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석산의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
탁석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과잉민족주의를 경계하는 책
세계의 역사 교과서 / 이시와타 노부오·고시다 다카시 엮음 / 작가정신, 2005
탁석산의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 / 탁석산 지음 / 웅진닷컴, 2004


민족주의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적어도 한민족에게 있어서는 난공불락의 이념이었다. 일제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군사독재 정권이라는 특수한 질곡의 시대 상황을 뛰어넘는 가장 유효한 도구가 민족주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몇몇 논자들에 의해 민족주의는 더 이상 우리 사회를 이끄는 이념이 될 수 없다는 주장들이 대두되고 있다.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의 주체성』의 저자인 철학자 탁석산의 최근 저서 『탁석산의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에서 저자는 민족주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향해 올라가기 위해 사용된 도구, 즉 사다리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편다.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며, 물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버리고 지붕에 오르면 사다리를 버리는 것이 지혜다. 근대국가의 완성이라는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민족주의라는 사다리가 필요하지만 일단 목표가 달성되면 아낌없이 버리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민족주의는 절대적 이념이 아니라 도구적이고 한시적 이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에 대한 탁석산의 새로운 해석과 접근은 북한과 일본 문제에까지 미친다. 탁석산은 통일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재산권과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는 시민국가의 외연 확대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과 무엇을 할 때 민족의 이름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민족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지 통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탁석산은 민족이 개인의 행복에 우선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유보하면서 이룩되는 통일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한다.

일본에 대해서는 그동안의 심리적 장애를 극복하고 평범한 외국으로 인식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축구 한일전에서 나타나는 붉은악마들의 도에 넘치는 응원전이 역설적으로 일본에 대한 우리의 심리적 장애를 말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심리적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이라는 우상을 깨야 한다고 강조하며 그는 말한다.


"민족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용서될 때 더 이상 민족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이 됩니다. 그걸 부숴야 민족주의는 사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탁석산은 고구려사는 한국사가 아니라고 단정짓는다. "나당연합군이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단순화해 말하자면 당나라에도 고구려사에 대한 지분이 있다는 것이죠. 사실 역사를 '누구의 역사'로 소유화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고구려는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닙니다. 고대 공간에는 당나라, 고구려, 신라, 백제 등이 있었던 것이지 한국과 중국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라는 주장을 하며 탁석산은서강대 김한규 교수의 '요동사'를 "합리적이고 합당한 주장"이라고 평한다. 예맥계의 고조선·부여·고구려와 숙신계의 말갈·여진·만주, 동호계의 선비·거란·몽골 등 여러 세력이 번갈아 나라를 세우고 명멸해간 만주는 한국이나 중국이 아닌 요동이라는 '제3의 영역'이었다는 것이다.

과잉민족주의를 경계하는 탁석산의 주장에 귀가 솔깃하는 독자가 있다면 간과해서는 안될 책이 바로 『세계의 역사교과서』다. 일본 우익이 지원하는 후소샤 출판사의 역사 교과서가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등 심각한 왜곡으로 국제 사회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지금, 『세계의 역사교과서』가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이 책은 후소샤 교과서의 왜곡된 역사관을 비판하기 위해 일본의 대학 강사들이 만든 책이다. 이 책을 주도한 이시와타 노부오는 조선사를 전공한 뒤 한·일 교과서 대화의 핵심멤버로 활동해온 양심적 지식인이다. 분석 대상이 된 11개국은 일본과한국을 포함, 중국, 싱가포르, 베트남, 인도네시아, 독일, 네덜란드, 영국, 미국, 폴란드다.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전쟁 책임에 대한 기술이 명확하지 않고 가해와 피해에 대한 내용도 모호하다. 고시다 다카시는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 대해 "1980년대 후반 이후 일본 근현대사의 침략적 성격이 입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그러나 1995년 전후로 우파 사상가들이 '일본 민족주의'를 내걸며 겨우 바르게 방향을 잡기 시작한 역사 인식을 방해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전근대사의 경우도 단일민족설에 바탕을 둔 단선형(單線型)의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의 교과서 역시 민족이라는 사다리를 걷어치우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전쟁 범죄의 책임을 가능한 한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있다. 독일의 교과서는 히틀러에 대한 열광적 지지와 협력이 없었다면 나치가 만행을 저지르지 못했을 것이라며 나치와 당시의 국민을 공범으로 본다. 유대인 학살도 당시 국민의 의식에 박혀 있던 반유대인 감정에 중점을 두고 기술하고 있다. 편협한 민족주의라는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다는 점에서 독일의 역사 교과서는 세계의 교과서의 모범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면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어떻게 비쳤을까. 이시와타 씨는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민족주의 사관으로 인해 객관화하기 어렵고 불편한 역사를 숨기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불편한 역사를 누락시키거나 숨기고 왜곡하는 것이 다반사고, 단일 민족임을 강조하며 다른 민족과의 공존을 경시하고, 이들의 존재를 무시하기 일쑤라는 지적이다.


