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소중한 것부터 버려라
E. 플라트너 지음, 유명미 옮김 / 가야넷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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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조여진 시간의 코르셋을 벗어 던져라



  절한 스트레스는 건강에 이롭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즐겨 드는 예가 있다. 바다에서 횟집으로 활어를 차량으로 실어오는 경우 활어만을 실어 오면 차의 진동으로 인한 멀미로 운송 도중에 죽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차량의 저장탱크 안에 활어의 천적을 풀어놓으면 죽는 활어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든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을 들어가며 적절한 스트레스는 건강에 도움이 됨을 그들은 역설한다.

  러나 이런 예를 즐겨드는 사람들이라면 다음의 질문에도 답을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이다. 먼저 천적에게 잡혀 먹느냐 마느냐, 생사가 걸린 문제가 어찌 <적절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데서 그칠 것인가라는 질문. 또 하나 무엇하나 거칠 것 없이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 경쟁의 무대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여유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장수하는 비결은 무엇이냐는 질문. 썩 시원한 대답을 기대하긴 어려울 듯하다.

   일간지가 소개하는 오키나와 장수촌의 비밀은 이렇다. 소식(小食), 규칙적 운동, 여유가 장수의 비결이란다. 소식과 규칙적인 운동이야 상식에 속하는 일이니 젖혀두고라도 문제는 여유가 어떻게 장수의 비결이냐는 문제다.

  문이 소개하는 비결은 흥미롭다. 도교와 유교가 결합된 독특한 오키나와의 토속신앙은 매사에 여유를 갖고 속도를 늦추게 한단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이른바 '오키나와 시간'(Okinawa time)에 맞춰 생활을 하는데 예를 들어 파티가 8시에 시작하기로 되어 있으면 대부분의 손님들은 9시에 도착하고 10시나 11시쯤 도착해도 지각했다는 사실에 대해 결코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의 '코리안 타임'과 다를 바 없다. '오키나와 시간'은 그동안 극복되어야 할 '악습(惡習)'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서양인들의 눈에 부러운 장수 비결로 비춰지고 있단다. 장수와 행복의 비결은 ‘느릿한 삶’에 있다는 증좌.

  체 천적과 활어 운운하며 적절한 스트레스가 건강의 비결이니 하는 말을 늘어놓는 심사의 배후에는 어떤 무의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생산에는 일정량의 스트레스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가 적절한 생산을 위해 필요한 것인지에는 의문이 따른다. 욕망은 언제나 필요를 초과한다. 자본주의 시대의 욕망은 한 인간이 먹고 숨쉬는 생존의 차원을 훨씬 초과한다. 생존의 차원을 넘어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필요를 위한 생산이라고 보기에 오늘날의 생산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과욕에서 비롯되는 이 거대한 생산의 시스템을 운용하는 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활어의 스트레스론>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

  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소위 밥줄에 목매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예를 즐겨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 꿈과 의지와 뜻은 아예 한 쪽에 밀어두고, 생활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안달복달하며 살아가는 삶을 어떤 식으로든 미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의식이 이런 예를 즐겨 말하는 사람들의 사고의 저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꿈을 져버리고, 아예 꿈조차 잃어버리고, 어디로 간다는 목적도 없이 이끌려 가는 삶을 어떤 식으로든 미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의식이 <활어의 스트레스론>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데 일조하지 않았을까. <활어의 스트레스론>이 말하는 건강 비결은 늘 적절한(?) 스트레스에 노출되라는 것이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면역력과 성욕의 저하, 뇌세포의 파괴 등 수많은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어의 생사여탈권을 쥔 천적 운운하며 스트레스가 건강에 기여한다는 <활어의 스트레스론>은 과연 누구를 위해 이로운지는 곰곰 생각해볼 일이다.


  엄양(嚴陽)이라고 하는 선객(禪客)이 조주 선사(趙州 禪師)를 찾아가서 물었다.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조주 선사 "내려 놓아라[放下着]!"하였다.
도대체 아무 것도 지니지 않았는데 무엇을 버리라고 하는 것인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엄양은 다시 물었다.
"이미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무얼 내려 놓으라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짊어지고 가거라."



   일화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에 집착하는 마음마저 버리라는 조주(趙州) 선사의 가르침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물론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이 나쁠 것은 없다. 한 점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도공의 욕망이 걸작을 낳고, 대작을 이루겠다는 예술가의 집착이 명품을 낳는다. 욕망은 개체를 이끌고 가는 힘이고, 성욕은 종족을 이끌고 가는 힘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선사(禪師)들은 묻는다. 대체 왜, 라고. 그러나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성철은 십년 동안 눕지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용맹정진한 자가 아니었던가. 그런 집착의 대인들께서 방하착(放下着)을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 아닌가. 대체 무엇을 놓으라는 말인가.

