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침묵 - 개정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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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투르니에의 『짧은 글, 긴 침묵』


대가(大家)들의 능청은 눈여겨 볼 만하다. 대수롭지 않은 것들을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말하지만 거기엔 간과할 수 없는 예지와 통찰이 있다. 초보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일단 열대숲의 구관조처럼 자신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의 화려한 외양에 흠뻑 만족해 한다. 대부분의 처녀시집(處女詩集)들은 이러한 종류의 나르시시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젊음은 그 자체로도 보여줄 가치가 있는 것인데도 굳이 치장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 '심뽀'의 배후엔 인간의, 거의 본능적이랄 수 있는 자기현시욕이 있다.
자신의 주관을 재료와 형상에 양보하는 겸손의 어법은 자신의 질서를 더 큰 질서 아래 포섭시키려는 구도자적 통찰을 담아내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 겸손의 어법은 사뭇 경건하기까지 하다. 최소한의 재료로 자신의 품위를 고즈넉하게 말하고 있는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그래서 우리에게서 내뱉어진 너무 많은 말을 무참하게 한다. 자발없이 몸을 뒤챘고, 경박하게 떠들어 댔다는 자책감이 스스로를 아주 몹쓸놈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명품'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가 그 앞에서 우리의 '뿌리없음'을 스스로 실토하게 만드는 것, 우리가 얼마나 경박한 충동에 자신을 위탁해버렸는지를 아프게 깨닫게 하는 것.

그러나 명품이 반드시 인간을 주눅들게 하는 것은 아니다. 명품 앞에서 우린 엄숙해지기만 하는 건 아니다. 때론 후후, 적의(敵意) 없는 미소를 터뜨리기도 한다. 『짧은 글, 긴 침묵』의 작가 미셀투르니에는 엉덩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에 조물주가 무슨 변덕을 부려서 인간이 가진 것들 가운데서도 가장 부드럽고 피동적이고 맹목적일 만큼 푸근하게 믿기 잘하는 모든 것, 매질을 당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헌신만이 본분인 그 모든 것이 와서 숨어 있는 이 둥근 구릉을 남자와 여자에게서 박탈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만 해도 아찔해질 지경이다. 엉덩이는 언제나 수줍게 가려져 있기를 바라는 만큼 매맞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보들보들한 살은 가장 요란스런 소리를 내면서 뽀뽀를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대개 학대하고 싶을 때만 엉덩이를 노출하도록 만든다."

우린 이런 대목에서 후후, 웃으면 된다. 푸짐한 살덩어리, 엉덩이가 이렇게 충성스럽고, 친근한 내 몸의 기관이었던가를 새삼 알아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만으로 엉덩이는 눈물겹도록 고마운 것이다. 조그마한 영광을 엉덩이에게 돌리는 투르니에의 호들갑스럽지 않은 이런 어법 속에서 질 좋은 휴머니즘을 느껴보는 일은 재밌다.

트루니에의 글은 매우 지적인 글이지만 그것이 현학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자신의 주관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글쓰기의 전략에 있지 않을까 짐작해볼 수도 있겠다. 지적인 글이 빠뜨리기 쉬운 시적 감수성, 시적 감수성이 간과하기 쉬운 지적인 탄력성을 이 책은 잘 믹싱(mixing)해서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의 지중해 연안지방을 <미디Midi>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은 절묘하다.

"왜 미디인가? 그곳은 태양의 운행 곡선의 정점이요 태양이 그 절정을 음미하기 위하여 걸음을 멈춘다고 인간들이 즐겨 상상하는 바로 그 균형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절이 불러일으키는 이국취미(exotism)에 아직도 가슴이 설레인다면 지중해는 영원한 피안의 땅이 아니라 마땅히 내가 도착해야 할 세속의 땅이어야 한다. 트루니에는 지중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지중해는 이것인 동시에 또한 저것이다>라고. 모든 귀한 것들은 이것인 동시에 저것이다.

심지어 우린 그것이 안타깝게도 우리의 모든 것이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짧은 글, 긴 침묵』의 호화 양장본의 뒷켠을 장식하고 있는 이런 카피가 맘에 들지 않는다.

이 산문집은 집, 도시들, 육체, 어린이들, 이미지, 풍경, 책, 죽음 등, 각기 길이가 다른 8개의 장 속에 짤막한 텍스트들로 묶여 분류되어 있다. 그의 산문은 방만한 수필이 아니다. 그것은 등 푸른 생선이다. 구워서 밥상에 올려놓는 생선이 아니라 이제 막 아침빛을 받으며 바다 위로 튀어오르는 생선이다.

왜 미셀투리니에의 산문이 <구워서 밥상에 올려놓는 생선>이면 안될까. 그런 평가를 고스란히 수락하기에 미셀투르니에의 텍스트는 '쌀'. '엉덩이', '머리털','집과 도시들과 타잔' 등 너무도 번다하고 자질구레한 일상을 담고 있다. 차라리 까뮈의 『결혼, 여름』이란 수필집이
'막 아침빛을 받으며 바다 위로 튀어오르는 생선'이라면 생선이랄 수 있겠다. 까뮈는 그 책에서 육체를 말하고 있지만 그 육체는 번다한 일상 속의 육체가 아니라 쏟아지는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햇볕 속에 서있는 구릿빛의 육체다. 아직 까뮈가 젊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까뮈의 육체는 해학까지 말할 겨를과 여유가 없다. 그러나 투르니에의 육체는 다르다. 그의 육체는 '이것이면서 저것'이다. 속스러운서도 성스럽고 탐미적이면서도 해학적이다. 엉덩이에 대해서 능청스런 해학을 떨던 그가 때론 이렇게 말한다.

상처 입고, 치료받고, 죽임을 당하고, 수의에 감싸이는 인간의 육체는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서 형이상학적 현기증과 피학, 가학적 도취감을 자극하는 거대한 주체다. 이는 잔혹함과 애무, 죽임과 찬양이 교차하는 다분히 변태적인 변증법이다.

지(知)와 정(情)을 넘나드는 트루니에의 교묘한 이중성이 이 책의 독서에 좋은 리듬감을 불러일으킨다. 독서의 시간은 이완과 긴장의 반복 속에서 묘한 에로티즘과 만나게 된다. 어젯밤 내가 인터넷의 일본 포르노 사이트에서 접촉할 수 없었던 고즈넉함이 그 속에 있다. 그의 짧은 글 하나.

"인도에서 목격한 광경. 새 한 마리가 종려나무 위에 앉는다. 새가 싼 똥이 나무 둥치 아래 떨어진다. 그 속에 바냔 씨 한 알이 들어 있다. 새똥 덕분에 비옥해진 땅에 씨앗은 싹이 튼다. 바냔 싹이 자라 종려나무를 감는다. 거기에 두번째 싹, 그리고 세번째 싹, 이렇게 여러 개의 싹이 차례로 돋아나 합세하여 종려나무를 감아 올라간다. 마치 여러 개의 점점 더 억세어지는 손가락을 가진 손처럼, 땅에서 솟아난 어린 바냔 나무가 종려나무를 모질게 휘감아 뿌리를 뽑아 올린다. 뿌리뽑힌 종려나무는 바냔나무에 쳐들려 올라간다. 그러면서도 종려나무는 때로는 땅에서 몇 미터씩 쳐들린 채 나뭇가지들의 감옥 속에서 계속하여 생명을 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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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생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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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the rainbow - Israel kamakawiwo ole 



사랑, 자신에게 결별을 고하는 경탄
-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에 대한 단상
 
 죽음처럼, 풍경들은 우리를 포함하기 위해 우리를 매혹한다.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을 하루만에 읽었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철학적 단상…  가볍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지만 대단한 흡입력을 가진 매혹의 텍스트였다. 파스칼이나 루소의 철학적 에세이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소설 같기도 한, 딱히 뭐라 분류할 수 없는 제멋대로의 책이지만 말이다.
 
