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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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일이세요? 당신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군요"
  --아니예요, 전 행복해요, 하지만 슬퍼요.
              -- 메테를링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중에서  

 라디오를 틀어놓으면 채 십분이 되기도 전에 우린 사랑을 운운하는 수많은 노랫말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담론의 양적인 결과에 비해 그 실질과 내용은 왜소해 보인다. 사랑의 담론이 이렇게 부실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그것들이 삶과 사물에 대한 사려 깊은 통찰과 사색의 결과가 아니라 자본의 자기 증식 원리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마아케팅 차원에서의 사랑의 담론은 시장의 수요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깊은 성찰의 시간을 채 가지기 힘들다.

 통속적인 사랑의 담론들이 범람하고 있다.통속적이라는 것은 무반성적이라는 것이다. 대중들은 사랑의 담론들을 기계적으로 수용한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아주 미세한 뉘앙스가 결여되어 있다. 연인들이란 지극히 섬세한 어떤 것들을 쉴 사이 없이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랴. 하나하나의 느낌들이 극도로 민감해지는, 그래서 쉽게 깨어지기 쉬운 영혼들, 바로 그들이 우리가 연인들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이 아니랴.

 롤랑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사랑의 담론이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에서 비롯된다'라고 작자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이 책의 문체는 롤랑 바르트를 마르크스주의자, 구조주의자 라는 기존의 인식틀에서 제외시켜 주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대단히 아름다운 산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미리 이데올로기화, 정치화 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저 깊이 느낄 자세만 갖추면 된다. 약간의 심호흡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역자 김희영은 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이게 된  이 사랑의 담론을, 상상적인 것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의 자리를 제공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이다"라고

 이 책은 그러므로 기특한 책이다.

 남들에게 공개하기 아까운, 그래서 혼자 몰래 간직하고 싶기만한 이 책을 열어 보자. 이 책은 제 몸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를 열어 우리와 대화하게 될 것이다.나는 내가 밑줄친 그곳을 열어 보이겠다.(바슐라르 읽기에서 고정된 나의 이런 어투는 고쳐지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약간의 주석을 달겠다. 그 주석들은 언제나 그 책들이 나에게 촉발시킨 몽상과 사유의 흔적들이다.

 참고로 이 책은 괴에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대상으로 행해진 강의의 결과임을 밝혀두자. 이 책엔 치열한 사랑의 담론들이 등장한다. 그것의 대부분은 베르테르의 담론이다. 하지만 더 정확히는 사랑을 하는 모든 연인들의 담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글을 읽는 바로 당신의 담론이다.

               # 표시는 본문의 내용 그 아래는 감상적 주석

  #장미빛과 신비로운 푸른빛이 어우러진 어느날 저녁, 우리는 하나의 유일한 섬광을 교환하겠지. 모든 것은 긴 오열처럼 작별 인사로 가득한 채   ---보들레르

 그와 내가 나누는 섬광은 무엇일까? 입맞춤, 아니면 어떤 느낌의 홍수, 아니면 부딪히는 눈빛들, 눈물에 반짝이는 불빛들....

  #죽음을 사랑하는 것일까? 키츠의 말처럼 반쯤은 그런 마음도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말일까(편안한 죽음을 반쯤은 사랑했거니 half in love with easeful death) 죽는 것으로부터 해방된죽음. 나는 이런 환상을 해본다. 내 육체의 어느곳에서도 피가 흐르지 않는 부드러운 출혈, 채 사라지기 저에 고통을 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계산된 거의 즉각적인 소모. 나는 잠시나마 죽음의 뒤틀린 상념 속에 머무른다.

  어떤 구렁텅이에 빠지고 싶은 열망이 사납게 가슴 속에서 자라난다.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격렬한 감정들. 즉각적으로 소모되고 싶은 이상한 충동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선 삶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사랑은 우리가 매우 부조리한 존재임을 말해준다. 사랑 속에서 사람들은 부조리하다. 아픔의 본질은 그 부조리에 있다. 부조리를 넘어서려는 이성의 안간힘은 창백한 얼굴을 가진다. 그 창백함을 바라보는 존재는 초라하면서도 그 부조리함을 견디는 존재는 한편으론 위대하다.

