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크자키 전영혁은 늘 음악을 수집한다. 그리고 수집한 음악을 매일 밤 풀어놓는다. 음악은 전파를 타고 흘러가 고픈 이들의 마음에 양식으로 쌓인다. 알고 보니 그가 모으는 것은 음악만이 아니었다. 그는 학교가 일찍 파하는 시험기간을 기다려 하루에 3편씩 영화를 보던 학생이었고, 영화를 실컷 볼 심산으로 대학 졸업 뒤 태창영화사 수입부에 들어간 사람이었다. 창간 11주년을 맞은 <씨네21>은 그가 꼽는 영화음악에 대해 들을 수 있겠냐고 청했다. 얼마 전 <전영혁의 음악세계> 방송 20주년을 맞은 그는, 기념행사며 인터뷰며 여러 가지로 분주함에도 흔쾌히 응해주었다.
“요즘 영화는 <룩 앳 미>와 <코러스> 정도뿐이네요.” “요즘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많이 하니까 의미가 없을 것 같았어요. 옛날영화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좋은 정보가 될 수 있을 것도 같고요. 이렇게 좋은 영화들을 못 보고 죽으면 얼마나 억울해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앙겔로풀로스 영화들, <흑인 오르페> 이런 건 꼭 봐야 해요. 너무 슬프고 감동적인 영화예요.” 조용히 얘기를 시작한 그는 영화음악보다 외려 영화 얘기를 더 많이 하는 듯도 싶었다. “그래야 책 보는 사람이 판도 사고 영화도 볼 거잖아요. 궁극적으로 영화를 봐야 해요. 판만 들으면 안 돼. 그래서 영화도 좋고 음악도 좋은 영화를 골랐어요.” 그렇게 그는 자신이 수집한 ‘음악이 좋은 영화’ 20편을 풀어놓았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프랑스영화의 O.S.T
삶을 풍요롭게 하는 선율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La Double Vie De Veronique
1991년/ 감독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음악 즈비그뉴 프라이즈너
아카데미 작품, 음악, 여우주연, 촬영, 각본 이렇게 5개 부문은 수상했어야 마땅한 영화다. 폴란드 감독이 만든 프랑스영화라고 상을 안 준 거다, 미국 사람들이. 우선 음악이 너무 좋고, 내가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라고 생각하는 이렌느 야곱이 나왔다. 영상도 아름다웠다.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다. 요즘에는 이상한 영화를 다 컬트라고 하는데, 이런 영화가 진짜 컬트라고 생각한다. 비현실적인 주제로 철학을 담은 영화가 진짜 컬트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세상에는 나하고 똑같은 이름에 똑같은 외모에 성격이 똑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 영화의 압권은 폴란드의 베로니카가 노래하다가 탁 쓰러져서 죽는 장면인데, 그때 프랑스의 베로니크는 이를 닦고 있다. 근데 갑자기 막 아파오는 거다. 아무 이유도 없이 너무 슬픈 거다. 자기의 분신이 죽었으니까. 그런 착상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음악 역시 너무 좋다. 슬프고 아름답고. 키에슬로프스키 영화의 음악은 항상 즈비그뉴 프라이즈너가 만들었다. 그런 훌륭한 영화음악가가 있었기 때문에 영상과 음악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재미난 것은 반 부덴 메이어라는 네덜란드 작곡가의 존재인데, 영화 속에 그의 음악이라며 너무 좋은 곡이 나온다. 내가 음악은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듣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어서 알아내서 음반을 모조리 수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다 하는 음대 교수들에게 물어봤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더라. 클래식 백과사전에서 찾았는데 거기에도 없었다. 거기는 한곡만 남기고 죽은 사람들도 다 나오는데. 이 천재들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다. 반 부덴 메이어는 결국 프라이즈너 자신인 거다. 이 사람 <레드>에도 나온다. 잠깐 등장한 이렌느 야곱이 레코드 가게에 들어가서 반 부덴 메이어 음반을 찾다가 나가는 장면이다. 아무튼 굉장히 고생했다. 이 사람이 천재 콤비가 지어낸 가상의 존재라는 걸 알기까지.