키냐르는 작가이기 이전에 지독한 탐독가였다. “나는 원래 한 명의 독자이다. 내게는 평생의 열정인 독서가 마법의 양탄자여서 나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매일 글을 쓰지는 않지만 매일 책을 읽는다. 어떤 것도 내게 독서를 포기하게 만들지는 못한다.”라고 그는 쓰고 있다. 그에게 ‘독서하다’는 ‘사랑하다’와 ‘음악을 하다’와 동일어라고 한다. 독서든 사랑이든 음악이든 ‘빠짐’을 전제로 한다. 빠짐은 대상과의 일체를 지향한다. 너와 하나가 되겠다는 에로스적 충동! 그 끝은, 이라는 질문에 프로이트는 스타카토로 답할 것이다. 죽음! 『은밀한 생』은 시종일관 사랑으로써 죽음을 말하는 책이다.
 

1. 잔인한 경험
 
치아를 활짝 드러내는 미소, 여유 있는 포옹과 입맞춤, 사랑은 분명 축복이다. 그러나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사랑은 끝이 났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라는 유행가 속에서 사랑은 무엇보다 잔인하고 쓰디쓴 경험이다. 그것은 환희의 경험이라기보다는 비탄의 경험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베르테르와 롯테, 트리스탄과 이졸데… 수많은 사랑의 텍스트를 끌고 가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비탄이다. 파국으로 가는 비탄. 완전성은 추상의 영역에서 논할 성질의 것이지 현실의 영역에서 논할 바는 못 된다. 그것이 어떤 사랑이든 사랑은 끝내 지고야마는 게임. 사랑이 뜨거운 것이라면 그 패배에의 줄기찬 예감 때문은 아니겠는가.
 
모든 연어는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 연어의 출생이 이미 모천(母川)에서의 죽음을 배태하고 있었던 셈. 탄생 이전의 따스하고 축축한 기억 속으로 돌아가는 길, 그것은 열락을 찾아가는 에로스의 길이요, 동시에 둥근 무덤을 찾아가는 타나토스의 길이다. 그래서 모든 교미는 조금씩 슬픔을 닮아 있다.
어머니의 강으로 헤엄쳐 돌아가는 길, 분리 이전으로 귀환하는 길, 더 이상 이별이 없는 곳으로 돌아가는 길, 아득한 길, 아스라한 길,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며 생의 모든 얼룩과 회오(悔悟)를 쏟아버리는 길, 침묵의 대우주 속에서 경계가 지워지며 비로소 어둠과 하나가 되는 길, 서서히 잦아드는 열락 뒤에 가지런한 호흡이 오고 그 호흡마저 새벽별처럼 사위어 가는 길, 너의 이름마저 아니 나의 이름마저 희미해지는 길…
 
키냐르는 소설의 『은밀한 생』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모든 강물은 끊임없이 바다로 휩쓸려 들어간다. 나의 삶은 침묵으로 흘러든다. 연기가 하늘로 빨려들 듯 모든 나이는 과거로 흡수된다.'
 
기억할 수 없는 땅, 기억 너머의 땅, 그 어머니의 바다로 귀환하는 일,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먼 과거로 간다. 태초의 어미에게로.
 
2. 시선
 
그들은 끊임없이 시선을 교환하는 자들이다. 매혹은 바라봄을 전제한다. 한 대상을 바라볼 때 우리의 아득한 육식의 기억이 무의식 속에 작동된다. 키냐르는 끊임없이 기원을 찾아간다. 키냐르가 어원학과 심리학을 빈번하게 동원하는 이유도 기원을 찾겠다는 그의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대체 기원을 찾아서 무엇에 쓰려는가,라고 묻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내 안에는 내 의지로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있는가 하면 무수한 조상들의 기억이 침전된 영역이 있을 수 있다. 침전된 기억의 영역, 그 세계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나는 이미 그 세계에 묶여 있다. 내가 누군가를 매혹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탐스런 피식자를 바라보는 한 육식동물의 체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이다. 내 기억과 무의식은 온전한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이미 무수한 조상과 공유되어 있는 것이다. 키냐르는 말한다. <우리는 또한 연어들과도 같다. 우리의 삶은 그것을 태어나게 한 행위에 매혹된다. 삶의 근원에 홀린다. 여명에 홀린다.>그렇다. <우리의 조상은 선택이 아니다. 우리가 말을 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스며든 언어는 선택이 아니다. 우리의 국적은 선택이 아니다.… 우리는 오줌누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우리는 밤의 이미지들의 주인이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성은 우리 모두를 사로잡는다. 그러나 성보다 열 배나 더 지배력, 본래의 의존관계, 과거가 우리를 사로잡는다.> 내 속에 있는 욕망, 내 속에 있는 사랑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이미 태어났던 것이다.<바라본다는 것은, 어느 정도에 이르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 속에서 자신의 욕망과 함께 사라지는 욕망하는 인간이 그러하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 또한 나를 바라본다. 그 시선 속에서 사랑은 태어난다. <매혹된 자는 하나의 시선이다. 자신을 고정시키는 사선을 맞바로 쳐다보는 나머지, 바라보는 자가 보여지는 자 안으로 시선을 통해 옮아간다.> 한 사람을 매혹된 시선으로 바라 볼 때, 그 시선은 꿈꾼다. 나는 네 안으로 가고 싶어. 네 안으로 사라지고 싶어. 침묵이 욕망을 감사고 움직임을 유예시킨다. 연인은 욕망과 침묵에 꼼짝없이 붙들린 존재다. 진정한 연인은 소유하려는 자가 아니다. 주체성을 포기하고 타자 속으로 나를 옮겨놓고 싶다는 욕망, 그것은 소유의 욕망이 아니라 망각의 욕망, 소멸에의 희구다. 내가 내 어머니의 몸에서 왔으니 이제 그 몸으로 돌아가겠다는 회귀의 꿈이다.
 
우리 모두가 아이였을 때, <우리들의 어머니의 두 눈은 최초의 얼굴>이었다. 그 두 눈에서 반짝이는 두 개의 별빛을 우리는 밤하늘에서 본다. 별, 우리를 추방했지만, 우리가 돌아가야 할 반짝임의 나라, 글썽임의 나라.
 
 
3. 비밀과 공모
 
연인들은 은밀한 기호를 교환한다. 그들만의 상징과 은유를 만들어낸다. 일체의 사회적 교환장치로부터 그들은 벗어난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벗어난 자들이다. 손가락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서도 둘만의 은밀한 기쁨의 의미를 읽어낸다. 아무리 주의 깊게 바라보아도 타인들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기호들을 해독할 수 없다. 둘만의 은밀한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사랑의 기쁨은 증폭된다. 그들에게 고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의미가 없다. 키냐르는 이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사랑이란 정확히 이런 것이다: 은밀한 생, 분리된 성스러운 삶, 사회로부터 격리된 사람, 그것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인 이유는, 그러한 삶이 가족보다 먼저, 사회보다 먼저, 빛보다 먼저, 언어보다 먼저, 삶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어둠 속, 목소리도 없는, 출생조차도 알지 못하는, 태생(胎生)의 삶> 카츄사에 빠진 네프 백작, 춘향이에게 빠진 이몽룡을 상기해보자. 사랑은 모든 다른 가치들을 폐기시키고, 한 시절을 신성화시키고, 심지어는 한 개인 개인의 국적과 계급마저 박탈한다.
 
