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계의 문제적 감독 신재인 스토리 영화

2005/11/14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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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인의 진실이 전진한다

신재인은 누구인가? 지난해와 지지난해 독립영화를 조금이라도 주목했던 사람이라면 이 이름은 익숙할 것이다.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라는 단 2편의 단편영화로 독립영화계의 일대 파란을 일으켰던 이 문제적 감독에 대한, 조금 늦게 날아온 보고서.

이 사람은 신재인이다. 70년 대전 출생,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한국영화아카데미 17기다. 혹자는 그를 “영화천재”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자는 “약간 사이코라며?” 되묻기도 한다. 본명은 신미경. 재인(才人)이란 이름은 지난해 투병하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이다. ‘재능있는 인간’이기도 하고 ‘영화 만드는 광대’이기도 하다. 바쁜 와중에도 사진기자에게 “왼쪽 얼굴이 잘 나오니까 사진은 왼쪽으로 찍어달라”는 주문을 잊지 않는 걸 보니 꽤나 까다로운 성격임에 분명하다. 하나 이런 사실이나 추측들은 그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는 유독 상 복, 상금 복 많은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런 번쩍이는 트로피 역시 신재인을 설명할 수 없다.

… 이 기괴한 순환. 또는 술래를 알 수 없는 숨바꼭질. 그래서 번번이 불려가야 하는 지옥의 영겁회귀. 여기에 이 도착증에 빠진 채 물구나무를 선 신재인의 종잡을 수 없는 묘기가 있다.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과 루이스 브뉘엘이, 혹은 스즈키 세이준과 마리오 바바가 뒤죽박죽으로 앞서거나 뒤서면서 등을 떠밀거나 발을 걸어 시종일관 휘청거리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던 상징적 법의 인과성을 교란시킨다. 말 그대로 그것이 담론의 목에 꽂혀서 삼켜질 수 없는 형상-원인이 되어 결국 토해내게 만든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환원되지 않는다. 익사할 만큼 넘쳐나는 담론의 토사물. 이 영화 안에 들어서는 것은 말 그대로 신재인 월드에로 다이빙하는 것이다….” - 영화평론가 정성일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은 기발한 이야기 소재에 엉뚱하고 성숙한 유머를 천연덕스럽고 솜씨있게 비벼놓아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모든 감독들을 한방에 보내버렸다. 뒤에 알았지만 그에게 매료당한 영화인들이 꽤 있었던 걸로 안다.” - 영화감독 김지운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 글은 순전히 신재인이란 감독에 대한 소개글이다. 그러니 잠시, 콸콸 쏟아져 흘러내리는 극찬들과 단명한 진실을 거두고 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물론 이 흥미로운 ‘중독의 역사’ 역시 신재인이라는 인간을 아는 데는 작은 단서밖에 안 되겠지만.

신재인이 대학에 입학한 해는 1988년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누군가 분신을 했고, 거리는 화염병과 피로 뒤덮였다. 매일 매일이 전쟁 같은 시기였다. 그는 혼란에 빠졌다. 대의명분을 강요하는 사회에도 신물이 났고, 대의명분에 따라 살지 못하는 스스로에게도 자괴감이 밀려왔다. 결국 그는 정반대로 사랑에 탐닉했다. 중독에 가까운 연애였다. 1학년 때 만난 남자친구(지금의 남편)와, 당시만 해도 너무 파격적으로, 애정행각을 벌였고, 그를 “똘아이로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루는 기숙사에 남자친구를 불러들였다가 들켜서 전 기숙사 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한 여성지에서는 ‘요즘 대학생들의 문란한 성생활’이라는 기사로 그를 다루기도 했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인터뷰가 실렸고, 기사는 마치 그를 ‘새시대의 자유부인’이라도 되는 양 보도하고 있었다. 캠퍼스를 걷다보면 학생들이 “이런 시국에 사사로운 연애질이 웬말이냐!”는 증오 담긴 쪽지를 돌에 묶어서 던지고 가곤 했다. 결국 기숙사에서 쫓겨났고 2학년 때부터 학교 코앞에서 본격적으로 동거를 시작했다.

