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 제안들 36
아글라야 페터라니 지음, 배수아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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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 분량이 얼마 되지 않아서 금방 읽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다 읽는데 며칠이나 걸렸다. 루마니아에서 서커스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나 유럽을 떠돌았던 아글라야 페터라니가 독일어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



난민으로 여러나라를 떠돌며 서커스 곡예사로 어린시절을 보낸 저자. 폭력과 소외로 점철된 어린시절을 지나 스스로의 언어를 선택하게 된 저자가 적어내려간 생의 파편들. 이질적이고 생경하다. 이중의 이방인이 새겨넣은 단순한 문장들. 생략된 이야기들은 페이지의 여백을 더듬으며 천천히 읽을 때에야 완성된다. 자연스럽게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떠오른다.



기억에 남는 것은 찌르듯 강렬한 문장들.

‘아이는 폴렌타 속에서 끓는다, 왜냐하면 아이가 어머니 얼굴에 가위를 꽂아버렸기 때문이다.’(125p)

‘나의 천사는 피로 웃는다’(1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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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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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들>. 캐롤라인 냅의 저서들 중 가장 좋았다. 단순히 여성과 허기에 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여성의 욕구와 그것들을 둘러싼 기류 전반에 대한 이야기이며, ‘갈망과 동경과 필요로 이루어진’, 자기 징벌적 ‘독’에 대한 이야기이고, 여성 내면의 공허함과 두려움, 슬픔에 대한 이야기다. 먹거나 먹지 않거나, 훔치거나, 자해하거나 -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여성들의 심연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의 글은 투명한 자기 성찰로부터 출발한다. 스스로를 벌하듯 혹독하게 굶기를 일삼았던 시절에 대한 고백부터, 어머니로부터 이어진 자기부정의 역사, 심리상담과 조정을 시작하며 스스로의 상황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되기까지.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섬세하고도 예리하게 여성 생애 전반에 스며든 욕구와 죄책감의 문제를 짚어낸다. 밀푀유처럼 겹겹이 쌓인 여성들의 자아를, 무의식 깊은 곳에 방치되어 명명되지 못한 울부짖음들을 다독이며 불러낸다.



반짝이는 통찰로 가득한 책. 특히 저자가 여성의 허기를 소비주의와 연관짓고, 여성 내면의 밑바닥에 숨어있는 있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을 읽으며 열광했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일거라며 읽어내려가다가 얼어붙은 구절도 여럿이다. 희망으로 나아가는 결말은 또 어떤가. 여성들이 자기혐오 없이, 자기징벌없이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그러니까 그대로의 내 몸을 사랑할 자유, 원하는 것을 거리낌없이 욕망할 수 있는 자유,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여성성의 기준을 거부하고 그저 나다울 수 있는 자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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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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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책을 다 읽고 나서 느껴지는 기쁨은 그 종류가 무척 다양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가 느꼈던 기쁨에 이름을 붙인다면 ‘오롯한 기쁨’. 열 네명의 철학자를 만나는 여정을 기차 여행 컨셉으로 풀어낸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일단 기차 여행 콘셉에서 완전히 넘어갔고, 한 챕터를 끝낼 때마다 종이 티켓 굿즈에 스티커를 붙이는 것도 정말 즐거웠다. 아, 가장 중요한 포인트! 글 자체가 재미있다! 빌 브라이슨이나 패트릭 리디의 여행기처럼!



책 속에 소개된 열 네명의 철학자들은 살아온 시기도 삶의 궤적도 제각각이다. 특히 헤이안 시대 일본의 궁녀였던 세이 소나곤이 포함된 것이 흥미롭다. 책 속 흐름은 말 그대로 출발과 끝이 있는 여행인데, 새벽부터 황혼까지 구성되어 있다. 한 명의 철학자에게서 하나의 가르침을 얻어가는 여정인 셈. 철학자의 일생이나 주장을 단순 요약하는 식이었다면 바로 덮어버렸을텐데 각각의 매력 포인트를 제대로 잡아 소개하니 빠져들수밖에. (책 속에 소개된 책들 정리하다가 때마침 <월든> 특별판 나왔길래 구매..)