사랑은 무엇보다 반사회적인 것이다.<연인들은, 이 세상에서 생겨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 가족이다 사회의 연대성을 그 공동체 뒤로 멀리 내던져버린 채, 밤이면 꿈속에서 보는 환각에 사로잡힌 장면을 잠과 이미지를 빼앗긴 밤에 불면의 밤에 빛 속에서 행하는 포옹이라는 구체적인 형상으로 대체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만의 공간이다. 모든 사회적 중재가 그들에게 무시된다. 안중에도 없다. 그들은 눈먼 자들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인간 사회가 처벌하는 어떤 것>이다.
 
<사랑은 이 세계에 고하는 하직 인사>라지만 그러나 사회로부터의 완전한 추방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어차피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은 ‘여기’고, 이곳에서의 법령이 우리를 강력하게 지배한다. 그러므로 연인들은 감춘다. <감출 줄 모르는 자는 사랑할 줄 모른다.> 그들은 공모자들이다. <공모는 사랑보다 더 신비스러운 말이다.> 둘이서 어떤 은밀한 범죄에 가담한다는 것, 그리하여 언젠가는 죽음의 형벌에 이를 수도 있다는 위험에 몸을 맡긴다는 것, 그 두려움이 둘의 포옹을 더욱 굳세게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열정은 공포에의 저항이다.
 
 
4. 냄새
 
냄새가 기억을 이끌어내는 심리작용을 일컬어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냄새에 이끌려 어린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냄새와, 냄새의 기억은 있어도, 냄새에 얽힌 기억의 시간은 지금 여기에 없다. 냄새는 지금 여기에 없는 부재를 강력하게 환기시켜준다. <사랑이란 무엇보다 타인의 냄새를 미친 듯이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키냐르가 말할 때, 냄새는 곧 부재의 강력한 증거가 된다. 엄마가 벗어둔 옷에 엄마의 냄새는 있지만 정작 그 냄새의 실체인 엄마는 없을 때 엄마의 냄새는 엄마에 대한 강력한 그리움의 증거물이 된다. 모든 냄새는 부재의 증거다. 왜 냄새는 있는데 너는 없는가, 부재가 존재를 달뜨게 한다. 그러므로 <향기는 보이지 않는 것의 유혹이다.>
 
내 속으로 너를 온통 침투시키고 말겠다는 무의식의 표현일까, 사랑에 빠진 자는 흠뻑 공기를 빨아들인다. 그의 몸 주위를 떠돌던 공기들, 그의 몸 속을 빠져나온 공기들이 ‘내’ 속으로 들어온다. 한 존재를 비로소 온전히 가졌다는 착각의 나르시시즘이 그를 지배한다. 그러나 후각처럼 쉽게 피로해지는 감각이 또 있을까. 모든 냄새는 찰나적이다. 한 사람을 소유했다는 우리의 의식이 그렇듯 그것은 흐리멍덩하다.
 
후각은 시각처럼 분명한 감각이 아니다. 그것은 흐리멍덩한 감각, 명철하지 않은 감각이다 그러나 모든 냄새에는 발원지가 있게 마련이다. 모든 냄새는 그 발원지를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냄새가 있다는 것은 냄새를 피우는 무엇인가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냄새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너는 어딘가 반드시 존재한다, 라는 등식은 이렇게 성립하지만 오늘날의 향수 산업은 이런 등식을 간단하게 비웃는다. 도처에 너의 냄새는 있는데 너는 어디에도 있지 않다는 현대의 비극!! 모든 향수 산업은 체취의 유일무이한 개체성을 무화시킨다.
 
 
5. 독서
 
<모든 독서는 출애급이다.>라는 키냐르의 말에 나는 동감한다. 독서는 끊임없이 ‘이곳’을 벗어나는 행위다. 지금 이곳에 만족하는 자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 어떤 결핍이 끊임없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한다. 결핍이 없으면 독서도 없다. 키냐르는 <책읽기는 이 세상과 어긋나고 알 수 없으며 그 자체로 좋은 다른 세계에 두뇌를 집중함으로써 또 하나의 세계에 접속되는 일이다. 그 세계가 나의 구석진 장소였다.>라고 고백한다. 지금 이곳이 충분하다면 왜 다른 세상과의 접속을 꿈꾸겠는가. 독서는 <사회의 그리고 시간의 사각지대에서 살아가기. 이 세계의 모퉁이에서 살아가기>다. 그것은 <자신 밖으로 떨어져 나가기>이다. <결코 자신의 밖으로 떨어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다. >라고 키냐르는 말한다. 사랑은 나를 벗어나 너로 귀환하겠다는 망아와 몰아의 체험이다. 독서 역시 나를 벗어나는 망아의 체험이다. <독서하다. 사고하다. 독서의 기쁨은 사랑의 기쁨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사고와의 만남이라는 경험에서 오는데, 거기에는 일체의 경쟁관계나 정신의 기능을 종속시킬 일체의 의도가 배제되어 있다. 타인이 파악한 것을 함께 나눌 뿐이다. 독서는 죽은 자들과 더불어 사고하는 기쁨이다.>
 
독서는 또한 배반과 금기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일이다. <독서와 사랑은 지식을 뒤집는 인식이고, 끌어당기고 생각해야 할 것에 불복하는 일이며, 가족이나 집단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일이다.> 탐미적인 독서가들은 책을 통해 배반의 힘을 키운다. <책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특이한 비밀결사를 구성한다.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과 연령의 구분 없이 섞이지 않음이, 결코 서로 만나는 일 없이도 그들을 한데 모아 놓는다.… 그들의 선택은 다른 사람들의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 선택은 오히려 틈새와 주름들 안에, 즉 고독, 망각들, 시간의 경계, 열정적인 생활태도, 응달지역, 사슴의 뿔, 상아페이퍼 나이프들 안에 칩거하고자 한다. … 그 선택은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속하는, 짧지만 수많은 삶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도서관을 설립한다. 그 선택이 도서관 구석에서 촛불을 밝혀놓고 말없이 서로를 읽어가는 반면, 전사계급은 전장에서 요란법석을 떨며 서로를 죽이고, 상인계급은, 장이 선 마을광장이나 이 광장을 대체한 장방형의 매혹적인 회색빛 화면 위로 비추는 빛 속에서 고함을 지르며 서로를 물어뜯는다.>
 
독서는 고독의 시간을 요구한다. 독서는 집단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사적인 체험이다.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삶은 사적일 경우에만 생동감으로 넘치고, 나체는 이미지가 부재할 때만 나타나고, 여명이나 황혼에서 반복되었으며 또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자기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선에 대한 기억마저도 벗어난, 매순간에 동의하는 욕망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 모든 모국어들, 구어들, 인간 상호간의 언어들을 다소간 등지지 않은 사생활이란 없다.>라고 말할 때 ‘삶’을 ‘독서’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하다.
 
