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에 있는 락바인 크로스아이(Cross Eye)에 가면 영진이가 이 음악을 틀어준다.
어떻게 내가 내가 이 음악을 좋아하는지 알까 궁금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는 나를 위해 이 음악을 틀어준다.
가장 우울했던 시절에 듣던 음악이다.
이 음악을 들으며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어두웠던 20대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터널의 바깥이라고 해서 밝지는 않았다.
여전히 밤이었는지도 몰랐다.
 
The load-out에  업템포로 이어지는 Stay!
특히 Stay에선 여성 보컬이 함께 하면서 잭슨 브라운과 묘한 매치업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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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언어 - 에드워드 홀 문화인류학 4부작 -1 이상의 도서관 50
에드워드 홀 지음, 최효선 옮김 / 한길사 / 200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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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내 식으로 세상을 보기 위한 첫걸음


침묵의 언어  문화인류 학자 에드워드 홀의 저서,『침묵의 언어』는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전하고 있다. 홀이 리오그란데 부근의 푸에블로 인디언 마을의 크리스마스 무도회에 참석했을 때 겪었던 이야기가 그것이다. 추위를 참으며 아무리 기다려도 무도회는 시작되지 않더란다. 여러 백인 참석자들은 우리 식의 표현대로라면 그야말로 '눈이 빠지게'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러나 도대체가 시작할 기미가 없더라는 것이다. 기다리다 못해 거의 기진맥진해 있을 무렵,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북소리가 나며 무도회가 시작되더라는 것이다. 그런 일을 경험한 후 몇 년이 지나도록 건전한 상식(?)을 지닌 백인들은 그 의식이 언제 시작되는지 감히 예측할 수 없었다고 한다. 무도회는 어떤 특정한 시각에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무도회는 어떤 특정한 스케줄에 따라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인디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태가 무르익었을 때'시작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태가 무르익었을 때? 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시간 관념을 우리네 시간 관념으로 재단하여 가타부타하는 것은 온당한 일일까.

  어쩌면 우리는 기계적 분절에 의해 만들어진 시간을 살기 훨씬 이전부터 푸에블로 인디언식의 시간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사태가 무르익었을 때', 파종을 하고, 곡식이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 추수를 했고, '사태가 무르익었을 때' 결혼을 했고, 달이 충분히 찼을 때, 아기를 낳지 않았던가. 생각건대 여름은 충분히 여름의 신고(辛苦)를 겪었을 때, 비로소 가을을 맞이하고, 겨울은 충분히 겨울의 고통을 겪었을 때, 비로소 봄을 맞이한다. 그러니 계절의 순환을 주관하는 심판자에겐 '사태가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를 판단하는 각별한 인식장치가 있음에 틀림이 없다. 때가 되면 여자아이들의 가슴이 볼록해지고 사내아이들의 목젖이 굵어지는 것도 조물주의 시간 인식 장치가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말해준다. 아무튼 자연엔 다 때가 있는 법이니, 그 '때'를 알아보는 푸에블로 인디안의 감식력을 두고 원시적이니 뭐니 하는 가타부타의 문화론도 온당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소나기가 그친 여름하늘의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코끼리와 돌고래와 자동차의 형상을 구름 속에서 찾아내던 시절, 시간은 달팽이의 보행을 닮아 참으로 더디게 흘러갔다. 모든 것이 경이(驚異)였고 모든 것이 신비였다. 땅 끝 너머는 무엇일까, 우주에 끝이 있다면 그 끝의 너머는 무엇일까, 나는 정말 엄마의 배꼽에서 온 것일까, 땅강아지들은 어떻게 땅 속에서 눈을 뜨고 살아갈까. 강아지들도 꿈을 꿀까, 백두산 천지에 빠지면 친구들 말대로 바다로 흘러나올까, 모든 것이 궁금했던 시절, 시간은 아주 더디게 흘러갔다. 보아야 할 것도 많았고, 느껴야 할 것도 많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호기심의 영역은 급속도로 영토를 좁혀가기 시작했다. 하늘의 뭉게구름에서 형상을 읽어내던 버릇도 사라져버렸다. 그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열하일기  정민 교수의 『책읽는 소리』를 읽다보니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그 아버지의 생전 기억을 적은 책『과정록(過庭綠)』에서 아버지의 한 말씀을 전한다. " 아무리 지극히 미미한 물건, 예컨대 풀이나 짐승이나 벌레라도 모두 지극한 경지가 있으니, 조물주가 만든 자연의 현묘함을 볼 수가 있다." 이런 구절대로라면 박지원은 어른이 되어서도 세상에 대한 신비와 경이의 시선을 잃지 않은 듯하다. 박종채는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한다. " 매양 냇가 바위 위에 앉아 들릴 듯 말 듯 읊조리거나 느릿느릿 걷다가 문득 멍하니 무엇을 잊어버린 듯하셨다. 때로 오묘한 깨달음이 있으면 반드시 붓을 잡고 기록을 해서, 깨알같은 글씨로 쓴 조각조각 종잇장들이 상자에 가득 차고 넘쳤다." 이런 구절을 두고 박지원의 사실주의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건 전적으로 해석자의 자유다. 나는 이런 대목에서 그의 천진난만한 시선, 호기심에 가득 찬 어린 아이의 시선을 읽는다. 그의 눈은 대충 보아 넘기는 법이 없다. 『열하일기』 하나만 보아도 그렇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챙긴다. 길가에서 본 사소한 풍경, 여관방에 씌어진 낙서, 중국 여자의 헤어스타일이나 장신구 등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보고 그것을 적었다. 둔필승총(鈍筆勝聰), 둔한 붓이 총명한 기억력을 이긴다던가.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것도 모자라 그는 깨알같은 글씨로 메모를 했다.