  이 쉬워서 방하착(放下着)이다. 어디 그게 쉬울까. 우리는 집착의 하루하루를 살 뿐이다. 불경께나 읽었다는 사람들이나 필자와 같은 범부나 결국 미망(迷妄)과 집착(執着)의 안간힘으로 하루를 산다. 성불(成佛)은 멀고, 생활은 가깝다. 그러나 꼭 이런 것은 아닌데, 라는 자괴감이 들 때가 있다. 『가장 소중한 것부터 버려라』(E. 플라트너 저, 유영미 역, 가야넷)는 이런 우리들의 자괴감을 부채질하는 책이다. 하루하루 조금의 불만도 없이 느낄 수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런 책을 펴들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 책을 펴들고 허둥지둥 어디론가 분주하게 달려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리라.

  <활어의 스트레스론>이 제시하는 건강론에 비해 『가장 소중한 것부터 버려라』가 전하는 우화가 우리들의 건강에 훨씬 이롭지는 않을까. 이 책의 한 페이지를 열어 보자.


  어떤 여행자는 여행 중 따사롭게 내려쬐는 햇살을 받으며 배에 앉아 꼬박꼬박 졸고 있는 한 어부를 보았다. 그 여행자는 어부에게 왜 고기를 잡지 않고 졸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어부는 오늘, 내일, 모레, 3일 동안 잡을 분량을 아침에 벌써 다 잡았다며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닌가. 여행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물고기가 많다면 왜 더 잡으려고 하지 않을까? 여행자는 그 어부를 위해 사업 시나리오를 구상해주었다. 우선, 모터 달린 배를 구입한 후 물고기를 많이 잡아 그것을 팔아서 그것으로 다시 물고기를 더 많이 실을 수 있는 모터 달린 범선을 하나, 아니 두 개 정도 사서 물고기를 더욱 많이 잡아 물고기 가공공장을 차려 국제무역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여행자는 자신의 아이디어에 열광했다. 그때 어부가 물었다. 그 모든 것을 다 이루고 나면 무엇을 하느냐고. 그러자 여행자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한가로이 햇볕을 쬐면서 바다나 바라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어부는 자기가 벌써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행자의 아이디어가 어부의 한 마디에 보기 좋게 나가떨어지는 순간이다. 어떻든 이 책의 필자는 이 우화를 통해 ‘당신이 추구하는 성공의 목표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집착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우리에게 권한다. 꽉 조여진 시간의 코르셋을 벗어던지라고.

  자는 행복의 비결을 간단하게 말한다. "버려라, 그러면 삶은 그 이상을 줄 것이다!" 저자는 조주(趙州)와는 다른 방식으로 <방하착>을 말한다. 성공에 대해서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렇다. 성공하려면 개성이 있으면서도 인습을 존중해야 하고, 사교적이면서도 이기적이어야 하며, 팔방미인이면서도 한 우물을 파야 하고, 협조적이면서도 관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성공한 사람에게 기대되는 자질이다. 그런 자질들이 동시에 추구될 수 없을 만큼 상반된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다시 말해 성공세계는 모순적이고 정신분열증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이다.”

  딘가에 <성공사전>이 있다면 그 책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관이 뚜렷한 사람은 매사에 의견 충돌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이 성공의 자리를 차지하긴 어렵다. 다소 불합리한 명령일지라도 불도저의 정신으로 일을 수행해내는 돌파력은 성공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제일의 요건이다. 감성적인 사람, 제 내면의 욕구에 답하기 쉬운 사람들 또한 성공의 자리를 차지하긴 어렵다.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경제성, 효율성, 차가운 절제의 정신이 그들에겐 필요한 것이다. 회의하는 정신, 의심하는 정신, 왜라고 묻는 정신의 소유자는 성공하기 어렵다. 일단 달성하라, 이것이 성공의 계명이니까. 꾸밈없이 자신을 드러내려는 자는 성공하기 어렵다. 호의와 친절을 가장하고, 때론 분노를 삭히고, 늘 상냥한 태도로, 고객을 관리하고 자신의 뒤를 봐줄 인맥들을 관리해야 하니까. 그러므로 성공하는 자는 꾸미는 자이다. 잘 나가는 상표의 의상을 걸치고, 머리칼은 무쓰를 발라넘기고, 한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당당하고도 세련된 몸짓을 보여야 한다. 헐거운 복장은 당신의 헐거운 의식을 대변한다. 어깨에 내려앉은 비듬은 당신이 스스로의 관리에 얼마나 허술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다. 그러므로 성공한 자들은 자신을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 쳐진 엉덩이와 기름기로 팽팽해진 복부에서 민첩함과 엄격함을 찾을 수는 없다. 뛰고 땀흘려라. 건강은 성공하는 자의 필수품이다.