<나는, 내가 읽으면서 몽상할 수 있는 그런 책을 쓰려고 한다. 나는 몽테뉴, 루소, 바타유가 시도했던 것에 완전히 감탄했다. 그들은 사유, 삶, 허구, 지식을, 마치 그것들이 하나의 몸인 듯 뒤섞었다. 한 손의 다섯 손가락들이 무엇인가를 붙잡고 있었다. > 기존의 장르에 포섭되지 않겠다는 것, 나만의 유일성을 훼손시키지 않겠다는 욕망이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다. 이른바 <키냐르식 담론>들. 그것은 어떤 장르이론으로도 분류되지 않는다. 내적인 요구와 부름에 키냐르식 담론은 충실하다. 어떤 사회적 요구에도 불응한다. 그는 말한다. <음악과 사랑 간에는 차이가 없다: 진실한 감동을 듣게 되면 완전히 길을 잃게 된다.> 그것은 길을 잃은 자의 장르다.
 
 
6. 감추면서 비밀을 드러내기
 
<키르케가 말한다: 자신의 나체를 맡기는 것(배설 구멍 드러내기, 생식 구멍 드러내기, 성기와 생식기관들을 드러내기), 밤중에 잠든 육체를 고백하는 것, 자신의 이름을 실토하고 비밀을 말하는 것, 이런 것들이 사랑의 내 가지 표지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진정으로 서로 말을 나누려면 침대로 들어가서, 서로의 벗은 몸을 보고, 서로의 몸 위에 올라타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국 <나체로 몸을 내맡기지 않는 여자에게 남자는 속내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나체로 몸을 내맡기지 않는 남자에게 여자는 속내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키냐르는 경고한다.
사랑, 모든 이들에게 감추면서 오직 한 사람에게 자신의 온몸을 던져 송두리째 말하기. 자신을 송두리째 던지는 자는 결국 자신으로부터의 떠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에게 결별을 고하는 경탄이다.>라고 말할 때의 키냐르의 행복은 즐겁지만은 않다. 결별을 예감하는 자의 행복, 행복은 이런 불안 속에 둥지를 튼다.
 
 
7. 풍경
 
풍경을 아름답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이 풍경보다 먼저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대체 어떤 관념이 풍경보다 먼저 우리 안에 침투해서 하나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게 하는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이를 아름답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어떤 미학이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대체 내 안의 어떤 것을 촉발시키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봐도 우리의 의식은 속수무책이다. 찧고 까불어 봐야 의식이 담당할 수 있는 몫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 그 불가해성이 사랑이다. 키냐르는 말한다. <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과거를 응시한다. > 그렇다면 연인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떤 과거를 응시하는 것일까. 젊은 어머니의 싱그러운 피부, 어미의 젖을 빨던 어린 포유류의 감각, 미소를 짓는 어머니의 검은 눈동자 안에 빛나는 별빛… 그 기억으로부터 어떤 이도 자유로울 수 없다면 매혹은 우리의 운명이다. 사랑은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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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1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전시륜 지음 / 명상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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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고 발랄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묵직함




  간해선 독서를 멈출 수 없는 책들이 있기 마련이다. 전시륜의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명상)도 그런 책 중의 하나. 이런 책들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니 베스트셀러 목록의 신뢰도에 고개가 갸웃해진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재능은 반드시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라 했지만 좋은 것이 반드시 널리 알려지는 것은 아닌 듯싶다.

  한 도서평론가는 한동안 전시륜 홍보원을 자처하고 다녔다고 한다. 좋은 것을 널리 알려 공유하고 싶은 욕망은 얼마든지 권장할 만하다. 더구나 그 홍보의 대상이 전시륜임에랴.(이 글도 그런 홍보 차원을 벗어나지 못함을 고백하자.) 전시륜, 그 이름만 떠올려도 금세 유쾌해진다. 독서가 값진 일이라면 바로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런 만남을 통해 예견치 못했던 세계가 나를 향해 흘러 들어오는 것이리라. ‘내’ 중심을 흔들어 ‘나’를 내 밖으로 확산시키는 이런 탈아(脫我)의 체험은 때론 당혹스럽고 때론 즐겁다. 독서는 그런 당혹과 즐거움을 만나는 일이다.

  1932년에 충청도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공대 재학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철학을 공부했으며, 대학원에서는 물리학을 전공한 전시륜, 그는 대학 졸업 후에도 미국에 거주하며 여러 직장에서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그에게 평범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면 평생 모국어로 된 한 권의 수필집을 세상에 남기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었다는 것. 1998년 그는 이 책을 탈고하고, 출판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6살 때였다.

  그는 무게를 잡지 않는다. 위악적인 포즈도 없고, 낭만주의자의 치기나 인문주의자의 엄숙함도 없다. 그렇다고 억지로 재기발랄함을 연출하지도 않는다. 그는 천진난만하고 솔직하며 거침이 없다. 그에겐 촌철살인의 유머가 번득이기도 한다. 그만큼 그의 영혼이 자유롭다는 증거다. 이 책은 무게를 잡지 않아도 이렇게 쓰면 글이 되는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을 준다. 풍성한 인문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생물학, 인류학, 신학, 여성론, 문학, 철학을 종횡무진하는 지적 산책의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인기연예인들이 유명세를 타고 펴내는 조악한 수필들, 속류 도사들의 얼치기 명상 수필에 넌더리를 내본 사람들은 신변잡기에 불과한 수필을 비중 있게 쳐주지 않는다. 대체로 문학인들도 수필을 잡문(雜文)으로 폄하하기 일쑤다. 그러나 옥석은 구별해야 마땅하다. 좋은 수필은 어떤 굴절이나 기교 없이 날것 그대로의 정신을 핍진하게 그려낸다. 엄격하게 말해 좋고 나쁜 장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좋은 글이 있을 뿐이다.

  전시륜의 가장 큰 미덕은 유머다. 유머는, 삶의 부조리- 아무리 그가 품은 뜻이 성자(聖者)처럼 고상하다 할지라도 삶이란, 또 한 인간이 품을 수밖에 없는 욕망이란, 어쩔 수 없이 속악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깨달음이고 여유다. 삶의 그런 양면성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것이 솔직함과 발랄함이다. 미와 추, 밝음과 어두움, 선과 악, 그 어느 것 하나 배제하지 않고 온전히 드러내는 솔직함이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는 용기 있게 그의 삶과 욕망을 누설한다.(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이 신비의 베일 속에 자신을 두기 위해 발언을 주저하는가. 더구나 산문이란 어떤 예술적 굴절 없이 자기를 드러내는 작업이 아니던가.) 가령 이런 식이다. ‘엄격히 말해서 키스는 정이 통하면 아무 때나 해도 상관없다. 해가 솟으면 신나서 키스를 하고 달이 떠오르면 달 때문에 키스를 하고 기분이 좋으면 신나서 키스를 한다. 키스는 인삼과 같이 만병통치약이다. 키스는 간사한 웅변의 입을 막고 정을 통하게 하는 침묵을 상징한다. 이리하여 나는 대학시절 공부는 하지 않고 데이트에 미쳐 간신히 낙제만을 면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모사꾼인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데이트의 진수는 진실함에 있다. 데이트가 연애로 발전하자면 꾀는 추진력이라기보다는 저지력이 된다. 나는 나의 가슴을 열었다. 일단 여자와 만날 기회가 마련되면, 나는 당신과 같이 착하고 평범한 사람이란 것을 나의 심장, 나의 폐, 나의 밥통, 나의 창자, 나의 콩팥을 벌려서 보여 주었다. 여자들은 나를 인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이쯤 되면 그는 꽤 괜찮은 연애학 강사인 셈이다. 실제로 이 책은 도처에서 그의 눈부신(?) 연애 솜씨를 보여준다.