책읽는 소리  『책읽는 소리』가 말해주는 이덕무 또한 박지원에 버금가는 꼼꼼한 시선의 소유자였고 메모광이었다 ."4, 5월에 숲이 무성해지고 과실이 갓 열려 새들이 우지질 때, 여린 파초잎을 딴다. 파초 잎새의 줄기 사이에 왕유(王維)의 `망천절구(輞川絶句)`를 미불의 글씨체로 쓴다. 넓은 파초잎에 가득 써진 글씨가 예뻤던지 곁에 있던 꼬마가 갖고 싶은 눈치를 보인다. 파초잎을 꼬마에게 냉큼 주면서 대신 호랑나비를 잡아오게 한다. 호랑나비의 머리와 더듬이, 눈과 날개에 어려있는 금빛과 푸른빛을 한참동안 찬찬히 살펴보다가 산들바람 사이로 날려 보낸다." 호랑나비의 머리와 더듬이, 눈과 날개에 어려있는 금빛과 푸른빛을 세밀하게 볼 줄 아는 눈, 우리가 잃어버린 저 유년의 시선이다. 경이와 신비를 읽어낼 수 있었던 눈. 이덕무는 그 눈으로 보고 메모해 두었던 것을 모아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라는 책을 묶었다고 한다.

  박지원이나 이덕무나 그들은 결코 세상을 빠르게 지나쳐 갈 수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다. 여기저기 한눈을 파는 아이들처럼 그들은 사소한 사물 하나에도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진다. 잔뜩이나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 속에서 시간은 아주 차분하고 정갈한 호흡을 가진다. 그러나 박지원이나 이덕무의 눈은 바쁘기 그지없다. 「면앙정가」를 쓴 송순 또한 바쁘기로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 그는 「면앙정가」에서 노래했다. " 인간 세상을 떠나와도 내 몸이 한가로울 겨를이 없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쏘이려 하고, 달도 맞으려고 하니, 밤은 언제 줍고 고기는 언제 낚으며,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떨어진 꽃은 누가 쓸 것인가?" 대단한 유머요 역설이다. 자연 속에서 전혀 한가롭지 않다는 얘기다. 볼 것도 많고 느낄 것도 많은데 한가로운 시간이 어디 있냐는 얘기다. 저 선인들의 삶 속에는 이렇듯 한가로움과 분주함이 하나의 시간 속에 잘 녹아들어 있다. 그들은 분주했으면서 동시에 한가로웠으며 한가로우면서 또한 바쁘기 그지없었다.