  러나, 자신의 내면의 요구와 성향에 응답하지 않고, 그것을 외면함으로써 달성되는 성공은 어쩔 수 없이 자기를 소외시킨다는 것이 저자, 플라트너의 진단이다. 독일의 교육학자이자 심리학자이면서 뮌헨에서 심리치료실을 열어 심리치료사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임상적 경험을 쌓은 플라트너는 현대인들이 받는 스트레스에 주목한다. 사회적인 성공, 부, 명예, 화려한 경력 등이 행복의 기준이 되어버린 오늘날, 그것들이 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성공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고 저자는 묻는다.

  방송국의 프로그램 <성공시대>는 분식회계, 변칙증여, 탈세 등을 일삼았더라도 일단 국부(國富)의 증진에 이바지했다면 기꺼이 그들을 성공한 자들로 분류하였다. 가장과 남편으로서의 도덕성이야 어찌 됐든, 일단 큰 부를 달성한 자들은 성공한 자의 부류에 합류시켰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프로그램의 주류는 역시 물질적으로 성공한 자들이었다. 부와 명성이 없어도, 비록 그가 이름 없는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제 신념과 양심에 따라 살아간 자들을 발굴하여 그에게 성공의 이름을 붙여주는 적극적인 취재 의식을 그 프로그램에서 찾아볼 수는 없었다. 이런 프로그램은 무의식중에 성공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다. 성공을 하려거든 부를 얻어라. 최소한 명성을 얻어라.

  런 풍토 속에서 어떻게 쉽게 돈을 벌 것인가. 어떻게 쉽게 성공할 것인가를 화두로 삼는 경영서적들의 출간이 봇물을 이루는 것은 당연지사. '부자가 되는 법 시리즈', '~을 알면 돈이 보인다 시리즈'와 같은 실용서, 처세술 관련 서적은 출간과 함께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쉽게 합류한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와 같은 책은 제목에서부터 양자택일의 삶을 강요한다. 사뭇 위협적이다. 경영과 처세술에 관련된 책들이 말하는 자기혁신이란 곧 성공의 조건에 맞게 너를 개조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삶의 본질을 묻는 자, 왜, 라고 묻는 자에게까지 그 명령은 유효한 것은 아니다. 『가장 소중한 것부터 버려라』의 저자, 플라트너는 우리에게 그런 명령에 휘둘리지 말 것을 권장한다. 저자는 말한다. 방하착(放下着)! 버리면, 삶은 그 이상의 것을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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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에서 왕으로 - 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 - 카이에 소바주 2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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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무엇이 야만인가


    개조차 퍼덕일 수 없는 비좁은 닭장 안의 닭들에겐 엄청난 양의 성장호르몬제가 투여된다. 인간으로 치자면 갓 태어난 아이를 18주만에 650킬로그램의 거구로 만들 수 있는 양의 호르몬이 닭들에게 투여된단다. 말 못하는 닭들로서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게다. 스트레스 때문에 부리로 상대방을 쪼아 죽일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에 양계장의 닭들의 부리는 모두 잘라 버린다. 심신이 온전할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그들에겐 병들 권리조차 없다. 엄청난 양의 항생제가 그들에게 투여되기 때문이다. 양계장의 조명도 닭들을 혹사한다. 몸집을 불려놓고 보자는 인간의 얄팍한 계산으로 양계장에는 불이 꺼지지 않는다. 조명이 켜져 있는 한 닭들은 밤을 낮으로 알고 모이를 먹는다.

    혹독한 문명의 시련만 있을 뿐, 양계장 어디에도 닭들을 위한 배려는 없다. 사정은 소나 돼지의 경우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의 폭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자연과 인간의 힘을 재는 저울이 있다면 저울은 인간 쪽으로 기울어져도 한참 기울어져 있다. 엄청난 비대칭성이다.

일본의 유명 출판사인 고단샤(講談社)에서 발행 중인 '카이에 소바주(Cahier Sauvage:야생적 사고의 산책)' 시리즈는 신세대에게 교양인문학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기획한 것으로,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의 대학 강의를 기록한 것이다. 총 다섯 권으로 예정되어 있으며 동아시아 출판사에 모두 출간할 예정이다.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에 이은 두 번째 권, 『곰에서 왕으로』에서는 국가라는 야만적인 권력이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나카자와의 책에 의하면 신화 시대에는 자연과 인간이 서로 존중하고 호혜성의 관계를 지키며 공존했다. 인간과 동물이 결혼을 하기도 하고, 곰은 언제나 자신의 가죽만 벗으면 인간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가령, 북미의 톰슨 인디언들은 연어를 잡아 살과 내장을 깨끗이 먹은 후에 남은 뼈나 껍질도 정성스럽게 다루었다. 쓰레기장 같은 곳에 함부로 버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들은 예를 갖추고 가능하면 뼈를 부러뜨리지 않도록 해서 조심스럽게 강에 흘려보냈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은혜만큼 자연에 돌려준다는 ‘대칭성’의 사고가 톰슨 인디언을 지배했다.