  유머는 또한 무욕의 표현이다. 생각해보시라. 무엇엔가 집착하는 사람들이 쉽게 웃을 수 있겠는가. 그는 끊임없이 긴장하고 쉼없이 포즈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사무욕(無邪無慾)한 사람들, 이해의 걸림이 없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법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진짜 멋진 삶이란 언제나 삼계탕을 끓여먹을 수 있고, 기분이 좋을 때 여행을 할 수 있고, 자녀를 교육시키고, 주말에 집에서 쉴 수 있고, 똥차를 몰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나는 미국교포 중에서 부자 중의 부자라고 믿는다.’ 그는 어떤 스님처럼 무소유를 권면하지 않는다. <부자아빠>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적당히 가지고 즐기라는 것이 그의 건강한 낙천주의다. ‘삶의 아름다움은 쌀장사를 하다가 망하면 포장마차를 꾸며 술장사를 할 수 있다’ 라는 구절이 그의 낙천주의를 잘 요약해준다. 노자 철학을 즐기며 무위자연을 믿고 풀밭에서 낮잠을 자고 가끔 낚시질을 하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즐거움으로 아는 그다운 발언이다. 그 발언에 무게를 얹어주는 것이 그의 연륜이다. 삶을 똑바로 보고 제 나름대로 품위 있게 살아온 노인의 발언은 안정감과 신뢰감을 준다.

  전시륜의 유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의외성에 있다. 그런 의외성은 일상의 진부함을 걷어버린다. 1957년 그는 『마산일보』에 구혼광고를 낸다. 잡다한 사연을 광고에 적은 뒤 응모자격을 그는 이렇게 기술했다. ‘만 19세 이상, 만 30세 미만의 대한민국 처녀 및 미망인’이라고. 이런 규정에 대한 그의 변이 재밌다. 총각이 결혼 대상으로 미망인을 환영한다는 말이 물의를 일으키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수작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지만 그의 의도는 단순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 6․25 전쟁으로 인해서 하루아침에 많은 여자들이 미망인이 되었다. 그 중에는 착하고 똑똑한 여자들이 많이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들 앞길은 막막했다. 그들이 내 광고를 읽었을 때 인습의 틀과 굴레를 차버리고 용기를 얻어서 나를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구둣방 머슴애처럼 건전한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가치없는 새 고무신보다는 튼튼한 헌 가죽 구두를 택할 용의가 언제든지 있었다.’ 이 책이 젊은이들이 쓴 책에 못지않게 팽팽한 탄력이 있다면 이러한 그의 건전한 본능, 삶의 약동을 숨기지 않는 그의 진솔함에 있다고 하겠다.

  그는 작달막하다. 썩 훌륭한 외모도 아니다. 그러나 178센티미터에 소피아 로렌과 같은, 늘씬한 루마니아 아가씨가 그를 아버지로 모시겠다고 했단다. 대체 그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삶은 권태의 늪이다. 이 절망, 이 권태에서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을까?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허영심이란 미덕을 심어주셨다. 내가 남보다 못난 것이 하나도 없다는 허영심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주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행복감을 준다....스피노자는 겸손은 위선이기 때문에 미덕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좀 더 겸손하고 살짝 더 허영을 키워보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음식 소화를 잘 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도덕적 상식을 살짝 뒤집는 이런 의외성이 그의 매력은 아닐까. 도저히 늙음과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 ‘의외성’이 전시륜에게 있어서는 편안한 옷처럼 잘 어울린다.

  ‘브라는 남성의 알고자 하는 의욕을 성공적으로 방해한다. 그러나 그의 효력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여자는 솜뭉치까지 쑤셔 박으면서 그녀의 보물을 밤낮으로 온 세상에 광고하면서도, 브라를 함으로써 그녀의 신비를 드러내기를 거부한다. 결과적으로 남자들의 호기심은 더 강화되어 브라 안에 숨겨진 실체에 대해서 제멋대로 신화를 조작한다.’와 같은 지적이면서 발랄한 문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철학이란 별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삶을 잘 들여다 보고 제 호흡에 맞는 문체로 이야기하기!

  죽기 전 그의 유언을 들어보자. '염라대왕이 허락해준다면 나는 수요일에 죽고 싶다. 월요일에 죽으면 첫날부터 재수 없다고 투덜댈 테고, 금요일에 죽으면 다가오는 주말을 망치는, 미국 헌법에 어긋나는 엉터리 수작이라고 아우성을 칠까 두렵다....아내에게 부탁드립니다. 재혼을 할 경우 남편과 살은 섞되 은행 장부는 섞지 마십시오....젊었을 땐 성행위가 있어야 소화가 잘 되듯이 노년에도 서로 기대고 의지할 반려자가 필요합니다. 농담을 주고받고 서로 깔깔 껄껄 웃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시오. 내가 코를 골 때마다 당신에게 두통이 온다니까 먼저 코를 고느냐고 살짝 물어 보십시오. 오비드가 쓴 『연애술법(The Art of Love)』이라는 책은 남편을 낚는 온갖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제발 그 책을 한번 읽으십시오. 예를 들면 <장례식은 꼭 우울해야만 된다는 법은 없고, 오히려 이곳을 새 로맨스의 시발점으로 생각하라>고 도사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다음 아이들에게....일생 동안 나는 돈을 살짝 멸시해왔다. 아마도 돈을 버는 재주가 없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돈을 많이 긁어모은다는 것은 악이다....돈은 도둑과 사기꾼을 끌어들이고 자객의 손에 칼자루를 쥐여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은 편리하다. 돈은 세칭 휴대용 행복이라고 한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에 의하면 늙으면 벗님이 셋밖에 없는데 늙은 마누라, 늙은 개, 손에 쥔 현금이라고 했다.' 기발한 유언장이다. 그 속에는 전시륜 문체의 모든 것이 녹아들어 있다.

  그는 그가 죽은 뒤 땅 속에 묻히게 된다면 멘켐(H. L Menkem)의 비문을 자신의 비문으로 써달라고 주문한다. ‘내가 이 속세를 뜬 뒤, 나를 아직도 기억하고, 내 유령을 즐겁게 해 주겠다는 분이 있으면, 죄인을 용서하고 못 생긴 아가씨에게도 윙크를 던져 주십시오.’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장엄한 일몰이 그렇듯, 그것이 학문이든 종교든 철학이든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바쳐온 사람의 삶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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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빵집 이야기
톰 맥마킨 지음, 박여영 옮김 / 예지(Wisdom)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몇 해전 어떤 대기업의 총수가 낸 책에서, 그는 자신이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휴일을 챙기지 못했음을 은연중에 과시하고 있었다. 나의 성공은 이런 피눈물나는 노력의 대가라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일 자체에서 행복을 느낄 수도 있으려니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가족과 나들이 한 번 가보지도 못하면서 얻어진 성공, 신선한 공기 한 번 호흡하지 못하면서 얻어진 성공, 느슨한 마음으로 음악 한 번 듣지도 못하고서 얻어진 성공은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말끔히 해소하고 있는 책이 그레이트 하비스프 브레드 프랜차이즈의 성공전략을 다루고 있는『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빵집 이야기』(예지)이다. 이 책이 가르치는 것은 단순한 성공의 신화가 아니다. 엄격히 말해 이 책은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를 가르친다.

