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
알랭 드 보통 지음 / 한뜻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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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제목부터가 다소 선정적이고 천박하다. 드러내놓고 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오, 선전하는 것도 같고 약간은 도발적인 제목으로 행인의 눈길을 끄는 것 같아 애초엔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소설의 원제가 밋밋하기 그지없는 『The Romantic Movement』임을 감안한다면 제목의 선정성은 작가의 탓이 아니라 상업적 계산에 밝을 수밖에 없는 출판사의 장삿속 탓이다.

 원제를 보고 제목에 대한 반감이 누그러뜨려지긴 했다. 게다가 신림동 스피노자 안경점 주인 고일희씨가 그 소설 그런 대로 깜찍해요, 하는 말에 얇은 내 귀가 그만 솔깃했던 모양이다. 아닌 게 아니라 별 셋쯤은 줄만 했다. 달리 말하면 그리 나쁜 소설은 아니라는 거다. 읽어서 시간 낭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런 대로 성공한 독서인 셈이 아닌가. 사실 별 하나 주기에도 아까운 소설에 기껏 시간을 빼앗기고 내 무딘 선구안(選球眼)을 탓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알랭 드 보통이라는 이 젊고 명민한 작가는 비트겐쉬타인, 프로이트 등 여러 이론가들의 논리와 현학적인 텍스트들을 동원하여 사랑에 빠진 한 여자의 심리를 상당한 수준으로 분석하고 있지만 그런 분석이 서걱이지 않고 그런 대로 소설에 잘 녹아들어 있다. 이 책을 독파한 후에 소설책 한 권과 에세이집을 동시에 읽은 느낌이 드는 것도 아마도 그런 때문.

 소설은 서사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소설에 관한 내 지론이었다면 지론이었는데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은 그런 평소의 내 소설관을 기분좋게 유린한다. 일단 길게 숨을 쉬고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워홀은 보잘것 없는 통조림 깡통을 소재로, 프라톤의 견해처럼 예술이 현실의 사물을 단지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와일드의 말처럼 그 사물의 가치를 확대시킨다는 기적을 실행에 옮겼다. 캠벨 회사의 통조림은 분명 사람을 우울하게 하는 구석이 있지만, 그 깡통을 다른 사람과 함께 본다면, 누군가가 주의를 기울여 가치 있는 사물로 변형시켰다면, 그래서 그 사물이 예술적인 고매함을 얻어 박물관의 벽에 걸린다면, 우리가 느끼는 우울함은 얼마나 가벼워질 것인가? 오랫동안 재현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왔고 '일상적 사물'이라는 경멸적인 범주로 취급받아 왔던 그 모든 것들, 이를테면 깡통이나 햄버거, 헤어드라이기나 립스틱, 샤워꼭지나 전등의 스위치 따위들이, 이제는 예술가의 손에 다루어진다는 이유로 진지한 비평가들의 눈길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그들은 먹고 있던 감자 스프 너머로, 이전에는 무의미하게 지나쳤던 온갖 사물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마돈나와 비너스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태와 더불어 미학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결정 때문이었다.

 일상적인 것들이 미학의 주목을 받음으로써 사물의 형태와 색, 소리와 반향 등을 타성적으로 무시하려던 경향이 사라지고 다음과 같은 공식이 보편화되었다. <여기, 이 속에도 특별한 것이 살아 숨쉬고 있음> 시릴 코널 리가 정의한 대로, 단지 한 번만 생각해 볼 어떤 것이 저널리즘이고 재차 눈길을 끄는 것이 문학이라면 캠벨 회사의 깡통은 워홀의 손끝에서 문학적인 지위를 획득하기 전까지는 '단지 소량의 액체를 담기 위해 제작된 일회용 물품으로서 저널리스틱한 것이었다. 당신이 오랫동안 모르고 지냈던 콧등이나 손등의 주근깨를 보고 연인이 감탄하는 일과 워홀이 물감으로 해낸 일에는 유사점이 있지 않은가?

<중략> 그렇게 자질구레한 것들에 경탄하는 것은 통조림 깡통이 벽에 걸리는 일만큼이나 우스운 일이지만, 아무리 사소한 것도 더 넓고 더 중요한 전체, 즉 사랑하는 사람 그 자체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어떤 세부적인 특징이 보다 큰 전체의 일부로 비쳐질 때, 그것은 단순히 사소한 것 이상의 지위를 얻게 된다.