<세상의 모든 아침> Tous les matins du monde
1991년/ 감독 알랭 코르노/ 음악 조르디 사발
알랭 코르노 연출, 제라르 드 파르디외의 호연, 조르디 사발의 음악이 삼위일체를 이룬 고전음악영화의 걸작이다. 비올라 다 감바는 첼로의 모태인 악기인데, 그 연주가의 얘기다. 재밌다. 제라르 드 파르디외는 후진 영화에도 많이 출연했지만 이 영화에서는 연기도 잘하고, 영화 못지않게 음악도 좋다. 조르디 사발은 고음악의 일인자다. 이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을 너무 아름답게 만들었다. 몽세라 피구에라스가 노래도 했는데, 조르디 사발의 아내다. 우리는 흔히 조르디 사발 사단이라 그런다. 아들, 딸, 뭐 다 같이 하거든. 전에 LG아트센터에서 공연했다(조르디 사발의 아내, 아들, 딸이 멤버를 이룬 고음악 전문 실내악 앙상블 ‘에스페리옹21’은 지난해 3월 내한했었다).
<룩 앳 미> Comme Une Image
2004년/ 감독 아녜스 자우이/ 음악 필립 롱비
프랑스판 ‘삼순이’. 최근 본 영화 중에 너무 좋았던 영화다. 여주인공을 보고 처음엔 ‘너무너무 못생겼다’ 했는데 끝으로 가니 나 역시 그녀가 좋아지더라. 뚱뚱하고 못생겼지만, 섬세하고 순수하고 아주 예민한 성격을 가졌다는, 그런 심리묘사가 잘돼 있다. <타인의 취향>의 명장 아녜스 자우이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배우들의 연기력이 돋보인다. 백미는 단연 음악이다. 슈베르트의 명곡 <음악에>가 여러 버전으로 담겨 있는데 라스트신의 합창이 가장 감동적이다. 슈베르트가 이미 오래전에 알려준 거다. 음악은 종교 이상의 가치를 가졌고, 사람의 생명도 구할 수 있다고.
<코러스> Les Choristes
2004년/ 감독 크리스토퍼 파라티에/ 음악 브뤼노 클레
크리스토퍼 파라티에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브뤼노 클레가 음악을 맡아 2004년 프랑스 최고 흥행을 기록했다. 휴지처럼 버려진 아이들을 최고의 소년합창단으로 만들어낸 선생님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감동을 안긴다. 그러나 단순한 음악영화로 보면 안 된다. <코러스>는 현재 우리들의 문제- 빈부 격차, 버려지는 아이들, 추락한 교권- 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묻는다. 국회의원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영화고, 촌지받는 선생님들을 다 모아서 보여줘야 하는 영화다. 한국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는데, 고아 수출국 1위다. 아이 버린 사람들에게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학생 입장가! 아이와 어른 모두 볼 수 있는 영화다.
그리스가 낳은 천재적 음악가들
<Music For Films>
테오 앙겔로풀로스 영화의 영화음악 모음집/ 음악 엘레니 카리인드루
키에슬로프스키와 앙겔로풀로스, 이 두 감독을 제일 좋아한다. 이 사람들 영화는 다 봤다. 지난번 씨네큐브에서 (앙겔로풀로스의) 전작 시리즈를 할 때도 가서 하루에 하나씩, 다 봤다. 상업성이라곤 없이 예술성을 추구하는 위대한 감독들이다. <왕의 남자> 이런 거 보는 사람들은 막 짜증낼 수도 있다. 왜 이런 영화들을 좋다고 그랬는지. 한 3차원쯤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영화 속에 철학이 담겨 있고, 장면 하나를 딱 떼어내면 훌륭한 그림이 된다. 영상작가인 거다. 대사는 거의 시고. 최근작 <흐느끼는 초원>도 너무 감동적이었다. 아들과 남편을 전쟁터에서 잃은 미망인의 이야기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배경은 같다. 한국과 그리스는 비슷한 데가 많으니까. 외침도 많이 받았고,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됐고.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주인공이 아들과 남편 시신 앞에서 비명을 한마디 콱 지르면서 끝나는데 소름이 막 돋는다. 너무 감동적이고 슬퍼서. 그런 게 영화 만드는 기술인 것 같다. 한국영화 보면 배우들이 미리 다 울어버리지 않나. 그래서야 관객이 울 시간이 없다. 앙겔로풀로스에게는 엘레나 카라인드루가 있다. 그리스의 천재적인 영화음악가다. 여성의 슬프고 섬세한 음악이 영화 속의 슬픔을 극대화한다. 이 여자가 없었으면 앙겔로풀로스가 오늘날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을 거다. 음악이 반은 해준 거다. 이 앨범은 숙명의 짝인 이들 콤비의 영화음악 모음이다. <안개 속의 풍경>의 주제곡 <아다지오>를 비롯해서 <비키퍼>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 등에서 나온 카라인드루의 곡들이 들어 있다. <엘리제 포 로자>는 그녀가 직접 노래한 유일한 곡이다.