 #그의 천직은 철새, 사라지는 자이다. 그런데 사랑하고 있는 나의 천직은 그 반대로 칩거자, 그 사람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자리에서 꼼짝않고 미결 상태로 앉아 있는, 마치 역 한 구석에 내팽개쳐진 수화물마냥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항상 현존하는 나는 끊임없이 부재하는 너 앞에서만 성립된다. 그러므로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곧 주체의 자리와 그 사람의 자리가 교환될 수 없음을 단번에 상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과연 나를 위해 행복한 처분을 내려줄 수 있을까. 스스로 팔 뻗지 못하는 그런 기다림의 수동성이 존재를 달뜨게 한다. 다가설 수 없음이 부재를 향하여 맹렬하게 손을 뻗친다. 그의 부재가 확실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기다림의 자리는 뜨겁다.

 #하나의 단어가 육체로부터 우러나와 부재의 감동을 말해준다.즉, 갈망하다란 단어가...입김을 불 때마다 그 불완전한 입김이 서로 상대방의 입김에 섞이기를 원하는 것처럼. 두 개의 이미지를 하나로 녹이는 것으로서의 포옹의 이미지. 그러나 사랑의 부재에서의 나는 서글프게 누렇게 메마르고 오그라든, 떨어진 이미지이다.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없다. 이 존재의 감옥에서 나는 행복한 유폐자다. 그러나 '행복한'이란 말은 한정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아픈 행복이기에. 사랑의 찰과상이 주는 아픈 행복들.

 #일생을 통하여 나는 수백만의 육체와 만나며 그 중에서 수백개의 육체를 욕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백개의 육체 중에서 오로지 나는 하나만을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 욕망의 특이함을 말해준다...수많은 사람중에서 내 욕망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찾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우연과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필요했던가. 

 사랑엔 멀티태스킹이 있을 수 없다. 내 욕망은 놀랍게도 오직 하나만을 요구한다. 둘은 희미하다. 오직 하나만이 강렬하다. 하나는 둘보다 강하고, 셋보다 격렬하다. 나는 무리중에서 오직 그만을 구별해낸다. 하나가 없는 모든 다수는 안중에도 없다. 그를 돌려다오.

 #나는 내 광기의 유일한 증인이다. 사랑이 내게서 노출시키는 것은 에너지이다.
 
 나는 타오르는 나를 본다. 그 불이 나를 바라보는 나의 눈길마저 태운다. 롤랑바르트는 말한다. '왜 지속되는 것이 타오르는 것보다 더 낫다는 말인가?'  이성은 정열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그런 우열이 정당한가?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욕망이며, 사랑의 대상은 그 앞잡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과 욕망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연인들은 현명해질 수 있을까? 욕망은 대상을 수중(手中)에 두려고 한다. 대상이 저항할 때, 그 저항이 불가항력적일 때 욕망은 스스로를 자학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나는 인생을 헛되이 살았다고. 그때 욕망의 큰구렁에 자학의 늪이 고인다. 욕망은 단지 큰구멍이다. 거기에 무언가를 채워야만 욕망은 편안하다. 그러나 그 구멍은 점점 둘레를 넓혀 간다. 욕망은 확장적이다. 더 깊은 곳을 찾아서 손을 뻗친다.

 #자신의 불행을 재현함으로써 그를 감동시키려 할 때,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징계하는 어떤 고행의 행위를 시도한다.(생활방식이나 옷차림 등에서)

 그는 격렬한 동작으로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는 세상을 버린 듯 멀리 있는 것들, 천문학과 해양학에 몰두하기도 한다.그는 은둔자처럼 허름하게 옷을 입기도 하고 그녀는 머리를 자르고 평소에 입지도 않던 스커트를 입기도 한다. 도발적으로, 그녀는 태우지도 않던 담배를 입에 문다. 그들은 변화하고 싶은 것이다. 표면의 변화가 내적이고도 화학적 변화를 가져오기를 갈망하고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세계가 변화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그들의 행위엔 하염없는 융합에의 욕구가 스며 있다. 세계가 변화하여 그와 내가 스며들 수 있기를 바라는, 그 터무니없는,불가능을 꿈꾸는, 슬프고도 미묘한, 달콤쌉싸름한 초콜렛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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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즘 현대사상의 모험 28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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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즘>은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性 이상의 것이다. 신성에 이르는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을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어떤 것으로 보고 있다.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으로서의 에로티즘을 바타이유는 말하고 있다.존재의 가장 내밀한 곳, 기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파고드는 에로티즘은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 고립감을 벗어나게 한다. 에로티즘은 나와 너의 하나됨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 지향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다. 에로티즘은 죽음에의 문을 열어 준다. 죽음은 개인적으로 존속하고 싶은 욕구를 부정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이성의 지배에 무한정 복종하지는 않는다.인간은 노동을 통해 이성의 세계를 건설하지만, 인간의 내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폭력이 도사리고 앉아 있다. 전적인 통제가 불가능한 충동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도 또한 결코 우리의 합목적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비합리성의 우주 속에 자리잡고 있는 폭력을 우린 에로티즘을 통해 경험한다. 에로티즘은 정신성이 지배하던  질서와 유효성의 체계를 허물어 뜨린다. 동물적 충동에 몸을 맡긴 사람은 맹목과 망각을 누리면서 폭력을 짐승처럼 휘두른다.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고 울부짖는 야수성,팽창과 절규, 그 끝에 죽음이 있다. 그 관능적 희열이란 죽음의 전조이다.