한국이 중국의 문화에 대해서는 자율적 수용론을 펼치고, 일본의 문화에 대해서는 조선이 일본에게 문화를 건네주었다는 시혜론을 펼치는 것 또한 한국의 과잉민족주의라고 편저자는 비판한다. 만주를 한국사의영역으로 편입시킨 '남북국시대'라는 개념 또한 중국과 마찰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쓰시마정벌'이라는 단어에도 한국의 일본에 대한 우월감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이 책에 의하면 메이지 천황이 러일전쟁 때 '동양평화를 위해서'라는 주장을 했는데 안중근은 이를 그대로 믿고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후, "이토는 한국 황제와 천황을 배신했다. 그래서 나는 이토를 죽였다."라고 한 바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이러한 측면을 다루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을 은폐하는 힘으로써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어느 나라의 역사교과서나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되도록 적게 기술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편협한 역사인식을 가지고 역사적 진실을 대하면, 객관적이며 공정한 역사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역사교과서는 민족주의 사관을 넘어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정치권력이 아니라 인권과 평화의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이 책의 편저자들은 주장한다. 교과서를 통한 국제적인 대화가 필요하며,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교과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역사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교육인적자원부는 2004년 9월 장관 직속으로 국사교육발전위원회를 만들었다. 역사학자와 교육전문가, 현직 교사 등 10명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과거 군사정권하의 국사교육이 국가주의적 민족의식에 사로잡혀 배타성이 강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개선책을 마련한단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나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같은 주변국의 과잉 민족주의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동북아 평화공존을 통한 세계화’에 초점을 맞춰 국사와 세계사를 유기적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뒤늦게나마 생각한 모양이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민족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용서될 때 더 이상 민족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이 됩니다. 그걸 부숴야 민족주의는 사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탁석산의 발언을 다시 한번 음미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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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역사 교과서 -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테마로 본 11개국의 역사교과서
이시와타 노부오.고시다 타카시 엮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과잉민족주의를 경계하는 책 세계의 역사 교과서 / 이시와타 노부오·고시다 다카시 엮음 / 작가정신, 2005 탁석산의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 / 탁석산 지음 / 웅진닷컴, 2004 민족주의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적어도 한민족에게 있어서는 난공불락의 이념이었다. 일제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군사독재 정권이라는 특수한 질곡의 시대 상황을 뛰어넘는 가장 유효한 도구가 민족주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몇몇 논자들에 의해 민족주의는 더 이상 우리 사회를 이끄는 이념이 될 수 없다는 주장들이 대두되고 있다.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의 주체성』의 저자인 철학자 탁석산의 최근 저서 『탁석산의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에서 저자는 민족주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향해 올라가기 위해 사용된 도구, 즉 사다리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편다.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며, 물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버리고 지붕에 오르면 사다리를 버리는 것이 지혜다. 근대국가의 완성이라는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민족주의라는 사다리가 필요하지만 일단 목표가 달성되면 아낌없이 버리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민족주의는 절대적 이념이 아니라 도구적이고 한시적 이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에 대한 탁석산의 새로운 해석과 접근은 북한과 일본 문제에까지 미친다. 탁석산은 통일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재산권과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는 시민국가의 외연 확대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과 무엇을 할 때 민족의 이름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민족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지 통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탁석산은 민족이 개인의 행복에 우선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유보하면서 이룩되는 통일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한다. 일본에 대해서는 그동안의 심리적 장애를 극복하고 평범한 외국으로 인식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축구 한일전에서 나타나는 붉은악마들의 도에 넘치는 응원전이 역설적으로 일본에 대한 우리의 심리적 장애를 말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심리적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이라는 우상을 깨야 한다고 강조하며 그는 말한다. "민족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용서될 때 더 이상 민족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이 됩니다. 그걸 부숴야 민족주의는 사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탁석산은 고구려사는 한국사가 아니라고 단정짓는다. "나당연합군이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단순화해 말하자면 당나라에도 고구려사에 대한 지분이 있다는 것이죠. 사실 역사를 '누구의 역사'로 소유화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고구려는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닙니다. 고대 공간에는 당나라, 고구려, 신라, 백제 등이 있었던 것이지 한국과 중국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라는 주장을 하며 탁석산은서강대 김한규 교수의 '요동사'를 "합리적이고 합당한 주장"이라고 평한다. 예맥계의 고조선·부여·고구려와 숙신계의 말갈·여진·만주, 동호계의 선비·거란·몽골 등 여러 세력이 번갈아 나라를 세우고 명멸해간 만주는 한국이나 중국이 아닌 요동이라는 '제3의 영역'이었다는 것이다. 과잉민족주의를 경계하는 탁석산의 주장에 귀가 솔깃하는 독자가 있다면 간과해서는 안될 책이 바로 『세계의 역사교과서』다. 일본 우익이 지원하는 후소샤 출판사의 역사 교과서가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등 심각한 왜곡으로 국제 사회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지금, 『세계의 역사교과서』가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이 책은 후소샤 교과서의 왜곡된 역사관을 비판하기 위해 일본의 대학 강사들이 만든 책이다. 이 책을 주도한 이시와타 노부오는 조선사를 전공한 뒤 한·일 교과서 대화의 핵심멤버로 활동해온 양심적 지식인이다. 분석 대상이 된 11개국은 일본과한국을 포함, 중국, 싱가포르, 베트남, 인도네시아, 독일, 네덜란드, 영국, 미국, 폴란드다.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전쟁 책임에 대한 기술이 명확하지 않고 가해와 피해에 대한 내용도 모호하다. 고시다 다카시는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 대해 "1980년대 후반 이후 일본 근현대사의 침략적 성격이 입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며 "그러나 1995년 전후로 우파 사상가들이 '일본 민족주의'를 내걸며 겨우 바르게 방향을 잡기 시작한 역사 인식을 방해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전근대사의 경우도 단일민족설에 바탕을 둔 단선형(單線型)의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의 교과서 역시 민족이라는 사다리를 걷어치우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전쟁 범죄의 책임을 가능한 한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있다. 독일의 교과서는 히틀러에 대한 열광적 지지와 협력이 없었다면 나치가 만행을 저지르지 못했을 것이라며 나치와 당시의 국민을 공범으로 본다. 유대인 학살도 당시 국민의 의식에 박혀 있던 반유대인 감정에 중점을 두고 기술하고 있다. 편협한 민족주의라는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다는 점에서 독일의 역사 교과서는 세계의 교과서의 모범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면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어떻게 비쳤을까. 이시와타 씨는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민족주의 사관으로 인해 객관화하기 어렵고 불편한 역사를 숨기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불편한 역사를 누락시키거나 숨기고 왜곡하는 것이 다반사고, 단일 민족임을 강조하며 다른 민족과의 공존을 경시하고, 이들의 존재를 무시하기 일쑤라는 지적이다. 한국이 중국의 문화에 대해서는 자율적 수용론을 펼치고, 일본의 문화에 대해서는 조선이 일본에게 문화를 건네주었다는 시혜론을 펼치는 것 또한 한국의 과잉민족주의라고 편저자는 비판한다. 만주를 한국사의영역으로 편입시킨 '남북국시대'라는 개념 또한 중국과 마찰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쓰시마정벌'이라는 단어에도 한국의 일본에 대한 우월감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이 책에 의하면 메이지 천황이 러일전쟁 때 '동양평화를 위해서'라는 주장을 했는데 안중근은 이를 그대로 믿고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후, "이토는 한국 황제와 천황을 배신했다. 그래서 나는 이토를 죽였다."라고 한 바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이러한 측면을 다루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을 은폐하는 힘으로써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어느 나라의 역사교과서나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되도록 적게 기술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편협한 역사인식을 가지고 역사적 진실을 대하면, 객관적이며 공정한 역사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역사교과서는 민족주의 사관을 넘어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정치권력이 아니라 인권과 평화의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이 책의 편저자들은 주장한다. 교과서를 통한 국제적인 대화가 필요하며,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교과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역사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교육인적자원부는 2004년 9월 장관 직속으로 국사교육발전위원회를 만들었다. 역사학자와 교육전문가, 현직 교사 등 10명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과거 군사정권하의 국사교육이 국가주의적 민족의식에 사로잡혀 배타성이 강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개선책을 마련한단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나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같은 주변국의 과잉 민족주의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동북아 평화공존을 통한 세계화’에 초점을 맞춰 국사와 세계사를 유기적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뒤늦게나마 생각한 모양이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민족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용서될 때 더 이상 민족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이 됩니다. 그걸 부숴야 민족주의는 사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탁석산의 발언을 다시 한번 음미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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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알랭 드 보통 지음, 이강룡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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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평범한 삶은 미학적 축복을 받을 수 없을까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 알랭 드 보통 지음 / 생각의 나무, 2005