 팝아티스트 앤디워홀의 캠벨 스프 깡통을 빌어 사랑에 빠진 한 여자의 감정을 분석하는 작가의 필치는 경쾌하지만 자칫 <이런 것도 소설이야>하는 비난을 살 만하다. 그러나 장르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소설이 꼭 소설이어야 한다는 법 있나>하는 심사로 읽어 내려간다면 거기서 느끼는 재미도 쏠쏠할 듯. 다음은 역자 후기의 한 토막. <특유의 현학적인 분석, 지적 유희, 사소한 것들에 대한 영민한 눈길, 거대함과 진지함의 무게를 더는 재치는 역시 이 소설에도 가득하다.>
 이런 구절도 곱씹을 만하다.


 어떤 학문 분야에서는 투명성에 반대하고 그에 상응하여 난해한 텍스트를 존중하는 편향이 오랫동안 존재하고 있다. 칸트나 헤겔, 후설이나 하이데거의 밀도 높은 글에 전념하는 학자들은 그속에 담겨 있다고 그들이 말하는 빛나는 사상들에 사로잡힐 뿐 아니라, 서툰 독자들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꼬이고 왜곡된 언어의 미로 속에서 이 사상들을 발견하는 순수한 어려움에 이끌리기도 한다.

 <중략> 독자를 고생시키는 저작은 명확하고 투명하게 읽히는 책보다 더 심오하고도 유효하며 더 진실하다고 간주되는 경우가 있다. 예민한 사람이 하이데거나 후설에 빠져 있다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책은 얼마나 심오한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분명 저자가 나보다 똑똑하기 때문이지.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은 이해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야. 그 책을 한쪽으로 집어던지고 참을 수 없는 헛소리로 가득한 책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경우는 아무래도 찾아보기 어렵다.

 <중략> 이것을 인간관계에 적용시킨다면, 까다로운 연인이 솔직 명료하고 예측가능하며 제시간에 전화를 걸어주는 연인보다 어떻게든 더 가치 있다는 개념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종교적 낭만적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런 유형의 손쉬운 사랑은 비난이나 회피의 대상에 불과하다. 그들은, 훌륭한 문체로 빛나는 산문이 교육받은 20세 청년에게 이해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속에 담긴 사상을 조롱하고 마는 학자들처럼 행동한다.



 상당히 솔직한 분석이다. 난 이런 대목을 읽으면서 모리스 블량쇼에 대한 내 무능한 독해 실력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모리스 블량쇼는 언제나 내 이해 수준을 웃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블랑쇼 블랑쇼 할 때, 저들이 진정으로 블랑쇼를 이해하고 하는 말일까 의아했다.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은 나를 조금 안도하게 했다. 아마도 그들도 블랑쇼를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이 블랑쇼에게 보여 주었던 열광은 자신의 이해 수준을 웃도는 그 난해성에 대서 기웃거려 본 작가들도 더러는 있다. 그러나 그런 독서는 필경 실패한 찬사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정도의 난해함의 수준쯤이야 나도 이해할 수 있어, 라고 하는 어떤 지적 나르시시즘이 블랑쇼에 대한 찬사를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내 스스로에 대한 이 정도의 격려라면 나도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만한 한심한 나르시스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보니 <소설은 서사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라는 내 믿음을 내 스스로 져버렸다.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의 서사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으니 말이다. 일독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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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소리 - 옛 글 속에 떠오르는 옛 사람의 내면 풍경
정민 지음 / 마음산책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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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또 다른 세계에 접속하는 일
 
 
『사생활의 역사』(새물결)에서 프랑스의 역사학자 로제 샤르티에는 묵독을 인쇄술과는 다른 차원의 혁명이라고 정의했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에서도, 서구의 경우 적어도 10세기 이전까지는 묵독이 일반화되지 않았다고 한다. 로제 샤르티에는 낭독에서 묵독으로, 그리고 경전에 대한 집중적인 독서에서 일반서적에 대한 광범위한 독서로의 점진적인 이행을 독서혁명이라고 부른다. 묵독의 가장 큰 특징은 독서의 형태가 개인화되었다는 점, 집단에서 벗어나 자아로의 침잠이 묵독을 통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결국 근대적 이성은 인쇄술의 혁명과 이에 따른 독서형태의 변화에 힘입은 결과라는 것이다.

나는 여름방학 내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가져다 준 복을 누렸다. 파스칼 키냐르와 폴 오스터의 소설들은 ‘나 자신으로 가라앉는 데’ 알맞춤한 책들이었다. 그것들은 읽는 시간은 아주 지극히 사적인 내밀함을 요구했다. 아주 자폐적인 공간과 시간을 요구했다. 텍스트들은 쉽게 비밀을 드러내지 않았다. 텍스트는 뿌옇고 몽롱했다. 나는 자꾸 어떤 심연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더위가 좀 가셨을 때, 국내에 번역된 키냐르의 소설, 『은밀한 생』,『떠도는 그림자』,『로마의 테라스』와 오스터의 소설 『뉴욕 삼부작』,『우연의 음악』, 『리바이어던』,『환상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욕심 같아서는 ‘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거기서 그만 둘 것을 명령했다.

