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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전시륜 지음 / 명상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유쾌하고 발랄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묵직함
여간해선 독서를 멈출 수 없는 책들이 있기 마련이다. 전시륜의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명상)도 그런 책 중의 하나. 이런 책들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니 베스트셀러 목록의 신뢰도에 고개가 갸웃해진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재능은 반드시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라 했지만 좋은 것이 반드시 널리 알려지는 것은 아닌 듯싶다.
한 도서평론가는 한동안 전시륜 홍보원을 자처하고 다녔다고 한다. 좋은 것을 널리 알려 공유하고 싶은 욕망은 얼마든지 권장할 만하다. 더구나 그 홍보의 대상이 전시륜임에랴.(이 글도 그런 홍보 차원을 벗어나지 못함을 고백하자.) 전시륜, 그 이름만 떠올려도 금세 유쾌해진다. 독서가 값진 일이라면 바로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런 만남을 통해 예견치 못했던 세계가 나를 향해 흘러 들어오는 것이리라. ‘내’ 중심을 흔들어 ‘나’를 내 밖으로 확산시키는 이런 탈아(脫我)의 체험은 때론 당혹스럽고 때론 즐겁다. 독서는 그런 당혹과 즐거움을 만나는 일이다.
1932년에 충청도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공대 재학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철학을 공부했으며, 대학원에서는 물리학을 전공한 전시륜, 그는 대학 졸업 후에도 미국에 거주하며 여러 직장에서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그에게 평범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면 평생 모국어로 된 한 권의 수필집을 세상에 남기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었다는 것. 1998년 그는 이 책을 탈고하고, 출판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6살 때였다.
그는 무게를 잡지 않는다. 위악적인 포즈도 없고, 낭만주의자의 치기나 인문주의자의 엄숙함도 없다. 그렇다고 억지로 재기발랄함을 연출하지도 않는다. 그는 천진난만하고 솔직하며 거침이 없다. 그에겐 촌철살인의 유머가 번득이기도 한다. 그만큼 그의 영혼이 자유롭다는 증거다. 이 책은 무게를 잡지 않아도 이렇게 쓰면 글이 되는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을 준다. 풍성한 인문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생물학, 인류학, 신학, 여성론, 문학, 철학을 종횡무진하는 지적 산책의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인기연예인들이 유명세를 타고 펴내는 조악한 수필들, 속류 도사들의 얼치기 명상 수필에 넌더리를 내본 사람들은 신변잡기에 불과한 수필을 비중 있게 쳐주지 않는다. 대체로 문학인들도 수필을 잡문(雜文)으로 폄하하기 일쑤다. 그러나 옥석은 구별해야 마땅하다. 좋은 수필은 어떤 굴절이나 기교 없이 날것 그대로의 정신을 핍진하게 그려낸다. 엄격하게 말해 좋고 나쁜 장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좋은 글이 있을 뿐이다.
전시륜의 가장 큰 미덕은 유머다. 유머는, 삶의 부조리- 아무리 그가 품은 뜻이 성자(聖者)처럼 고상하다 할지라도 삶이란, 또 한 인간이 품을 수밖에 없는 욕망이란, 어쩔 수 없이 속악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깨달음이고 여유다. 삶의 그런 양면성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것이 솔직함과 발랄함이다. 미와 추, 밝음과 어두움, 선과 악, 그 어느 것 하나 배제하지 않고 온전히 드러내는 솔직함이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는 용기 있게 그의 삶과 욕망을 누설한다.(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이 신비의 베일 속에 자신을 두기 위해 발언을 주저하는가. 더구나 산문이란 어떤 예술적 굴절 없이 자기를 드러내는 작업이 아니던가.) 가령 이런 식이다. ‘엄격히 말해서 키스는 정이 통하면 아무 때나 해도 상관없다. 해가 솟으면 신나서 키스를 하고 달이 떠오르면 달 때문에 키스를 하고 기분이 좋으면 신나서 키스를 한다. 키스는 인삼과 같이 만병통치약이다. 키스는 간사한 웅변의 입을 막고 정을 통하게 하는 침묵을 상징한다. 이리하여 나는 대학시절 공부는 하지 않고 데이트에 미쳐 간신히 낙제만을 면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모사꾼인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데이트의 진수는 진실함에 있다. 데이트가 연애로 발전하자면 꾀는 추진력이라기보다는 저지력이 된다. 나는 나의 가슴을 열었다. 일단 여자와 만날 기회가 마련되면, 나는 당신과 같이 착하고 평범한 사람이란 것을 나의 심장, 나의 폐, 나의 밥통, 나의 창자, 나의 콩팥을 벌려서 보여 주었다. 여자들은 나를 인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이쯤 되면 그는 꽤 괜찮은 연애학 강사인 셈이다. 실제로 이 책은 도처에서 그의 눈부신(?) 연애 솜씨를 보여준다.
유머는 또한 무욕의 표현이다. 생각해보시라. 무엇엔가 집착하는 사람들이 쉽게 웃을 수 있겠는가. 그는 끊임없이 긴장하고 쉼없이 포즈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사무욕(無邪無慾)한 사람들, 이해의 걸림이 없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법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진짜 멋진 삶이란 언제나 삼계탕을 끓여먹을 수 있고, 기분이 좋을 때 여행을 할 수 있고, 자녀를 교육시키고, 주말에 집에서 쉴 수 있고, 똥차를 몰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나는 미국교포 중에서 부자 중의 부자라고 믿는다.’ 그는 어떤 스님처럼 무소유를 권면하지 않는다. <부자아빠>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적당히 가지고 즐기라는 것이 그의 건강한 낙천주의다. ‘삶의 아름다움은 쌀장사를 하다가 망하면 포장마차를 꾸며 술장사를 할 수 있다’ 라는 구절이 그의 낙천주의를 잘 요약해준다. 노자 철학을 즐기며 무위자연을 믿고 풀밭에서 낮잠을 자고 가끔 낚시질을 하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즐거움으로 아는 그다운 발언이다. 그 발언에 무게를 얹어주는 것이 그의 연륜이다. 삶을 똑바로 보고 제 나름대로 품위 있게 살아온 노인의 발언은 안정감과 신뢰감을 준다.
