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폴 오스터 지음, 김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담배 연기처럼 가벼운 일상 (?)  

   좀도둑 하나가 있다. 그가 포르노 한 권을 훔쳐 달아난다. 점원은 열심히 그를 쫓아간다. 쫓기는 자는 쫓는 자보다 절박할 수밖에 없는 법, 힘이 부친다. 그런데 마침 쫓기는 자가 지갑을 떨어 뜨린다. 쫓는 자는 지갑을 주워 든다. 거기에  낡게 바랜 사진 몇 장, 행복한 한 때가 있다.
 
   웨인왕의 <스모크>는 사진에 관한 명상을 촉발시킨다.
 행복은 짧다. 그러나 사진은 영원히 행복의 기억을 소유한다. 사진 속에서만큼은 행복과 젊음은 영원한 것처럼 보인다. 시간의 소멸에 저항하기 위해, 시간이 갖는 저 막강한 부패의 힘에 맞서기 위해 인간은 사진을 발명했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어떤 한 순간을 떠낸다.찰나를 탁본해낸다. 떼어진 시간의 한 조각, 그 속에서 한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웃고 있다. 카메라의 셧터는 순간을 핀셋으로 고정시킴으로써 저 행복한 ‘현재’를 얼음 속에 가둔다. 포르노를 훔친 좀도둑이 떨어뜨린 지갑 속의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응결된 행복의 순간. 좀도둑의 기억 속에 은밀하게 잠복해 있는 저 요지부동의 추억. 그는 한때 행복했었다,라고 사진은 말한다.

   옛날 그 사진을 주웠던 점원은 이제는 담배 가게 주인이 되었다. 그는 아침 8시면 소풍을 나가듯 거리로 간다. 거기에서 그는  똑같은 위치에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사진을 찍는다. 그는 벌써 4천장의 거리 사진을 매일 한장씩 찍어 왔다. 꼬박 10년이 넘게 같은 자리에서 같은 풍경의 사진을 찍어댔던 셈. 글을 쓴다는 그의 친구가 그의 사진첩을 넘기며 말한다. 이건 같은 사진들이로군. 담배가게 주인 대꾸한다. 무슨 소리야, 세상에 같은 사진은 없어. 계절마다 거리는 다른 빛깔이고,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패션과 표정과 헤어스타일도 언제나 다른 법이라고. 역사는 그런 것들을 기록하지 않지. 역사가 외면하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기록하는 것들일세. 꽃도 십자가도 없고, 영광도 광휘도 없는 저 거리를 지나치는 삶들을 기록하는 것 말일세. 천천히 보게. 이 작가 선생은 천천히 사진첩을 넘긴다. 아, 그런데 거기에서 그는 놀랍게도 죽은 아내를 발견한다. 사진은 사무치게 한 사람의 부재를 증명한다. 눈물이 솟구친다. 대체 무엇이 우리의 삶을 저토록 생생하게 기록해줄 것인가. 어떤 역사가의 붓끝이 내 아내의 살아있는 모습을 저토록 생생하게 증언해줄 것인가. 역사가 신뢰받기 위해선, 던지 추상에 머물지 않고 풍성한 이갸기의 육체를 가지기 위해선 역사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학이든 예술이든 어시스트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는 ‘나’와 ‘너’를 기록해줄 만큼 친절하지도 섬세하지도 않다. 나와 너를 기록해주는 것은 사진이요 너의 일기장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필연코 무엇인가를 선택한다는 것, 모든 선택은 필연적으로 가치에 대한 선택이 아니던가. 찍는 자는 무언중에 말한다. 이것은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의 진실은 사진 속에 있지 않다. 사진의 진실은 늘 사진 밖에 있다. 이제는 내 곁에 없는 여자, 이제는 내 곁에 없는 행복, 이 땅에 없는 평화가 사진을 보게 한다. 아니 읽게 한다. 담배 가게 주인이 찍은 것은 그 무엇도 아니고 사진이다. 그는 해석하지 않는다. 단지 표면을 보여줄 뿐이다. 그 심층을 읽어내는 것은 상처(傷處)를 가진, 혹은 상처(喪妻)의 경험을 가진 당신의 아픔이다.

   일상은 담배 연기처럼 가볍다. 그것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담배재는 형체도 없이 흩어진다. 담배 연기는 그러므로 누구에 의해서도 기록되지 않는다. 이럴 때 담배 연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사람이 자신의 숨을 폐부까지 밀어넣었다가 다시 뱉아낸 공기들의 입자들이 아니던가. 어떤 공기들의 입자가 담배 연기처럼 인간의 속깊은 폐부를 낱낱이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매일매일 엄청난 양의 필름과 영상이 소비된다. 사진은 자연과 역사와 전쟁과 기아와 살륙을 눈요기 거리[스펙타클]로 보여준다. 끊임없이 제공되는 영상은 사진을 읽게 하지 않는다. 단지 보게 할 뿐이다. 오늘날 영상은 단지 대체되기 위해서, 소모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대체되고 소모되는 영상이 요구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다. 생각해보라. 추억에 깃들고자 하는 이가 원하는 것은 많은 사진이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몇 장의 그 낡고 바랜 사진이다. 그 사진 속에서만큼은 어떤 사람도 좀도둑이거나 전과자는 아니다.
 
   크리스마스엔 누구나 그런 사진을 보고 싶어한다. 심지어는 눈먼 할머니까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낡은 추억의 사진 속에서 어떤 울컥함이 치밀었다면 그때 나는 사진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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