파스칼 키냐르는 『은밀한 생』(문학과 지성사)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독서는 자신에 대한 망각이다. 피를 흘리면서 책을 읽기란 불편하지만 죽어가면서도 책을 읽는 것은 가능하다....책읽기는 이 세상과 어긋나고 알 수 없으며 그 자체로 좋은 다른 세계에 두뇌를 집중함으로써 또 하나의 세계에 접속되는 일이다. 그 세계가 나의 구석진 장소였다.” 독서는 이 세계를 떠나 또 다른 세계와 부단히 만나는 일이라는 키냐르의 말에 나는 동의했다. 그의 말대로 독서는 ‘출애급’이었다. 지금 이 땅에 만족한다면 책읽기는 없다. 어떤 식으로든 해방과 탈주를 꿈꿀 수밖에 없다.

반드시 독서는 어떤 결핍의 인식과 함께 한다. 텍스트를 통해 끝없이 자신의 공허를 채우는 일은 사랑을 갈구하는 자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파스칼 키냐르는 ‘사랑하다’와 ‘독서하다’, 그리고 ‘음악하다’를 동일어로 본다고 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대상과 일체가 되고자 하는 행위다. 나의 공허를 채우고 싶다는 아주 내밀한 욕망이 우리를 끊임없이 텍스트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를 누비고 다녀도 공허는 채워지지 않는다. 탐서가들은 채울 수 없는 허기를 가진 자들이다.

방학이 끝나면 다시 일상의 반복이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는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러나 끊임없이 책을 통해 또 다른 세계와 접속할 수는 있다. 업무 때문에 한 번에 네 다섯 시간 길이의 ‘통시간’이 남지 않고 고작해야 한 두 시간 길이의 ‘자투리’ 시간이 남을 때는 ‘서사’보다는 차라리 논리적인 글을 택했던 것이 내 독서의 습관이었다. 논리적 텍스트들은 휴지(休止)가 잦아도 무방했지만 소설과 같은 서사적인 미학은 고도의 집중을 요구했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시공사)을 읽었던 것도 학기 중이었고, 두껍기로 하면 리프킨의 저서에 두 배 분량에 달하는 『회의적 환경주의자』(에코리브르)를 읽은 것도 학기 중이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들 하는데, 청명하고 삽상한 날씨에 독서는 좀 억울하다. 하늘을 보고, 바람을 맞고, 가을꽃들의 개화를 지켜보고, 열매의 탐스러움에 눈을 여는 일이 가을에 할 일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가을에도 어떤 결핍은 있기 마련이다. 생명 있는 것들이 탐스러워질수록 내면은 더 휑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발언들이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등식을 낳지는 못한다. 따지고 보면 어느 계절하나 독서의 계절 아닌 것이 없다. 존재를 갱신하는 일, 존재를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에 편입시키는 일을 계절을 가려서 한다는 일이 어찌 보면 우습다.

꽤 읽었다 하는 사람들도 좌충우돌하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독서의 내공이 조금 쌓인 사람들이라면 제 나름대로의 독서의 길이 있기 마련이다. 독서의 길은 부단한 시행착오의 결과다. 이 책이다 싶었는데 아니다 싶으면 저 책으로, 그것도 아니면 또 다시 다른 책으로, 이런 식으로 책과 책의 고랑을 건너 뛰다보면 책을 보는 눈이 좀 길러질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도 고역이다 싶을 때는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궁리)의 저자인 출판칼럼니스트 표정훈은 책을 고르고 읽는 기본적 방법부터 책을 쓰거나 번역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충고, 성공적인 교양도서와 전통적인 출판사, 주요 유형별 책의 특성, 정보화 시대와 지식 고속도로에서의 책읽기 등 책과 관련된 그의 생각을 말한다. 이권우의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도 이와 비슷한 책이다. 이권우는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의 독서연수에서 김진경의 발언을 빌려 이런 강연을 한다.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정보화 사회는 지식의 카스트 제도를 출현시킬 위험이 있다. 이런 시대에 독서운동을 하는 자세에 일대 변화가 있어야 한다. 낭만적이고 일시적이고 국어교사이기 때문에 관례적으로 독서운동을 한다는 자세에서 벗어나 청소년들이 새로운 사회에서 계급적으로 소외세력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미리 막기 위해 독서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청할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최성일의 책, 『테마가 있는 책 읽기』(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는 이권우나 표정훈의 책과는 다소 성격이 다르다. ‘의료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돕는 책들, 팔레스타인에 관한 책들, 녹색정치를 다룬 책들, 아나키즘 관련서...’등의 부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현실에 대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최성일의 텍스트들이 가지는 독특한 성격이다. 출판관계 저널에 연재한 글을 묶은 것으로 유명 학자, 예술가, 작가 등의 생애와 사상을 간략히 소개한 책,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책동무논장) 도 같은 맥락에서 씌어진 책이다. 『길을 찾는 책 읽기 』(김학민 저, 아침이슬)는 청소년에게 권하는 100권의 책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전의 쉬운 해설서와 축약본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누구나 쉽게 읽힌다는 것이 특색.