<흑인 오르페> Orfeu Do Camaval
1959년/ 감독 마르셀 카뮈/ 음악 루이즈 본파,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유리다스 이야기를 모티브로, 프랑스 감독 마르셀 카뮈가 브라질에 가서 만든 영화다. 영화를 못 봤어도, 주제곡 <카니발의 아침>은 들으면 다 안다. 이 영화를 통해 세계적 스탠더드가 된 음악이다. 루이스 본파,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이 함께 음악을 했다. 낙천적이고, 카니발을 하고, 음악이 너무 좋은 나라 브라질을 세계에 알렸다. 보사노바, 삼바, 오늘날 워낙 유명하지 않나. 이 영화를 보고 스탄 게츠 같은 사람들이 브라질 음악을 알게 됐고, 근래 <댄서의 순정>까지 브라질 음악이 나오게 된 셈이다.
<희랍인 조르바> Zorba The Greek
1964년/ 감독 마이클 카코야니스/ 음악 미키스 데오도라키스
음악으로 보자면 <희랍인 조르바>도 굉장히 히트했다. 세계의 유명 밴드들은 한번씩 다 리메이크했던 곡이니까. 명곡이 된 거다. <흑인 오르페>가 브라질 음악을 세계에 알렸다면, <희랍인 조르바>는 그리스 음악을 알렸다. 데오도라키스라는 그리스 국민음악가의 힘과 명배우 앤서니 퀸이 콤비네이션을 이뤄서 오늘날 월드뮤직 부흥의 모태를 이뤘다. 그리스라는 나라가 세계 문명의 발상지이자 철학의 나라임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영화다. 데오도라키스의 제자인 코스타스 파파도폴로스가 신들린 듯한 부주키(기타처럼 생긴 그리스 악기) 연주를 들려준다.
<페드라> Phaedra
1962년/ 감독 줄스 다신/ 음악 미키스 데오도라키스
<흑인 오르페>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렸다. 여주인공 멜리나 메르쿠리는 가수이자 배우로 그리스의 국민스타다. 남자주인공은 <싸이코>의 앤서니 퍼킨스가 맡았다. 연상의 여자와 연하의 남자의 대비,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랑이 좋았다. 역시 데오도라키스가 음악을 담당했는데 <희랍인 조르바> O.S.T와 함께 그의 양대 역작으로 불린다. <페드라 사랑의 테마>는 멜리나 메르쿠리가 직접 노래했다. 내용은 ‘옛날 그리스 신화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있었는데…’ 이런 것이다. 비극의 끝이 곧 오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라스트신은 앤서니 퍼킨스가 자동차를 타고 자살하는 장면이다. 앤서니 퍼킨스가 카오디오를 맥시멈으로 올려놓고 바흐 음악을 들으면서 ‘굿바이 존 세바스천’ 이렇게 비명을 지른다. 차가 굴러떨어진다. O.S.T에 음악, 목소리, 차 부서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어 있다. 영화 본 사람은 당시 소름끼쳤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를 거고 안 본 사람은 영화가 보고 싶어질 거다.
세상 끝의 슬픔 그리고 고독
<부베의 연인> La Ragazza di Bube
1963년/ 감독 루이지 코멘체니 / 음악 카를로 루스티첼리
대학 다닐 때 ‘BB냐 CC냐’ 하는 말이 있었다. 브리지트 바르도와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둘 중 누구를 좋아하느냐는 거다. 그럴 정도로 이 두 여자가 세상 뭇 남자를 사로잡았는데 나는 CC의 팬이었다. CC는 청순가련형이고 BB는 막 벗는 스타일이라 CC의 팬이 7 대 3 정도로 적었다. 나는 BB 좋아하는 애들과는 안 놀았다. 대개 불량학생들이고 공부도 못했거든. 많은 사람들이 예술과 외설의 차이를 얘기하는데, 꼭 필요한 부분에 알몸으로 나오는 건 예술이다. 금방 목욕했는데 5분 뒤에 목욕을 또 하면 그게 외설이다. 브리지트 바르도는 목욕을 자주 했다. 그래서 싫었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딱 한번만 한다. 그래서 좋았다. 사춘기 때 내 마음을 사로잡은, 청초한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부베의 연인>은 이 청초한 여인의 순애보다. 조지 차키리스라고, 당시 유명했던 배우가 부베 역을 맡았다. 부베는 말하자면 운동권 학생이다. 계속 데모하고 반정부 투쟁하고 피해다니면서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를 항상 외롭게 한다. 그런데 이 여자가 예쁘니까 아까 말한 BB 좋아하는 애들이 들러붙어서 ‘부베는 가망없는 애다. 언젠가는 사형당할 수도 있다’면서 유혹한다. 다른 여자 같았으면 스스로 그 남자를 버렸을 텐데 그녀는 안 넘어간다. 정말 좋은 여자인 거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매번 감옥으로 면회를 가는데, 기차를 타고 부베를 만나러 갈 때 기뻐하는 그 청순가련한 표정. 그 뒤로 이탈리아 음악가 카를로 루스티첼리의 주제곡이 쫙 깔린다. 이 음악이 청초한 순애보를 한층 업그레이드시킨다.