  『책읽는 소리』에는 탐닉하고 싶은 구절들이 여럿 눈에 띈다. "`미로득한방시한(未老得閑方是閑)" 젊었을 때 얻는 한가로움이라야 진정한 한가로움이란 뜻이다. 다 늙어 한가로운 것은 할 일이 없는 것이지 한가로운 것이 아니며,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한가로움이라는 얘기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말이 쉽다. 이리 묶이고 저리 묶인 범인(凡人)들로선 언감생심. 어디 그게 될 법이나 한 얘긴가. 한가로움 하나 쟁취하는 데도 어지간한 내공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레 포기할 일은 아니다. 말을 배우는 아이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 적이 있다면 경이를 느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고갈된 것은 아닐 것이다. 노랗게 변해버린 은행나무의 거리를 범상치 않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신비를 느낄 수 있는 우리의 신경이 무뎌진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네 삶을 관통하며 우리의 활동을 조직하고 종합하고 통괄하는 시간, 우리의 능력과 성과를 판단하는 척도로서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잃은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러한 신비의 시선, 경이의 시선이 아닐까.

  좋은 글이 우리를 충만하게 한다면 그것은 좋은 글이 지니는 풍부한 시간성 덕분이리라. 박지원이나 이덕무의 글은 우리가 지나쳐 온 것들을 우리에게 다시 보여준다. 거기에는 우리가 지나쳐버린 시간들이 풍부하게 고여있다. 그들은 사물의 단순한 외양만이 아니라 그것의 얼개와 구조까지를 세세하게 보여준다. 박지원이 까마귀의 빛에 대해서 쓴 글을 보자. "아! 저 까마귀를 보면 깃털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그러나 홀연 유금(乳金)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석록(石綠)빛으로 반짝인다.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하더니 비췻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또한 괜찮을 것이다. 저가 본디 정해진 빛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어찌 그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리오.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 버린다. " 까마귀가 검다고 하는 것은 까마귀를 본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검다는 관념을 본 것이라는 얘기다. 세심한 눈은 관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본다. 오직 게으른 눈만이 실체를 보지 않고 관념을 볼 뿐이다. 우리가 배웠던 지식,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관념체계가 우리의 시각을 무디게 한 것은 아닌지. 지식이란 눈가리개 덕분으로 우리는 세계를 아주 편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사물의 실체를 볼 수 없게 된 것은 아닌지.

  시는, 이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시는 새롭게 보는 기술이다.>라는 정의는 어떨까 싶다. 매일 보아오던 인식에 균열을 주어 사물을 새로운 질서 속에 드러내는 일이 시쓰기는 아닐까. 아무튼 정의의 적실성 여부는 차치하고, 이런 정의대로라면 까마귀를 까맣다고만 보지 않은 박지원의 눈이야말로 시인의 눈이 아닌가 싶다.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지만 따지고 보면 그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세상은 이러저러하다는 관념은 내 나름대로의 판단력을 요구하지 않으니 기성의 관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손 안 대고 코푸는 방식일 것이다. 내 식으로 세상을 보겠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내 식으로 세상을 정의하고 규정하기엔 역부족이다. 빨리 투항해버리는 것이 낫다. 하지만 우리에겐 든든한 우군이 있다. 박지원의 책이 있고 이덕무의 책이 있다. 뿐이랴 도서관엔 '잘 느낄 수 있는 영혼'과 '예리하게 사물의 핵심을 파고 들었던 시선'으로 세상과 사물을 꼼꼼하게 기록한 선배들의 기록들이 있다. 책장을 열어 그들의 목소리에 나의 눈과 귀를 주는 것은 새롭게 세상을 보기 위한 첫걸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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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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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또 다른 세계에 접속하는 일
책을 말하는 책들





<사생활의 역사>(새물결)에서 프랑스의 역사학자 로제 샤르티에는 묵독을 인쇄술과는 다른 차원의 혁명이라고 정의했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에서도, 서구의 경우 적어도 10세기 이전까지는 묵독이 일반화되지 않았다고 한다.