『강철로 된 책들』(장석주 저, 바움), 『장정일의 독서일기 1-5』(장정일 저, 범우사), 『 내가 읽은 책과 세상』(김훈 저, 푸른숲)은 문인들의 독서체험, 『이병주의 동서양 고전탐사 1-2』(이병주 저, 생각의나무) 등은 문인들의 독서체험을 기록한 책들이다. 장석주의 책은  미래 생태 환경 식물들, 철학 지식 비평, 대중문화 현대예술 등 11개 분야로 나눠 77권을 소개하고 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장정일이 자신의 독서 경험을 일기 형식으로 쓴 책.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텍스트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을 가하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김훈의 책에서는 독특한 사유를 바탕으로 한 특유의 미문이 빛난다. 이병주의 책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살아남은 고전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사유를 전개하는 묵직한 문체가 빛을 발한다.

『책 읽는 소리』(정민 저, 마음산책)에서 저자는 '빌려 드린 지가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저 또한 벼슬길에 뜻을 끊고 강릉으로 돌아가, 이것을 읽으며 무료함을 달래려 합니다'고 했다는 허균이 정구에게 보내는 편지의 흥미로운 대목 하나를 소개한다. 책 귀한 줄 모르는 요즘의 세태를 꼬집는 일화다. 이 책에 소개된 책과 관련한 선인들의 풍부한 일화들은 새삼스럽게 책의 고마움과 독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책에 미친 바보』(이덕무 저, 권정원 편역, 미다스북스)에서는 겨울밤이면 군불도 때지 못한 냉골 바닥에서 대쪽처럼 정좌한 채 책을 읽는 이덕무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한서'로 이불을 삼고 '논어'로 병풍을 쳤던, 스스로를 '책에 미친 바보(간서치看書痴)'라 칭했던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의 모습은 독서에 게으른 우리를 매섭게 질타한다.

이런 책이 좋다, 저런 책이 좋다, 하는 식으로 책이 책을 말하는 시대는 불행하다. 음악은 듣기 위해 존재하고 책은 읽히기 위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말하는 책들이 존재하는 것은 ‘내 느낌’을 공유하자는 하나의 제안이리라. 나의 기쁨과 감동을 당신과 나누고 싶다는 하나의 초청이리라. 키냐르는 『은밀한 생』에서 이런 사정을 간단히 요약한다. “책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특이한 결사를 구성한다.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과 연령의 구분 없이 섞이지 않음이, 결코 서로 만나는 일 없이도 그들을 한데 모아 놓는다.”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그 은밀한 제의에 동참해보는 일도 나쁘지는 않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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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 조선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
김태완 엮음 / 소나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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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으로 읽는 조선의 젊은 엘리트들의 의기와 비전
책문 / 김태완 지음 / 소나무, 2004



    구멍가게 하나 꾸려나가는 데도 경영의 노하우가 필요한데, 하물며 국가 경영임에서랴. 이게 옳다 하면 저쪽에서 들고일어나고, 저게 옳다하면 이쪽에서 볼멘소리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출까, 아무리 좋은 뜻인들 힘 있게 밀고 나가기가 쉽지 않다. 목숨을 내놓을망정 이권을 놓을 수 없다는 도당(이익집단)들의 압력도 압력이려니와 초상 치르는 일 하나에까지 감 놔라 대추 놔라 간섭을 일삼는 선비들의 입바른 소리도 얄밉고, 마마 크신 국량으로 통촉하시오소서, 혜량하시오소서, 사사건건 생트집을 잡는 보수언론의 '딴지'도 달갑지 않다. 나도 잘해보자는 이야긴데, 왜들 이러시나, 대체 이들이 왕을 뭣으로 안단 말인가. 왕은 답답했다. 종묘사직을 위하자는 건지, 왕의 발목을 잡자는 건지, 대신들의 행태가 괘씸하기까지 했다. 대체 이 늙은이들로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왕은 과거에 급제한 싱싱한 선비들에게 묻는다.

