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더카머 - 시, 꿈, 돌, 숲, 빵, 이미지의 방
윤경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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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기다려왔다. 원형을 파고들어 독창적이고도 섬세한 언어로 기억을, 예술을, 문학을 그려내는 글. 에세이라면 마땅히 어떠해야한다는 분별을 부수는, 내면의 심연에서 길어내는 독특한 문장들. 윤경희의 <분더카머>.



‘분더카머’는 근대 유럽 초기 지식인들이 진귀한 사물들을 수집하여 진열한 공간을 뜻하는 말이다. 경이로운 사물들의 방. 이러한 제목에 걸맞게 책 속에 실린 글들은 곧 저자의 고유한 기억 시공간의 보물들이다. 어린시절의 단칸방에서, 파리에서, 베를린에서, 저자를 사로잡은 문학과 예술에게서 나온 이미지와 텍스트들이 즐비하다. 지적이고도 감각적이다.



끊임없이 돌고 도는 원형의 이야기 속에서 반짝이는 저자의 언어는 그야말로 경이롭다. 은폐되기 직전의 마음 깊은 곳의 진실들. 이런 문장들은 읽히는 것이 아니라 체험된다. 가령, ‘나는 은합에 가장 붉은 심장을 도려내 주려는데 너는... 차마. 어쩌나. 내 선물을 받아주겠니. 쓰레기라 비웃을 거니. 나는 두렵다. 나는 글을 쓸 수가 없다. 나는 말을 할 수가 없다.’ 하는 문장들. 어떻게 매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 책을 읽는다는 건, 현실에서 의식의 무게를 지워내고 마음을, 우주를 여행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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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방식 - 수전 손택을 회상하며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홍한별 옮김 / 코쿤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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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보다 부풀려지거나 혹은 평가 절하되기 일쑤였던 수전 손택의 가장 진실한 초상. 후에 전미도서상 수상 작가가 되는 저자 시그리드 루네즈는 20대 중반 수전 손택과 인연을 맺으면서 그의 아들 데이비드 리프와 교제했으며, 두 사람과 함께 거주하기도 했다. 저자의 손택을 향한 존경과 그리움은 물론, 인간 수전 손택의 날카로우면서도 의존적인 진짜 모습을 낱낱이 담아낸 책이 바로 <우리가 사는 방식>이다. 수전 손택이 세상을 떠난지 6년 만에 출간된 작품이기도 하다.



수전 손택이라는 한 인간을 그려내는 저자의 문장은 거침없이 솔직하다. 그는 손택의 미와 예술에 대한 열정과 박식함이 자신의 문학 세계를 만드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음을 시인한다. 그런가하면 저자는 손택의 지성에 이견이 없는 찬사를 보내면서도 고통과 외로움으로 가득했던 손택의 개인적인 삶 또한가감없이 드러낸다. 화려하게만 보이는 손택의 삶이 주변의 오해로 얼룩진 면이 있다는 것, 사실은 손택이 아들과 연인에게 의존적이었다는 것을 짚어낸다. 이는 손택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만이 적어낼 수 있는 글이다. 사랑과 미움, 어쩌면 두 감정으로 다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얽히고 섥혀있는, 진실된 글.



누구보다 진지하고 치열했던 수전 손택.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열 배는 더 강렬히’ 느끼고자 했던 사람. 그러나 혼자 멍하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으며 소설가로 성공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던 사람. 모순적이고 인간된 수전 손택의 진짜 모습이 궁금한 이들이라면 손택을 다룬 그 어떤 책보다 흥미로울 회상록이다. <우리가 사는 방식 : 수전 손택을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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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딸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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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죽은 성녀, 영원한 아이를 어떻게 이길 수 있나. 이미 완성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자매를 어떻게 이길 수 있나.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 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편지를 쓴다.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건 당신을 되살린 후 다시 죽이기 위해서일까요?’ 에르노는 자신의 근원으로 되돌아가 언니가 죽은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태어난다. <다른 딸>은 수신인이 없는 편지이며 에르노가 자신의 삶을 다시 명명하는 자리다.



‘나는 당신이 죽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죽은 것은 내가 글을 쓰도록 하기 위함이에요.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에르노의 삶은 글쓰기로 집결된다. 삶의 모든 순간을 해체해 그 의미를 탐색하는 에르노식 글쓰기는 삶 자체다. 이번 책, 죽은 언니의 완성된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다. 언니가 사라진 자리에서 살아온 에르노는 ‘정말로 살아있지 않은’, ‘허구의 삶’을, ‘존재의 부재’를 파고들기 위해 글을 쓴다. 그러나 그동안 비밀로 부쳐졌던 죽은 언니를 낱낱이 파헤치며 에르노가 직면한 것은 텅 빈 형체다. 글쓰기로 채울 수 없는, 추억 없는 사람. 이미 완결된 이야기.



편지의 결말부에 이르러 에르노는 ‘내 존재를 당신의 존재로 바꿀 수 없음’을, ‘나는 존재하기 위해서 당신을 부인해야만 했음’을 고백한다. ‘죽음이 있고 삶이 있다’고. 에르노는 이 문장에 이르러서야 죽은 언니의 그림자를 떨쳐내고 자신의 존재를 삶의 자리에 돌려놓는다. ‘나’가 되기 위해 ‘당신’을 그림자의 자리로 돌려보낸다. 이제서야 누군가의 대체가 아닌 그녀 자신이 그려진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여운이 길다. 역시 아니 에르노.