  코넬대를 막 졸업한 피트와 로라 웨이크먼 부부가 200달러를 들여 개업한 빵집 이름이 그레이트 하비스트 브레드다, 이 회사는 통밀가루와 소금 물 이스트, 약간의 당분만 들어가는 단순한 빵을 만드는 가게였다. 진정으로 우리의 몸이 원하는 것은 단순함. 갖은 조미료와 향료를 가미한 빵은 혀를 만족시켜 줄지는 몰라도 몸과 정신을 만족시켜줄 수는 없다. 단순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좋은 빵을 만들고 있다는 자부심, 최고의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로라와 웨이크먼 부부는 바로 그 자부심에서부터 시작했다. 그 자부심이 미국 전역에 140개의 점포를 두고 일년에 육천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프랜차이즈로 성장을 했다.

  그들은 빠른 성장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빚을 얻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빚을 얻으면 빚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격적 경영을 하게 되고 그 결과로 비양심적인 일조차 서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스스로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새겨둘 만한 대목이다. ‘크게 빌려 크게 벌기 위해서’ 무리하게 빚을 얻어 공격적인 경영을 하다 파산 위기에 몰린 우리 기업들의 현주소가 씁쓸하게 음미되는 대목이다. 빚을 얻지 않기 때문에 얻는 이점은 또 있다. 바로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 섞일 필요가 없다는 것. 저자 톰 맥마킨은 말한다. “수입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빠른 성장을 원하게 되면, 은행가와 투자자, 벤처자본가, 투자사나 증권사와 얽히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마음에도 없는 외교적 발언하랴, 명절날 인사치레 하랴, 접대하랴, 이래저래 피곤한 일들을 피할 수 있으니 확실히 자신의 자본으로 사업을 한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다. 물론 성장에 대한 과도한 욕망을 접어둘 수만 있다면 말이다.

  삶이 사업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사업이 삶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것이 그레이트 하비스트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이 책은 말한다. “우리의 사업과 일이 삶과 멀리 떨어진 것이어서는 안 된다. 사업과 일은 우리를 지금 당장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어느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일이 우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삶을 희생적 도구로 삼을 수 있는 어떤 고상한 목적이나 사업도 있을 수 없다는 그레이트 하비스트의 현세주의가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그레이트 하비스트는 프랜차이즈라지만 지정된 곳에서 재료를 구매하고 회사 로고를 다는 것 빼고는 점주 마음대로다. 미국 전역에 140개의 지점이 있지만 똑같은 곳은 없다. ‘우리는 모든 곳이 월마트화되는 문화에 지쳤다. 한 개인의 창조적인 비전이 존재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진짜 가게를 바라는 것이다.’ 라는 저자의 말처럼, 점주의 개성이 지점을 만든다. 점주를 고르는 기준도 특이하다. 돈을 벌기보다 시간을 얻기 위해 일하는 사람, 자신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을 선택한다. 점주가 될 사람은 ‘자기 개성과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편안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니, 이런 빵을 만들어 보겠다고 돈만 가지고 대들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먼저 인생을 즐기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니 사업 파트너의 선택 기준치고는 매우 이례적이고 신선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레이트 하비스트사, 월급은 후하지만 개인 인센티브제도는 거부한다. 돈만 보고 일하는 종업원들은 일 자체에서 만족을 얻고자 하는 종업원들보다 처진다는 것이 이유다. 일을 사랑해야지, 일로써 어떤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개인 보상 제도는 불필요한 경쟁을 야기한다는 것도 이 회사가 인센티브 제도를 거부하는 한 이유. 회사는 일터이지 싸움터는 아니라는 말.

  그레이트 하비스트의 매력은 단순함에 있다. 정말 되고 싶은 존재로 나 자신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순함이다. 여기에 묶이고 저기에 묶이고, 이래저래 꼬이다가는 초심을 잃기 십상이다. 창업자 로라와 피트 웨이크먼은 TV도 없다. 신문도 보지 않는다.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은 등산뿐이란다. 그들은 등산용구를 사는 것말고는 돈을 쓰지 않는단다. 그들은 황무지를 여행하기 좋아하고 모험을 사랑한단다. 저자는 이 회사가 지향하는 단순함을 이렇게 요약한다. “단순함과 자기 신뢰, 그리고 모험에 대한 사랑은 마치 사시사철에 피는 꽃처럼 회사 이곳저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 방식이 단순하든 아니든간에, 이 정신은 본사 사무실의 기능적인 외양이나, 일체의 허세가 없는 고용인에 대한 태도, 자연식품 선호자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사냥꾼이기도 한 직원 대부분의 생활방식에서 엿볼 수 있‘다라고.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를 궁리하는 경영자 A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경영자 B가 있다고 한다면 십중팔구 게임은 A의 승리로 돌아가기 십상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빵집 이야기』는 꼭 그런 공식이 맞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준다.

  이 회사의 사보에 썼다는 창업자 웨이크먼의 발언은 음미할 만하다.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깨달음이 있다.

  '나는 우리 회사가 야생귀리보다는 알팔파와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알팔파는 다년생 식물입니다. 야생귀리는 1년생 식물이고요. 둘 다 매우 잘 자라며, 토양에 잘 적응합니다. 적절한 환경에서 키운다면 어느 쪽이 어느 쪽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지요. 야생귀리는 빨리 퍼지고, 무서운 속도로 자라며, 많은 씨를 남기고 죽습니다. 뿌리를 보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알팔파보다 성장속도도 빠릅니다. 기회를 잘 만나면 성장을 멈출 줄 모르는 식물이죠. 많은 회사들이 이처럼 차입금을 이용하여 빠른 길을 택하고, 급성장합니다. 이런 방식의 성공은 입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나는 알팔파를 더 좋아합니다. 알팔파는 시간이 걸리지만, 끊임없이 뿌리를 보존해나가면서 내년을 기약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식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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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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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육체를 바라보는 욕망의 무거움

 
1. 모든 소멸은 슬프다
 
압도당했다는 표현이 옳다. 찌부룽한 월요일 아침이 확 깨어났다. 내 어줍잖은 자의식이 철퇴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카프카의 말이 떠올랐다.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 

 
김훈의 소설 <화장>은 차라리 도끼였다. 그 도끼에 나의 내면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전전긍긍했다. 하나의 텍스트가 나의 혈관 속으로 흘러 들어와 작렬하는 느낌, 감수성의 가장 예민한 곳으로 파고 들어와 찌르고 문질러대는 느낌. 김훈의 소설은 하나의 비수요 뇌관이었다.

 
소멸이란 우주적 질서로의 복귀라는 스토아 학파의 논설이 부동(不動)의 평상심까지 길러줄 수 있을까. 달관이니 초연이니 해도 죽음은, 소멸은 어떻든 슬프다. 탄력을 잃어가는 몸을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이다. 무상(無常)이라 했다. 항상성(恒常性)은 불가능한 꿈이다. 항상 있는 것은 결국 없다. 있다가도 없는 것이 권력이요, 돈이요, 청춘이요, 몸이다. 몸이 있을 때만 세상이라 했던가. 그러나 그 몸뚱이도 제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부풀고 팽창하고 지랄염병을 떨다가는 조금 쿨해질만 하면 시들시들 낡아간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없는 것은 그의 하초 때문이라고 말했던 이는 니체였던가.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삐거덕 와당탕 제멋대로다.
 