    젊은 선비라. 옳다. 그 싱그러움이 보기에 장히 좋다. 아직은 수구적 이익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았으니 좋고, 비록 엉뚱하기는 하더라도 고루한 세상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니 좋다. 비록 경험이나 관록이 짧다고는 하나 세상에 옳게 한 번 쓰여 보겠다는 젊은 포부와 패기도 싱싱하고 우람하다. 대개 낡은 것들은 부패의 조짐을 보이기 십상, 젊은 너희들의 생각은 어찌 한고, 왕은 싱싱한 선비들에게 나랏일을 물었다. 이에 대한 선비들의 답이 소위 '책문(策文)'이다. 대체 이 나라에 비전이 있는가, 있다면 어찌해야 하겠는고, 그대들의 식견을 어디 말해 보거라.

    '하루 책을 읽지 아니하면 입 속에 가시가 돋친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고도 했고, '수불석권(手不釋卷)'이라고도 했다.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읽은 게 글이요 책이었다. 선비, 그들에게 학문의 목표는 인간의 완성에 있지 않았다. 세상에 몸을 세워 이름 석자를 드날리자는 소위 '입신양명(立身揚名)'에 있었다. 장부가 세상에 나매 그것이 효의 끝이었다.

    책문이라, 임금 앞에서 제 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으니 이때가 호기렷다. 나랏님의 눈에 들어야 하니, 출중한 미모를 뽐내자. 가급적이면 고전과 문장에 대한 도드라진 실력을 뽐낼 수 있어야겠다. 사서삼경을 구구단 외듯 줄줄이 외며 박람강기(博覽强記)를 뽐내자, 선비들은 야후니 구글이니 엠파스니 인터넷 검색엔진을 동원하지 않고도 수많은 고전 속의 문장들을 기억의 하드디스크에서 불러낸다. 아날로그 세대라 해서 얕보지 말자. 그 양과 속도가 만만치 않다. 하긴 맹자왈 공자왈 공부가 몇 년인가.

    실력을 뽐내는 데서 그친다면야 기억 용량이 큰 자가 제일이겠다. 그러나 지(智)보다는 덕(德)이라 하지 않던가. 어리숙한 선비가 산을 옮기는 법,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랬다. 우직한 기개와 우국충정의 간곡함이 문장에 실린다면 까짓 지자쯤이야 무슨 문제랴. 선비들은 자신의 의기와 충정을 문장에 담았다. 그러나 직언(直言)에는 리스크가 따랐다. 아무리 바른 말을 해봐야, 도당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세상이고, 왕도 도당들의 이해관계와 무관하지 않으니 까딱하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러나 리스크가 크면 돌아올 영광의 크기도 커지는 법, 때로는 목숨도 걸어볼 일이다. 한 번 죽음을 무릅쓰면 크게 한 번 쓰일 수 있지 않겠는가. 더구나 장부가 세상에 한 번 나, 자신의 포부를 알림에 무슨 거리낌과 망설임을 두겠는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한다. 책문은 그런 '의기'로 쓰였다. 좋게 말해 '의기'요, 속된 말로 '깡다구'였다.

    광해군 즉위 3년인 1611년, 과거시험의 2차 합격자 33명을 직접 눈 앞에 불러놓고 광해군은 선비들의 깡다구와 배짱과 실력을 시험했다. 성적의 등급에 따라 벼슬의 높고 낮음이 결정되는 자리였다. 선비들,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은 물었다. 국가의 존망이 달린 절실한 문제였다. 어디 대답해 보거라.

    어리석고 사리판단도 할 줄 모르는 내가 나라의 대업을 이어받긴 했지만 나는 지혜도 모자라고 현명하지도 않다. 깊은 못과 살얼음을 건너야 하는데 건너갈 방법을 모르듯,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시급하게 인재를 불러 모아 나랏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선비들은 의견이 달라 서로의 차이를 조정할 길이 없고, 서로 마음을 다해 공경과 화합을 이루려는 미덕도 찾아볼 수 없다……그대들은 모두 뛰어난 인재들이다. 필시 마음속에 북받쳐 오르는 뜻을 품고 있었을 테이니, 저마다 자기 생각을 다 표현해 보라. 내가 직접 살펴보겠다.

    왕이지만 스스로를 어리석다고 하는 겸손이 예사롭지 않다. 선비 중에 임숙영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왕처럼 겸손하게 대답한다. "저는 참으로 꽉 막혀 식견이 없습니다." 문맥을 그대로 믿으면 오산이다. "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대답하겠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의 대목이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 불퇴전의 선비정신이 불꽃을 튄다.

