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듯, 장르간 이동 역시 새로운 소재 발굴과 비슷한 우려먹기에 지친 우리에게 흥미롭고도 익숙한 풍경이다. ‘원작’의 아우라가 새로운 장르로 이식되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재미와 감동, 교훈 그리고 문화적 소비자를 불러낼 때 이것이야말로 대단한 재창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각색-번역의 작업은 갈채 받는 원작에 손대야 할 때 큰 부담을 지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 뮤지컬 <렌트>의 열혈 팬이었던 감독 크리스 콜럼버스가 이 인기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했을 때에도 그러했으리라.
렌트 헤드(rent head)라 불리는 광적인 팬덤 중 한 사람이었던 크리스 콜럼버스는 일찍이 <나홀로 집에>,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등 주로 ‘아동 취향’ 영화를 연출한 바 있다. 감독이 누구든지, 뮤지컬 팬들은 그들이 숭배하는 작품이 영화로 옮겨질 때 종종 다른 각색에서 벌어지는 재앙처럼 원작의 깊이가 훼손될까 우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콜럼버스 감독은 그의 신상(神像)에 크게 망치질을 하지 않은 채, 뼈대와 재질을 거의 그대로 살려놓았다. 심지어 출연한 주요 등장인물 8명 중 조앤과 미미 역을 제외한 6명은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팅 출신이다. 거기에 더하여 영화 <렌트>는 제한적인 무대에서 표현할 수 없는 뉴욕이라는 공간을 영화라는 매체의 특징으로 한껏 확장하여 스크린에 화려하게 펼쳐보였다.
비록 ‘원작 뮤지컬을 단지 스크린에 옮긴 것에 지나지 않다’는 비판이 뒤따르기도 했지만 연출자로서는 그 역시 존경하는 원작자에 대한 경의였을 것이며, 실제로 브로드웨이에서 오리지널 캐스팅 공연을 보지 못한 전세계 <렌트> 팬의 갈증을 달래주는 최고의 선물이기도 한 것이다.
“Season's of love”라는 노래의 무대 위 합창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의 배경 1989년 12월 24일. 다큐멘터리 독립영화감독 마크(앤서니 랩)와 록 가수이자 송라이터인 로저(아담 파스칼)는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한 다락방을 같이 쓰는 가난한 예술가다. 먹을 것도, 불을 지필 것도 없이 상당히 비참한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게 된 이들은 청천벽력으로 밀린 집세(rent)를 내라는 독촉을 받게 된다.
‘애비뉴 A의 공공의 적’이 된 옛 친구 베니(타이 디그스)는 집세를 영구 면제해주겠다는 약속을 철회했지만, 만일 로저와 마크가 건물철거에 반대하는 공연을 개최하는 모린(이디나 멘젤)을 저지한다면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물론, 이들은 거절한다.
로저와 마크의 친구이자 MIT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콜린스(제스 마틴)는 한밤중 뉴욕의 골목에서 강도들에게 얻어맞고 길거리에 쓰러져 신음하다 ‘북치는 소년’ 엔젤(윌슨 저메인 헤르디아)을 만나 구조된다. 한편 아래층에 사는 댄서 미미(로자리오 도슨)는 로저와 가까워지려 노력하지만, 여자친구의 자살과 에이즈로 인한 절망, 그리고 죽기 전 완성해야 할 하나의 노래를 찾지 못한 조바심으로 가득한 로저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여는데 힘겨움을 느낀다.
마크는 자신을 차버리고 변호사 조앤(트레이시 토마스)을 새로운 연인으로 택한 매력적인 공연예술가 모린의 부탁으로 그녀의 공연장 세팅을 돕기 위해 찾아간다. 그곳에서 마주친 건 모린이 아닌 그녀의 연인 조앤. 마크와 조앤은 서로 불쾌감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모린이라는 공통분모에 대해 이야기하며 함께 ‘탱고 모린’을 춤춘다. 이 장면은 영화 <렌트>에 있어서 가장 영화적이면서도 스펙터클이 살아난 장면이며, 질투심과 의구심에 괴로워하면서도 끌릴 수밖에 없는 매혹적인 존재에 대한 심적 갈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건물주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훌륭하게 이끌어 사람들의 호응을 얻은 모린을 축하하기 위해 친구들은 다같이 레스토랑에 모인다. 이들에게 “보헤미안은 죽었어!”라고 선언하는 베니를 향해 일갈하는 예술가들, 보헤미안들의 합창인 “La Vie Boheme”은 뮤지컬과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겠다. 다만 가사의 묘미를 살릴 수 없는 자막번역이나 단어의 문화적 내연에 대한 무지는 이 작품의 이해와 재미에 현저히 걸림돌이 될 것이다.
예컨대 “La Vie Boheme”에 나오는 일련의 명사들, ‘손하임, 손탁, 케이지, 커닝햄, 파블로 네루다, 구로사와, 8BC’등의 단어는 보헤미안의 자유로움이나 예술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운율-라임을 맞추는 일종의 장치다.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지만 ‘소설가, 무용가, 민중시인, 영화거장, 록그룹…’ 식으로 자막이 제시되면 노래의 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게 되므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렌트>를 더욱 재미있게 보기 위해서는 약간의 학습도 필요한 것이다.
베니와의 관계를 의심한 로저는 미미와 헤어지고 뉴욕을 떠나 산타페로 간다. 이미 에이즈로 친한 친구인 엔젤을 떠나보낸 후였다. 생계를 위해 추구하던 작품세계를 버리고 방송국에 취직한 마크 역시 방황한다. “La vie Boheme”으로 맺는 1막이 등장 인물들 간의 만남과 사랑, 추구하는 길에 대한 신념, 구체제에의 저항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2막은 이별과 인물간의 갈등과 화해로 이루어져 있다. 각자 방황하던 이들은 다시 돌아오고 그러기까지 1년의 세월이 흐른다. 1년이 걸려 이들이 깨달은 사실은, 그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며 지금 이 순간뿐 다른 날은 없다는(no day but today) 것이다.
<렌트>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을 원작으로 하긴 했지만 많은 부분이 비교된다. 19세기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들은 20세기 뉴욕의 역시 가난한 예술가들로, <라 보엠>에서 주인공이 앓던 결핵은 <렌트>에 와서 에이즈와 약물중독으로 치환됐다.
물론 가장 큰 차이점은 눈에 보이는 결말부일 것이다. 그러나 <렌트>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군(레즈비언, 게이, 크로스드레서, 흑인, 백인, HIV보균자, 약물중독자 등)에 대한 묘사가, 더욱 이 시대의 보엠을 잘 묘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마크가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가 아니라 창조라 주장하는 부분에서, 이 사회의 전형적 질서와 권태 역시 그들의 적일 수 있다는 공감대가 만들어진다.
여러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존재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의 치열한 삶이다. 그들은 배고픔과 추위에 떨고 질병에 신음하지만, 추구하는 예술세계에 대한 애정과 갈망을 숨기지 않으며 기존 체제의 모순과 관습에 타협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현실은 비루하지만 정신은 그러하지 않다.
그것이 보헤미안의 삶이라는 건가?
Viva, La vie Bohe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