 삶이란 끊임없는 폭발의 연속이다.그런데 끊임없는 폭발에도 불구하고, 삶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존재는 폭발의 힘이 다하면, 새로운 존재에 자리를 내어주어 그 새로운 존재들이 폭발의 불꽃놀이를 지속하게 한다. 그것이 삶의 조건이다. 에로티즘은 삶의 연소, 삶의 낭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합리적이 아니다. 생산의 메카니즘을 보기좋게 외면한다. 아니 위반한다.그렇다. 에로티즘은 금기의 위반이다. 합리성의 파괴이다. 찢음이며 찢김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폭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생명을 낳는다.
 
 그러나 거기엔 공허가 있다. 갑작스런 한순간에 열리는 공허. 그 공허의 문을 여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부재를 이끌어들이며, 부재는 부패와 관계한다. 관능적 희열 끝에 우린 급속도로 부패한다. 새로운 생명에게 우릴 내어주고 우리는 잠시 죽는 것이다.

 동물성과 야수성을 말하지 않고 에로티즘을 말할 수 없다.성행위 중의 상대방은 연속성의 가능성으로서 제시되며, 빈틈없는 개체의 불연속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끊임없이 야수처럼 파고든다. 성행위 중에 동물성의 폭력의 세계에 휘말리게 된 두 존재가 성적 결합을 통해 자아를 잠시 잊고 위기를 함께 겪는다. 성적 결합은 두 존재로 하여금 연속성을 향해 잠시 자아의 문을 열게 할 뿐이다. 막연한 의식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그러나 발작이 지나면 각자의 불연속성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따라서 성행위는 가장 진하면서도 가장 의미있는 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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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미학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이가림 옮김 / 문예출판사 / 197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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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단순한 몽상의 작은 책에서 우리들은 어떤 지식의 무거운 짐을 질 것도 없고 일관된 탐구의 방법에 얽매일 것도 없이 일련의 짧은 章들 속에 한 사람의 몽상가가 고독한 불꽃을 응시하는 가운데 몽상의 어떤 갱신을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촛불 한 자루가 이끄는 이미지의 중심 속으로 갈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헐렁한 셔츠다. 여행을 떠날 때 목까지 단추를 꿰고 근엄한 표정으로 떠나지 않는다. 촛불의 몽상 또한 캐주얼한 차림을 요구한다. 이완시켜야 한다. 너무 굳어 있었다.

 불꽃은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싸우면서 세세하고 연약한 것으로 그곳에 있고, 한편의 몽상가는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린 채 다른 쪽으로 꿈꾸기 위해 떠나간다. 크게, 너무나 크게 꿈꾸면서, 세계에 대하여 꿈꾸면서.

불꽃은 흔들린다. 불꽃의 몸은 그 흔들림 자체이다. 그 흔들림을 유지하려고 불꽃은 제 전신으로 흔들린다. 흔들리는 불꽃 옆에서 부는 바람, 그는 불꽃의 적대자인가? 한 시인의 시를 읽어보자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도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 주지만
  어떤 삻아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정현종  <상처> 전문                         

작은 빛에 대한 몽상은 우리들을 친밀함의 오막살이로 끌고 갈 것이다. 우리들은 가물거리는 빛밖에 받을 수 없는 컴컴한 구석에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느끼기 쉬운 마음은 깨어지기 쉬운 가치를 좋아하는 것이다.