    요즈음 사대부들은 이리 찢어지고 저리 나뉘어 각기 붕당을 세워 현명하고 어리석음,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뜻이 맞는 사람만 붙여주고 뜻이 다른 사람은 배척합니다……임금이 마음을 써서 일을 행할 때에는 반드시 하늘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늘이 특별히 누구를 좋아하고 미워하는 일이 없듯이, 임금도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미워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신하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아랫사람의 처지에서 윗사람의 잘못을 따지는 것인 만큼, 임금이 비록 마음을 비우고 들으면서 뜻을 굽혀 따른다고 해도, 저 유순하고 마음 약한 선비들은 오히려 지레 할말을 다 못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바른 말을 하면 노하여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에게 죄를 준다면 곧고 강직한 신하가 아니고는 누가 기꺼이 나서서 전하께 바른 일을 할 수 있도록 권할 수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왕 당신부터 잘하라는 소리다. 똑바로 듣고 처신 잘 하라는 소리다. 그 일갈이 마차 아랫사람을 대하듯 추상같다. '지금 막 가자는 거지요?' 왕은 일순 자존심이 상한다. 왕은 분개했다. 바른 말도 좋지만 이래도 되는 건가. 너를 내침으로써 법과 기강과 국가의 품위를 바로 세우리라. 이런 자는 본때를 보여주어야 국왕으로서의 품위가 서겠다 싶었는지 광해군은 일갈한다. 이 친구 벼슬 취소하시오, 그리고 당장 귀양 보내시오, 이에 영의정, 좌의정, 한다하는 대신들이 마마 고정하소서, 마마 통촉하소서 극구 말린다. 왕의 돈후대덕하심이란 뭔가. 이럴 때 한 번 크게 쓰는 것이다. 좋다 내 자애로운 군주의 도리를 보여주마. 알았다. 내 참으마, 고정하마. 왕은 넉 달 만에 노염을 풀면서 한 마디를 덧붙인다. "앞으로 내가 질문 한 것에서 벗어난 대답하는 자들은 뽑아선 안돼!! 묻는 것만 대답하라구."

    새만금호 사업, 이래저래 이권이 얽혀 난리다. 이 사업을 접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너희들의 의견을 들어보자, 인터넷이 요즘 욕설창고가 되었고, 음란비디오가 난리인데 이에 대한 너희들의 방책을 들어보자. 이랬다저랬다 하는 대학입시 문제, 어디 너희들의 시원한 대책을 들어보자. 언론개혁을 언론탄압이라고 몰아붙이는 자들이 있는데, 뾰족한 특단의 대책이 없을꼬. 정경유착, 이거 심각한 문제다. 수구세력의 입을 막으며 쾌도난마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비책을 말해 보거라. 대한민국의 소프트웨어 산업의 미래와 전망에 대한 그대들의 의견은 어떠한고 …….

    뭐 이런 것들이 책문의 현대식 버전이랄 수도 있겠다. 국가 경영의 노하우를 왕이 묻고 선비들이 답하는 것이 책문이었다. 거기에는 국가 최고 CEO의 공인으로서의 고민이 담겨있다.

    지금도 사법고시 예상문제를 가르치는 '고시학원'이 신림동 고시촌에 즐비하듯 조선시대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번에는 당쟁 문제가 나오지 않을까, 아니 일본과의 통상마찰이 나올 거야, 아니 청나라와의 외교적 문제가 나올 거야, 한참 예상문제를 찍어가며 공부할 때, '어리석은 선비들아, 아마도 이런 문제가 나올 줄은 몰랐을 거다. 어디 맛 좀 봐라.' 광해군은 참으로 장난스런 책문의 주제를 내린다.

    어릴 때는 새해가 기뻤으나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서글픈 마음이 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어랏, 이것도 책문의 주제가 되나. 안 되는 게 어디 있나. 어명이다 물으면 답하라. 이에 대해 이명한이란 선비는 답했다.

    살아서 볼만한 것이 없고 죽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면, 초목이 시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무지한 후진을 가르쳐 인도하고, 터득한 학문을 힘써 실천하며, 등불을 밝히고 밤새도록 바르게 앉아 마음 모으기를 일평생 하면 (죽을 때가 되어도) 무에 마음에 유감이 있겠습니까"

    인생이 허무하다느니 어쩌느니 치졸한 감상에 빠지지 말고 짧은 인생, 마음을 모아 공부하라는 왕에 대한 어른스런 훈계였다.

