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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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이 몰아닥칠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여기 혼돈과 싸우는 것이 평생의 과업이었던 이가 있다.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가 30여년간 몸과 마음을 다해 수집해온 어류 표본들이 갑작스러운 지진 때문에, 삶의 손가락질 한 번으로 전부 박살났을 때에도 그는 주저없이 다시 일어난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는 혼돈 속에서 다시 설 수 있었나. 이 책의 저자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바로 그 의문을 풀고자 한다. 그녀 삶의 혼돈으로부터 바로서고자,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고자 노력하며. 즉,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기이자 회고록이다.



이 책은 과학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철학적이며 자기 성찰적이다. 저자는 여러가지 소재를 한데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가는데, 끈질기게 혼돈으로부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녀는 그 답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알려줄 수 있다는 듯 그의 삶을 파고들어간다. 이 책의 묘미는 중반부부터 시작되는 반전에 있다. 영원히 꺾이지 않을 것만 같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불굴의 의지 이면의 것들이 조명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된다.



다른 독자분들로부터 독서의 즐거움을 빼앗을 수는 없으니 스포일러는 접어두고, 저자의 깨달음과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하는 생각들을 적어볼까 한다. 내려놓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그저 모든 것이 흘러가도록 두는 것에 대해서. 어쩌면 자연에 순응하는 것은 가장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두는 것은 우리들 중 가장 용감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자연이 우리 삶에 혼돈을 내리꽂는다면 그 혼돈에 몸을 맡겨버리는 것이 가장 빨리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듄>의 폴 아트레이데스가 모래폭풍속에 자신을 내맡기기로 선택했듯이.



흥미로운 이야기, 인생에 대한 성찰, 매혹적인 구조. 한 번 읽고 다시 들춰보았을 때 더 매력적이었던 책. (표지 디자인 너 무 아 름 다 워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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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 잡기 - 노년의 정원사가 자연에서 배운 것들
마크 헤이머 지음, 황유원 옮김 / 카라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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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한 해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시점에 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자주 던지게 된다. 때마침 읽고 있었던 책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었다. 시인이자 정원사인 마크 헤이머가 황혼을 넘긴 나이에 쓴 첫번째 에세이 <두더지 잡기>. 책 속에는 저자가 20여년간 생계를 책임져준 두더지 잡기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이유, 그동안 그가 걸어온 삶의 여정이 간결한 문장으로 담겨있다.

자연 속에서 사는게 아니라 자연을 관람하며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의 순리를 모른다. 자연은 치열하고도 냉혹하게 계절과 섭리에 맞게 흘러가는 것. 자연 속에서 일하는 사람인 저자는 기꺼이 자연과 함께 흘러가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벨벳 천 같은 가죽을 두른 채 고독하게 생활하는 두더지에 대해서, 맑은 정신으로 생각들은 그저 지나가게 둔 채 내면을 자연으로 채우는 자신에 대해서.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저자가 열 여덟살때 홈리스가 되어 자연 속을 걸어다녔다는 일화다. 이 이야기는 파편적으로만 소개되지만 자연 속에서 순간만을 사는 저자의 태도가 시작된 시기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연과 두더지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배웠다. 알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의식의 상태로, 고요하고 평온한 순간을 확보하며, 순간순간을 살 것. 그러니까 나와 타인을, 세상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살 것. 기본에 충실하며 매 순간을 살아있음이라는 경이로 가득 채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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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제니 오델 지음, 김하현 옮김 / 필로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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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제목부터 매혹적이다. 현대인들의 새해 소망이 있다면 일상의 피로가 씻겨나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아닐지. 제니 오델의 첫 에세이인 이 책은 디지털 기기와 소셜미디어로 매 순간 연결된 나머지,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해진 현대인들에게 건네는 일종의 제안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웃들에게, 동식물들에게, 주변 환경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또 연결되어야 한다는 제안 말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강의라기보다는 산책에 가까운 이 책은 저자의 사고 흐름을 따라가도록 구성되어 있다. 필경사 바틀비, 데이비드 호크니, 에피쿠로스, 1960년대의 코뮌 등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풍부하게 실려있어 읽는 재미가 있다. 결국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러니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고 매 순간의 경이로움을 알아차릴 것.



이 책을 열흘에 걸쳐 읽었는데 첫날 적어둔 메모를 옮겨둔다.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되는 연결.