전시륜의 유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의외성에 있다. 그런 의외성은 일상의 진부함을 걷어버린다. 1957년 그는 『마산일보』에 구혼광고를 낸다. 잡다한 사연을 광고에 적은 뒤 응모자격을 그는 이렇게 기술했다. ‘만 19세 이상, 만 30세 미만의 대한민국 처녀 및 미망인’이라고. 이런 규정에 대한 그의 변이 재밌다. 총각이 결혼 대상으로 미망인을 환영한다는 말이 물의를 일으키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수작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지만 그의 의도는 단순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 6․25 전쟁으로 인해서 하루아침에 많은 여자들이 미망인이 되었다. 그 중에는 착하고 똑똑한 여자들이 많이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들 앞길은 막막했다. 그들이 내 광고를 읽었을 때 인습의 틀과 굴레를 차버리고 용기를 얻어서 나를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구둣방 머슴애처럼 건전한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가치없는 새 고무신보다는 튼튼한 헌 가죽 구두를 택할 용의가 언제든지 있었다.’ 이 책이 젊은이들이 쓴 책에 못지않게 팽팽한 탄력이 있다면 이러한 그의 건전한 본능, 삶의 약동을 숨기지 않는 그의 진솔함에 있다고 하겠다.
그는 작달막하다. 썩 훌륭한 외모도 아니다. 그러나 178센티미터에 소피아 로렌과 같은, 늘씬한 루마니아 아가씨가 그를 아버지로 모시겠다고 했단다. 대체 그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삶은 권태의 늪이다. 이 절망, 이 권태에서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을까?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허영심이란 미덕을 심어주셨다. 내가 남보다 못난 것이 하나도 없다는 허영심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주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행복감을 준다....스피노자는 겸손은 위선이기 때문에 미덕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좀 더 겸손하고 살짝 더 허영을 키워보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음식 소화를 잘 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도덕적 상식을 살짝 뒤집는 이런 의외성이 그의 매력은 아닐까. 도저히 늙음과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 ‘의외성’이 전시륜에게 있어서는 편안한 옷처럼 잘 어울린다.
‘브라는 남성의 알고자 하는 의욕을 성공적으로 방해한다. 그러나 그의 효력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여자는 솜뭉치까지 쑤셔 박으면서 그녀의 보물을 밤낮으로 온 세상에 광고하면서도, 브라를 함으로써 그녀의 신비를 드러내기를 거부한다. 결과적으로 남자들의 호기심은 더 강화되어 브라 안에 숨겨진 실체에 대해서 제멋대로 신화를 조작한다.’와 같은 지적이면서 발랄한 문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철학이란 별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삶을 잘 들여다 보고 제 호흡에 맞는 문체로 이야기하기!
죽기 전 그의 유언을 들어보자. '염라대왕이 허락해준다면 나는 수요일에 죽고 싶다. 월요일에 죽으면 첫날부터 재수 없다고 투덜댈 테고, 금요일에 죽으면 다가오는 주말을 망치는, 미국 헌법에 어긋나는 엉터리 수작이라고 아우성을 칠까 두렵다....아내에게 부탁드립니다. 재혼을 할 경우 남편과 살은 섞되 은행 장부는 섞지 마십시오....젊었을 땐 성행위가 있어야 소화가 잘 되듯이 노년에도 서로 기대고 의지할 반려자가 필요합니다. 농담을 주고받고 서로 깔깔 껄껄 웃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시오. 내가 코를 골 때마다 당신에게 두통이 온다니까 먼저 코를 고느냐고 살짝 물어 보십시오. 오비드가 쓴 『연애술법(The Art of Love)』이라는 책은 남편을 낚는 온갖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제발 그 책을 한번 읽으십시오. 예를 들면 <장례식은 꼭 우울해야만 된다는 법은 없고, 오히려 이곳을 새 로맨스의 시발점으로 생각하라>고 도사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다음 아이들에게....일생 동안 나는 돈을 살짝 멸시해왔다. 아마도 돈을 버는 재주가 없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돈을 많이 긁어모은다는 것은 악이다....돈은 도둑과 사기꾼을 끌어들이고 자객의 손에 칼자루를 쥐여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은 편리하다. 돈은 세칭 휴대용 행복이라고 한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에 의하면 늙으면 벗님이 셋밖에 없는데 늙은 마누라, 늙은 개, 손에 쥔 현금이라고 했다.' 기발한 유언장이다. 그 속에는 전시륜 문체의 모든 것이 녹아들어 있다.
그는 그가 죽은 뒤 땅 속에 묻히게 된다면 멘켐(H. L Menkem)의 비문을 자신의 비문으로 써달라고 주문한다. ‘내가 이 속세를 뜬 뒤, 나를 아직도 기억하고, 내 유령을 즐겁게 해 주겠다는 분이 있으면, 죄인을 용서하고 못 생긴 아가씨에게도 윙크를 던져 주십시오.’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장엄한 일몰이 그렇듯, 그것이 학문이든 종교든 철학이든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바쳐온 사람의 삶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