    <책문>(소나무)은 책문 13개와 대책 15개를 우리말로 옮겼으니, 책은 모두 13장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단순 번역은 아니다. 각 장마다 당시의 시대상황과 관련된 인물들의 감춰진 이야기를 재구성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 책은 과거를 단순히 끌어 모은 책은 아니다. 수많은 사료(事料) 중에서 의미 있는 사료(史料)를 모을 수 있는 편집자적 감각, 그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라면 이 책에 실린 책문 13개는 충분히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 '술의 폐해를 논하라'는 중종, '정벌이냐 화친이냐'를 물은 선조, '인재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라고 물은 세종 등의 책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더구나 대책문 뒤에 덧붙인 저자 김태완의 다음과 같은 글은 고전을 빌려 현재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사림은 명종 이후 훈구세력 붕괴로 갑작스레 국정을 주도하게 됐다. 관료로서 훈련을 쌓을 기회가 없었던 그들은 정국 운영에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사림은 잔존하는 훈구세력을 포용해 대국적인 정국 운영의 이념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과 대립각을 세웠다. 그 바람에 관료사회가 동서 붕당으로 연결돼 조선 사회의 누적된 모순 개혁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여기서 저자의 정치적 색깔에 대해서 따져 물으며 날을 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 일단 책문의 현장으로 들어가 조선의 지도자, 한 국가의 CEO가 어떤 고민을 했고, 젋은 선비들이 어떤 대책문을 썼는지 일독하는 것이 급선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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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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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수보다 즐거운 유희

-마르께스에 대한 단상.


마르께스에게 바쳐진 헌사 중 최고의 것은 쿤데라의 입을 빌어야 했다. <소설의 종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인들의 지엽말단적인 걱정일 뿐이다. 동구나 중남미 작가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서재에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꽂아놓은 채 소설의 죽음에 대해 중얼거릴 수 있다는 말인가?>


마콘도에서 아이들은 양탄자를 타고 다니면서 날아다닌다. 나는 것이 필요하면 나는 것을 꿈꾸면 된다. 비행기를 살 수 없는 사람들은 비행기를 꿈꾸면 된다. 마콘도는 가난한 땅이다. 그래서 신화도 많고, 전설도 많고 방귀 소리도 크다. 거기에 돼지 한 마리를 먹어치우고 엄청난 방귀로 꽃들을 질식시켜 죽여 버리는 거대한 사나이가 있다 해도 따지지 말 일, 송아지 한 마리와 쉰 개의 오렌지, 8리터의 커피와 30개의 날계란, 두 마리의 돼지와 한 다발의 바나나, 네 상자의 샴페인을 먹어치우는 여자가 있다 해도 따지지 말 일, 하늘에서 꽃비가 내릴 수도 있고, 한 여인이 돼지 꼬리가 달린 아이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도 그곳에서는 극한을 향해 과장된다. 중요한 건 표현과 현실의 일치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도 즐겁자는 것. 그것이 게임의 논리요 언어의 논리가 아닌가. 생각해보시라 아무리 사람이 많다 하더라도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겠는가. 입추(立錐)의 여지(餘地)가 없을 정도로 붐비는 곳이 있다는 말인가. 해서 하는 말인데 즐겁자는 게 말이니 따지지들 마시길.


극한의 아름다움, 그 강철의 무지개 앞에서 죽음이나 삶도 무게를 잃어 버린다. 마콘도에서 운우지락(雲雨之樂)의 열락의 신음은 무덤 속의 유골마저 놀라움에 떨게 한다. 그런 강렬한 매혹 앞에서 현기증을 느끼는 몸, 탕진을 예감하며 떠는 몸, 죽음을 예감하며 한 사나이가 미녀 레메디오스의 아랫배에 손을 집어 넣는다. 이럴 때 에로티즘은 지독하게 외로워 보인다. 에로티즘은 지긋지긋한 개체성을 탈피해 어떤 합일과 섬광의 순간을 꿈꾸지만 그게 될 법한 일인가. 나는 너라구?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나는 지긋지긋하게 나다. 아닌가? 대체 어떤 탁월한 수단과 방법으로 네가 나이며, 내가 너란 말인가? 하기야 개체가 제 윤곽을 허무는 일도 있긴 하겠다. 가령 죽음 같은 거 말이다. 세상이 내 허물어진 몸에 확, 침투해서 비로소 내가 세상이 된다. 그런데 나는 없다. 그때 난 죽었으니까. 암만 생각해도 내가 네

가 되는 경우를 알지 못하겠다. 약의 힘을 빌기도 어렵고.