: 사는 것에는 목적이 없다. 더 많은 것을 경험하는 것, 더 사랑하는 것. 좋은 무언가를 소유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본질로부터 벗어난 것. 나 자신을 제외한 다른 것들에게 중심을 옮겨두지 말 것. 내게 밀려오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환영하고 느낄 것. 진짜 중요한 것은 이미 내 안에 있음을 잊지 말것. 어쩌면 인생은 이것을 다시 깨달아가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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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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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 자리에서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한 권의 책을 완독한지가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최근 몇 달간 가장 밀도있는 몇 시간을 선물해준, 올 겨울 최강 기대작이었던 프랑수아즈 사강의 <패배의 신호>. 사강의 여섯번째 소설로, 문장마다 눈을 뗄 수 없는 압도적인 수작이다. 최근 사강의 첫번째, 두번째 소설인 <슬픔이여, 안녕>과 <어떤 미소>를 다시 읽고 연이어 이 소설을 읽게 되어서인지, <패배의 신호> 속 감정 묘사의 깊이와 서사의 유려함, 매혹적인 분위기가 초반 작품들에 비해 무척 압도적이라고 느껴졌다. 아마 지금껏 읽은 사강 소설들 중 가장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은 이미 각자의 연인을 둔 루실과 앙투안이 별안간 서로를 발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만큼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무튼 줄거리보다 중요한 건 소설 속 인물들을 휘감는 감정의 변화다. 매 순간 시시각각 변화하는 인간의 감정을,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려운 사랑이라는 감정을 사강만큼 황홀하게 풀어내는 작가가 있을까.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도 제대로 모른다. 내 마음도 상대의 마음도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함 속에서 소설 속 인물들은 최선의 추측으로 선택을 해나간다. 이 기가막힌 과정을 때로는 소설 속 인물이 되어, 때로는 관찰자가 되어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독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아무것도 소유하고 싶어하지 않고, 존재 자체로 행복하며, 순간만을 사는 주인공 루실을 본다. ‘행복만이 그녀의 도덕‘이라는, ‘그녀의 유일한 도덕은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라는 표현 앞에서 잠시 멈춘다. 과연 나는. 내가 나의 행복을 유일한 도덕으로 삼는다면 수천 수만번 패배하더라도 상처받지 않으리라. 밑줄과 메모로 가득한 나만의 <패배의 신호>를 안고 카페를 나서는 나는, 몇 시간 전의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크리스마스 연휴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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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2-26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비안북스 님 아주 멋진 크리스마스 휴가가 되었군요. 책 색상도 넘 이쁘게 나와서 찜해 두고 있었는데 리뷰 읽어 보니 더는 미룰 수가 없네요. 당장 구매합니다.
 
맺힌 말들 - 각자의 역사를 거쳐 가슴에 콕 박힌 서툴지만 마땅한 마음의 낱말들
박혜연 지음 / 아몬드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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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흔히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잘 안다고 착각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간절히 원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손에 넣었을 때 사실 원했던 건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던지, 괜찮은 줄 알았는데 지나고보니 전혀 괜찮은게 아니었다던지. 이럴 때 평소 자주 곱씹거나 내뱉는 말을 살펴보면 그때그때의 마음 상태를 가늠할 수 있다. 임상심리학자 박혜연의 <맺힌 낱말>은 ‘누군가의 마음에 맺혀있던 낱말을 단서로 그 사람의 마음을 따라가보는 여정‘을 담았다.



정말 괜찮은 사람은 괜찮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진짜 변화는 주어진 현재에 충실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자주 되뇌이는 단어를 파헤쳐보는 것이 진짜 나를 아는 것의 시작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단어의 본질적인 의미를 아는 것만으로도 막연하고 어렴풋했던 것들이 명료해질 수 있다. 과연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며 사용하고 있는지 개개인의 고유한 역사를 되살펴볼 수도 있을테다. 예를 들어, 저자는 ‘질문‘의 고유한 뜻이 ‘본연의 가치를 묻는 것‘임을 설명하며,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정말 ‘질문‘을 하고 있는지 묻는다. 더 나아가 세상을, 타인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있는지.



담백하게 쓰여진 책 속 글들을 한 편씩 읽는 것만으로도 나를 옭아매고 있었던 감정적 걸림들에서 조금씩 풀려나는 듯했다. 오랜시간 직접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온 임상심리학 전문가가 들려주는 마음을 살피는 이야기. 단정하고 단단한 문장 너머로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저자의 다음 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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