<미드나잇 카우보이> Midnight Cowboy
1969년/ 감독 존 슐레진저/ 음악 존 배리
지금은 죽고 없는, 존 슐레진저 감독의 명작이다. 배우 존 보이트를 세상에 알린 영화기도 하다. 영화의 압권은 더스틴 호프먼이다. 절름발이 노숙자를 연기했는데, 신들린 듯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더스틴 호프먼은 이 영화에서 연기상을 못 받았다. <빠삐용>에서도 상을 못 받았다. 이런 영화에서 상을 안 주고 <투씨> 같은 후진 영화에서 상을 주다니, 아카데미의 권위를 다시 한번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제목을 두고 ‘카우보이가 밤에 뭐 다닐 일 있냐’ 하는 우스갯소리도 하고 그랬는데, 어떤 소외된 청년, 우리나라로 치자면 어둠의 자식, 그런 뜻이다. 도시의 어둠과 자본주의의 실패를 보여주는 영화. 하모니카의 제왕 투스 틸레망의 연주도 들어 있고 주제곡은 해리 닐슨이 불렀다. 전체 음악 스코어는 007 시리즈의 존 배리가 담당했다. 음악도 좋고, 영화는 더 좋고. 보지 않은 사람에겐 꼭 추천하고 싶다.
<파리 텍사스> Paris, Texas
1984년/ 감독 빔 벤더스/ 음악 라이 쿠더
빔 벤더스는 영화감독 중에서 손꼽히는 음악광이다. 그 파트너가 또 라이 쿠더인 거고. 좋은 감독 옆에는 항상 이렇게 훌륭한 음악감독이 있다. 그들의 앙상블이 절묘한 빛을 발한다. 빔 벤더스가 방황하는 여인 나스타샤 킨스키를 아름답게 찍어냈고, 라이 쿠더의 처절한 슬라이드 기타가 채찍처럼 발목에 감긴다. 요부 스타일로 많이 나오는데다 삼류영화에 많이 나와서 나스타샤 킨스키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영화가 생각을 바꿔놓았다. 감독들이 장사하려고 그동안 너무 거지 같은 영화에 출연시켜서 그렇지, 이 여자가 너무 아름다운 여자구나 하고 생각했다. 주제곡과 <Cancion Mixteca>를 추천한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Leaving Las Vegas
1995년/ 감독 마이클 피기스/ 음악 마이클 피기스
알코올 중독자와 창녀의 이야기를 너무 아름답게 승화시켰다. 이 영화가 없었으면 니콜라스 케이지도 없다. 엘리자베스 슈도 그 못지않게 잘된 캐스팅이다. 나스타샤 킨스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 때문에 엘리자베스 슈를 좋아하게 됐다. 나는 나만 좋아해주는 여자가 좋지 창녀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창녀가 있을 수 있나 싶더라. 재즈 뮤지션이기도 한 마이클 피기스 감독 자신이 음악까지 담당했다. 주제곡 <My One & Only Love>를 비롯한 <Angel Eyes> <It’s A Lonesome Old Town> 같은 곡들은 스팅이 불렀다.
벽을 깨부수는 저항의 외침
<헤어> Hair
1979년/ 감독 밀로스 포먼/ 음악 맥 더모트
밀로스 포먼의 3대 명작 중 하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마데우스>를 알고, 마니아들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도 알고 있지만 <헤어>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헤어’는 히피들의 긴 머리를 지칭한다. 베트남전의 희생양이 된 미국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반전영화인데, 군사정권 때 수입돼 국내개봉이 금지됐다. 체코 출신 밀로스 포먼은 내가 보기에 영화감독 중에서 음악을 제일 많이 아는 사람이다. <아마데우스>에서는 모차르트를 완벽하게 묘사했고 <헤어>는 사이키델릭 록 음악으로 채워져 있다. 클래식부터 록을 다 꿰뚫고 있는 거다.