로제 샤르티에는 낭독에서 묵독으로, 그리고 경전에 대한 집중적인 독서에서 일반서적에 대한 광범위한 독서로의 점진적인 이행을 독서혁명이라고 부른다. 묵독의 가장 큰 특징은 독서의 형태가 개인화되었다는 점, 집단에서 벗어나 자아로의 침잠이 묵독을 통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결국 근대적 이성은 인쇄술의 혁명과 이에 따른 독서형태의 변화에 힘입은 결과라는 것이다.

나는 여름방학 내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가져다 준 복을 누렸다. 파스칼 키냐르와 폴 오스터의 소설들은 '나 자신으로 가라앉는 데' 알맞춤한 책들이었다. 그것들은 읽는 시간은 아주 지극히 사적인 내밀함을 요구했다. 아주 자폐적인 공간과 시간을 요구했다. 텍스트들은 쉽게 비밀을 드러내지 않았다. 텍스트는 뿌옇고 몽롱했다. 나는 자꾸 어떤 심연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더위가 좀 가셨을 때, 국내에 번역된 키냐르의 소설 <은밀한 생>, <떠도는 그림자>, <로마의 테라스>와 오스터의 소설 <뉴욕 삼부작>, <우연의 음악>, <리바이어던>, <환상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욕심 같아서는 '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거기서 그만 둘 것을 명령했다.

파스칼 키냐르는 <은밀한 생>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독서는 자신에 대한 망각이다. 피를 흘리면서 책을 읽기란 불편하지만 죽어가면서도 책을 읽는 것은 가능하다……책읽기는 이 세상과 어긋나고 알 수 없으며 그 자체로 좋은 다른 세계에 두뇌를 집중함으로써 또 하나의 세계에 접속되는 일이다. 그 세계가 나의 구석진 장소였다."

독서는 이 세계를 떠나 또 다른 세계와 부단히 만나는 일이라는 키냐르의 말에 나는 동의했다. 그의 말대로 독서는 '출애굽'이었다. 지금 이 땅에 만족한다면 책읽기는 없다. 어떤 식으로든 해방과 탈주를 꿈꿀 수밖에 없다.

반드시 독서는 어떤 결핍의 인식과 함께 한다. 텍스트를 통해 끝없이 자신의 공허를 채우는 일은 사랑을 갈구하는 자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파스칼 키냐르는 '사랑하다'와 '독서하다', 그리고 '음악하다'를 동일어로 본다고 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대상과 일체가 되고자 하는 행위다. 나의 공허를 채우고 싶다는 아주 내밀한 욕망이 우리를 끊임없이 텍스트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를 누비고 다녀도 공허는 채워지지 않는다. 탐서가들은 채울 수 없는 허기를 가진 자들이다.

방학이 끝나면 다시 일상의 반복이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는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러나 끊임없이 책을 통해 또 다른 세계와 접속할 수는 있다. 업무 때문에 한 번에 네 다섯 시간 길이의 '통시간'이 남지 않고 고작해야 한 두 시간 길이의 '자투리' 시간이 남을 때는 '서사'보다는 차라리 논리적인 글을 택했던 것이 내 독서의 습관이었다. 논리적 텍스트들은 휴지(休止)가 잦아도 무방했지만 소설과 같은 서사적인 미학은 고도의 집중을 요구했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시공사)을 읽었던 것도 학기 중이었고, 두껍기로 하면 리프킨의 저서에 두 배 분량에 달하는 <회의적 환경주의자>(에코리브르)를 읽은 것도 학기 중이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들 하는데, 청명하고 삽상한 날씨에 독서는 좀 억울하다. 하늘을 보고, 바람을 맞고, 가을꽃들의 개화를 지켜보고, 열매의 탐스러움에 눈을 여는 일이 가을에 할 일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가을에도 어떤 결핍은 있기 마련이다. 생명 있는 것들이 탐스러워질수록 내면은 더 휑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발언들이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등식을 낳지는 못한다. 따지고 보면 어느 계절하나 독서의 계절 아닌 것이 없다. 존재를 갱신하는 일, 존재를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에 편입시키는 일을 계절을 가려서 한다는 일이 어찌 보면 우습다.