2. 두 개의 육체
 
김훈의 소설, <화장>에는 두 개의 육체가 등장한다. 하나는 시들어 가는 육체요, 하나는 피어나는 육체다. 시들어 가는 육체는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피어나는 육체는 연정을 불러일으킨다. 신파는 대체로 후자를 선호하고, 도덕주의자는 전자를 선호한다. 김훈은 그 두 개의 육체를 교차시킨다. 그 교차지점에서 삶은 부풀어오르고 신음하고 오열한다. 열락과 고통의 아수라장이다.

 
연민은 삶을 조망할 수 있는 정신의 영역이고, 연정은 욕망에 전전긍긍하는 몸의 영역이다. 욕망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연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연민에는 거리가 필요하다.  성찰과 반성이 요구된다. 시들어 가는 육체를 가녀린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화장>은 성숙한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탐스런 육체를 바라보는 늙지 않는 욕망, 그 불꽃의 에네르기가 행간 속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2년 동안 뇌종양을 앓고 있는 아내의 몸은 똥내, 지린내… 악취의 창고다. 아내의 몸은 해부학 교실에 걸린 뼈처럼 앙상하다. 2년 동안에 세 번의 수술을 받은 아내의 몸은 만신창이다. 두통이 나면 위액까지 토하고 실신을 하고, 실신을 하면 항문의 괄약근이 열려서 똥이 흘러나온다. 간병인은 아내의 기저귀를 갈아 채울 때마다 향을 피우고 마스크를 쓴다. 아내를 돌보는 사이에 그는 그가 맡은 음식의 냄새가 과연 음식의 본래 냄새인가를 의심하게 된다. 몸 속에 종양이 존재하듯이 음식 속에 원래부터 구린내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그는 생각한다. 어쨌든 병든 아내의 몸에도 한때는 젊음의 싱그러움이 깃들어 있었을 것이다. 한때는 그 몸에도 놀라운 탄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늘어진 피부에는 거뭇거뭇한 검버섯이 피어있고, 성기는 과연 그것이 생명을 수태하고 밀어냈던 생명의 문(門)이기나 했었던 것인지, 이제는 볼품없이 축 늘어져 있다. 몸이랄 것도 없는 몸, 악취의 창고인 몸을 남편인 '나'는 씻긴다. 처연하다.
 

저는 샤워 물줄기로 바닥에 떨어진 똥물을 흘려보내고 다시 아내를 의자에 앉혔습니다. 아내의 항문과 똥물이 흘러내린 허벅지 안쪽을 다시 씻겼습니다. 환풍기를 켜서 욕실 안의 냄새를 뽑아 냈습니다.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아 침대에 뉘었습니다. 아내는 자꾸만 울었습니다. 아내의 울음소리는 가늘고 희미했습니다.
 

작가는 몸의 너저분함을 표현하는 데에 일체의 미학적 군더더기를 갖다 붙이지 않는다. 그는 똑바로 악취 나는 몸을 응시한다. 우회하지 않는 시선, 똑바로 너저분한 몸뚱이를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은 몸에 대한 연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미화하거나 에둘러 말하지 않고, 더러움을 더러움 그 자체로 수용하겠다는 의지, 나는 너를 너로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 우리가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것들이 아니겠는지. 그것이 추(醜)이든 미(美)이든 사랑은 대상을 똑바로 바라본다.
 

또 하나의 몸뚱이가 있다. 추은주(秋殷周), 그녀에겐 풋풋한 사과향이 풍긴다. 추은주, 5년 전에 그의 회사에 입사한 젊은 여자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보는 순간 잃어버린 고대국가를 생각한다. 잃어버린 국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상실의 다른 이름이다. 무상(無常)의 다른 이름이요, 영속하는 것은 없다는 허무의 다른 이름이다. 그녀는 입사한 지 5년 동안에 시집을 갔고 아이를 낳았다. 그는 그 5년 동안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숨긴다. 단지 그녀를 지켜볼 뿐이다. 하염없는 욕망의 시선으로 그녀를 지켜보는 탐욕스럽지만 안쓰러운 눈이 바로 '그'다.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秋殷周,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지요.
 제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 속으로 사라지고 저의 부름이 당신의 이름에 닿지 못해서 당신은 마침내 3인칭이었고, 저는 부름과 이름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건너갈 수 없었는데, 저의 부름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몸은 햇빛처럼 완연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몸으로 당신을 떠올릴 때 저의 마음속을 흘러가는 이 경어체의 말들은 말이 아니라, 말로 환생하기를 갈구하는 기갈이나 허기일 것입니다. 아니면 눈보라나 저녁놀처럼,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말의 환영일 테지요.

 
그는 끊임없이 추은주를 부른다. 그러나 사랑은 본질적으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의 비밀에 헌신한다. 아무리 그가 추은주의 이름을 불러도 그 이름은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껍데기다. 그러나 부재의 공간에 그녀를 불러낼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다. 끊임없이 이름을 부를 수밖에. 
 
 추은주의 아름다움을 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문체는 조바심을 낸다. 그러나 어떤 장황한 헌사(獻辭)가 그 아름다움에 닿을 수 있을까. 언어는 실체에 닿지 못하는 하염없는 불길이 아니던가. 제 풀에 꺾여 언젠가는 스러지고 마는.

 
당신의 가슴의 융기가 시작되려는 그곳에서 당신의 빗장뼈는 당신의 가슴뼈에서 당신의 어깨뼈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빗장뼈 위로 드러난 당신의 푸른 정맥은 희미했고, 그리고 선명했습니다. 내 자리 칸막이 너머로 당신의 빗장뼈를 바라보면서 저는 저의 손으로 저의 빗장뼈를 더듬었지요. 그때, 당신의 몸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몸 속의 깊은 오지까지도 저의 눈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여자인 당신, 당신의 깊은 몸 속의 나라. 그 나라의 새벽 무렵에 당신의 체액에 젖는 노을빛 살들, 그 살들이 빚어내는 풋것의 시간들을 저는 생각했고, 그 나라의 경계 안으로 제 생각의 끄트머리를 들이밀 수 없었습니다.

 
추은주의 몸에 손을 뻗고 싶지만 그에겐 병든 아내가 있다. 도덕주의자는 말할 것이다. 아내의 병든 몸의 대체물로서 젊은 여자의 몸뚱아리라는 말인가. 현실은 냉정하다. 그의 욕망이 발설되는 순간 그를 비도덕주의자로 단죄할 것이 분명하다. 사랑과 욕망은 본질적으로 비사회적인 것이 아닌가. 그것은 자신만의 내밀한 동굴을 필요로 한다. 광장은 그에게 적이다. 그는 그 적이 두렵다. 그는 잘 나가는 화장품 회사의 중역이 아닌가. 그는 광장의 사람이다. 그러나 광장의 사람일수록 억눌러온 내면의 욕망은 큰 법이다. 『은밀한 생』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사랑의 비사회성을 이렇게 묘파한 적이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 연인들, 부부들이란 동일한 인간들을 지칭하지 않는다. 사랑은 성욕과도 결혼과도 대립된다. 사랑은 도둑질에 속하지 사회적 교환에 속하지 않는다.….태고의 어둠 이래로 사랑에 빠진 자는 오래 전부터 그의 가족, 친척들, 그리고 집단이 그에게 마련해준 교환에서 빠져나온 여자 혹은 남자를 가리킨다.
 
