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티즘 현대사상의 모험 28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에로티즘>은 단순하지 않다.그것은 性 이상의 것이다. 신성에 이르는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을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어떤 것으로 보고 있다.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으로서의 에로티즘을 바타이유는 말하고 있다.존재의 가장 내밀한 곳,기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파고드는 에로티즘은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 고립감을 벗어나게 한다.에로티즘은 나와 너의 하나됨을 지향한다.그러나 그 지향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다. 에로티즘은 죽음에의 문을 열어 준다.죽음은 개인적으로 존속하고 싶은 욕구를 부정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이성의 지배에 무한정 복종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이성의 세계를 건설하지만, 인간의 내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폭력이 도사리고 앉아 있다. 전적인 통제가 불가능한 충동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도 또한 결코 우리의 합목적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비합리성의 우주 속에 자리잡고 있는 폭력을 우린 에로티즘을 통해 경험한다. 에로티즘은 정신성이 지배하던 질서와 유효성의 체계를 허물어 뜨린다. 동물적 충동에 몸을 맡긴 사람은 맹목과 망각을 누리면서 폭력을 짐승처럼 휘두른다.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고 울부짖는 야수성, 팽창과 절규, 그 끝에 죽음이 있다. 그 관능적 희열이란 죽음의 전조이다.

삶이란 끊임없는 폭발의 연속이다. 그런데 끊임없는 폭발에도 불구하고, 삶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존재는 폭발의 힘이 다하면, 새로운 존재에 자리를 내어주어 그 새로운 존재들이 폭발의 불꽃놀이를 지속하게 한다. 그것이 삶의 조건이다. 에로티즘은 삶의 연소, 삶의 낭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합리적이 아니다.생산의 메카니즘을 보기좋게 외면한다.아니 위반한다. 그렇다. 에로티즘은 금기의 위반이다.합리성의 파괴이다. 찢음이며 찢김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폭력이다.그러나 그것은 또다른 생명을 낳는다. 그러나 거기엔 공허가 있다.갑작스런 한순간에 열리는 공허.그 공허의 문을 여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부재를 이끌어들이며,부재는 부패와 관계한다. 관능적 희열 끝에 우린 급속도로 부패한다.새로운 생명에게 우릴 내어주고 우리는 잠시 죽는 것이다.

동물성과 야수성을 말하지 않고 에로티즘을 말할 수 없다. 성행위 중의 상대방은 연속성의 가능성으로서 제시되며,빈틈없는 개체의 불연속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끊임없이 야수처럼 파고든다.성행위 중에 동물성의 폭력의 세계에 휘말리게 된 두 존재가 성적 결합을 통해 자아를 잠시 잊고 위기를 함께 겪는다.성적 결합은 두 존재로 하여금 연속성을 향해 잠시 자아의 문을 열게 할 뿐이다. 막연한 의식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그러나 발작이 지나면 각자의 불연속성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따라서 성행위는 가장 진하면서도 가장 의미있는 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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