꽤 읽었다 하는 사람들도 좌충우돌하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독서의 내공이 조금 쌓인 사람들이라면 제 나름대로의 독서의 길이 있기 마련이다. 독서의 길은 부단한 시행착오의 결과다. 이 책이다 싶었는데 아니다 싶으면 저 책으로, 그것도 아니면 또 다시 다른 책으로, 이런 식으로 책과 책의 고랑을 건너 뛰다보면 책을 보는 눈이 좀 길러질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도 고역이다 싶을 때는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궁리)의 저자인 출판칼럼니스트 표정훈은 책을 고르고 읽는 기본적 방법부터 책을 쓰거나 번역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충고, 성공적인 교양도서와 전통적인 출판사, 주요 유형별 책의 특성, 정보화 시대와 지식 고속도로에서의 책읽기 등 책과 관련된 그의 생각을 말한다.

이권우의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도 이와 비슷한 책이다. 이권우는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의 독서연수에서 김진경의 발언을 빌려 이런 강연을 한다.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정보화 사회는 지식의 카스트 제도를 출현시킬 위험이 있다. 이런 시대에 독서운동을 하는 자세에 일대 변화가 있어야 한다. 낭만적이고 일시적이고 국어교사이기 때문에 관례적으로 독서운동을 한다는 자세에서 벗어나 청소년들이 새로운 사회에서 계급적으로 소외세력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미리 막기 위해 독서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청할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최성일의 책, <테마가 있는 책 읽기>(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는 이권우나 표정훈의 책과는 다소 성격이 다르다. '의료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돕는 책들, 팔레스타인에 관한 책들, 녹색정치를 다룬 책들, 아나키즘 관련서……' 등의 부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현실에 대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최성일의 텍스트들이 가지는 독특한 성격이다.

출판관계 저널에 연재한 글을 묶은 것으로 유명 학자, 예술가, 작가 등의 생애와 사상을 간략히 소개한 책,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책동무논장)도 같은 맥락에서 씌어진 책이다. <길을 찾는 책 읽기>(김학민 저, 아침이슬)는 청소년에게 권하는 100권의 책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전의 쉬운 해설서와 축약본을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누구나 쉽게 읽힌다는 것이 특색이다.

<강철로 된 책들>(장석주 저, 바움), <장정일의 독서일기 1-5>(장정일 저, 범우사), <내가 읽은 책과 세상>(김훈 저, 푸른숲), <이병주의 동서양 고전탐사 1-2>(이병주 저, 생각의나무) 등은 문인들의 독서체험을 기록한 책들이다.

장석주의 책은 미래 생태 환경 식물들, 철학 지식 비평, 대중문화 현대예술 등 11개 분야로 나눠 77권을 소개하고 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소설가이자 시인인 장정일이 자신의 독서 경험을 일기 형식으로 쓴 책이다.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텍스트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을 가하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김훈의 책에서는 독특한 사유를 바탕으로 한 특유의 미문이 빛난다. 이병주의 책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살아남은 고전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사유를 전개하는 묵직한 문체가 빛을 발한다.

<책 읽는 소리>(정민 저, 마음산책)에서 저자는 "빌려 드린 지가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저 또한 벼슬길에 뜻을 끊고 강릉으로 돌아가, 이것을 읽으며 무료함을 달래려 합니다."라고 했다는 허균이 정구에게 보내는 편지의 흥미로운 대목 하나를 소개한다. 책 귀한 줄 모르는 요즘의 세태를 꼬집는 일화다. 이 책에 소개된 책과 관련한 선인들의 풍부한 일화들은 새삼스럽게 책의 고마움과 독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책에 미친 바보>(이덕무 저, 권정원 편역, 미다스북스)에서는 겨울밤이면 군불도 때지 못한 냉골 바닥에서 대쪽처럼 정좌한 채 책을 읽는 이덕무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한서'로 이불을 삼고 '논어'로 병풍을 쳤던, 스스로를 '책에 미친 바보(간서치看書痴)'라 칭했던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의 모습은 독서에 게으른 우리를 매섭게 질타한다.