'혈액형에 따른 성격분류'라는 것처럼 허황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한 인간의 성격을 규정짓는 데 어떤 요인들이 관여하는지도 확정된 바가 없고 설령 그 요인들을 찾아낸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영향력을 계량화할 수도 없다. 암스텔담처럼 습하고 우중충한 날씨가 어두운 성격을 만들어낸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론일 뿐, 얼마든지 예외적인 성격은 있기 마련이고, 그 예외를 만들어내는 요인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쉽게 판단할 수가 없다.

한 사람의 가계(家系)가 한 사람의 성격을 규정짓는다는 듯 대개의 전기(傳記)는 한 사람의 족보를 캐는 데 수많은 페이지를 할당하고 있다. 한 사람의 성격을 무쪽 가르듯 구분해낸다는 것은 프로이드 할아버지가 살아온다 해도 요령부득이다. 한 사람의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들이 어떤 것인지조차 분명하게 알 수가 없고, 설령 그 변수들을 모두 조사했다고 해도 변수와 변수끼리 맞부딪쳐 일으키는 불꽃의 밝기를 계산하는 데만도 몇 만대의 슈퍼컴퓨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가령 오늘 같은 우중충한 날씨가 비염이 있으며 최고혈압이 100이며, 호박잎 삶은 것을 된장에 찍어먹기를 좋아하며, 왼쪽 셋째 발가락에 약간의 무좀이 있는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계산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한 인간은 복잡하고도 미묘한 환경의 산물일진대, 한 인간에 대한 이러쿵저러쿵은 결국 판단자의 섣부른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첫인상을 보고 어떤 사람의 본질을 간파했다는 것도 필경은 오만한 자의 떠벌림에 그치기가 십상이다. 누군가를 이해했다는 인식은 따지고 보면 타인을 자아화하려는 포섭의 욕망에 지나지 않든가,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불과할 뿐이다. 화석화된 박제가 아닌 이상 대상은 호락호락 내 인식의 범주에 걸려들지 않는다. 언제든 우리의 믿음을 비웃으며 뒤통수를 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경솔한 자신의 태도를 탓하기보다는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는 식의 푸념을 늘어놓는다.

현상이 본질을 반영한다지만 모든 현상이 본질에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에 보이는 특정한 현상을 비가시적인 본질에 연결시키는 이상한 형이상학적 충동을 버리지 못한다. 한 존재의 행동을 해석하고 판단하여 그 존재를 어떤 식으로든 규정짓고 말겠다는 분류학적 태도는 정작 도서관 사서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사람을 사람으로 느껴야 할 범인(凡人)들에게는 그다지 장려할 만한 태도는 아닌 듯싶다.