 빛을 제 몸에 허락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어둡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의식의 환한 형광등을 끄고 우리는 어떤 초막으로 간다. 그곳에서 한자루의 촛불이 불러들이는 기억들의 초혼제. 과거는 단순하게 흘러 간 것만은 아니다. 촛불 속으로 날아드는 하루살이 떼. 모든 외곽은 희미하고 일렁이고 부풀고 비틀린다.이 촛불의 非寫實主義.


 철학자의 책상 위, 스스로의 형태 속에 사로잡혀 있는 물건들, 천천히 가르쳐 주는 책들 옆에서 촛불의 불꽃은 끝없는 사상을 불러일으켰고 끝없는 이마쥬를 발생시켰다.

 존재는 갇힘이다. 아무리 열려도 그들은 갇혀있다. 몸은, 그리고 질료는 굳은 자물통이다. 죽음으로 해서 세계는 존재로 침투한다. 스스로의 형태에 갇혀 있는 물건들. 그러나 바슐라르의 사물은 존재의 감옥에 유폐되어 있지만은 않은 듯하다. 단지 그들은 스스로에게 <사로잡혀> 있다. 몽상은 <사로잡힘>이 아닌가. 그들은 단지 자신을 건설하기에 열심일뿐이다. 눈치 보지 않는다.

 촛불의 불꽃은 혼의 靜謐性을 재는 예민한 압력계, 섬세한  조용함, 생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내려가는 조용함--편안한 몽상의 흐름을 쫓아가는 持續에 부드러운 연속성을 주는--의 척도가 될 수 있다. 당신들도 조용하게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침착하게 빛의 일을 하고 있는 경쾌한 불꽃 앞에서 가만히 숨쉬어 보라

 조용한 타오름, 서서히 진행되는 소멸, 그 부드러운 탕진, 그아름다운 쇠잔, 누군들 그런 죽음을 감히 꿈꾸지 않을까?

타는 액체가 위쪽을 향해서, 하늘을 향해서 수직의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것을 볼 것이다...... 불꽃은 위쪽을 향해서 흐르는  모래시계다. 부서져 내리는 모래보다 가벼운 불꽃은 마치 시간 자체가 항상 무엇인가 해야 할 것처럼 그 형태를 쌓고 있다. 불꽃과 모래시계는 편안한 몽상 속에서 가벼운 시간과 무거운 시간과의 일치를 나타내고 있다.

 불꽃의 시간은 가벼운 여성성(아니마,anima)의 시간이고, 모래시계는 무거운 남성성(아니무스, animus)의 시간이다. 불꽃의 시간은 확산의 시간이고, 모래시계의 시간은 집중의 시간이다. 삶은 그 두 개의 반죽된 시간이다. 어떤 이는 수직적 초월을 꿈꾸기도 하지만, 또 어떤이는 어둠으로의 맹렬한 자기헌신을 통해 역설적인 초월을 꿈꾸기도 한다. 그 두 가지 상반된 충동을 나무는 통일한다. 그 뿌리로는 어둠을 헤메이며 그 잎으로는 하늘을 꿈꾸는 나무.

 그렇다. 불꽃 앞에서 밤샘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그는 삶을 생각한다. 그는 죽음을 생각한다.불꽃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며 꿋꿋하다. 이 빛은 조금만 불어도 꺼진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하나의 불씨로써 다시 켜진다.

 몽상은 요구한다.책을 덮기를. 책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음악을, 하나의 음악보다는 하나의 바람소리를 몽상은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의미가 약화될 때 이미지는 강화된다. 분명하지 않음으로 해서 풍부해지는 이 비밀. 그건 단순한 티미함이 아니다. 어정쩡함이 아니다.

 인간이 보다 좋은 인간의 싹이며 노랗고 무거운 불꽃이 희고 가벼움 불꽃의 싹인 것과 같이 세계는 보다 나은 세계의 싹이다...아리스토텔리스적 철학을 따라가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물리적인 여러 현상을 관할하는 모든가치보다도 더 커다란 가치가 정복된다.

바슐라르, 이 노인의 낙관주의는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그것은 몽상 속에서 인간이 잃어버린 제 땅을 회복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신념일까? 과연 세계는 더 좋은 세계의 싹일까. 이 세계의 엔트로피는 종말을 향해 간다는 슬픔 신념은 섣부른 비관주의일까. 그러나 비관은 논리적 사유의 산물인 것만은 틀림없다. 적어도 꿈꾸는 자는 찡그리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은 선천적으로 낙관주의자다. 태양의 후손들, 그들은 밝음으로만 꽃피지 않는다.