화학과를 다니다 “너 같은 아이는 철학을 해야 해”라는 말에 다시 시험을 쳐서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동·서양철학은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이었다. 대신 수학처럼 명료했던 논리학에만 빠져들었다. 결국 하루라도 빨리 이 혼란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생각에, 아무런 계획도 없이 4학년1학기 만에 조기졸업했다. 그러나 연애와 논리학으로만 버틸 수 있었던 대학 4년이 준 정신적인 외상은 꽤나 컸다. 졸업은 했지만 목표없이 헤매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자괴감에 허우적대며 심한 데카당이 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면서” 살던 중 별 생각없이 고시준비를 시작했다. 원래 “안 자고, 안 씻는 걸 잘하고, 시험운도 좋은 편이라” 사시, 행시 1차는 몇달 만에 붙어버렸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금세 2차도 붙겠거니 기대했다. 그런데 문제는 비디오방이었다. 그 당시 신림동 고시촌 주변에 비디오방이 우후죽순 불어나면서 가게 사이 경쟁이 붙어 한편에 500원까지 가격이 떨어졌다. 어느 날부터 그는 비디오에 중독되었다.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시네마테크에 빠져든 영화광처럼 하루에 5편은 기본이었다. 공포영화, 액션영화, 멜로영화 등 가리지 않고 보았다. 결국 2차 시험일, 그는 비디오방에서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어쌔신>을 보고 있었다. 그냥 그 영화가 좋아서라기보다 중독이란 다 그렇듯, 이유없이 그 영화를 오늘 안 보면 못견딜 것 같아서였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장롱을 부수셨고, 거의 죽이기 일보직전으로 노여워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길로 고시공부를 때려치웠다. 대학원도 가고, 이런저런 직장도 다녔다. 1년 동안은 모 대학 법대교수 비서로 들어갔는데, 이 생활은 정말 가관이었다. 강남의 으리으리한 멤버스술집 문 앞에서 양복 들고 기다리는 일은 양반이었다. 썩어문드러진 인간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적나라하게 보는 기회였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98년 여름이었다.

 

“… 세상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 그들의 몸속을 돌아다니는 피는 다음과 같이 속삭이곤 한다고 합니다. ‘너의 이야기가 진실이어도 거짓이어도 상관이 없다. 다만 모순이 없도록만 하여라. 그럼 내 네게 영생(永生)을 약속하마.’ 한때 그의 몸속을 돌아다니기도 했던 이 피의 속삭임을 믿는다면 그가 영생을 누리지 못한 까닭은 단지 그가 모순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 소설집 <포도주> 프롤로그 중

짧은 단편들로 이어진 소설집 <포도주>는 한 문화재단 공모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결국 여덟 군데 출판사에서 “책으로 만들긴 좀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거절의 말을 들어야 했다. 99년 여름 1년간 처박아 두었던 소설을 다시 읽어보았다. 다시 출판사에 들고 가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럼 이걸로 영화를 만들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99년 한겨레문화센터에 들어갔고, 영화아카데미가 나이제한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조해서 만든 단편 <소세지>를 들이밀었다.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입학생의 절반 이상이 연극영화과 출신이라 비디오방에서 1년을 죽친 자신과는 지식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났지만, 별로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학교는 가르쳐주는 게 없었지만 동기들이 영화 찍는 걸 옆에서 보면서 진짜 영화란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 우리 인간들은 소중한 양분이 될 많은 자원들을 방치해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천지에 먹을 것을 널어두고도 배를 곯고. 단지 무지, 비위 혹은 그놈의 테이스트 때문에 말야….” 소설집 <포도주> 중 <남이 먹을 때1>

