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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역사 교과서 -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테마로 본 11개국의 역사교과서
이시와타 노부오.고시다 타카시 엮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과잉민족주의를 경계하는 책 세계의 역사 교과서 / 이시와타 노부오·고시다 다카시 엮음 / 작가정신, 2005 탁석산의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 / 탁석산 지음 / 웅진닷컴, 2004 민족주의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적어도 한민족에게 있어서는 난공불락의 이념이었다. 일제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군사독재 정권이라는 특수한 질곡의 시대 상황을 뛰어넘는 가장 유효한 도구가 민족주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몇몇 논자들에 의해 민족주의는 더 이상 우리 사회를 이끄는 이념이 될 수 없다는 주장들이 대두되고 있다.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의 주체성』의 저자인 철학자 탁석산의 최근 저서 『탁석산의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에서 저자는 민족주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향해 올라가기 위해 사용된 도구, 즉 사다리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편다.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며, 물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버리고 지붕에 오르면 사다리를 버리는 것이 지혜다. 근대국가의 완성이라는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민족주의라는 사다리가 필요하지만 일단 목표가 달성되면 아낌없이 버리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민족주의는 절대적 이념이 아니라 도구적이고 한시적 이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에 대한 탁석산의 새로운 해석과 접근은 북한과 일본 문제에까지 미친다. 탁석산은 통일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재산권과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는 시민국가의 외연 확대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과 무엇을 할 때 민족의 이름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민족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지 통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탁석산은 민족이 개인의 행복에 우선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유보하면서 이룩되는 통일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한다. 일본에 대해서는 그동안의 심리적 장애를 극복하고 평범한 외국으로 인식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축구 한일전에서 나타나는 붉은악마들의 도에 넘치는 응원전이 역설적으로 일본에 대한 우리의 심리적 장애를 말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심리적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이라는 우상을 깨야 한다고 강조하며 그는 말한다. "민족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용서될 때 더 이상 민족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이 됩니다. 그걸 부숴야 민족주의는 사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탁석산은 고구려사는 한국사가 아니라고 단정짓는다. "나당연합군이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단순화해 말하자면 당나라에도 고구려사에 대한 지분이 있다는 것이죠. 사실 역사를 '누구의 역사'로 소유화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고구려는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닙니다. 고대 공간에는 당나라, 고구려, 신라, 백제 등이 있었던 것이지 한국과 중국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라는 주장을 하며 탁석산은서강대 김한규 교수의 '요동사'를 "합리적이고 합당한 주장"이라고 평한다. 예맥계의 고조선·부여·고구려와 숙신계의 말갈·여진·만주, 동호계의 선비·거란·몽골 등 여러 세력이 번갈아 나라를 세우고 명멸해간 만주는 한국이나 중국이 아닌 요동이라는 '제3의 영역'이었다는 것이다. 과잉민족주의를 경계하는 탁석산의 주장에 귀가 솔깃하는 독자가 있다면 간과해서는 안될 책이 바로 『세계의 역사교과서』다. 일본 우익이 지원하는 후소샤 출판사의 역사 교과서가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등 심각한 왜곡으로 국제 사회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지금, 『세계의 역사교과서』가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이 책은 후소샤 교과서의 왜곡된 역사관을 비판하기 위해 일본의 대학 강사들이 만든 책이다. 이 책을 주도한 이시와타 노부오는 조선사를 전공한 뒤 한·일 교과서 대화의 핵심멤버로 활동해온 양심적 지식인이다. 분석 대상이 된 11개국은 일본과한국을 포함, 중국, 싱가포르, 베트남, 인도네시아, 독일, 네덜란드, 영국, 미국, 폴란드다.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전쟁 책임에 대한 기술이 명확하지 않고 가해와 피해에 대한 내용도 모호하다. 고시다 다카시는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 대해 "1980년대 후반 이후 일본 근현대사의 침략적 성격이 입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며 "그러나 1995년 전후로 우파 사상가들이 '일본 민족주의'를 내걸며 겨우 바르게 방향을 잡기 시작한 역사 인식을 방해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전근대사의 경우도 단일민족설에 바탕을 둔 단선형(單線型)의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의 교과서 역시 민족이라는 사다리를 걷어치우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전쟁 범죄의 책임을 가능한 한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있다. 독일의 교과서는 히틀러에 대한 열광적 지지와 협력이 없었다면 나치가 만행을 저지르지 못했을 것이라며 나치와 당시의 국민을 공범으로 본다. 유대인 학살도 당시 국민의 의식에 박혀 있던 반유대인 감정에 중점을 두고 기술하고 있다. 편협한 민족주의라는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다는 점에서 독일의 역사 교과서는 세계의 교과서의 모범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면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어떻게 비쳤을까. 이시와타 씨는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민족주의 사관으로 인해 객관화하기 어렵고 불편한 역사를 숨기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불편한 역사를 누락시키거나 숨기고 왜곡하는 것이 다반사고, 단일 민족임을 강조하며 다른 민족과의 공존을 경시하고, 이들의 존재를 무시하기 일쑤라는 지적이다. 한국이 중국의 문화에 대해서는 자율적 수용론을 펼치고, 일본의 문화에 대해서는 조선이 일본에게 문화를 건네주었다는 시혜론을 펼치는 것 또한 한국의 과잉민족주의라고 편저자는 비판한다. 만주를 한국사의영역으로 편입시킨 '남북국시대'라는 개념 또한 중국과 마찰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쓰시마정벌'이라는 단어에도 한국의 일본에 대한 우월감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이 책에 의하면 메이지 천황이 러일전쟁 때 '동양평화를 위해서'라는 주장을 했는데 안중근은 이를 그대로 믿고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후, "이토는 한국 황제와 천황을 배신했다. 그래서 나는 이토를 죽였다."라고 한 바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이러한 측면을 다루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을 은폐하는 힘으로써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어느 나라의 역사교과서나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되도록 적게 기술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편협한 역사인식을 가지고 역사적 진실을 대하면, 객관적이며 공정한 역사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역사교과서는 민족주의 사관을 넘어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정치권력이 아니라 인권과 평화의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이 책의 편저자들은 주장한다. 교과서를 통한 국제적인 대화가 필요하며,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교과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역사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교육인적자원부는 2004년 9월 장관 직속으로 국사교육발전위원회를 만들었다. 역사학자와 교육전문가, 현직 교사 등 10명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과거 군사정권하의 국사교육이 국가주의적 민족의식에 사로잡혀 배타성이 강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개선책을 마련한단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나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같은 주변국의 과잉 민족주의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동북아 평화공존을 통한 세계화’에 초점을 맞춰 국사와 세계사를 유기적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뒤늦게나마 생각한 모양이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민족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용서될 때 더 이상 민족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이 됩니다. 그걸 부숴야 민족주의는 사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탁석산의 발언을 다시 한번 음미해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