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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몇 퍼센트 한국인일까 - 강정인 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본 우리 안의 서구중심주의 ㅣ 책세상 루트 3
강정인 외 지음 / 책세상 / 2004년 9월
평점 :
나는 누구인가
『난 몇 퍼센트 한국인일까』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나의 한 친구를 소개한다. "자 여기 있는 사람은 용산의 미군기지 내에 있는 매릴랜드 주립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모니카 캐시아양입니다." 금발의 캐시아는 가벼운 포옹으로 선생님과의 우정을 과시하며 더듬거리는 한국어로 입을 연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이 친구와 오래 친구했습니다."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오, 마이 가드, 금발의 아가씨가 선생님의 친구라니.
이번에는 다른 친구를 소개한다. "여러분 인사하세요. 여기 있는 친구는 네팔출신의 산업연수생 샤말 타파입니다. 한국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아주 다정다감한 친구죠." 타파 역시 더듬거리는 한국어로 입을 연다. "안녕하세요. 한국 사람, 한국 불교, 저는 사랑합니다." 아이들의 표정이 샐쭉하다.
'이런 경우를 한번 상상해보자'라는 주제로 수업을 하며 학생들에게 두 개의 경우를 머리 속에 그려보라고 하면 모두들 피식 웃는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학생들의 반응이다. 여러분들의 머리 속에는 서양인들은 합리적이요, 위생적이지만 동양인들은 비합리적인데다 비위생적이라는 선입견이 자라잡고 있지는 않느냐고 물으면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수업은 계속된다. 만약 슈퍼맨과 배트맨과 스파이더맨과 타잔이 유색인종이라면 어떨까, 타잔에 나오는 짐꾼들이 모두 백인이라면, 뒷골목에서 마약을 파는 사람들이 거의가 백인들이라면 어떨까. 과연 그때도 우리들은 유색인종은 천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노벨상 수상자들이 거의가 다 유색인종이고 농구선수들이나 댄스가수들이 거의 백인이라면 어떨까.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노는 '바비인형'이 만약에 흑인이라면 어떨까. 그때도 우리는 백인의 모습을 좇아서 여전히 코를 높이고 쌍꺼풀 수술을 하고 머리를 노랗게 염색할까. 지금으로부터 수 백년 전, 유럽의 허여멀쑥한 백인노예들을 빛나는 검은 피부를 가진 아프리카인들이 혹독하게 부렸다면 어떨까. 과연 우리들은 모니카 캐시아양을 친구로 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샤말 타파를 친구로 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할까. 학생들은 여전히 빙긋 웃는다. 그 웃음의 의미는 이렇다. "아뇨!"
호텔과 같이 분위기 있는 곳에서는 클래식음악이나 재즈를 들으며 양식을 먹어야 하고 장터에서는 트로트음악을 들으며 국밥을 먹어야 제격이라는 생각은 한 개인에게 국한된 생각이 아니다. 모든 세련된 것의 중심에는 서구가 있다는 서구우월주의가 한국인의 심층심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과연 우리는 스스로를 몇 퍼센트 한국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학생들의 두뇌 속에서 동양과 서양은 단순히 지리적인 개념만은 아니다. 서양은 우월하고 동양은 비속하다는 관념은 비단 학생들만의 것이 아니다. 한국인 대부분의 생각이 그럴 것이다.
『난 몇 퍼센트 한국인일까』는 한국인의 심층 깊숙이 자리잡은 '서구중심주의'를 문제삼고 있는 책이다.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라는 학술서를 출간하기도 했던 강정인 교수가 서구중심주의를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면서 서구중심주의의 기본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썼다. 수업 시간에 강정인 교수는 학생들에게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각자의 고민을 짧은 글에 담으라는 숙제를 냈고, 그 결실이 이 책에 실려 있다. 이 책이 딱딱한 강의노트와 구별되는 곳이 바로 이 대목이다. 이 책이 고등학교 고학년과 대학의 교양학부생에게 두루 읽힐 수 있는 가능성도 바로 여기에 있다.
왜 미술사는 서양미술사인가, 왜 서양음악은 '음악'으로 보통 명사화하여 부르고, 한국음악이나 한국의학은 '국악'이나 '한의학'으로 특수화하여 부르는가, 우리는 왜 칠월칠석이 아닌 화이트데이에 사랑을 고백하는가, 친구의 옷에 묻은 자국이 김치 국물이면 촌스럽고, 케첩 자국이면 세련된다고 믿는 것은 왜일까, 왜 음악의 아버지는 바흐고, 어머니는 헨델인가, 왜 과학의 아버지는 데카르트이고, 어머니는 뉴턴인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수많은 질문들이 이 책에 등장한다. 바로 그런 질문들로 해서 이 책은 대중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계몽서로 읽힌다.
강 교수는 서구중심주의에 대해 많은 이들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한다. 서구중심주의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중심주의를 강의의 주제로 택한 것도 그 때문이라 한다. 강정인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나 몽테스키외, 헤겔, 마르크스 같은 서구 사상가들이 서구 중심주의에 빠져 어떻게 다른 지역 사람들이 유럽에 지배되어야 하는지 역설했는가를 보여주고, 어떻게 서구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자기들이 만든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세상에 퍼뜨렸는지 보여준다.
이 책이 대중서로 읽힐 수 있는 큰 장점은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언어로 씌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책은 우리의 일상 언어 속에 서구중심주의가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가를 풍부한 예시를 통해 보여준다. 청소년들이 쓰는 접두어 ‘왕’과 ‘캡’ 가운데 우리말이랄 수 있는 ‘왕’은 ‘왕재수’, ‘왕따’ 등 부정적 의미에 쓰이고 ‘캡’은 아주 좋은 것, 멋진 물건이나 사람을 부를 때 쓰인다는 것들을 짚어주는 식이다.
책을 펼치면 풍부한 삽화들과 눈을 즐겁게 하는 시원한 편집이 이론서들은 으레 딱딱하다는 선입견을 허문다. 그렇다고 이 책은 청소년들만이 읽을 책은 아니다. 성인들의 시각교정에도 요긴할 듯싶다. 무엇보다 진지한 사고력을 요구하는 논술참고서적으로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책 뒤에는 서구우월주의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교정시켜줄 참고서적들을 열거해 주고 있다.
인터넷 시대, 클릭 하나로 전지구의 문화가 안방으로 흘러 들어오는 시대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인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서구는 우월하다는 서구중심주의다. '국내학자들은 서구 학문에 익숙한 경우 자신들이 내면화한 서구중심주의에 따라 동양적인 것을 폄하하는 의식을 청산하고, 동양학문에 익숙한 경우 서구적인 것에 대한 과민하고 배타적인 경계의식을 극복하여 호혜성, 평등성, 차이의 존중에 입각한 교차문화적 대화를' 수행해야 한다는 강정인 교수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라는 폐쇄주의와 서구의 것은 좋은 것이라는 패배주의에서 이제는 그만 자유로워질 때다.