소설『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에서,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인정해야만 하는 것은 우리가 25년간 알고 지냈던 남자 혹은 여자를 하나의 정연한 총체로서 응집시킬 수 없다는 점이고, 다른 이들도 우리처럼 복잡하고 알기 힘든 존재라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와의 짧은 만남 뒤에는 충분히 생각하고 여유와 인내를 갖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성급하게 어떤 사람을 규정짓지 말라는 충고다. 100년 전쟁을 100년에 걸쳐 서술할 수는 없는 법이라면, 한 사람이 보여주는 현상적인 모습을 현상 그 자체로서 가감 없이 그려내는 전기(傳記)는 실상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전기는 하나의 장면과 사태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알랭 드 보통은 아주 사소한 것들에 주목한다. 한 사람의 일상을 이루는 지극히 사소한 이야기들이 한 사람의 총체를 엿보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작가의 믿음이다. 그 사소한 것이 음악일 수도 있고, 음식일 수도 있고, 잠버릇일 수도 있다. 혹 그것은 누군가가 뒤쪽에서 당신을 부르면 왼쪽 혹은 오른쪽 당신이 고개를 돌리는 방향일 수 있고,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토핑부분부터 먹는지 아이스크림부터 먹는지에 대한 당신의 취향일 수도 있으며, 길게 늘어선 줄에 당신이 서있을 때 당신 앞으로 불쑥 새치기를 하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당신의 반응 유형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우연적인 것, 아주 사소해서 어떤 전기 작가의 레이다망에도 포착되지 않는 것, 드 보통의 책은 많은 페이지를 그런 것들에 할애한다. 사실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흘러가 버리는 시간 속에 묻혀버리고 말 우연성, 그 사소하기 짝이 없는 자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새벽 바다를 걷고 있는 당신의 머리칼을 날리게 하던 바람, 그때 무심히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손가락, 덧없는 시간 속에 묻혀버리고 말 그 찰나의 장면,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역사가의 시선이 아니라 연인의 시선이다. 우연적인 순간을 시간 속에 흘려버리지 않고 영원히 가슴 속에 박제화하고 싶다는 연인들의 욕망. 그것은 시간의 풍화작용에 맞서는 가녀린 저항이다. 사랑은 그 저항의 다른 이름은 아닌지.

소설의 주인공은 그의 연인, 이자벨의 소소한 것들을 기록한다. 위인들의 전기가 한 사람의 유의미한 행적을 기록한 것이라면 드 보통의 소설은 전기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드 보통은 묻는다. '꼭 위인만이 전기의 적당한 소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라고. 대개의 전기가 위인의 삶을 다루는 것은 그 삶이 가지는 계몽적 효용성 때문이리라. 그런 책들은 "이 사람의 삶을 본받아라. 너의 삶을 반성하라."라고 고압적인 태도로 말하지만 드 보통은 "전기를 읽는 즐거움은 부분적으로는 그들도 나와 똑같은 육신을 가진 생명체라는 것을 자각하는 데에서 나온다."라고 말한다.

아무리 비범한 위인일지라도 결국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말씀이니 진리니 강론해봐야 결국 먹고 배설할 수밖에 없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우리는 우리의 평범함에 안도한다. 전기의 재미는 바로 위인의 인간됨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은 대체 어떤 재미와 각성을 우리에게 주는가.

너무나 평범하고 밋밋하여 간과하기 쉬운 삶을 미학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예술가들은 일상에 놀라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장대(壯大)한 것, 특별한 것만이 미학적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한 소소한 국면도 '의미 있는 시선'으로 훑어보면 얼마든지 미학적일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평범한 인물의 전기를 읽는 재미라면 재미겠다. '비일상적인 것의 가치는 복잡한 과거에서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닿을 수 있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전기 집필 전통의 숨겨진 역할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리라.'라고 제법 현학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드 보통은 실상 "당신들은 그녀가 평범하다고 생각하시겠지. 그러나 함부로 판단하지마시라. 판단을 보류하고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보시라. 그녀와 밥을 먹어 보고, 그녀와 아침에 함께 일어나 보시라. 그녀는 그 소소함의 총체에 다름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연인들의 항변이다. 사랑은 아주 사소한 것조차 간과하지 않는, 오히려 그 사소한 뉘앙스에 대한 도저한 집착이 아니던가. 생각해보시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저녁의 이상한 푸름에 이끌리고, 무엇이든 놓고 오기를 자주하는 그의 건망증을 사랑하기도 하는, 이런 매혹이 사랑이 아닌가.

역사가와 과학자는 추상의 욕망에 이끌려 한 개인의 다양한 표정에는 관심이 없지만 예술가들은 역사가와 과학자들이 놓쳐버린 부분에서 놀라운 삶의 통찰을 길어 올린다. 이런 책들을 읽고 있노라면 전혀 특별할 것도 없는 나의 삶은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서 비로소 미학적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그래, 우리는 잊혀지지 않는 그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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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배부른 식당
김형민 지음 / 키와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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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배부른 식당
마음이 배부른 식당/ 김형민/ 키와채, 2005
 