아카데미 1학년 작품이었던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은 뭐든 먹어치우는 놀라운 비위를 가진, 그것만이 유일한 재능인 소년의 이야기다. 영화 제목인 ‘이준섭’은 그 아이의 본명이다. 촬영헌팅을 갔던 학교에서 “PC방 가려는 데 돈이 없다, 천원만 주라”며 뻔뻔하게 묻던 아이였다. 그외 아역배우들 역시 섭외한 학교 운동장에서 무작위로 불러모은 100% 아마추어였다. 하루 나왔던 아이들이 그 다음날은 안 나오는 통에 연결이 튀는 경우도 많았다. 여자주인공을 비롯한 소녀들은 자칭 ‘칠공주파’라고 부르던 그 학교에서 좀 ‘나가는’ 아이들이었다. 머리염색해야 한다고 돈 달라는 건 예사고, 돌아서면 “아줌마, 대사가 이게 뭐야!”라는 솔직한 소리도 서슴없이 내뱉았다. “나는 아이들이 싫다. 내 영화에 아이들이 곧잘 등장하곤 하지만 결코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아니다. 내가 인간에게서 가장 마음에 드는 요소가 바로 위선적이라는 것과 코미디를 할 수 있다는 거다. 아이들은 코미디를 할 수는 있지만 너무 솔직해서 위선을 못 떤다. 그게 마음에 안 든다.” 이렇듯 아이들을 싫어하는 감독이 만드는, 아이들만 등장하는 이상한 영화의 촬영장엔 감독도 아마추어, 배우도 아마추어였다. 날은 영하 20도, 학교협조도 잘 안 되었고, 프로듀서는 쉼없이 내리는 눈을 치우다가 결국 삽을 던지고 도망갔다. 고생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신재인은 너무 오랜만에 행복하다고 느꼈다. 너무 기뻐서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연애할 때의 희열, 쾌락과 정확히 일치했다. 전기가 몸에 찌릿찌릿 오는 것 같은, 깊은 고통과 엄청난 희열이 시소를 타는. 그렇게 그는 이제 ‘영화촬영’에 중독되었다. 결국 첫경험을 치르고 졸업영화를 찍기까지 1년 동안은 엄청난 금단현상에 시달려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촬영장에 나가서 카메라를 잡고 싶었다.

“… 들어라, 여기 유일한 것이 있다.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닌 것이 여기 있다. 그래도 그들이 듣지 않는다면 너는 그들의 뺨을 함몰시키고 그들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꺾어버리고자 했을 것이다. 그들의 두개골을 열고 진실을 슬쩍 집어넣은 뒤 봉합하고도 싶었겠지. 그리고 그들이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면 너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느니 그 편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소설집 <포도주> 중 <너의 진실1>