그의 내면은 격렬하게 추은주를 부른다. 그러나 그의 입은 열리지 않는다. 그는 홀로 비밀을 간직한다. 그는 여전히 누군가를 의식해야만 하는 광장의 사람이다. 그녀를 갖고 싶다는 그의 욕망은 화장(化粧)을 필요로 한다. 김훈의 문체가 장황해지고 아득해지고 처연해지는 곳도 이 대목이다. 이성의 감시, 도덕의 간섭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문체는 자꾸 아름다워진다. 젊은 여자의 몸을 이렇듯 미학적으로 포장한 소설이 몇이나 있을까. 김훈은 '문체로 꼬리친다'(문체로 남을 수 있는 작가는 행복하다)
 

3. 가벼움과 무거움

 
주인공의 몸은 무겁다. 욕망 때문이기도 하고, 전립선염으로 가득 차오르는 오줌 때문이기도 하다. 욕망이나 오줌이나 주기적으로 물꼬를 터주어야 하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된다. 사연이 그러니 몸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오줌은 아쉬운 대로 해소 방식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욕망은 다르다. 타인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병든 아내와 가질 수 없는 그녀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이 상무로 있는 회사의 화장품 광고 카피의 컨셉 중의 하나를 골라야 할 때 그가 고른 것은 '여성의 내면여행'이라는 무거움이 아니라 '여름에 여자는 가벼워진다'라는 가벼움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더 이상 무거움을 감당할 수 없는, 무거워질대로 무거워진 몸이 아닌가.
 

병으로 30킬로그램으로 체중이 빠진 아내의 몸은 가볍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무겁다. 남편을 자식을 두고 눈을 감아야하는 그녀의 마음이 어찌 가볍겠는가. 병든 아내를 바라보아야 하고, 젊은 여자의 몸을 욕망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그는 몸도 마음도 모두 무겁다. 이 소설이 묵직하게 읽히는 것은 이런 무거움 때문이다. 가벼운 서사들이 범람하는 곳에 김훈의 이런 무거운 서사는 미덕으로 읽힌다. 그러나 그 무거움을 중화시키는 것이 추은주의 육체다. 그녀의 '깊은 오지'까지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 그녀의 혈관을 타고 그녀의 몸 속 깊은 곳까지 흘러가고 싶은 그의 욕망, 끝없이 속삭이고, 끝없이 침투하고, 자신의 전존재를 투여하고 싶은 욕망, 그녀를 온통 제 안으로 빨아들이고 싶은 욕망, 그는 그 욕망의 주체할 수 없는 주체다.

 
어쩌다가 회사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당신과 마주칠 때, 당신의 몸에서는 젊은 어머니의 젖 냄새가 풍겼습니다. 엷고도 비린 냄새였습니다. 가까운 냄새인지 먼 냄새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냄새였지요. 확실하고도 모호한 냄새였습니다. 당신의 몸 냄새는 저의 몸 속으로 흘러 들어왔고, 저는 어쩔 수 없이 당신의 몸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볶음밥을 먹으며 야근하는 저녁에 저는 저의 자리에 앉아서, 당신의 모든 의식과 기억을 풀어 헤쳐서 다만 숨쉬게 하는 당신의 잠든 몸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잠들 때, 당신의 날숨이 당신의 가슴에서 잠든 아기의 들숨 속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고, 아침이 오도록 당신의 방에서 익어가는 당신의 몸 냄새를 생각했습니다. 여자인 당신의 모든 생물학적 조건들 속에 깃드는 잠과 당신이 잠드는 동안 당신의 몸 속에서 작동하고 있을 허파와 심장과 장기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몸 속 실핏줄 속을 흐르는 피의 온도와 당신의 체액에 젖는 살들의 질감을 생각했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당신의 살들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풍문과도 같았습니다.
 

한 사람의 냄새를 맡고 싶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송두리째 빨아들이겠다는 욕망의 표현이 아닌가. 그를 내 안으로 남김없이 불러들이겠다는 욕망. 에로스는 본질적으로 소유의 욕망이 아닌가. 너를 남김없이 내 안에 두고 싶다는 죽임의 충동, 나를 너 안에 모두 디밀어버리고 싶다는 죽음의 충동, 새디즘과 매조히즘은 동전의 양면처럼 먼 곳에 있지 않다.
 

4. 은밀한 생
 
다시 키냐르의 표현이다.
 
사랑이란 정확히 이런 것이다. 은밀한 생, 분리된 성스러운 삶,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 그것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인 이유는, 그러한 삶이 가족보다 먼저, 사회보다 먼저, 빛보다 먼저, 언어보다 먼저, 삶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어둠 속, 목소리도 없는, 출생조차도 알지 못하는, 태생(胎生)의 삶
 
그렇다. 사랑은 분리와 격리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애써 이해받기를 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정형의 에너지다. 그것이 우리의 몸을 출렁이게 하고 열락에 들뜨게 한다. 그러나 과연 분리와 격리가 가능한 일인가. 우리는 여전히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유한적 존재요, 식솔들에 묶인 사회적 존재다. 소설의 주인공 또한 묶인 존재다. 아내가 병들지만 않았어도 문제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병든 아내를 버려선 안 된다는 이성의 계율, 그는 그 계율 앞에 무릎을 꿇는다. 혹자는 이런 패배를 소시민성의 발로라고 설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치기 어린 낭만주의 문학이 낭만주의적 패배를 하이톤으로 보여주었던가. 얼마나 많은 신파가 눈물과 콧물의 우여곡절을 연출했던가. 김훈의 소설은 절대로 신파나 낭만주의로 퇴행하지 않는다. 아파도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여간해선 신음소리를 내지르지 않는 것이 김훈 소설의 남성성이다. 그는 확실히 힘에 집착한다. 그는 어금니를 사려물고 지긋이 침묵한다. 그 힘과 침묵의 실체가 김훈 소설의 미학은 아닐까. 슬쩍 곁을 주다가도 돌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부동의 현실감각. 바로 그런 현실감각은 한국문학에서는 대단히 희귀한 예에 속한다.
 
김훈은 <화장>으로 2004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6명의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화장>을 추천했다. 다음은 심사위원인 소설가 서영은의 평이다.
 
김훈의 <화장>은 지금까지 써진 한국소설을 통틀어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비장하고 잔혹한 소설이다. 그 잔혹함은 작가의 덕목인 산문 정신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기에, 신기루와 아비규환을 하나의 얼굴로 가진 삶이란 저 오묘한 수수께끼를 이토록 여지없이, 명징하게 파헤칠 수 있었을 것이다. 육체로 사는 모든 산 것들이 무로 환원되는 대역정, 그 시작과 끝, 겉과 속, 앞과 뒤를 사회학적으로 생태학적으로, 메처럼 날카로운 금속성 문체로 저미고 파헤쳐서, 한 점 연기로 시화할 때까지 몰아가는 이 소설은, 차라리 존재의 근원을 고찰한 보고서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이 소설은 허허로운 삶을 수시로 돌아보며 옷깃을 여밀 수 있도록 무릎 가까이 두어야 할 것 같다.
 
그렇다. 모든 것은 한 번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몸을 가진 자들은 끊임없는 윤회를 거듭한다지만 지금 여기, 이곳에서의 우리의 몸은 단 한번뿐이다. 아름다움도 사랑도 한 번뿐이다. 김훈의 <화장>을 옆에 둔다는 것은 그 허망함을 확인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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