    신화의 시대, 인간은 결코 자연 위에 일방적으로 군림하지 않았다. 인간은 조금도 특별할 것이 없는 생명의 일원일 뿐이었다. 신화가 일상적으로 이야기되던 사회에서 인간이 동물에 비해 일방적인 우위에 있거나, 구체적인 인간 관계를 초월한 권력 같은 것이 사람들에게 강압적인 힘을 휘두르는 일도 없었다. ‘대칭성’의 사회에서는 권력은 원래 인간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에서 빌려온 것일 뿐이었다.

    문제는 기술이었다. 신석기 후기에 새로운 문명의 도구가 만들어지자,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 대칭관계가 파괴되고 힘이 한쪽으로 기우는 비대칭의 관계가 형성된다. 이 위계질서 위에서 왕이 출현하고 국가가 태어났으며, 증여와 교감과 소통은 지배와 폭력과 착취로 대체됐다. 문명화 과정은 이 비대칭의 저울을 극단적으로 한쪽으로 쏠리게 했다. ‘야만’의 땅에 ‘문명’을 심어준다는 명분으로 제국주의는 식민주의의 손길을 뻗쳤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던가. 수많은 제3세계의 인민들이 학살당하고, 원시의 신화를 간직한 아름드리 수목이 잘려나가고 동식물이 떼죽음을 당하지 않았던가. 나카자와 신이치가 말하는 이른바 자연과 인간의 ‘비대칭성’이 초래한 재앙이다. 지식을 축적한 인간이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대칭성을 무시하고 권력을 독점하면서 스스로 왕이 되려는 자가 나타나고 국가를 형성하면서 ꡐ야만ꡑ의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나카자와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학문적인 흥취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신화를 읽는다는 것은 현재와 직결되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의 시대가 절실하게 신화를 요청하고 있다는 말이다. 니카자와는 우리의 ‘문화’적인 생활이 ‘야만’의 행위의 기초 위에 성립되어 있다고 단호히 말한다. 자연과 공존하고, 서로 주고받는, 상생과 호혜의 관계가 아닌 일방적인 착취의 관계 위에 세워진 것이 우리의 문명이라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의 쾌적한 생활을 위해서 그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견디기 힘든 고통이나 죽음을 맛보아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풍요로운 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혹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 형성된 이런 ‘비대칭성’의 현실에 현대인들은 무감각하다. 신화는 그저 까마득한 시대의 옛이야기일 뿐이다.

    신식 화기와 첨단 레이저로 무장한 사냥꾼은 진정한 사냥꾼일 수 없다. 백 전의 싸움에서 백 승을 하는 사냥꾼은 사냥꾼이 아니다.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것이 진정한 싸움이다. 싸움의 미학이 있다면 그것은 승패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긴장의 미학이다. 일방적인 승리로 귀결되는 싸움은 싱겁기 그지없는 싸움이다. 닭싸움이나 개싸움도 그보다는 낫다.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확률을 가진 ‘대칭적’인 싸움, 그러한 싸움만이 진정한 싸움이다. 패배를 모르는 싸움은 일방적인 테러일 뿐 진정한 싸움은 아니다. 기술과 문명으로 인간은 많은 것을 얻었지만 진정한 싸움꾼의 윤리와 야성을 잃은 지는 이미 오래다.

    신화는 인간이 잃어버린 윤리와 야성의 기록이다. 야만의 시대, 그래서 신화를 읽는 것은 아리기 그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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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2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리뷰 멋진데요^^이번에 신의 괴물이라는 책이 나왔던데, 왜 신은 식인동물을 만들었는가 뭐 그런 카피가 있던데 재밌지 않을까요?