+) 책의 말미에 실린 신유진 작가님의 추천사가 정말 좋아요! 죄다 밑줄밑줄. 이 편지의 다른 제목으로 ‘나’이기 위해 부르는 ‘당신’이라니. 황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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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헤엄치기
토마시 예드로프스키 지음, 백지민 옮김 / 푸른숲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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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인가!˝ 첫 페이지부터 황홀한 기분으로 한 문장 한 문장을 탐독했다. 무엇보다 감정의 떨림을 오롯이 담아낸 문장을 보면서 전율했다. 이런 묘사, 이런 문장을 오랫동안 그리워했다.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것처럼,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문장 말이다. 오늘의 책은 1980년대 폴란드의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피어난 퀴어 로맨스를 그린 소설, 토마시 예드로프스키의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

​주인공 루드비크는 대학 졸업 전 농촌활동에서 야누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들이 한여름 호숫가에서의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이 얼마나 아름답게 그려져있던지! 표현 하나하나에 감탄했다. 처음 야누시를 본 순간 ‘마치 아는 얼굴을 알아본 양 내 마음은 기묘하게 안심‘했다던가, 스스로의 분신처럼 여기는 책을 덜컥 알려줘놓고는 ‘인생을 살면서 그런 느낌이 드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거나! 상대방을 애타게 그리며 그를 점차 세계의 중심으로 놓는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져있다. 너무나 적나라하고 강렬해서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은 사랑이라니. 그걸 언어로 표현해내다니.

그런가하면 소설 속에서는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며 필연적으로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 체제에 순응하며 성공을 갈망할 것인지 탈출하여 자유를 맛볼 것인지 사이의 갈등 또한 첨예하게 드러난다. 루드비크와 야누시는 서로를 애타게 갈망하지만 그들 욕망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한다. 여름 호숫가에서의 환희가 끝나고 회색빛 도시 바르샤바에서의 갈등이 소설 후반부에 펼쳐진다. 억압당하며 ‘부질없는 삶과 소극성‘을 견딜 수 없는 루드비크와 ‘모험을 피하고 똑똑하게 굴어야 한다‘는 야누시. 필연적으로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여정은 어쩐지 견딜 수 없이 쓸쓸하다. 전반부의 찬란함만큼이나 후반부의 암흑 또한 강렬하다. 금기 안에서의 욕망, 체념 혹은 반항, 불안과 수치 같은 것들이 한데 모여 소용돌이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칫 전형적일 수 있었던 책 속 이야기를 강렬하게 재탄생시킨 건 바로 살아있는 문장이다. 특히 루드비크가 영혼의 책이라 여기던 <조반니의 방>을 야누시에게 덜컥 빌려주던 바로 그 순간을 나는 오래도록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나의 전부를 들킬 것을 각오하면서도 어쩐지 그라면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전전긍긍하던 루드비크의 모습은 과거 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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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산 지 십 년 - 레즈비언 부부, 커밍아웃에서 결혼까지
천쉐 지음, 채안나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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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한 삶을 꿈꾼다. 직접 요리한 소박한 음식들, 평생의 반려, 꾸준한 일. 그리고 외부 현실에 좌우되지 않는 단단한 내면. 무엇 하나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단정한 일상을 그려본다. <같이 산 지 십 년>을 읽으면서 저자인 천쉐가 꼭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천쉐와 그의 반려 짜오찬런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바탕으로 일상을 함께 꾸려나간다. ‘지옥을 몇 번이나 드나들며 얻은‘ 잔잔한 사랑을 소중하게 지키면서. 그들이 겪어낸 지옥은 끊임없이 조율을 요하는 사랑의 속성 탓도 있지만, 상당부분은 그들이 레즈비언 부부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 책은 레즈비언 부부인 천쉐와 짜오찬런이 2009년 그들만의 결혼식을 올린 뒤 2019년 타이완 동성혼 법제화까지 지나온 10년 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천쉐에게 사랑은 일상이다. 평화다. 숨이다. 마음을 표현하는데 서툴러 ‘로맨틱이란 모르는‘ 사람이었던 천쉐는 짜오찬런을 만나 ‘혼자 있어도 좋고 함께 있어도 좋은‘, 자기 자신의 고독마저 포용하게 만드는 보다 폭넓은 의미의 사랑을 배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점차 넓어지는 사랑의 외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절망에 빠진 자기 자신에게 다시 한 번 손을 내미는 사랑, 상대에게 매 순간 진심을 다하는 사랑, 부당한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사랑. 저자는 수많은 좌절 속에서도 사랑을 선택할 용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성소수자이기에 가족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털어놓을 수 없어 생기는 거리감,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자학, 동성혼 법제화 과정에서의 수많은 좌절 속에서도 우리는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랑을 선택함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있다고.



‘이성애자가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것은 더 우월적이고 정상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법률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라는 천쉐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동성애자 부부는 서로 평생의 반려가 될 것을 약속하고서도 법적 부부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의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없다. 이들은 ‘계속 함께할 수 있을지 모르는 불확실성‘속에서 함께하며 자기 자신됨을 이유로 고통받는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책의 말미만해도 요원해보였던 타이완에서의 동성혼 법제화가 아시아 최초로 이루어졌듯 한국에서도 어서 그 날이 오기를 바란다. 법이 먼저 소수자를 보호할 때 사람들의 인식도 평등해진다. 저자가 재차 말하듯 사랑은 그 무엇보다 강하며,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은 없다. 항상 사랑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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