십여 년 전 겨울, 남해금산의 정상 근처에 있는 부산여인숙에서 묶은 적이 있었다. 칠순이 넘어 보이는 노인네가 깔밋하게 끓여낸 된장국도 된장국이겠지만 특별한 조미료도 없이 나물을 버무린 솜씨도 보통이 아니시구나 하는 생각으로 음식 칭찬을 드렸더니, 노인은 대뜸 “ 맛이라니요? 에구 그런 말씀 마셔요. 손님이 시장하시니 그렇지요” 태연하게 말을 받는다. 말투엔 일체의 호들갑이 없었다. 다른 손님들도 맛있다는 말씀 많이 하시더라구요, 하는 정도의 은근한 자기 선전도 없었다. 맛이 있긴 뭐가 맛이 있냐, 맛이 있다면 모두 당신의 시장기 탓이라는 거였다. 허름한 상위에 놓인 음식들이 노인의 심성만큼이나 담백하게 느껴졌다. 십중팔구는 소슬하기 마련인 겨울 여행길에서의 하룻밤이 모처럼만에 푸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영어 단어 ‘companion'도 ’함께 빵을 먹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우리말에서도 ’한솥밥을 먹는다‘는 관용구는 가족을 의미한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섭식 행위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은 ‘먹음’의 행위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성을 회복한다. 물론 모든 먹음의 행위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일에 좇겨 허겁지겁 먹는 패스트푸드는 허기를 때운다는 수단적 의미 그 이상을 가지지 못한다.


자본주의의 일상적 현실이 아무리 우리에게 ‘빠름’을 강요한다 할지라도 음식을 먹는 행위만큼은 반자본주의적으로 한 번 에둘러 갈 필요가 있다. ‘밥’의 종국적 귀착지는 사람이다. 사람의 몸이 밥을 받고, 사람의 마음이 밥에 반응한다. 밥을 주는 사람의 마음과 그것을 받는 사람의 마음이 만나는 밥상머리에서만큼은 수다나 너스레도 좀 떨어 보자는 이야기다. 배도 불러보고 마음도 좀 불러보자는 것이다. 꼭 이 정도의 ‘음식론’을 지지하는 독자라면 김형민이 소개하는 『마음이 배부른 식당』에 들러볼 일이다.
 
김형민의 식당에는 식도락가의 품위 있는 미각을 채워줄 만한 ‘럭셔리한’ 메뉴는 없다. 그 식당에는 자장면, 감자탕, 콩국수, 콩비지, 돈가스, 만두, 수제비, 삼겹살, 매운탕... 시장통의 한 구석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을 법한 음식 일색이다. 김형민은 흔하디 흔한 음식 속에서 흔하지 않은 우리네 삶의 이야기들을 끄집어낸다. 그 이야기에 마음이 먼저 움직이고, 그 마음에 다시 몸이 움직인다. 그런 사연을 가진 음식이라면 어디 한 번 먹어보자 하는 호기가 발동하는 것이다.
 
 ‘셈베과자’를 만들어 파는 삼각지 근처에 있다는 ‘김용안씨의 과자점’ 이야기는 이 책의 성격을 잘 요약해준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과자를 사러온 서른 중반의 여인이 들려주었다는 이야기를 본문의 의미를 살려 각색해보면 이렇다.
 
제가 이 집에 크리스마스 때마다 들러서 엄마에게 드릴 과자를 사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사실 제가 '엄마'라고 부르는 분은 제 친 엄마가 아니고 돌아가신 제 친 엄마의 언니, 즉 이모였어요. 제 친엄마와 아빠가 어려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모집에서 저희 두 형제는 눈칫밥을 먹으며 자랐죠. 이모는 저희들 때문에 시댁에서 평생 죄인으로 지내셔야 했지요. 저희들에게 옷 한 벌 사줄 수도 없었고, 맛난 것도 먹일 수가 없었죠. 어려운 살림에 두 군입을 데려왔으니 남편이나 시댁식구들에게 항상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이모는 크리스마스만 되면 우리를 교회에 보냈어요. 그때마다 이모는 이 과자 한 봉지씩을 우리 손에 쥐어 주시면서 다 먹고 와라, 누가 볼지 모르니 밖에서 다 먹고 들어와라 그랬죠. 인형이나 옷은 주위의 눈이 무서워 줄 수도 없었고, 다른 선물도 눈에 띌 수밖에 없으니 이모는 먹어치울 수밖에 없는 과자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선택하셨던 거예요. 이모는 크리스마스 이브날, 1년에 단 한 번 이 과자점의 손님이 되었던 거죠. 그때의 이모처럼 저도 크리스마스에는 꼭 이 과자를 사서 이모에게 보내드려요.

 
과자 하나에도 이렇듯 애틋한 사연이 있는데 하물며 훈김이 피어오르는 한 그릇의 국밥에서랴. 책은 계속해서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들이 모이는 곳이 마음이 배부른 식당이다. 그 식당은 허름하지만 그곳에서 오갔을 이야기들은 맛깔스럽다.
 
식당을 개업하려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컨설팅을 해준다는 ‘뚱보갈비’집의 아저씨는 말한다. “장사 처음 할 때 마포의 한 갈비집에 가서 부탁을 했죠. 도와 달라고. 대뜸 로얄티를 250만원 달라 합디다. 그때 우리 집 전셋값이 200만원이었어요. 에라 혼자 해보자. 나중에 성공해도 난 저렇게는 안 산다. 도와준다고 생색내지도 않고, 돕는답시고 남의 피 같은 돈 긁지도 않겠다.”
 
‘뚱보갈비’ 아저씨의 발언에 공감하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네 마음 속의 분노다. 밥이 하늘이라 했는데, 돈은 좀 적게 벌릴지라도, 좋은 재료 써서, 좋은 사람들에게, 좋은 음식을, 한 번 좋이 먹여보겠다는 마음으로 식당 문을 여는 주인장들이 이 땅에 얼마나 될까. 손님들의 건강이야 어쨌든 맛 하나만을 위해서라면 설탕과 조미료를 듬뿍듬뿍 치고, 얕은 눈속임으로 손님들의 혀끝만을 만족시키는 데에 여념이 없는 이 땅의 식당문화에 대한 분노가 김형민의 글에 먼저 반응한다.
 