이런 책이 좋다, 저런 책이 좋다, 하는 식으로 책이 책을 말하는 시대는 불행하다. 음악은 듣기 위해 존재하고 책은 읽히기 위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말하는 책들이 존재하는 것은 '내 느낌'을 공유하자는 하나의 제안이리라. 나의 기쁨과 감동을 당신과 나누고 싶다는 하나의 초청이리라. 키냐르는 <은밀한 생>에서 이런 사정을 간단히 요약한다.

'책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특이한 결사를 구성한다.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과 연령의 구분 없이 섞이지 않음이, 결코 서로 만나는 일 없이도 그들을 한데 모아 놓는다.'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그 은밀한 제의에 동참해보는 일도 나쁘지는 않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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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와 더러움을 동시에 껴안는 삶

  병은 몸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다. 몸에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백혈구가 세균과 한판 전쟁을 치른다. 천근만근 같은 몸에 열까지 난다. 몸에서 백혈구와 바이러스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열이 나면 정신까지 혼미하다. 누가 질문을 해도 대답하기도 귀찮다. 

  그러나 병은 우리에게 예기치 않은 지혜를 열어준다. 몸은 소중한 것이로구나, 아플 때는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도 없구나, 하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시련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던가. 세균이나 질병에 노출됨으로써 몸은 저항력과 면역력과 지혜를 키운다.

 여기 일체의 세균이 박멸된 곳에서 자라난 아이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는 과연 건강한 아이일까. 물론 질병을 앓아보지 않았으니 건강한 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는 다른 사람에게는 있는 저항력과 면역력이 결핍되어 있기 십상이다. 그런 아이를 건강한 아이라고 단정지을 수만은 없다.

  건강은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힘이다. 깨끗한 곳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가도 조금이이라도 오염된 환경에 처하면 옴짝달싹도 못하는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건강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일체의 소요가 없는 사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사회, 조금의 혼란도 없는 사회가 있다고 하자. 이 사회는 건강한 사회일까. 대답은 No다. 그 사회가 아무리 질서가 있고 깨끗한 사회일지라도 우리는 그 사회를 건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 잡음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챙기려 다투는 게 인지상정이다. 평화는 인간들의 영원한 꿈이고, 현실은 시끄럽고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이 현실을 억지로 외면할 수는 있다. 사람들의 귀와 눈을 막고 어지러운 현실로 향하는 모든 출구를 막아버릴 수도 있다. 마치 세상에는 한 점의 악도 존재하지 않는 듯 동화 같은 현실 속에서 순수함만을 이야기하며 오손도손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평화는 위장된 평화에 불과하다. 위장된 평화일수록 깨어지기 십상이다.

 질병에 대처하는 능력이 있는 몸이 건강한 몸이라면 사회적 혼돈을 관리할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일체의 혼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결국 사회를 취약하게 만든다.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인의 이익을 뒷전으로 미루어야 한다는 전체주의 사회, ‘나’와 ‘우리’만이 옳고 타인은 그르다는 배타주의적 사회는 겉으로 볼 때는 안정된 모습을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말해주듯 역사는 그러한 사회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영화 <빌리지>는 숲 속에 있는 작은 마을을 보여준다. 주민들은 낙원과 같은 이 공동체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아간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평화로운 마을 코빙톤 우즈! 그 마을이 어떻게 붕괴되어 가는지를 지켜보면서 ‘건강’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어둠을 외면하는 밝음, 더러움을 외면하는 순수함은 취약하다. 건강한 삶은 순수와 더러움을 동시에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
 
감독 : M.나이트 샤말란
주연 :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 호아킨 피닉스, 애드리안 브로디
제작 :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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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 도둑
수잔 올린 지음, 김영신 외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미쳐야 미친다
난초도둑, 수잔 올린 저, 김영신, 이소영 역 / 현대문학, 2003


  양대 국문학과 정민 교수의 홈페이지는 즐겨 찾는 사이트 중의 한 곳.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의 글 등 풍부한 한문학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구비해 놓은 곳이다. 이런 사이트와 만나면 인터넷의 해악을 운운하는 발언들이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인터넷도 얼마든 생산적 커뮤니케이션의 장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런 사이트들은 몸소 구현해주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다음의 문장은 오래 마음을 끈다. 명말의 문장가 장대(張岱)가 그의 저서 〈다섯 이인전의 서문(五異人傳序)〉에서 했다는 말이란다. "사람이 벽(癖)이 없으면 더불어 사귈 수가 없다. 깊은 정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흠[疵]이 없으면 더불어 사귈 것이 없다. 참된 기운이 없는 까닭이다." 무언가에 병적으로 미친 사람만이 깊은 정과 참된 기운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란다. 청나라 때 장조(張潮)는 《유몽영(幽夢影)》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던가.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 된다.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되고, 사람은 벽(癖)이 없어서는 안 된다."