불꽃은 혼자이고, 태어나면서부터 혼자이고, 또 그것은 혼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적어도 불꽃은 몽상가에게 있어서 스스로의 생성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존재의 상징인 것이다! 불꽃은 생성으로서의 존재, 존재로서의 생성이다. 스스로를 고독한 불꽃으로 느끼는 것, 생성으로서의 존재의 드라마 그 자체 속에 있는 불꽃으로 느끼는 것, 스스로를 밝히면서 켜지는 것, 이러한 것들이 위대한 시인의 이마쥬 밑에 솟아나는 사상들 인것이다.

스스로의 생성에 마음 뺏긴 촛불. 그러나 생각해보자. 스스로의 생성에 마음 뺏기지  않은 自然이 있을까? 흐름에만 열중하는 시냇물, 꽃피는 데만 열심인 연산홍의 그 붉은 꽃잎, 하나의 집을 짓기 위해 제 부리를 몇천번이고 땅에 입맞추는 까치. 노는 데 정신이 팔린 아이들의 이마에 맺힌 구슬땀, 행복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런데 그게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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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5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각의 박물학 2005-10-06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해요*^^* 제 스타일이네요
 
내가 읽은 책과 세상 - 김훈의 詩이야기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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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에 관한 단상

 이글은 좀 난삽할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김훈과 관련된 내 사설을 두서없이 풀어 놓을 것 같다. 그리고 어떤 논리에 기댈 만큼 나는 그닥 여유가 없다. 두서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 것이다.

 어쩌다가 김훈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문학기행> <내가 읽은 책과 세상> <선택과 옹호>, <풍경과 상처> 그리고 언젠가 그가 쓴 <한영애론>을 읽었다. 아마도 그가 편집장으로 잠시 관계했던 <연예저널>이라는 잡지에서였던 것 같다. 한영애, 그녀는 미지수다. 도대체 그녀를 보고 있으면 한 어린아이 얼굴을 가진 여자 무당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왕창 빨아 들인다. 그녀가 "거기 누구 없소"할 때 나는 '거기에 항상 있다.' 있을뿐더러 조금 감동하고 있다. 흡인력에 있어서는 김훈의 문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적절히 단문과 장문을 구사하며 문체의 소용돌이 속으로 독자를 몰고 간다.

 그는 리포터다. 그런만큼 업무상 그는 세상을 아주 열심히 쏘다닌다. 그러나 그의 글들은 비지니스용의 글로 읽히지 않는다. 그의 표정을 보라.(그는 실제 그의 책에 자신의 사진을 싣기 좋아한다. 그것두 언제나 담배를 삐딱하게 꼬나문 모습, 두 주머니에 깊숙히 손을 찌르고 느릿느릿 걷는 모습....거기다 언제나 콤비를 입고 머플러를 매길 좋아하는 그의 댄디즘) 이런 외관으로 그는 괜찮은 낭만주의자다. 대한민국이 이런 낭만주의자 하나쯤 가지는 것도 문화적으로 그리 험이 되진 않을 듯하다. 우리 문화계에도 이런 뉘앙스 메이커(이건 나의 新造語다.그는 어떤 섬세함을 자꾸 만들어 낸다)가 있다는 거, 더구나 그가 70년대와 80년대를 저널리스트로(그가 한때박래부와 있었던, 한국일보 문화부는 문청들의 꿈이었다) 거치면서도 그의 문체를 잃지 않았다는 것에 나는 무조건 감동한다. 이건 고집이다. 70년대 왠지 구질구질하게 입어야 뭔가 고뇌하는 지식인처럼 보일 때도 콤비를 멋지게 입어제꼈던 그다. 그런 점에서 그는 충분히 강하다. 그러나 이런 찬사의 무의식적 심층엔 <문화부>라는 후광(aura)에 대한 어떤 부러움의 속사정이 감춰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에 대한 문인들의 애정도 어떤 비평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저널리스트에 대한 일종의 屈身은 아니었을까하는 우스운 생각도 든다. (이해하시길 좀 솔직히 써보려고 한다)

 그에겐 아마도 <보여질 것>이란 콤플렉스가 있었을 것이다.  그의 그런 콤플렉스가 그의 문체를 만들어내진 않았을까 나는조심스레 진단한다. 리포터는 단순히 보여지기 위한 직업이 아닌가. 그는 얼마나 많은 눈(目)들을 의식했었을까. 그의 문체는 그 눈초리를 의식하는 곳에서 세워졌을 것이다. 깊이를 이루기 위한 집요한 사유의 후견인은 그 무수한 잠재적인 눈초리가 아니었을까.

