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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고 싶었다. 도망칠 수 있는 데까지 도망치고 싶었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힘껏 도망쳐야만 했다. 어떻게든 도망치고 나면 밤이오니까, 밤이 오고 나면 또 잠으로 도망치곤 했다.
이상한 굴레를 거듭 반복한 시절이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이 시기에 식물에 깊이 매료되었다.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었다. 나를 소개할 필요도 없었고, 스스로를치장하거나 즐거운 표정을 짓지 않아도 괜찮았다.
식물들은 내가 애정을 쏟은 만큼 정직하게 자라났다. 그 건강한 방식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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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세계에 들어서면 누구도 나를 괴롭히지않는다. 안전하고 커다란 초록색 원이 생긴다. 그 안에 들어간다. 불안은 나를 쥐고 흔들지만 식물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나는 조금씩 평화를 얻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기가 자연스럽게 스르륵 지나간다. 물론 언제고 다시 돌아올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번엔 무사히 지나간다. 지옥을 맛보고 연옥의 문턱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계속 살 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지는 것보다 더 능동적으로 살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면서 스스로 구원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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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는 회사 앞에 세워둔 차로 돌아왔다. 차 문을 열어서 번들거리는 햇볕을 받으며 폭발하기 직전까지 뜨거워진 공기를 밖으로 내보내고, 입고 있던 윗도리를 조수석에 던졌다. 담배 냄새가 밴 비닐시트에 몸을 맡기고 시동을 걸었다. 차를 돌리면서 그는 자신이 더러운 돈놀이꾼이 된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더러운 돈놀이꾼이야."
그 자각을 짊어지고 다시 코크스 밭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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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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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정전>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아홉번째 파도>가 출간되었을 때 득달같이 달려들어 읽어치웠던 날도 기억한다. 나는 최은미의 소설이 주는 감각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얼마 전 <김승옥문학상수상작품집>에서 만났으면서도!) 무심하게 이 책을 집어들었고, 그야말로 완전히 덫에 걸려버렸다. 현대문학 핀시리즈 <어제는 봄>.



덫에 걸려버렸다는 것은 이 소설의 특정 장면이 나의 트리거를 눌렀다는 의미다. 순전히 개인적인 일이다. 너무 방심했다. 얇은 책이니 가볍게 읽어치울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등단 후 10년간 소설을 쓰고 있는 정수진. 그녀가 쓰고 있는 소설은 과거의 트라우마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소설을 10년째 붙잡고 있는 것이고 반드시 완성해야만 한다. 과거와 트라우마와 소설과 딸과 남편으로 굴러가는 정수진의 일상에 이선우 경사가 등장한다. 소설에 자문을 해주기 위해서다. 딱딱하게 경직된 정수진을 조금씩 달라지게 만든 존재가 이선우다.



정수진은 자기 자신을 증오한다. 더 정확히는 아버지를 빼닮은 자기 자신을.(맞다. 정수진의 트라우마는 그녀의 아버지와 관련이 있다.) 어쩌면 정수진은 자기 자신을 향한 증오를 해갈하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계속 써야만 한다. 등단 이후 10년동안 아무런 작품도 발표하지 못했지만 정수진은 쓰는 존재, 작가다. 나는 작가도 무엇도 아니지만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안다. 덫에 걸려버린 첫번째 이유.



정수진과 이선우의 만남. 정수진과 이선우가 공유하는 것들. 그 둘은 우연히 혹은 운명적으로 서로를 알아봤다. 비슷한 경험, 다른 해석. 어쩌면 서로 닮은 사람. 나는 엉뚱하게도 어떤 이와 하루종일 자리를 옮겨가며 이야기를 나눴던 날을 생각했다. 그 사람과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두번째 덫에 걸렸음을 알았다.



그리고 내 하루는 망했다.



그럼에도 나는 <어제의 봄>이 마음에 든다.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정수진의 문장이, 그녀의 글쓰기가, 나아감이 마음에 든다. 트리거가 눌린 것은 나의 문제이니 내가 해결해야 할테고. 아, 또한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최은미의 소설을 읽을 것이다.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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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 나오키 1 - 당한 만큼 갚아준다 한자와 나오키
이케이도 준 지음, 이선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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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터너가 필요해 급하게 빌려읽은 <한자와 나오키>. 화제가 되었던 동명의 드라마의 원작 소설이다. 1권은 은행원 한자와 나오키가 억울한 누명을 통쾌하게 해결한다는 이야기다. 두 권을 빌렸으나 한 권만 읽고 그만 읽기로 했다. 빨리 읽히고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나에게는 한 권으로 충분하다.



은행 및 금융업에 관심이 있는 이들 혹은 직장 생활을 다룬 소설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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