  벽(癖)이란 어떤 것에 대한 기호가 지나쳐서 억제할 수 없는 병적인 상태가 된 것을 뜻한다. 도벽, 노름벽, 주벽이란 단어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 벽(癖)은 대체로 부정적인 뜻을 함축한다. 벽(癖)은 끊을 수 없는 것, 절제할 수 없는 통제불능의 것이란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열정의 산물이다. 통제의 영역이 아니라 일탈의 영역에 벽(癖)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잖고 근엄하신 선비들이 벽(癖)을 옹호한 것은 왜일까.

  이성이란 단어만으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한 인간의 내면이란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것이어서 이성이라는 틀로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는 아닐까. 어쩌면 쉽게 설명될 수 없는 저 깊고 어두운 열정, 그 속에 삶의 비밀스런 의미가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어뎁테이션>에 뼈대를 제공해주었던 수잔 올린의 『난초도둑』(현대문학)이 보여주는 세계는 바닥 모를 삶의 도저한 열정들이 만들어 내는 세계. 그 세계는 벽(癖)이 만들어 내는 음습한 세계다. 난초에 탐닉하는 격렬한 집착, 난초를 얻기 위한 매혹적인 모험담이 플로리다의 습지를 배경으로 종횡무진으로 펼쳐진다. <필라델피아 시티 페이퍼>는 이 책을 이렇게 요약한다. ‘놀라울 정도로 음습하고, 기이할 정도로 에로틱하다. 올린은 육감적이고 매력적으로 암꽃술 같은 욕망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라고. 그렇다. 이 책은 깊고 어둡고 탐미적일 정도로 에로틱하다. 그러나 이 책은 어떤 정사씬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책은 이렇게 탐미적인 에로티시즘을 발산하는 것일까.

  구부러진박차난초, 갈색난초, 뻣뻣한난초, 비틀린난초, 빛나는잎난초, 쇠뿔난초, 입술난초, 뱀난초, 민둥부리난초, 쥐고리난초, 노새귀난초, 그림자마녀난초, 물거미난초, 가짜물거미난초, 귀부인머릿단난초… 난초의 세계는 상상을 불허하는 다양성의 세계다. 이 책은 말한다. “많은 식물들이 제꽃가루받이를 하는데 이는 번식력을 높이고 종을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동일한 유전물질을 반복해서 다시 사용하는 제꽃가루받이를 하면, 종은 유지되지만 진화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꽃가루받이를 하는 식물들은 계속해서 단순하고 평범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예를 들면 잡초들이 그렇다. 발달된 식물들은 딴꽃가루받이를 한다.” 대부분의 난초들은 절대로 제꽃가루받이를 하지 않는단다. 자신의 꽃가루를 인공적으로 암술머리에 묻혀줘도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단다. 어떤 종들은 자신의 꽃가루가 암술머리에 닿으면 그 독 때문에 죽기도 한단다. 이를 두고 놀라워한다면 아직 때는 이르다. 이 책은 실로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놀라운 난초의 세계를 소개한다. 한 대목을 더 소개하자. “많은 (난초의) 종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곤충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곤충들은 난초를 동종으로 착각하고 그 꽃에 내려앉는다. 그때 꽃가루가 그 곤충의 몸에 달라붙고, 그 곤충이 다른 난초에 가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첫 번째 꽃의 꽃가루가 두 번째 꽃의 암술머리에 묻혀진다. 다시 말해서, 곤충들보다 난초가 더 똑똑하기 때문에 그런 꽃가루가 가능한 것이다.” 포복절도할 일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 이르면 요령부득, 난초의 교활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어떤 난초들은 꽃가루받이를 해주는 곤충들이 죽이고 싶어하는 적의 모습을 모방한다. 식물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위적대관계 pseudoantaagonism라 부르는데, 천적을 발견한 곤충은 공격을 하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 없는 공격과정에서 곤충은 난초의 꽃가루를 몸에 묻히게 되고, 그런 실수를 반복하면서 꽃가루를 퍼뜨린다. 난초의 어떤 종들은 꽃가루받이를 해주는 곤충의 배우자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 곤충은 이 난초 저 난초 찾아다니며 교미를 하려고 애쓰고, 그렇게 헛수고를 하는 과정에서 이 꽃에서 저 꽃으로 꽃가루받이가 이루어진다. 바로 위교미 pseudocopulation 현상이다.”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 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라고 노래했던 난초의 시인 가람 이병기 선생이 이런 난초의 세계를 일찍이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관념의 난초와 실제의 난초는 이렇게 다르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던가. 미치기 위해서는 미쳐야 한단다. 미치지 않으면 목적지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이다. 난초 채취는 대체로 열병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늪지나, 난초 수집가를 죽이려고 노리거나 심지어는 잡아먹으려 들지도 모르는 험악한 원주민들이 우글거리는 자생지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난초에 대한 광신적인 열정은 바로 이런 채취의 어려움에서 비롯된다. 스스로 난초 채취꾼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강인하고, 예리하고 객지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단다. 죽음을 부르는 직업, 바로 그것이 난초에 대한 탐미적 열정을 증폭시켰음에 틀림없다. 불가능을 꿈꾼다는 것, 하나가 될 수 없는 것과 하나가 되는 합일에의 꿈, 에로스의 본질이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 위험에 아랑곳없이 세계의 오지를 찾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진기하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 떠나는 여행, 이만하면 충분히 목숨을 걸 만하지 않은가.