이 책이 소개하는 ‘신성각’이란 자장면집 주인장은 돈만이 최고는 아니라는 배짱으로 두둑하다. 마음으로 그를 응원하고 있자니 몸이 가잔다. 해서 퇴근 무렵에 그 집에 들러 주인장이 직접 만들었다는 수타면을 먹어보았다. 기름지고 느끼하지 않은 담백한 맛이었다. 그 맛은 요란한 수사학, 장황한 자의식으로 범벅이 된 프로작가들의 글과는 그 맛이 판이한 작가 김형민의 문체와 많이 닮아있었다. ‘대교(大巧)는 약졸(若拙)’이라 했던가. 지극한 기교는 단순한 것에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노자가 살아온다면 이 집에서 자장면 두 그릇을 시킬지도 모른다는 싱거운 생각을 하며 그 집에 써 있다는 글귀들을 읽어보았다. 책이 소개하는 글귀에 얽힌 이야기들은 이렇다.
 
글귀1: 영업시작 11시 37분, 문닫는 시간 8시 31분
글귀1에 대한 주인의 변: 그렇게 분(分)단위로 체크해야 모든 게 두루뭉실해지지 않아요. 그 시간에 나를 맞추는 거죠. 늦게 일어났다고 늦게 시작하고, 무슨 일 있다고 시간 어기고 그러면 내가 거기에 맞춰진다고.
글귀2: 배달 속도 드림, 저속 배달
글귀2에 대한 주인의 변:(손으로 만드는) 수타 짜장면을 하다보면 한 그릇 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타산이 안 맞아서 종업원도 못써요. 아내가 배달을 하는데 면허 딴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오토바이 타고 뽈뽈뽈 간다구요. 그러니 저속배달이지.
 
이 책의 띠지에는 민주노동당 소속의원 노회찬씨의 추천사가 적혀 있다. 정치하는 사람이 별 곳에 다 얼굴을 내미는군, 의아해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곳에 서려는 작가의 균형감각이다. 그런 균형감각이 없었다면 이 책은 따뜻한 미담을 전하는 낯간지런 이야기에 그쳤을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은 SBS 프로그램 '리얼 코리아'의 후일담이다. 작자는 그 프로그렘 제작에 참여했던 PD다. 이 프로그램에 소개된 밥집들의 이야기는 일간무가지 'AM7'의 지면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그 이야기들을 묶은 책이 『마음에 배부른 식당』이다. 글은 설렁설렁 쉽게 읽힌다. 마음도 뭉클뭉클 대책 없이 따뜻해진다. 그렇다고 글맛에 빠져서 우리네 현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도처에 마음이 배부르지 않은 식당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이상국의 시 하나로 글을 맺자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끊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이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사족 하나. 이 책이 소개하는 식당들은 크게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 주인장들의 배가 너무 불러지지 말아야 하니까 말이다. 이 책이 소개하는 식당들의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하기 전에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먼저 헤아려 보는 것도 좋다. 좋은 친구가 오면 맛도 함께 오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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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3-1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유심히 광고를 본 책인데요.
꼭 읽고싶네요.^^
 
모형 속을 걷다 - 이일훈의 건축 이야기
이일훈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이일훈, 불편함의 미학을 말하다
모형속을 걷다 / 이일훈 지음 / 솔, 2005


함석헌 선생의 스승이셨던 다석 유영모 선생의 인간적 됨됨이를 보여주는 일화는 많다. 그 중의 하나. 유영모 선생은 서울에서 인천까지 걸어 다니셨던 모양이다. 우리 중의 누가 그런 모험을 감행할까. 체력도 문제겠지만 시간 낭비도 문제겠다. 그러나 유영모 선생은 기꺼이 그런 불편을 감수하셨다. 오히려 그런 불편함 속에서 기계적 매카니즘에 묶이지 않은 대자유의 삶을 사셨는지도 모르겠다.

기술이 삶의 편익을 증진시킨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차가 있으니 발이 편하고, 식기세척기가 있으니 손이 편하다. 몇 천 자리 계산도 알아서 척척 해주는 컴퓨터가 있으니 머리가 편하다. '삼분카레'니 '삼분짜장'이니 하는 인스턴트 식품들, 캔만 따면 당장 먹을 수 있는 통조림, 세탁은 물론 다림질까지 척척해주고 심지어는 양말까지도 빨아주고 개켜주는 세탁소……. 이제는 돈만 있으면 홀아비들도 궁색함과는 안녕이다.

그러나 불편함을 무슨 훈장처럼 껴안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산악인들은 말한다.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던 고통의 크기가 그가 차지할 수 있는 영광의 크기라고. 그들은 가장 험난한 시즌과 가장 험난한 코스를 택해서 에베레스트에 오른 자에게만 최고의 알피니스트라는 칭호를 준다. 헬리콥터를 탔다고? 첨단의 장비를 빌렸다고? 그대는 실격이다. 실격의 이유는 간단하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투의 과정이 중요하는 것!.

사랑의 행위는 또 어떤가. 사랑의 행위는 엎치락뒤치락하는 그 비효율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 <데몰리션맨>에서의 사이버섹스를 생각해보시라. 체액과 타액을 교환하지 않는 간편하고 산뜻한 사랑의 행위가 과연 사랑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일까. 사랑의 시간은 루즈타임과 연장전을 요구하는 법이다. <데몰리션맨>에서처럼 후다닥 기계적으로 성급하게 해치우는 사랑의 행위는 위생적이고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사랑의 심리학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어쨌든 편리와 효율은 기술개발로 이득을 보는 자들에게는 최고의 미덕일지 몰라도 피와 살이 도는 우리네 선남선녀들에게까지 능사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을 도드라지게 역설하는 건축가가 있다.