<진정한 기억은 기억의 환영 같았다. 반면에 거짓스러운 기억은 너무도 그럴 듯해서 현실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것 같았다.> 라는 마르께스의 구절은 곱씹을 만하다.


『백년 동안의 고독』이 말하는 것은 욕망이다. 욕망은 유전될 뿐 진화하지 않는다. 테크놀로지가 욕망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조작할 수 있는 날이 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까지는 인간은 아랫도릴 싸쥐고 신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럴 때 대체 역사는 발전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늙지 않는 욕망과 함께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은 아닌가.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역사가 끊임없이 욕망과 함께 순환하는 땅은 마콘도이다. 마콘도, 낙원의 땅, 저주의 땅, 대홍수의 땅, 전쟁과 살육의 땅, 위대한 어머니의 땅. 


욕망이란 렌즈를 통해서 본 미래는 뻔하다. 기껏 날아보았자 부처님의 손바닥 안이다. 욕망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고안해냈다면 그는 대단한 히트상품을 발명한 셈. 어떤 고약한 신이 욕망을 근본적으로 개조할 능력을 우리에게 주지도 않으면서 영생만을 준다면 그보다 지독한 테러는 없을 것이다. 욕망을 좌지우지하고 그것을 제멋대로 주물러 가지고 놀 수 있는 막강한 힘과 함께 영생을 주지 않는다면 영생은 감옥이다. 담배는 수백 보루가 쌓여있는데 불이 없는 감옥처럼 끔찍한 감옥이 있을까. (인생이 짧은 건 그나마 다행이잖은가.)


프랑스의 한 출판사는 마르께스에게 물었다. 그는 유머스럽게 대답했다.

- 당신 최대의 미덕은?

- 죽을 때까지 비밀을 간직할 수 있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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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즘 현대사상의 모험 28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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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즘>은 단순하지 않다.그것은 性 이상의 것이다. 신성에 이르는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을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어떤 것으로 보고 있다.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으로서의 에로티즘을 바타이유는 말하고 있다.존재의 가장 내밀한 곳,기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파고드는 에로티즘은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 고립감을 벗어나게 한다.에로티즘은 나와 너의 하나됨을 지향한다.그러나 그 지향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다. 에로티즘은 죽음에의 문을 열어 준다.죽음은 개인적으로 존속하고 싶은 욕구를 부정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이성의 지배에 무한정 복종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이성의 세계를 건설하지만, 인간의 내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폭력이 도사리고 앉아 있다. 전적인 통제가 불가능한 충동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도 또한 결코 우리의 합목적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비합리성의 우주 속에 자리잡고 있는 폭력을 우린 에로티즘을 통해 경험한다. 에로티즘은 정신성이 지배하던 질서와 유효성의 체계를 허물어 뜨린다. 동물적 충동에 몸을 맡긴 사람은 맹목과 망각을 누리면서 폭력을 짐승처럼 휘두른다.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고 울부짖는 야수성, 팽창과 절규, 그 끝에 죽음이 있다. 그 관능적 희열이란 죽음의 전조이다.

삶이란 끊임없는 폭발의 연속이다. 그런데 끊임없는 폭발에도 불구하고, 삶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존재는 폭발의 힘이 다하면, 새로운 존재에 자리를 내어주어 그 새로운 존재들이 폭발의 불꽃놀이를 지속하게 한다. 그것이 삶의 조건이다. 에로티즘은 삶의 연소, 삶의 낭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합리적이 아니다.생산의 메카니즘을 보기좋게 외면한다.아니 위반한다. 그렇다. 에로티즘은 금기의 위반이다.합리성의 파괴이다. 찢음이며 찢김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폭력이다.그러나 그것은 또다른 생명을 낳는다. 그러나 거기엔 공허가 있다.갑작스런 한순간에 열리는 공허.그 공허의 문을 여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부재를 이끌어들이며,부재는 부패와 관계한다. 관능적 희열 끝에 우린 급속도로 부패한다.새로운 생명에게 우릴 내어주고 우리는 잠시 죽는 것이다.

동물성과 야수성을 말하지 않고 에로티즘을 말할 수 없다. 성행위 중의 상대방은 연속성의 가능성으로서 제시되며,빈틈없는 개체의 불연속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끊임없이 야수처럼 파고든다.성행위 중에 동물성의 폭력의 세계에 휘말리게 된 두 존재가 성적 결합을 통해 자아를 잠시 잊고 위기를 함께 겪는다.성적 결합은 두 존재로 하여금 연속성을 향해 잠시 자아의 문을 열게 할 뿐이다. 막연한 의식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그러나 발작이 지나면 각자의 불연속성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따라서 성행위는 가장 진하면서도 가장 의미있는 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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