1년 뒤 들어간 졸업영화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시나리오를 보고 교회가 어떻게 물에 잠기냐고 걱정을 했지만 스스로에겐 전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인터넷 공모로 스탭들이 모였고, 의외로 교회섭외도 쉽게 이루어졌으며 특수효과 하나 쓰지 않고도 시나리오를 영상화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그냥 너무 행복했다. 촬영이 끝나면 밤새 술을 마시고 (그들은 별로 탐탁지 않았겠지만) 스탭들에게 헤어지기 싫다고 집에까지 쫓아가기도 했다. 고단한 줄도 힘들지도 않았다. 찍고 나니 아카데미에서 준 제작비 중 50만원이 남았다. 질펀하게 술판을 벌이고 촬영이 끝나는 날 펑펑 울었다. 또 찍고 싶다, 어떻게 여기서 끝내냐, 그러다가 촬영에 대한 집착이 중독을 넘어가는 순간이 왔다. 촬영이 없는 일상생활이 너무 지루하게 느껴졌다. 밥먹고, 차마시고, 자는 시간들이 단조로워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준비 중이던 에로영화 프로젝트가 엎어지자 금단증세는 더욱 심각해졌다. 미쟝센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한번 본 적 있는 봉준호, 허진호 감독을 무턱대고 찾아가서 “스탭으로라도 써달라”고 애걸했다. “<친구>의 마약 먹은 준석이처럼 눈이 퀭해져서”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감독들은 “영화에 대한 열망이 너무 큰 사람 같으니, 바로 당신 영화를 찍어라”며 그를 스탭으로 두는 것을 유보했다. 이런 그를 두고 충무로에서는 “신재인이란 여자 정상이 아닌 것 같다. 사이코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아이디어는 콸콸 쏟아지는 물처럼 흘러넘쳤다. 그러나 하나를 붙잡고 진득하게 시나리오를 발전시키고, 영화사를 찾아가고 하는 과정을 진행해야 하는데 마음이 너무 급한 나머지 계속 트리트먼트 수준의 글들만 쉼없이 쏟아냈다. 그때 쓴 트리트먼트가 대략 30여편이 되었다. 꿈에서도 카메라가 돌아가고, 빨리 찍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렇게 불행한 시기 중간중간에 영화제에서는 상을 주었다. 그러나 상금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면 조잡한 영화라도 빨리 찍을까 하는 마음뿐이었다. 남편도 “너 좀 이상한 것 같으니까 정신병원에 가봐라”는 소리를 할 정도였다. 두문불출하고 무지막지하게 시나리오를 써내려가던 중 한 제작사 대표에게 <천사를 본 소년>과 <재수없는 소녀>의 두개의 중편을 묶은 장편 프로젝트 <남이 먹을 때>를 들고 갔고 소액이지만 투자하겠다는 뜻을 들었다. 이후 영화진흥위원회 공모에 당선되어 3천만원의 지원금도 받았다. 2003년 10월이었다.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영화찍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간들은 너무 말을 잘한다. 그래서 지겹다. 그중 누구도 내 친구가 될 수는 없다. 내 친구는 돼지다. 나는 소를 사랑한다.” - 소설집 <포도주> 중 <공포영화>

“11월이면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장담했지만 이건 아카데미 단편이 아니었다. 15일 빡빡하게 준비하면 가능했던 단편과 달리 독립장편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처음에 투자를 약속했던 제작사는 지나친 서류작업을 요구했고 이런 소모적인 과정 속에서 PD들이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두달간의 작업은 “유황불에 몸을 달구는 것” 같았다. 캐릭터 있는 아이들만 15명, 전체 25명의 아이들이 등장하는 아역배우 캐스팅부터 고아원 헌팅까지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10월 초부터 조감독과 둘이 앉아 한달을 꼬박 준비했는데 준비된 건 없었고, 몸은 축이 날 때로 나 있었다. 조강지처 같았던 조감독은 어느 날 “나는 감독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스탭들은 “수능 두번

본 기분”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병원을 들락날락했다. “선상반란이 가장 잔인하고 끔찍하다고 하지 않나. 스탭들의 분위기가 거의 선상반란 수준이었다.” 감독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누군가가 자신의 손등을 지지는 꿈도 꿨다. 이렇게 할 가치가 있는 영화인지, 자신의 영화가 너무 싫었다. 영화를 엎고 싶었지만 그런 말은 차마 못하겠고 “누가 뒤통수를 부수고 갔으면 했다. 영안실에 누워 있다면 영화를 안 찍을 텐데” 같은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상하게 자신만은 쓰러지지 않았고, 아프지도 않았다. 그냥 유체이탈 같은 상태로 며칠 밤을 멍하니 새기도 했고 누군가는 “영화 한편 찍고 죽을 겁니까?” 하고 답답한 듯이 묻기도 했다. 결국 12월 초에 조연출과 연출부들을 새로 구성해야 했다. 제작사와는 사무실을 빌려쓰는 정도로 정리했다. 그렇게 12월22일 우여곡절 끝에 독립장편영화 <천사를 본 소년>의 첫 촬영에 들어갔다.