인천시 만석동에 위치한 저소득층 어린이 보금자리 '기찻길 옆 공부방'을 설계한 이일훈이 바로 그다. 저소득층 맞벌이 부부, 결손가정의 아이들을 돌보는 신앙공동체인 '기찻길 옆 공부방'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이 건물은 1998년말 만석동에 지어졌다. 건축주의 빠듯한 예산 때문에 일반 다세대주택보다도 적은 공사비로 지어진 연건평 45평짜리 이 작은 건물은 건축계의 젊은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이끌어 낸다.

<행복이 가득한 집>류의 잡지를 뒤적이다 보면 은근히 부아가 난다. 그런 유의 잡지들이 말하는 행복은 광고가 말하는 행복의 모습과 닮은꼴이다. 물질의 소비만이 행복을 보장해준다. 행복을 원한다면 일단 구입해라. 광고는 은근히 우리 무의식을 강제한다. '부드러운 협박'이다. 여기에 손들면 끝장이다. 일단 일벌레가 되야 하고, 할말은 꾹꾹 가슴속에 쟁여놓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물질이 보장해주는 안락함에 동참하려면 있는 성깔 다 죽이고 고분고분해져야지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일훈은 좀 불편해지자고 말한다. '빈자의 미학'을 역설하는 건축가 승효상도 반갑지만 '불편의 미학'을 말하는 이일훈 또한 반갑기 그지없다.

승효상은 '빈자의 미학'을 말하지만 그의 건축에선 어쩐지 돈 냄새가 난다. 지나치게 세련되어 보이는 것도 어쩐지 마뜩찮다. '빈자의 미학', 논리로 보면 버릴 게 없지만 속내를 보면 왠지 찜찜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일훈의 건축에서는 승효상적인 세련미는 덜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네 건축의 주류적 마인드를 흠집 내는 어떤 거칠고 속 깊은 배포가 느껴진다. 그 '거침'과 '질박함'이 이일훈의 미학이다. 건축미학하면 흔히 가진 자들의 몫이었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일훈은 '기찻길 옆 공부방'에서 소규모 서민 공공건물에 철학과 미학을 스며들게 한다. 『모형 속을 걷다』(솔)의 거의 모든 페이지가 그런 철학과 미학을 말하는 데 바쳐진다.

이일훈은 동물의 집짓기를 예로 들면서 우회적으로 인간의 건축을 비판한다. 길지만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집에 대해서 부리는 과도한 욕심, 갖고도 더 가지려 하는 욕심, 살지도 않으면서 여러 채를 갖고 싶어 하는 욕심, 여기저기 경치 좋은 곳에 별장 짓고 살고 싶은 욕심, 더 크게 더 높게 더 화려하게 짓고 싶은 욕심, 결국 그런 욕심은 치장과 장식으로 나타난다. 장식도 일종의 기능이긴 하지만 필요 이상의 과도함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보기 위해서가 아닌 보여주기 위한 것, 보여주기의 속뜻은 우월감을 나타내고픈 속내이다. 종종 그것이 건축으로 표현되면 역겨운 졸부의 치졸함으로 나타난다. 과잉/과도가 낳는 그 우스꽝스러움.

바로 그 우스꽝스러움이 '세계 제일'이니 '동양 최대'니 하는 화려한 수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우스꽝스러움이 대리석으로 발림이 된 '무늬만 르네상스풍'인 국적불명의 건축물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보여주기 위해서 지어진 건축물에 침묵과 겸손이 깃들 여지는 없다. 엄청난 규모로 지어진 교회의 건축물에 신비가 깃들 여지는 없다. 신비가 없는 곳에 침묵이 있을 리 없다. 이 시대의 건축은 이 시대의 종교를 닮아간다. 그리고 이 시대의 종교는 이 시대의 화두인 자본을 열심히 따라간다. 침묵이 사라진 곳에 여지없이 번쩍거림의 광택과 소음이 들어선다.

이일훈이 설계했다는 '자비의 침묵' 수도원은 그가 말하는 '불편의 미학'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현해준다.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는 넓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일훈의 생각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자비의 침묵' 수도원의 통로를 설계한 이일훈의 말이다.

복도가 넓으면 지나는 걸음걸이가 빠르고 빠름은 사람끼리의 예의를 소홀히 여기게 만든다. 서로 간섭 없이 스쳐갈 수 있는 넓은 복도는 언뜻 여유로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관계에서는 외면/소외를 조장하는 악덕의 동선이다. 서로 마주치면 한 사람이 비켜서야만 둘 다 지나갈 수 있도록 복도를 아주 좁게 만들자.

좁은 복도에서 서로 마주치면 후배가 양보하면서 비껴 설 것이고 바로 그 비켜서는 데서 예의와 공경이 묻어난다는 것이다. 서로 먼저 가라고 양보하는 사이에 겸손이 배는 것이니, 겸손을 미덕으로 지키는 수도원에서는 좁은 통로가 알맞춤이라는 말이다. 모든 복도를 좁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불편의 미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건축에서의 공간설계는 그 건축물이 상징하는 정신까지를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이 공간의 효율성을 지향하는 것까지야 타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는 일상적 삶을 초월하는 데에 그 속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초월의 의미를 간단히 방기해버리는 우리의 건축문화에 대한 그의 일갈은 아프게 음미해볼 만하다.