  노먼 맥도널드는 『난초 채취꾼 The Orchid Hunters』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고 『난초도둑』은 말한다. “낮에는 불타는 듯 뜨겁고 밤에는 덜덜 떨리도록 춥고, 열병으로 고문을 당하고 온갖 불편함으로 고통을 겪어도 그만두지 못할 걸세. 난초에 빠진 사람은 원하는 난초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게 마련이니까. 마치 사랑하는 여인을 쫓아다니는 것이나 마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과도 같지.” 그렇다. 이 책이 소개하는 난초에 대한 집착은 하나의 질환이다.

  법정은 그의 책 『무소유』에서 난초를 말한다. 그러나 그 말하는 방식은 수잔 올린과는 사뭇 다르다. 길지만 인용해보자.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이름 있는 난초(蘭草)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왔을 때 아는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이라는 비료를 바다 건너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나는 떨면서도 실내 온도를 높이지 않았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개인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 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 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이때에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 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執着)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착해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僧家의 遊行期]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 하고 말았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모든 괴로움은 집착에서 연유하는 것이니, 집착에서 마음을 놓아주라는 것이다. 표연한 선사의 기개가 느껴지는 글이다. 『난초도둑』은 그 표연함의 대척점에 있는 세계, 욕망으로 피가 뜨거워지는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속진의 세계는 넌덜머리가 나는 환멸의 세계는 아니다. 수잔 올린은 말한다. “그들은(난초 수집가) 진정으로 무언가를 사랑하고, 살아 있는 생명체의 완전성을 믿고, 스스로 신화적인 인물이 되기 위한 모험의 세계에 살며, 어떤 것은 목숨을 바쳐도 좋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신이 꿈꾸는 인생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 세계는 우리가 안존하고 있는 상식의 세계 바깥에 있다. 경제적 효용성과 환금성(換金性)이 모든 사물과 행위의 가치판단의 잣대가 되고 있는 이 속물스러운 세계로부터도 썩 벗어나 있다. 모험이 있다면 마땅히 그런 것이어야 하리라.

  수잔 올린의 『난초도둑』은 우리의 삶이 무엇을 결핍하고 있는가를 일깨운다. 바로 열정과 모험의 신화, 용맹정진(勇猛精進), 쉽게 초월과 해탈을 꿈꾸지 않는 싸움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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