감각의 박물학 2004-10-23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아시아 신화관련책은 모두 재미있던 걸요
 
울지 않는 늑대
팔리 모왓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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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문화의 미덕을 일깨워준, 『울지 않는 늑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 중에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한데, 사람이 귀한 까닭은 오륜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유학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다석 유영모 선생은 어떤 책에선가 인류가 멸망한다고 해서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지구의 장구한 역사에 견주어 볼 때 인류의 역사란 아주 미미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므로 인류의 멸망은 본래의 지구 질서로의 복귀일 뿐이라고 태연히 말하는 철학자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야말로 양보할 수 없는 가치임을 굳게 믿는 사회 속에서 이런 선각자들의 발언은 다소 생경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홉스는 자연 상태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만 있고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늑대이므로 평화를 얻기 위해 자연권을 지배자에게 위양해야한다고 했다. 홉스의 늑대는 냉정한 킬러의 이미지다. 자신의 생존 이외에는 안중에도 없는 철저한 이기주의자의 모습이다. 하지만 『울지 않는 늑대』의 저자, 팔리 모왓(Farley Mowat)이 말하는 늑대는 홉스를 비롯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늑대의 이미지가 터무니없는 오류에 근거한 믿음임을 역설한다. 모왓은 우리가 믿고 있는 늑대에 대한 신화가 인간 자신의 죄와 비겁의 투영일 뿐이라고 말한다.

팔리 모왓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인류의 파멸상을 보고 전쟁의 충격에 빠져 고통을 겪었던 모양이다. 그는 수차례 북극을 찾아가 머물면서 에스키모와 인디언들의 참상을 보고 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각을 평생 갖게 되었다고 한다. 주변적인 존재에 대한 따뜻한 시각, 『울지 않는 늑대』에서 독자들이 만날 수 있는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대학 졸업후 공무원이었던 모왓은 한 달에 120달러라는 넉넉한 급여에 채용되어 "순록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인간을 해치기까지 하는 포악한" 늑대를 조사하라는 캐나다 야생생물보호국의 지시를 받는다. 이후 모왓은 늑대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바로 옆에서 1년을 보내게 된다. 『울지 않는 늑대』는 바로 그때의 기록이다. 그런 만큼 이 책은 철저한 경험적 관찰의 산물이다.

모왓의 관찰 결과는 의외였다. “수백년 묵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늑대에 대한 사람들의 통념은 명명백백히 거짓말이라는 깨달음이 내 마음 밭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일주일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나는 모두 세 번씩이나 이 ‘포악한 킬러’들의 손에 완전히 내맡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내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놓으려 하기는커녕 나에게 모욕에 가까운 절제력을 보여주었다”라고 모왓은 쓰고 있다.

늑대의 실체에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인디언 친구 ‘우텍’이었다. 늑대를 자기의 친족처럼 생각하고 있는 우텍은 문명의 사람이 아니라 신화의 사람이었다. 순록이 늑대를 먹여주면, 늑대는 순록을 튼튼하게 해주는 상생의 관계에 있으므로, 순록과 늑대가 하나라는 신화를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우텍의 믿음은 정당한 것이었다. "늑대는 먹이가 되는 생물종의 장기적인 안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인류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며, 가축에게 입히는 손해는 아주 적은 정도이며, 대개의 경우 인간의 거주지나 농업 시설 가까이에는 살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모왓의 관찰 결과였다.

모왓이 본 늑대는 단지 피에 굶주렸다는 이유로 순록을 함부로 해치지 않았다. 또 늑대는 자기 마음대로 순록을 사냥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도 않았다. 우텍은 모왓에게 건강한 어른 순록이 늑대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다고 말해준다. 심지어 태어난 지 3주가 된 아기 순록도 가장 빠른 늑대를 따돌릴 수 있으므로 순록은 보통의 경우 늑대들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도 모왓은 우텍으로부터 전해듣는다. 통념을 깨는 우텍의 발언,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늑대는 순록 사냥을 할 때 여러 방식으로 테스트한 후 열등한 순록만을 사냥한다는 사실, 배고프지 않을 때에는 사냥하지 않는다는 사실, 절대로 재미로 사냥감을 죽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모왓은 알게 된다. 게다가 늑대는 자기의 새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매일 밤 사냥을 나가고, 사냥한 음식물을 몸 속에 저장한 채 굴에 들어와서는 게워내어 새끼들을 먹이는 자상한 부양자이기도 하였다.