존 새비지가 주인공인데, 오클라호마 농부의 아들, 그러니까 촌놈이다. 별달리 할 일도 없고 취직도 안 돼서 베트남전에 지원한다. 군대 가기 전, 그가 한 무리의 히피를 만나서 놀러다니고 대마초도 피우고 하는 장면이 몽환적으로 그려져 있다. 존 새비지가 입대한 뒤 여자친구가 그를 만나러 온다. 공식적인 면회는 안 되는 상황이다. 그들이 만날 수 있게 히피 친구가 존 새비지 대신 훈련소에서 잠깐 자리를 채워준다. 그런데 갑자기 베트남으로 가는 수송 비행기가 오는 거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보는 이는 손에 땀을 쥐고, 결국 친구가 어이없이 전쟁터에 끌려간다. 라스트신이 압권이다. 다른 감독 같았으면 장황하게 전쟁장면을 보여줬을 텐데, 밀로스 포먼은 한마디 설명없이 바로 무덤을 비춘다. 벌써 죽어서 묻힌 거다. 사람들이 <Let the Sunshine In>을 합창한다. 아무도 울지 않지만 보는 사람은 눈물이 난다. 왜 죄없는 젊은이들을 데려다 죽였냐고.
<토미> Tommy
1975년/ 감독 켄 러셀/ 음악 더 후
더 후는 비틀스에 버금가는 영국 록 그룹이다. <토미>는 더 후가 만든 록오페라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소년 토미의 시점에서 인간 군상의 추악함을 고발한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토미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그런 추악함을 더 잘 볼 수 있다. 토미가 성장하여 산 정상에 올라 만세를 부르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더 후의 리드 보컬 로저 달트리가 토미로 분했다. 감독 켄 러셀은 원래 촬영감독 출신이라 영상이 너무 멋지다. 화면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연결되는데 신기해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록 그룹이 직접 만든 음악이니 음악 자체는 말할 것 없이 좋다. 숨은 스타 찾는 재미도 있다. 엘튼 존, 에릭 클랩턴, 키스문 같은 유명한 카메오들이 등장한다. 에릭 클랩턴은 사이비 교주로, 엘튼 존은 핀볼 위저드로 나온다.
<핑크 플로이드의 벽> Pink Floyd: The Wall
1982년/ 감독 앨런 파커/ 음악 핑크 플로이드
박찬욱이 타란티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앨런 파커에게 더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타란티노도 앨런 파커에게 영향을 받은 거고. 엽기적인 영화는 이 사람이 최고다. <핑크 플로이드의 벽>은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핑크 플로이드의 컨셉 앨범 <The Wall>을 통째로 영화화한 것이다. <토미>와 마찬가지로 썩어가는 인간 군상을 그렸고 그것을 하나의 벽으로 생각했다. 가장 쇼킹한 장면은 학교를 소시지 공장으로 표현한 부분.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기계 위에서 뚝 떨어지면 소시지가 되어 나온다. 음악이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한다. 너무 슬펐다가 너무 격정적이었다가. 록 뮤지션인 주인공 핑크를 연기한 밥 겔도프는 실제로도 가수다. <Dark Side of the Moon>과 <The Wall>로 많은 이들을 그들의 음악에 빠지게 만든 핑크 플로이드의 이름을 더 널리 알린 영화이기도 하다.
<올모스트 훼이모스> Almost Famous
2000년/ 감독 카메론 크로/ 음악 Various Artists
카메론 크로 역시 음악을 좋아하는 감독이다. 음악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영화지만, 국내 개봉이 안 돼서 못 본 사람들이 많다. 비디오나 DVD로 볼 수 밖에 없는데, 대여점에서도 구하기가 어려워 마니아들끼리 서로 돌려보고 그랬다. 밴드 따라다니는 그루피들과 어린 록 칼럼니스트의 이야기니까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재밌을 수밖에 없는 영화다. 하루종일 음악 얘기하고 공연하고. 영화에서 그루피들이 LP판을 죽 넘기면 유명한 레코드들이 많이 지나가는데, 그런 거 보는 재미도 컸다. ‘저 판은 나도 있는 건데’ 하면서.