“옛날에 어떤 여자애가 있었어. 그애의 모친은 사려 깊게 그녀를 교육시켰지. 그녀를 소설 나부랭이로부터 격리시키고. 대신 어머니는 그녀에게 과학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녀는 아름답고 단순한, 행복한 여인으로 성장했어. 그런데 어느 날 그만 소설 <파우스트>를 읽고 말지. 그녀는 머리가 복잡해지고. 결국 그녀는 쓰러진다. 연애 감정, 죄의식, 부적절한 비유, 답이 없어도 되는 의문들, 모든 것을 아는 체하며 또한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양….” - 소설집 <포도주> 중 <탕아, 돌아오다>

경기도 파주 교하읍, 허름한 건물에 만들어진 고아원 세트에서는 추운 날씨 속에도 촬영이 한창이다. 하지만 신재인 감독의 얼굴엔 지난 2달의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모든 고민들과 고통들이 눈녹듯이 녹았다. 그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은 촬영하지 않을 때이고, 다음은 프리프로덕션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때는 촬영하고 있을 때”라고 말한다. 게다가 이번엔 “매일매일 장편의 리듬을 깨우쳐가고 있는 중”이라며 꽤나 신이 난 표정이다.

“원래 집 밖에서 자는 걸 좋아한다”는 그가 촬영 시작 뒤 거의 열흘 만에 집을 찾는다. 꼬불꼬불한 상도동 골목을 따라 들어간 그의 집 문을 열자 영화준비하는 두달 동안 신경을 못 써줘서 “정신병에 걸린 것 같다”는 푸들잡종 두 마리가 유난히도 부산스럽게 주인의 사랑을 갈구한다. 머리의 무게를 가누지 못해 자꾸 고꾸라지는 중국산 스탠드가 어두운 집안을 밝히는 가운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얼굴이 담긴 액자와 <피아니스트>의 포스터가 부조화스럽게 붙어 있다. “스필버그는 극장에서 돈내고 보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네케 사진은 지갑에 넣어서 다닐 정도고, 아! 김기영 감독의 영화도 너무 좋다.” 이 널뛰는 ‘테이스트’의 주인공은, 13년째 은단중독이라는 이 여자는, 한번 피우기 시작하면 하루 4갑이라는 이 골초감독은 “상업성이 본질적인 것을 침해하지 않는 한 언제라도 상업영화를 만들 생각이 있다”며 “그러나 이 지독한 중독이 다른 데 꽂혀버리면 그땐 영화를 아예 그만둘지도 모른다”고 덤덤하게 말한다. 그러나 그의 앞엔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노인을 이용해 엽기적인 성행위를 벌이는 심각하게 야한 시나리오”를 비롯, 에로영화 트리트먼트도 수북이 쌓여 있고, 당장 <남이 먹을 때>의 2편인 <재수 없는 소녀>를 찍고 싶은 조바심도 목 끝까지 차 있다. 서늘한 시선, 기괴한 감성, 진실된 유머, 의외의 상업성으로 무장한 괴물 같은 감독 신재인. 이 재능있는 인간의 진실이, 그의 중독이 전진하는 발걸음을 따라 한국영화의 지형도에서 한번도 탐험되지 않은 처녀지는 지금 막 그 입구를 열기 시작했다.

그녀의 영화들, 보셨나요?