“순록이 늑대를 먹여 살려. 하지만 순록을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건 늑대야. 늑대가 없다면 순록도 금방 없어져버릴 건 뻔한 사실이야. 나약함이 퍼져 모두 죽을 테니까.”라는 우텍의 믿음은 그 어떤 생태학자의 믿음보다 생태학적 진실에 접근해 있었다. 자연과 공존하고, 서로 주고받는, 상생과 호혜의 문화가 바로 인디언의 문화였다. 모왓이 발견한 것은 늑대의 삶이었지만 그것은 이미 인디언의 문화 속에 신화적 형태로 구현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순록을 대량 살상한 것은 늑대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순록의 뿔과 머리가 미국의 트로피 헌터(사자 머리 같이 사냥의 기념물들을 주목적으로 하는 사냥꾼)에게 충분한 미끼가 되리라 판단한 지방당국은 완전히 조직화된 사냥 원정 여행을 계획했다 그 결과는 순록의 떼죽음이었다. 그런데도 북극 순록을 도살한 것은 늑대들이라고 거짓 주장한 사냥꾼들과 모피상인들에 밀려, 정부는 늑대 한 마리당 10~30달러의 포상금을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인간은 아무생각 없이 동물 학살을 자행하는 때와 곳마다, 자기들이 죽이는 대상에 대하여 가장 악독하고 혐오스러운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종종 자기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해왔다. 학살의 명분이 모자랄수록 흑색선전은 더 심했다”라고 모왓은 말한다. 자신의 죄의식을 늑대에게 뒤집어씌우는, 인간의 적반하장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비웃는다. 그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지만 진실은 결국 모왓의 손을 들어주었다.

『울지 않는 늑대』는 늑대에 대한 생태 보고서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에 대한 신랄한 풍자의 글로도 읽힌다. 신화의 죽음 위에 세워진 인류의 문명이 얼마나 더 큰 야만으로 치달을 수 있는가를 이 책은 말해준다. 이 책으로 아메리카 인디언의 문명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면 뜻밖의 기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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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늑대
팔리 모왓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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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문화의 미덕을 일깨워준, 『울지 않는 늑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 중에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한데, 사람이 귀한 까닭은 오륜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유학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다석 유영모 선생은 어떤 책에선가 인류가 멸망한다고 해서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지구의 장구한 역사에 견주어 볼 때 인류의 역사란 아주 미미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므로 인류의 멸망은 본래의 지구 질서로의 복귀일 뿐이라고 태연히 말하는 철학자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야말로 양보할 수 없는 가치임을 굳게 믿는 사회 속에서 이런 선각자들의 발언은 다소 생경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홉스는 자연 상태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만 있고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늑대이므로 평화를 얻기 위해 자연권을 지배자에게 위양해야한다고 했다. 홉스의 늑대는 냉정한 킬러의 이미지다. 자신의 생존 이외에는 안중에도 없는 철저한 이기주의자의 모습이다. 하지만 『울지 않는 늑대』의 저자, 팔리 모왓(Farley Mowat)이 말하는 늑대는 홉스를 비롯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늑대의 이미지가 터무니없는 오류에 근거한 믿음임을 역설한다. 모왓은 우리가 믿고 있는 늑대에 대한 신화가 인간 자신의 죄와 비겁의 투영일 뿐이라고 말한다.

팔리 모왓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인류의 파멸상을 보고 전쟁의 충격에 빠져 고통을 겪었던 모양이다. 그는 수차례 북극을 찾아가 머물면서 에스키모와 인디언들의 참상을 보고 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각을 평생 갖게 되었다고 한다. 주변적인 존재에 대한 따뜻한 시각, 『울지 않는 늑대』에서 독자들이 만날 수 있는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대학 졸업후 공무원이었던 모왓은 한 달에 120달러라는 넉넉한 급여에 채용되어 "순록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인간을 해치기까지 하는 포악한" 늑대를 조사하라는 캐나다 야생생물보호국의 지시를 받는다. 이후 모왓은 늑대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바로 옆에서 1년을 보내게 된다. 『울지 않는 늑대』는 바로 그때의 기록이다. 그런 만큼 이 책은 철저한 경험적 관찰의 산물이다.

모왓의 관찰 결과는 의외였다. “수백년 묵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늑대에 대한 사람들의 통념은 명명백백히 거짓말이라는 깨달음이 내 마음 밭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일주일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나는 모두 세 번씩이나 이 ‘포악한 킬러’들의 손에 완전히 내맡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내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놓으려 하기는커녕 나에게 모욕에 가까운 절제력을 보여주었다”라고 모왓은 쓰고 있다.

늑대의 실체에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인디언 친구 ‘우텍’이었다. 늑대를 자기의 친족처럼 생각하고 있는 우텍은 문명의 사람이 아니라 신화의 사람이었다. 순록이 늑대를 먹여주면, 늑대는 순록을 튼튼하게 해주는 상생의 관계에 있으므로, 순록과 늑대가 하나라는 신화를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우텍의 믿음은 정당한 것이었다. "늑대는 먹이가 되는 생물종의 장기적인 안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인류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며, 가축에게 입히는 손해는 아주 적은 정도이며, 대개의 경우 인간의 거주지나 농업 시설 가까이에는 살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모왓의 관찰 결과였다.