 그가 <내가 읽은 책과 세상>에서 나해철시인을 두고 <그의 영산포연작은 강가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불행을 이야기하면서도 끝끝내 말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그는 언어에 집착한다. 그러나 그의 언어에 대한 집착은 미학적 자기 만족 차원에서 그치는 것처럼 보이질 않는다. 같은 책에서 그는 하재봉을 별로 이쁘게 평가하지 않는다.
 
 하재봉의 시 속에서는 너무나도 강력하고 너무도 현란한 이미지와 시어들이, 때로는 중심부를 향하여 조여드는 기색이 없이 난무하고 좌충우돌한다..노련한 시인은 그 구문의장치를 내버리지 않고, 감추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더 노련한 시인이라면 그 감추어진 구문의 장치까지도 시화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이다. 하재봉의 글은 그 구문의 틀이 돌출함으로써 생각의 물결 같은 흐름을 방해하고 그가 그리는 시화의 세계를 괴기스럽게까지 만들어 버린다

  좋은 비평이다. 김훈의 글이 하재봉을 화나게 하지 않고 아프게 만들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말을 어디에선가 읽었다. <좋은 비평은 작가를 화나게 하는 데에 있지 않고 작가를 아프게 하는 데에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글은 가끔 미학적 세련이 지나치다. 그땐 좀 찌푸려진다. 세간에 그를 스타일리스트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본데, 난 나쁜 뜻에서 그가 그런 면이 있다는 것, 즉 좀 지나치게 세련됨을 추구할 때가 종종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난 스타일리스트라는 세간의 평에 조금 동의한다. <내가 읽은... ...>에서 기형도를 썼을 때 마지막 문장은 안빼버렸어도 좋았을 것이다.

 김현과 김훈은 모음의 한끝 차이다. 그들은 유사하다. 그 둘은 황지우의 표현을 빌면  <문체로 꼬리친다>. 문체로 꼬리를 친다니! '꼬리를 친다'는 건 한번 붙어보자는 욕망의 표현이 아닐까. 저무는 서해를 말할 때 김훈은 세상을 향해 꼬리 친다. 그는 겉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풍경의 속살을 향해, 아니 그 속의 뼈와 핵심을 향해 비집고 들어 가려고 한다. 비집고 들어가려할 때 그의 언어는 유장해진다. 말이 말의 꼬리를 물고 길어진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시도의 끝에서 그가 만나는 것은 무엇일까. 그속에 무엇이 있는가. 과연 세계의 핵은 그에게 만져지는 에로틱한 실체로서 다가오는 것일까. 과연 세상의 풍경 그 속에 무엇이 있는가. 없다.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망연자실 서해의 낙조 앞에 서있다.

 그는 일몰의 풍경이다. 그는 깊은 가을의 풍경이다. 그는 언제나 조락한다. 그런데도 그에겐 물기가 많다. 뿐인가 그는 바삭하기조차 하다. 그는 모순이다. 나는 그런 종류의 모순을 언제나 좋아한다. 태양의 아들이면서도 멜랑꼬리한 분위기의 까뮈나 디오니소스적 광기와 아폴론적 명석함의 혼혈아 니이체. 암튼 그의 떠돎은 그의 물기를 말리기 위한 여행, 定處를 얻기 위한 定處없는 여행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물기를 말리기 위해서 햇빛 밝은 곳으로 떠나지 않는다. 설령 그가 봄에 떠나도 그가 도착하는 곳은 가을이다. 설령 그가 아침에 떠나도 그가 도착하는 곳은 저무는 일몰이다.

익어가는 것들의 색깔은 그 완숙의 절정 밑에 조락의 쓸쓸함과 죽음을 수락하는 처연함의 색깔이 깔려 있다. 이룸과 죽음 사이의 구획을 허물고 삼투시켜, 그것들이 합쳐져서 드러나는 삶의 내용을 하나의 색깔이라는 구체적 현존 속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여, 아직 살아서 보는 인간의 눈 앞에 '보이는 것'으로 펼쳐놓은 가을빛의 저 말하여지지 않는 신비를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초월자의 한 성정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터이다.
 