게다가 이 철학 여행의 출발점은 순전히 저자의 개인적 필요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나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알고 싶다.’ - 삶의 의미를 찾고있는 독자들이여 오세요 철학의 세계로) 사사로운 이야기들이 듬뿍 들어가있어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아끼는 수첩을 잃어버린 뒤 그 한탄이 몇 챕터에 걸쳐 계속된다던지, 딸과의 여행 에피소드가 끼어든다던지 하는 식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조하며 툴툴거리는데도 전혀 밉지 않은 태도도 정이 가는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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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실루엣
미야모토 테루 지음, 이지수 옮김 / 봄날의책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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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가장 좋아하는 일본 소설가 미야모토 테루. 작품 수가 상당한데도 국내에 번역되어있는 책이 몇 권 되지 않아 항상 아쉬웠었다. 그의 작품을 읽으려면 직접 일본어를 배우는 수밖에 없는걸까 싶었던 찰나, 반가운 소식! <생의 실루엣>은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미야모토 테루의 에세이다. 독보적인 서정성으로 나를 비롯한 수많은 독자들의 심장을 앗아간 미야모토 테루 문학이 궁금한 이들이라면 정말이지 필독해야한다.



제목마저도 절묘한 <생의 실루엣>(원제는 ‘생명의 모습’). 그 탄생 일화부터 흥미진진하다. 소설에 집중하고자 에세이를 쓰지 않기로 결심한 저자였지만, 에세이 잡지 발간이 꿈이라는 단골 요릿집 사장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10년간 일 년에 두 번씩 에세이를 연재했다고. 오랜 시간 한 편씩 쓰여진 글들이 모여 이 책이 된 것이다. 저자가 어린시절 겪었던 일부터 작가 생활을 시작하게 된 계기, 즐겨 읽었던 책 이야기까지 글의 내용도 분량도 다양하다. 그동안 소설로만 만날 수 있었던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그려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다.



미야모토 테루는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는가. 그가 서점에서 책을 들춰보다가 ‘나라면 백배는 더 재밌는 소설을 하룻밤만에 쓸 수 있다’며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있다. 이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역시 천재는 출발부터 다른 것인가!’ 하며 경외의 마음을 품었었다. 이번 책에는 당시의 일화가 자세히 그려져있는데, 원인모를 불안증세를 겪고 있었던 저자에게 생긴 ‘꿈만 같은 큰 목표’가 바로 소설이었다고. 그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 셈이다. ‘살아가자, 멋진 소설을 쓰자.’ 문학을 향한 순수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가득한 그의 문장을 읽으니 내 안에서도 용기가 피어오른다. 그의 글이 더 좋아진다.



미야모토 테루 소설 애독자분들, 이 에세이 무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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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피에르 베르제 지음, 김유진 옮김 / 프란츠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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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한 잔 가져다두고 읽으면 더없이 어울릴 책. 피에르 베르제가 먼저 세상을 떠난 동반자 이브 생 로랑에게 반 년동안 쓴 편지들이 담긴 서간집이다. 50여년간 사업 파트너이자 연인이었던 두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 책이 무척 각별할테다. 그렇지 않더라도 평생의 연인을 그리워하는 구구절절한 이야기에 마음을 열지 않기는 힘들겠지만.



편지는 약 6개월 동안, 두 사람이 수집한 예술품 경매가 사상 최고가로 치러진 시기를 통과한다. 베르제의 문장은 슬픔이 깃들어있음에도 무척 아름답다. 특히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그 순간은 얼마나 찬란했는지, 함께 했던 날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회고하는 장면은 당장이라도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다. (‘우리는 처음부터 동반자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가하면 베르제는 말년의 이브 생 로랑을 두고는 가차없이 솔직한 말도 서슴지 않는다. (‘너는 언제나 조난자였지.’) 가장 가까이에서 단단한 믿음과 애정으로 함께해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모든 문장에 그리움이 서려있다.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인데도 다 읽고 나니 여운이 길다. 아름답고 쓸쓸한 연서. 이브 생 로랑에게 피에르 베르제가 그랬듯, 있는 그대로의 나를 정확히 바라봐줄 평생의 연인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났을 때 제대로 알아볼수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 굳이 나타내려하지 않아도 글마다 배어나는 베르제의 예술적 안목에도 찬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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