네가 있었다. 품위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존중받기를 원하는 만큼 타인을 대접하는 사람, 나의 상처가 아픈만큼 남의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사람이고 싶었다. 품위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자, 가진것 없는 자가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지켜야 할 방어선이었다. 나는 매사에 ‘내 돈을 써야 하는일인가만 생각하는 사람, 폭력적인 시선으로 남을 쳐다보는 사람, 남의 차에 가래침을 뱉는 사람, 욕설을 퍼붓고 악을 쓰는 사람이 결코 되고 싶지 않았다. 나뿐 아니라 누구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다들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그런 사람이 되고만 것이다. 어떤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몸에 배는 품위와 교양과 인격이 다른 환경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 태도였다.
피곤하고 지친 나머지 끝내 화만 남은 이들에게는 인간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이웃들을좋아할 수 없었지만 차마 미워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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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센디어리스
권오경 지음, 김지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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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딱한 바보들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듯 폭군을 믿었다. 누군가의 지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수용소 안에서든 밖에서든 신앙을 갈구했다. 하물며 그 독재자가 자기 제자들이 믿는 만큼 올바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얼마나 큰 것을 성취했을까. 만약 그가 그들을 사랑했다면……… 존 릴의 아이디어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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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 - 괴테와 마주앉는 시간
전영애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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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목표가 있는 한 방황한다니 갈 곳이 있기에 길을 잃는다니. 그러나 이 비문의 합의가 참 큽니다.
뒤집어보면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은 곧 갈 곳이, 목표가 있다는 이야기일 수 있는 것입니다. 방황하지 않는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방황이 바로, 목표가있고 지향이 있기 때문이라니! 참으로 큰 위로가 아닐 수없습니다. 지금 방황해도 괜찮아. 다 가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언젠가 어디인가에 닿아. 그런 쉬운 말보다, 말이 될듯 말 듯한 이 위로가 주는 여운이 큽니다. 참으로 정교한 비문입니다.

뒤처진 새

철새 떼가, 남쪽에서 날아오며
도나우강을 가로지를 때면, 나는 기다린다
뒤처진 새를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그뒤처진 새가 머리 위로 날아 떠나면
나는 그에게 내 힘을 보낸다


- 오늘 새가 팩스기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몹시 기뻤습니다! 감사합니다! 라이너 쿤체.

"심각하진 않게, 노상 생각한 것 같네요. 몸에다는 워닉들인 공이 없어서, 언제 회수해도 불만 없다 하며 살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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