▶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소년 이준섭은 못생기고, 뚱뚱하고, 인기도 없는 외톨이다. 그러나 그가 어느 날부터 샤프심, 지우개, 가래침으로 비빈 도시락, 분필, 노트 등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하면서 친구들의 관심을 사기 시작한다. “야, 니네 반에도 이런 애 있냐?” “없어, 이런 애가 어딨어.” 그는 전교에서 유일한, 독창적이고, 신기한, 그리고 비위가 좋은 소년이다. 그런 이준섭이 한 소녀를 좋아한다. 소녀는 그에게 “너 나 좋아하지? 얼마나 좋아해? 많이 좋아해? 그럼 너 내 똥도 먹을 수 있어?”라고 묻는다. 운동장 한가운데서 소녀와 소녀의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똥이 담긴 도시락을 앞에 두고 꿈을 꾼다. 소년은 똥을 먹음으로써 사랑을 확인시키고 전교생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연다. 해피엔드. 그러나 더욱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100년 만에 찾아온 가뭄으로 전 인류가 굶주려 있을 때 소년은 기차역 앞 노숙자들을 향해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세요, 눈을 뜨세요. 모든 게 여러분의 밥입니다!”라고 외친다. 구황(救荒)소년은 그렇게 지구를 구한다. 판타지가 깨지면 소년은 여전히 도시락 앞, 운동장 한가운데 서 있다. “그래도 나는 재능있는 소년. 소녀는 나를 사랑할 거야. 그래도 우린 행복할 거야….”

▶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한 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오며 보호자에게 말한다. “수술 잘되었구요… 환자의 머릿속에는 제 진실을 넣었습니다.” 다급히 의사를 부르는 간호사의 외침을 뒤로 하고 남자가 들어선 곳은 법정이다. 남자는 법정에서도 다음 장소인 교회에서도 “내 입에선 오로지 진실만이 콸콸 쏟아져나올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모두가 내 진실에 빠져 죽으리라”고 말하며 판사와 목사에게 대항한다. 그를 바라보는 정체불명의 푸른 모니터와 천장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은 이 이상한 이야기에 의문을 더할 뿐이다. 그러나 “내 입을 크게 열라”는 잠언의 말씀에 따라 남자가 입을 열자 그의 입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고 결국 교회는 물속에 잠긴다. 목사는 물에 잠긴 채 말한다. “그동안 네 이야기 재미있었다. 나는 그러면 된 거라고 생각한다.” 장면이 전환되면 이곳은 경찰서 고문실이다. 남자는 “네 입을 크게 열라”는 성경구절이 써 있는 깨진 거울 아래 수조에서 물고문을 당하고 있고, 목사와 판사로 등장했던 이들은 그에게 “물 좀 고만 먹고 이제 진실을 불라”고 강요하는 형사들이다.

▶ <천사를 본 소년>

외딴 고아원 ‘천사의 집’의 원장은 식비를 줄이기 위해 원생들에게 먹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가르친다. 그는 성경의 구절을 들먹이며 아이들의 식욕을 유린하고 결국 고아원의 아이들은 배가 고픈 것을 도저히 못 참을 지경이 돼서야 식당에 가서 초코파이를 타서 침대 밑이나 화장실에서 회개하며 먹는다. 이들에게 가장 큰 벌은 남이 보는 데서 식사하는 일이다. 뚱뚱한 소년 성일은 원장의 교리를 가장 잘 따르는 아이지만 말라가는 친구들과 달리 풍만한 자신의 몸 때문에 아이들로부터 식탐하는 돼지라는 오해를 산다. 결국 성일은 금식선언을 하는 등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 하지만 아이들은 믿지 않는다. 금식에 실패한 어느 날, 성일은 밥을 먹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날개로 가려주는 따뜻한 천사를 본다. 한편 아이들은 우연히 원장과 수위가 함께 밥을 먹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아이들에게 원장과 수위의 식사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그들이 섹스를 나눈 것 같은 환상과 겹쳐지면서 끔찍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성일의 유일한 친구이자 원장을 의심하던 갑수는 원장을 살해하고 시내로 탈출하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갑수가 원장에게 반발하는 사이 오히려 성일이 고아원을 탈출하게 된다. 다음날 시내에서 눈을 뜬 성일, 그는 사람들이 공공장소에서 수치심도 모른 채 밥을 먹는 놀랍고 역겨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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