아무리 노자연하고 공자연해도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구복이 웬수'이고 보니 그런 건축가도 없다. 그는 "냉혹한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사회적 기능과 미학적 성취를 동시에 이루는 건축가들은 존경받을 만하다."라고 말한다. 주판알을 퉁기다 보면 이념이 뒷전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다. 자재비와 인건비도 제때 지급해주지 못하는 판에 철학이니 미학이니 따지는 것도 한심하다. 이일훈도 여느 건축가처럼 현실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박한 도시에 신중한 건축 드물고 기품 있는 공간 속에 비로소 기품 있는 생활이 따른다."라고 주장하는 그가 돈이 되는 만큼만 대충 지을 사람은 아니다.

동선(動線)은 짧아야 한다, 집은 한 덩어리로 지어야 한다, 공용면적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규범화된 건축양식을 그는 거부한다. '조금 편하자고 많은 것들을 잃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불편하게 살기'의 철학이 그가 말하는 '채나눔'의 논리다. 채나눔'은 이일훈이 일관되게 고집해온 건축형태다. "집은 작을수록 공간을 나누고, 한 가족일수록 적당히 떨어져 살아야 한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공간이 좁다고 집을 한 덩어리로 만들면 햇빛이 한쪽에서만 들어와 집 전체가 어두워지지만, 채를 나누면 나눠진 면은 모두 남향이 되어 채광과 통풍, 환기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아파트 같은 거실 중심의 획일적인 실내구조는 친부모라 해도 두 세대가 함께 살기에는 불편함이 따르는데 비해 채 나눔을 한 집에서는 사적인 공간을 침해받지 않고 동선이 길어져 가족 간의 충돌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는 주장이다. 바로 그런 주장의 연장선상에 그가 설계했다는 자비의 침묵 수도원, 도피안사 향적당, 천주교 우수영공소 등의 종교용 건축물과 BK메디텍 본사 및 공장, 문학과지성사 사옥, 나루터 공동체, 기찻길 옆 공부방 등이 있다.

일전에 아스카 문화의 중심지라는 나라현으로 일본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곳에서의 문화적 충격을 나는 어떤 일간지에 다음과 같이 소개한 적이 있다.

울긋불긋한 도시의 간판들은 한 명의 손님이라도 더 끌기 위해 안달이다. 행인들이 어떤 미적 취향을 가지고 있느냐는 관심 밖이다. 오직 강렬한 빛깔로 행인들의 시각을 사로잡겠다는 의지 하나로 도시의 간판은 번쩍거린다./ 관광지라고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일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한적한 여유를 누리고 싶다는 소망은 관광지의 입구에서부터 여지없이 깨어진다. 노래방, 음식점, 모텔과 각종 위락시설들이 끊임없이 소음을 생산해낸다./ 침묵은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고, 여행은 침묵을 찾으러 가는 시간이다. 소리도 침묵하고 빛도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를 생각한다. 그러나 번쩍거리는 간판으로 눈은 고역이고, 호객의 외침으로 귀 또한 고역이다. 백 번 양보해서 장삿속이니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더 큰 문제는 시설물들이 주는 시각적 공해다. 시멘트를 나무처럼 보이게 하여 글씨를 판 안내문은 조악하기 이를 데 없고, 사찰입구의 유럽식 가로등도 우리네 한심한 미의식을 증명해준다. 새로 건축한 건물들은 주변건물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튀는 느낌을 준다./ 일전에 일본 나라현의 동대사(東大寺)를 다녀온 적이 있다. 커피를 마실까 해서 동대사 입구에 있는 자동판매기를 보니 나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거참, 신기하군 하는 생각이 들어 가까이 가서 보니 자동판매기의 표면을 나무로 덧내어 놓았다. 자동판매기의 생뚱맞은 빛깔이 사찰의 고색창연함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미학적 판단에서 비롯된 발상이었다. 배울 건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한복에 하이힐을 신을 수는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한복엔 고무신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네 미학적 판단이다. 미학은 학자들의 학술적 연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네 쾌적한 감각을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모형 속을 걷다』에서 만난 이일훈의 이런 구절이 아마도 그가 '우리편'임을 확신하게 했을 것이다.

시간의 흔적을 거부할수록 빛나는 것은 소위 보석이나 귀금속 종류이다. 그것들은 녹슬면 안 되고 퇴색하면 가짜이지만 건축 배료는 시간이 지나 갈수록 퇴락하고 변형되며 상해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서 노후된 건축물을 고치고 새로 짓는 것이다. 오히려 시간 따라 변해가는 그 푸석함을 즐기는 것이 건축의 참맛을 아는 것이다.

그의 시선을 빌어 우리네 건축을 보라. 경복궁에만 가도 울화가 치민다. 이일훈의 책,『모형 속을 걷다』를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의 책을 빌어 우리네 건축물을 보는 일은 울화가 치미는 일이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건축물은 무너지지도 않고 우뚝 서있다. 시각적 폭력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선인들의 미학이 아니다. 어떡해서든 자본을 증식시키고야 말겠다는 자본의 확장 논리다. 그 자본의 제국주의적 논리 앞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논리는 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얼빠진 인문주의자의 넋두리에 불과하다는 빈축을 언제까지 사야 하는 것일까. 언제까지 우리의 풍경은 '자본의 풍경'이 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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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2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각의 박물학 2005-02-23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 직접 썼습니다. 저도 기대 안하고 봤는데 읽다보니 좋은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