모왓이 본 늑대는 단지 피에 굶주렸다는 이유로 순록을 함부로 해치지 않았다. 또 늑대는 자기 마음대로 순록을 사냥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도 않았다. 우텍은 모왓에게 건강한 어른 순록이 늑대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다고 말해준다. 심지어 태어난 지 3주가 된 아기 순록도 가장 빠른 늑대를 따돌릴 수 있으므로 순록은 보통의 경우 늑대들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도 모왓은 우텍으로부터 전해듣는다. 통념을 깨는 우텍의 발언,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늑대는 순록 사냥을 할 때 여러 방식으로 테스트한 후 열등한 순록만을 사냥한다는 사실, 배고프지 않을 때에는 사냥하지 않는다는 사실, 절대로 재미로 사냥감을 죽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모왓은 알게 된다. 게다가 늑대는 자기의 새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매일 밤 사냥을 나가고, 사냥한 음식물을 몸 속에 저장한 채 굴에 들어와서는 게워내어 새끼들을 먹이는 자상한 부양자이기도 하였다.

“순록이 늑대를 먹여 살려. 하지만 순록을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건 늑대야. 늑대가 없다면 순록도 금방 없어져버릴 건 뻔한 사실이야. 나약함이 퍼져 모두 죽을 테니까.”라는 우텍의 믿음은 그 어떤 생태학자의 믿음보다 생태학적 진실에 접근해 있었다. 자연과 공존하고, 서로 주고받는, 상생과 호혜의 문화가 바로 인디언의 문화였다. 모왓이 발견한 것은 늑대의 삶이었지만 그것은 이미 인디언의 문화 속에 신화적 형태로 구현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순록을 대량 살상한 것은 늑대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순록의 뿔과 머리가 미국의 트로피 헌터(사자 머리 같이 사냥의 기념물들을 주목적으로 하는 사냥꾼)에게 충분한 미끼가 되리라 판단한 지방당국은 완전히 조직화된 사냥 원정 여행을 계획했다 그 결과는 순록의 떼죽음이었다. 그런데도 북극 순록을 도살한 것은 늑대들이라고 거짓 주장한 사냥꾼들과 모피상인들에 밀려, 정부는 늑대 한 마리당 10~30달러의 포상금을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인간은 아무생각 없이 동물 학살을 자행하는 때와 곳마다, 자기들이 죽이는 대상에 대하여 가장 악독하고 혐오스러운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종종 자기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해왔다. 학살의 명분이 모자랄수록 흑색선전은 더 심했다”라고 모왓은 말한다. 자신의 죄의식을 늑대에게 뒤집어씌우는, 인간의 적반하장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비웃는다. 그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지만 진실은 결국 모왓의 손을 들어주었다.

『울지 않는 늑대』는 늑대에 대한 생태 보고서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에 대한 신랄한 풍자의 글로도 읽힌다. 신화의 죽음 위에 세워진 인류의 문명이 얼마나 더 큰 야만으로 치달을 수 있는가를 이 책은 말해준다. 이 책으로 아메리카 인디언의 문명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면 뜻밖의 기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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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장의 사진 - 내 마음속 사진첩에서 꺼낸
박완서 외 지음 / 샘터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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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바랜 사진, 그 속의 시간들




    영화 <팔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시한부 생명인 한석규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카메라 앞에 앉는다. 살아있음의 한 순간을 기록하기 위함이다. 사진은 보여준다. 생의 한 순간을 영원의 압핀으로 고정하고 싶은 서글픈 한 인간의 욕망을. 그러나 한 장의 사진은 그대로 향불 앞에 놓이는 영정의 사진이 되기도 한다. 그 사진은 말한다. 나도 한때는 당신들과 같이 그곳에 있었다.

    모든 사진은 생명의 한 순간을 기록한다. 그것은 아주 짧은 찰나의 기록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살고자 하는 소망의 기록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 앞에서 인간의 꿈은 덧없다. 우리는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그 덧없음에 저항해본다. 그러나 소멸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 모든 것은 낡아가고 희미해져 간다. 어떤 것도 제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어떤 것도 세월 속에서 견고한 윤곽을 유지할 수 없다. 풍화의 운명 앞에선 존재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사진마저도 조금씩 빛이 바래간다. 

   햇볕이 환한 여름날이었을까. 사진 속의 어머니는 웃고 계신다. 어머니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는 말인가. 처녀인 어머니는 아름답다. 이제 저 눈부신 어머니의 아름다움은 부재한다. 그러나 사진 속에서의 어머니는 영원한 처녀다. 그 어머니는 늙지 않는다. 지금은 없는 것들이 여기에는 존재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 사진의 비밀이다. 우리는 한 장의 사진을 보면서 지금은 내게 없는 것들과 이미 흘러가 버린 한 시절을 생각한다. 젊고 미끈한 아버지, 수줍은 미소를 짓는 어머니, 소풍, 운동회, 수학여행, 첫사랑, 입영전야… 단 한 번뿐이었던 시간들을 사진은 재생시킨다. 정말 그때 그랬단 말인가. 가벼운 탄성이 튀어나온다.