 나는 그가 풍경의 겉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언제나 침투한다. 그가 풍경의 속살을 헤치고 질료적인 본질과 만나려고 할 때 그는 언제나 허무주의자다. 세상은 비어있는 것이다. 공연히 그 혼자서 용쓰고 유난스레 지랄을 떤 것이다. 그럴 때 언어는 가혹하다. 가혹하게 주인을 물어 뜯는다. 참혹하다. 언어를 버리고 무거움을 버리고, 끈적끈적한 장문들과 호흡들을 버리고 그는 상큼하게 날아 오르고 싶다. 그렇다. 나는 이런 그의 말에 가장 확실한 밑줄을 긋는다.(밑줄을 그을 때 이미 나는 그를 읽기 훨씬 전에  그와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

      ...초겨울의 풀들은 가볍다.풍화의 운명이 무겁고 쓰라
      릴수록 그 외양은 저토록 가벼워야 옳으리라.
 
 그러나 그가 생각하고 있는 가벼움은 늙은 가벼움이다. 노련한 가벼움이다. 어린아이의 가벼움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자, 풍화의 운명을 알고 있는 자의 가벼움이다. [헬리콥터와 정현종 생각]은 그같은 가벼움에 대한 작은 예찬의 기록쯤으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헬리콥터에 매달려 가는 탱크. 가벼움이 무거움을 매달고 하늘로 씽씽 날아간다. 정현종이라는 禪士에게 그는 한방 먹는다. 선사들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너 뭐하냐?!"

 아, 마흔 일곱살의 그가 이렇게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세계가 세계사에 의하여, 또는 문명이나 논리에 의하여 채워져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썰물의 서해는 감당할 수 없는 이 막막한 빈 공간을 안겨다 준다.>  그가 어느덧 마흔하고도 일곱이다.(그는 1948년생이다.) 발빠른 보행과 속도성을 요구하는 리포터라는 직업은, 그의 나이를 실제보다 아랫길로 보게 만든다. 또 그의 짧은 머리칼도 그렇다. 어떤 이는 항상 젊게 보인다. 그렇다. 브레히트는 언제나 젊고 유관순은 언제나 열여섯 살 이상이다. 난 스물 댓살쯤으로 보인다. 이렇게 시시콜콜 그의 구석구석을 대한민국의 이름없는 한 文靑에게 보고당하다니, 그는 성공했다. 그를 보고 있는 눈(目)들을 의식하는 데에 리포터로서 성공했다. 그러나 그러한 성공에 전혀 기꺼워 하지 않을 만큼 그는 성공했다.
 이렇게 속물적으로 글을 끝맺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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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달팽이 2005-12-21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8년생이면 58살 아닌가요? 열살이나 빼면 너무 한 것 같은데요.
김훈이라는 인물은 참 여전히 궁금합니다.

감각의 박물학 2006-10-23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12년전에 쓴 거거든요 후 그렇게 되었네요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폴 오스터 지음, 김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담배 연기처럼 가벼운 일상 (?)  

   좀도둑 하나가 있다. 그가 포르노 한 권을 훔쳐 달아난다. 점원은 열심히 그를 쫓아간다. 쫓기는 자는 쫓는 자보다 절박할 수밖에 없는 법, 힘이 부친다. 그런데 마침 쫓기는 자가 지갑을 떨어 뜨린다. 쫓는 자는 지갑을 주워 든다. 거기에  낡게 바랜 사진 몇 장, 행복한 한 때가 있다.
 
   웨인왕의 <스모크>는 사진에 관한 명상을 촉발시킨다.
 행복은 짧다. 그러나 사진은 영원히 행복의 기억을 소유한다. 사진 속에서만큼은 행복과 젊음은 영원한 것처럼 보인다. 시간의 소멸에 저항하기 위해, 시간이 갖는 저 막강한 부패의 힘에 맞서기 위해 인간은 사진을 발명했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어떤 한 순간을 떠낸다.찰나를 탁본해낸다. 떼어진 시간의 한 조각, 그 속에서 한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웃고 있다. 카메라의 셧터는 순간을 핀셋으로 고정시킴으로써 저 행복한 ‘현재’를 얼음 속에 가둔다. 포르노를 훔친 좀도둑이 떨어뜨린 지갑 속의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응결된 행복의 순간. 좀도둑의 기억 속에 은밀하게 잠복해 있는 저 요지부동의 추억. 그는 한때 행복했었다,라고 사진은 말한다.