신경쇠약 직전의 음악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Frantic, Ascenseur Pour L’echafaud
1958년/ 감독 루이 말/ 음악 마일스 데이비스
좀 잘난 척하는 사람들은 ‘루이 말’ 하면 다 안다. 프랑스영화의 교과서 격으로 생각되는 감독이니까. 이 사람 역시 음악을 굉장히 많이 알았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는 그의 대표작인데 그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프랑스의 훌륭한 재즈 뮤지션을 다 놔두고 파격적으로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음악을 맡겼다. 지금이야 마일스 데이비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1958년이니 마일스 데이비스가 청년이었던 시절이고 아직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전이다. 그의 재능을 알아볼 만큼 루이 말은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주인공은 남편을 살해하고 그 죽음을 자살로 가장하려 한다. 연인은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만 의도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나 상황을 긴박하게 몰아간다. 남자는 애인의 남편을 살해하고 도망치다 엘리베이터에 갇히고, 여주인공은 그를 찾아 밤거리를 헤맨다. 그들의 차를 훔쳐탄 또 다른 커플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잔 모로가 여주인공 역을 맡아 긴박감 넘치는 연기를 펼쳤다. 지금은 할머니가 됐지만 좋은 영화에 많이 출연한 프랑스 배우다. 그리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인다. 오싹오싹하게 느껴지는 그의 트럼펫 소리가 들려오면 보는 이는 더 으스스하고 공포스러운 기분을 맛본다. 루이 말이 노린 것이 바로 그 점이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는 그 자체로도 훌륭해서 영화 마니아들뿐 아니라 음악 마니아들도 영화를 보게 만들었으니,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웨스턴> C’Era Una Volta Il West
1968년/ 감독 세르지오 레오네/ 음악 엔니오 모리코네
세르지오 레오네는 마카로니 웨스턴의 창시자다. 이 이탈리아 감독은 존 웨인만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런 스타일의 서부영화도 만들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줬다. 예를 들면 결투장면을 클로즈업해 보여주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미국 서부영화들은 롱숏으로 누가 먼저 쏘나 하고 한 화면에 다 담아버리는데, 레오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풀숏으로 탁 잡아, 보는 이에게 더 큰 긴장을 안긴다. <웨스턴>은 그의 황금기 작품. 헨리 폰다, 찰스 브론슨이 냉정한 총잡이로 출연했다. CC,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도 나온다. 무관의 제왕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이 영화의 백미다. 그는 레오네가 <황야의 무법자>를 만들 때부터 함께해왔지만 그중에서도 <웨스턴>의 음악이 가장 아름답다. 특히 에다라는 여성 보컬이 노래하는 <Finale>는 몹시 슬프고 처절하다.
<트윈픽스> Twin Peaks: Fire Walk with Me
1992년/ 감독 데이비드 린치/ 음악 안젤로 바달라멘티
컬트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데이비드 린치는 두말 필요없는 사람이다. 개인적으로는 데이비드 린치 영화 중에서 <엘리펀트 맨>을 가장 좋아한다. 이 감독은 최근 이상한 영화만 만들고 있지만, 이미 그렇게 좋은 영화를 옛날에 만들었으니 용서할 수 있다. <블루 벨벳> <광란의 사랑> <로스트 하이웨이> <멀홀랜드 드라이브> 등의 영화에서 린치와 줄곧 함께해온 안젤로 바달라멘티의 음악이 공포감을 배가시킨다. 줄리 크루즈라는 여가수가 부른 <Nightingale> <Into the Night> <Falling>, 이 세곡은 영화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잘 맞는다. 노래도 아름답고, 창법이 독특해 사람을 빨아들이는 듯하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Midnight Express
1978년/ 감독 앨런 파커/ 음악 조르지오 모르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앨런 파커의 대표작. 그가 아니고서는 만들 수 없는 영화다. 터키 여행 끝에 얼마 안 되는 마약을 반출하려다 종신형을 받고 터키 감옥에 갇힌 윌리엄 헤이즈의 이야기로, 지옥 같은 감옥에서의 사건과 그의 극적인 탈출이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한다. 조르지오 모르더의 신시사이저 음악이 불안을 더한다. 그의 음악은 영화 이상으로 히트해서 O.S.T도 많이 팔렸다. 판에 주제곡의 보컬 버전도 실려 있고. 지어낸 이야기라면 별거 아닐지 몰라도, 실제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고 보면 너무 충격적이다. 더 재밌고. 당시 아직 감독 데뷔 전이던 올리버 스톤이 이 영화의 각본을 써서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았다.
<출처 :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