    "……너의 방안을 정리하다가 내 사진이/혹시 나오면 넌 그냥 찢고 마는지/한참을 바라보는지/ 또 우울한 어떤 날/비마저 내리고 늘 우리가 듣던 노래가/라디오에서 나오면 나처럼 울고 싶은지……." 김장훈의 <나와 같다면>이란 노래의 한 대목이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이 사진 속에는 있다. 없는 것이 확실한데도 사진 속에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아이러니! 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으며 닿을 수 없는 것들에 닿았다고 안도해 보지만 사진 한 장으로 해서 부재는 더욱 확고해 진다. 설상가상으로 비마저 부슬부슬 내린다.

    촬영한 필름을 인화하기 전까지는 잘 찍혔는지 마음을 졸여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디지털카메라엔 그런 불안이 없다. 필름에 빛이 들어가 한 장의 사진도 건지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다. 디지털카메라는 촬영한 사진을 카메라의 모니터를 통해 바로 확인이 가능하다. 컴퓨터 폴더에 사진을 저장해 놓고, 모니터를 통해 언제든 사진들을 불러내어, 이리저리 오려붙이고 뿌옇게 뚜렷하게 변형해보고 사진으로 한참을 놀 수 있다.

    이제 사진은 심각하지 않다. 카메라 앞에서 먼 산을 바라보며 고상한 폼을 잡던 시절도 지났고, 가족이나 애인의 사진을 수첩 속에 끼워 놓을 만큼 사진을 애지중지하는 사람들도 없다. 이제 사진은 가벼울 대로 가볍다. 사진을 대하는 젊은이들을 보라. 필름에 빛이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 따위는 없다. 혹시 사진이 잘못 나오면 어떨까 하는 조바심도 없다. 잘못 나오면 다시 찍으면 그만이다. 설령 잘못 나오더라도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으로 적당히 손질을 할 수 있다. 메모리 카드의 용량이 충분하니 얼마든 찍을 수 있다. 얼마든 찍을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찍을 수 있다는 말이다. 강의를 하는 선생님도 찍을 수 있고, 나의 누드도 찍을 수 있고, 타인의 몸을 몰래 찍을 수도 있다. 사진은 이제 놀이요 유희다. 사진은 이제 심각하지 않다.

    그러나 『이 한 장의 사진』은 가볍지 않다. 『이 한 장의 사진』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인 스물 아홉 명이 간직하고 있는 사진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묶은 산문집이다. 사진 속에는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이 있고, 불행했던 청춘과 스무 살의 좌절이 있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부모님과 친구들, 연락이 끊긴 친구들의 기억들을 불러내는 초혼제(招魂祭). 사진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표정을 짓고 있다. 그 표정을 어떤 이는 아름다움으로 기억하고 또 어떤 이는 쓸쓸함으로도 기억하고 더러는 뼈아픈 슬픔으로도 기억한다. 물들여 입은 군복처럼 궁색한 날들의 이야기, 유랑극단의 배우처럼 촌스러운 날들의 이야기를 이 책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10여 년 전 손녀와 찍은 사진을 찾아낸 소설가 박완서는 손녀에게 공들여 글자를 가르쳤던 추억을 끄집어낸다. 박씨는 더디게 한글을 깨우치는 손녀를 위해 손녀를 주인공으로 삼은 동화책을 썼다. 아이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는지 할머니가 쓴 동화책을 읽어달라 자꾸만 재촉했고, 차츰 글자도 깨치게 됐단다. 그 손녀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할머니의 마음이 어떨까. 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 그 할머니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손녀의 마음은 어떨까.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이 황량한 사막에서 어떤 사진은 갑자기 나에게 찾아와 나를 흥분시키고, 또 나는 그 사진을 흥분시킨다. 그러므로 내가 사진을 존재케 하는 매력을 열거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방식에 의해서이다. 즉 그것은 흥분시키기이다. 사진 그 자체는 조금도 흥분되지 않지만, 그러나 사진은 나를 흥분시킨다. 이것이 바로 모든 모험의 행위이다.

    어떻든 사진은 그것을 보는 이를 흔들고, 격발시키고, 찌른다. 사진을 들여다보는 일은 영원할 수 없는 사랑을 확인하는 일, 바로 그 아픔을 즐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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