   옛날 그 사진을 주웠던 점원은 이제는 담배 가게 주인이 되었다. 그는 아침 8시면 소풍을 나가듯 거리로 간다. 거기에서 그는  똑같은 위치에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사진을 찍는다. 그는 벌써 4천장의 거리 사진을 매일 한장씩 찍어 왔다. 꼬박 10년이 넘게 같은 자리에서 같은 풍경의 사진을 찍어댔던 셈. 글을 쓴다는 그의 친구가 그의 사진첩을 넘기며 말한다. 이건 같은 사진들이로군. 담배가게 주인 대꾸한다. 무슨 소리야, 세상에 같은 사진은 없어. 계절마다 거리는 다른 빛깔이고,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패션과 표정과 헤어스타일도 언제나 다른 법이라고. 역사는 그런 것들을 기록하지 않지. 역사가 외면하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기록하는 것들일세. 꽃도 십자가도 없고, 영광도 광휘도 없는 저 거리를 지나치는 삶들을 기록하는 것 말일세. 천천히 보게. 이 작가 선생은 천천히 사진첩을 넘긴다. 아, 그런데 거기에서 그는 놀랍게도 죽은 아내를 발견한다. 사진은 사무치게 한 사람의 부재를 증명한다. 눈물이 솟구친다. 대체 무엇이 우리의 삶을 저토록 생생하게 기록해줄 것인가. 어떤 역사가의 붓끝이 내 아내의 살아있는 모습을 저토록 생생하게 증언해줄 것인가. 역사가 신뢰받기 위해선, 던지 추상에 머물지 않고 풍성한 이갸기의 육체를 가지기 위해선 역사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학이든 예술이든 어시스트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는 ‘나’와 ‘너’를 기록해줄 만큼 친절하지도 섬세하지도 않다. 나와 너를 기록해주는 것은 사진이요 너의 일기장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필연코 무엇인가를 선택한다는 것, 모든 선택은 필연적으로 가치에 대한 선택이 아니던가. 찍는 자는 무언중에 말한다. 이것은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의 진실은 사진 속에 있지 않다. 사진의 진실은 늘 사진 밖에 있다. 이제는 내 곁에 없는 여자, 이제는 내 곁에 없는 행복, 이 땅에 없는 평화가 사진을 보게 한다. 아니 읽게 한다. 담배 가게 주인이 찍은 것은 그 무엇도 아니고 사진이다. 그는 해석하지 않는다. 단지 표면을 보여줄 뿐이다. 그 심층을 읽어내는 것은 상처(傷處)를 가진, 혹은 상처(喪妻)의 경험을 가진 당신의 아픔이다.

   일상은 담배 연기처럼 가볍다. 그것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담배재는 형체도 없이 흩어진다. 담배 연기는 그러므로 누구에 의해서도 기록되지 않는다. 이럴 때 담배 연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사람이 자신의 숨을 폐부까지 밀어넣었다가 다시 뱉아낸 공기들의 입자들이 아니던가. 어떤 공기들의 입자가 담배 연기처럼 인간의 속깊은 폐부를 낱낱이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매일매일 엄청난 양의 필름과 영상이 소비된다. 사진은 자연과 역사와 전쟁과 기아와 살륙을 눈요기 거리[스펙타클]로 보여준다. 끊임없이 제공되는 영상은 사진을 읽게 하지 않는다. 단지 보게 할 뿐이다. 오늘날 영상은 단지 대체되기 위해서, 소모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대체되고 소모되는 영상이 요구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다. 생각해보라. 추억에 깃들고자 하는 이가 원하는 것은 많은 사진이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몇 장의 그 낡고 바랜 사진이다. 그 사진 속에서만큼은 어떤 사람도 좀도둑이거나 전과자는 아니다.
 
   크리스마스엔 누구나 그런 사진을 보고 싶어한다. 심지어는 눈먼 할머니까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낡은 추억의 사진 속에서 어떤 울컥함이 치밀었다면 그때 나는 사진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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